교회증언5 629-638 (326일)

77 장 —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사랑하는 P 형제에게:

나는 당신의 편지에서, 당신이 불신 상태에 빠져서 당신의 상황이 희망이 있는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 42:5, 11) 고 말하는 바이다. 그분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당신은 이 귀중한 약속에서 용기를 가질 수 없는가? 사단은 여러번 당신이 죄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고 대답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5:32) 고 말씀하셨다. 다시 그분은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7) 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이 귀중한 말씀들을 믿지 않겠는가? 이 말씀들을 당신의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 55:6, 7). 이 약속은 넓고 깊고 완전하지 않는가? 당신은 더욱 많이 구할 수 있는가? 당신은 주님께서 바로 이 곳에서 당신을 위하여 원수를 대항하여 깃발을 세우도록 허락하겠는가? 사단은 복스러운 하나님의 약속을 빼앗아 버리고자 노리고 있다. 그는 모든 희망의 희미한 빛과 모든 빛의 광선을 심령에서 빼앗아 버리고자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가 그렇게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믿음을 활용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이 의심들을 대항하여 싸우고, 약속들에 대하여 정통해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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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 이는 법과 의를 행하였음이니라” (겔 33:13-1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6-8). 사단이 당신에게 와서 모든 희망을 포기하게 하고자 유혹하거든 그에게 이 말씀들을 가리켜 주라 다윗처럼 기도하라.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시 25:7-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 1:18-20). 확실하고 분명하며, 풍부하고 완전한 약속들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조건적이다. 당신이 만일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 주님께 그분의 말씀을 이루어 주시도록 신뢰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복스러운 약속들을 믿음의 골격으로 삼아 기억의 창고에 저장하도록 하라. 그것들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 (히 10:23) 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당신 앞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사 1:16, 17).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신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주님께서는 “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겔 33:15, 17) 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겔 18:2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겔 18:23, 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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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님께서는 죄인의 구원에 관한 당신의 뜻을 분명히 나타내셨다.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인지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나타냄으로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불신용에 해당된다. 하나님이 가혹하시다고 불평하는 자들은, “실제적으로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겔 18:25) 너희가 회개하지 않고 너희 죄에서 떠나지 않는 데 너희의 허물을 내가 용서하겠느냐” 라는 말씀으로 그 비난을 죄인에게 분명히 되돌려 버리신다. 하나님의 품성은 내가 당신 앞에 제시한 말씀을 통하여 충분히 옹호된다. 주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고, 그의 죄를 버림으로 품성의 완성을 위하여 애쓰는 그의 노력과 하나님이 협력하실 수 있게 될 때 그를 받으실 것이다. 그 약속들은 예이면서 동시에 아니요가 아니다. 만일 사람이 조건에 따르기만 하면 그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고후 1:20) 된다.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의 죄를 위하여 내주신 전반적인 목적은, 사람을 구원하시되, 범죄와 불의를 통해서가 아니고 죄를 버리고, 그의 품성의 옷을 씻고,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희게 함으로 구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미워하시는 불쾌한 것을 사람에게서 제거하고자 하신다. 그러나 그 사업에 있어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 죄는 버려지고, 증오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의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과 인간은 협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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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의심과 불신이 들어오도록 용납하고, 실망의 태도로써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고 그분을 세상에 잘못 나타내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의심하는 사단의 편에 두게 된다. 사단은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영혼들이여, 나는 죄에 눌려 신음하고 있는 그대들을 동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정심이 없다. 그대들은 무엇인가 희망의 광선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대들을 멸망하도록 버려 두고, 그대들의 불행을 보고 만족해 한다.” 이것은 무서운 기만이다. 유혹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이렇게 말하라. “예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하여 돌아가셨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가 멸망당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나에게는 자비로운 하늘 아버지가 계신다. 비록 내가 그분의 사랑을 남용하고, 자비롭게도 그분께서 내게 주신 축복들을 낭비해 왔을지라도 나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여 내가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눅 15:18, 19) 라고 말하겠다.” 비유는 그 방황자가 어떻게 영접을 받을 것인지 당신에게 말해 준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즐겨 영접해 주신다는 것을 알려 준다.

비록 이 비유가 다정다감하고 감동적일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주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렘 31:3) 고 주장하신다. 죄인이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낯선 나라에서 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마음은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심령 속에서 생길 때마다 그것은 방황자를 그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으로 호소하고, 간구하고, 이끌고 있는 그분의 영의 부드러운 간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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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앞에 성경의 풍성한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전히 의심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가련한 죄인이 돌아오고자 갈망하고, 그의 죄를 버리고자 희구하지만 주님께서 회개로써 그분의 발 앞에 나오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하고 계신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버려라. 그런 생각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 대하여 그런 생각을 품는 것보다 그 자신의 영혼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전반적인 영적 생애는, 하나님께 대한 그런 관념 때문에 절망의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찾거나 그분을 섬기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좌절시킨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우리에게 선고를 내리고자 기다리고 있는 재판관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죄를 미워하신다. 그러나 죄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주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단이 악랄하게도 그릇되게 나타낸 당신의 품성을 친히 선포하신다. 그분은,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출 34:6, 7) 라고 말씀하심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분께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택하신 말보다 더 강하고 더 부드러운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5) 고 주장하신다.

구속의 계획에는,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 (시 85:10) 다. 온전히 지혜로우시고 온전히 능하신 하나님,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분께서는 사랑이 충만하시고 자비가 넘치신다. 그러므로 의심하며 떨고 있는 자들이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님께서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선물로 주신 데 대하여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헛되이 돌아가지 않으신 데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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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형제여, 당신은 이 세상이나 장차 올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지었는지에 대하여 질문한다. 이것이 그런 경우라는 증거를 나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하는 바이다. 무엇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가 되는가? 그것은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사단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의 특별한 역사를 목격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그 일이 성경과 일치된다는 것과, 성령께서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그의 마음에 증거해 주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유혹을 받아 타락한다. 교만, 자부심, 그밖의 다른 악한 특성이 그를 지배한다. 그리하여 그 역사의 거룩한 특성에 대한 모든 증거를 거절하고, 그는 그가 이전에 성령의 능력으로 인정했던 것이 사단의 능력이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의 매개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성령을 거역하고 그것이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의 통로를 끊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즐겨 그들에게 주신 증거를 부인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비취고 있던 빛을 꺼 버린다. 그 결과로 그들은 어둠에 묻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말씀, 곧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 6:23) 라고 하신 말씀이 입증된다. 이 죄를 범해 온 사람들이 한동안은 하나님의 자녀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품성을 나타낼 환경을 만나서 그들이 어떤 형태의 정신에 속한 사람인지를 보이게 될 때, 그들이 원수의 땅에 있다는 것, 검은 깃발 아래 서 있다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나의 형제여, 성령께서는 오늘 당신을 초청하신다.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께로 오라.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복하고, 모든 죄악을 버려라. 그리하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약속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사 45:22) 는 말씀은 그분의 은혜로운 초청이다.

무서운 하나님의 분노의 책망이 그분께 불충성 하기로 고집해 온 모든 자들에게 내릴 날이 올 것이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 의로써 말씀하시고 무서운 일을 하시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의 분노 아래 놓일 자들 사이에 속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다.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비취는 빛은 지금 분명하고 밝은 빛으로 빛나고 있으며,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드러내 주고 있다. 내가 당신 앞에 제시해 준 약속들을 읽을 때, 그것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자비임을 기억하라. 무한한 사랑을 가진 위대한 마음은 끝없는 긍휼로써 죄인을 이끌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시는 분이심을 믿기만 하라. 그분은 사람 안에 그분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시키기를 바라신다. 당신이 고백과 회개로써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면 그분은 자비와 용서로써 당신에게로 가까이 오실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빚지고 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신다. 당신이 두렵고 떨림으로 당신 자신의 구원을 이루게 될 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빌 2:13)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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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장 —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고백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 28:13).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조건은 단순하고, 공정하고, 합리적이다.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어떤 괴로운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께 우리의 심령을 고치거나 우리의 허물을 속하기 위하여 길고 지루한 순례를 하거나 고통스런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죄를 고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얻을 것이다. 이것은 타락한 사람이 용기를 얻어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그분의 나라에서의 영생을 구하게 하고자 주어진 귀중한 약속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지자 다니엘이 하늘의 은총을 크게 입은 자였음을 읽게 된다. 그는 바벨론 왕궁에서 번영과 시련의 때를 막론하고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존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낮추고 그의 죄와 백성의 죄를 고백했다. 그는 마음에 깊은 슬픔 가운데 이렇게 인정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 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단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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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은 자기 자신이나 그의 백성을 하나님 앞에 변명하고자 하지 않고, 심령의 겸손과 통회로 완전히 고백하고 그들의 허물의 결점을 토로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분의 호소가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게 한 나라에 대하여 취하신 그분의 처사를 공의롭다고 옹호했다.

이처럼 진실하고 마음에서 우러난 회개와 고백은 오늘날에도 크게 필요하다. 자신의 허물을 인정함으로 심령을 하나님 앞에 낯추지 못한 자들은 가납받을 첫째 조건도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만일 우리가 회개할 것이 없는 회개를 경험하지 않고 진정한 영혼의 겸비와 심령의 통회로써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우리의 죄악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결코 죄의 용서를 진정으로 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혀 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결코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죄를 도말받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즐겨 낮추지 않고 진리의 말씀의 조건에 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주어진 명백한 교훈이 있다. 죄의 고백은, 공적이거나 사적이거나를 막론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거리낌없이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죄인에게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경박하고 부주의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죄의 가증한 성격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 눈물과 슬픔이 섞인 고백, 심령의 깊은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백은 무한한 자비의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발견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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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의 바로의 고백과 같은 고백이 너무도 많이 있다. 그는 더 이상의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 그의 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재앙들이 그치자 즉시 그는 하늘을 반항하는 일로 되돌아갔다. 발람의 고백도 유사한 성격의 것이었다. 칼을 빼 들고 그가 가는 길에 서있는 천사에 놀란 그는 생명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자기의 죄를 인정했다. 그의 고백에는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도 없고, 통회도 없고, 목적의 변동도 없고, 죄를 가증히 여기는 마음도 없고, 어떤 가치도 공효도 없었다. 가룟 유다는 그의 주님을 배반한 후, 제사장들에게로 돌아가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마 27:4) 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하나님의 자비를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죄의 무서운 장면과 미래의 무서운 심판 때문에 죄책감에 눌린 그의 심령에서 강요된 것이었다. 그에게 이르러 올 결과 때문에 그는 자신의 큰 죄를 이처럼 인정하게 되었다. 그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넘겨 주어서 조롱받고,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고, 또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배신하여 악하고 무도한 자들의 손에 넘겨 준 데 대한 깊고도 마음을 찢는 슬픔이 없었다. 그의 고백은 다만 이기적이고 암담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에 불과했다.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후, 그들은 수치와 공포감으로 충만해졌다. 처음에 그들의 유일의 생각은 하나님 앞에 그들의 죄를 어떻게 변명할 것이며 무서운 죽음의 선고를 어떻게 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죄에 관하여 질문하시자, 아담은 그 죄를 부분적으로는 하나님께로, 부분적으로는 그의 배우자에게로 돌림으로 대답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3) 고 말하므로 그 책임을 뱀에게 돌렸다. “왜 당신이 뱀을 만들었습니까? 왜 당신이 뱀을 에덴 동산에 들어오도록 허락했습니까?” 이것들은 그의 죄를 변명하는 일을 암시한 질문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타락의 책임을 하나님께 지우고 있었다. 자기 정당화의 정신은 거짓의 아비에게서 나와서 아담의 모든 자녀들에 의하여 나타났다. 이런 종류의 고백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 앞에 가납될 수 없다. 참된 회개는 사람의 범죄를 자기 자신에게 지우고 기만이나 위선 없이 그것을 인정하게 할 것이다. 가련한 세리처럼, 눈을 하늘로 향하여 들지 못하고 그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18:13) 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허물을 인정하는 자들은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회개한 영혼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내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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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의 창조주 앞에 머리를 숙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를 통한 용서를 간구하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범죄하고 반역함으로 상하게 한 분 앞에서 그대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고상한 일이다. 그것은 그대를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높여 준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 지” (눅 18:14) 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은밀한 생각과 상상을 고백으로 털어 놓는 자는 자기의 인격을 떨어뜨리고 그의 영혼의 모든 본성을 저하시킴으로 자신을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술과 방종으로 타락한 사제에게 그의 생애에 있는 죄를 펼쳐 놓음으로써 그의 품성의 표준은 낮아지고, 그는 결과적으로 더럽혀진다. 그의 생각 속에는, 사제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서 있다는 뜻에서 하나님이 죄많은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낮추어진다. 세상을 더럽히는 악이 증가되어 마지막 멸망받기에 합당한 상태가 되는 원인 중 많은 부분은 타락한 사람에게 하는 이와 같은 저열한 인간의 고백인 것이다.

교회증언 5권 pp. 629-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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