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마지막 날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고가 되기 위함이다. 그들이 의와 진정한 성결을 따르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면, 사단과 그의 사자들이 그들을 정복하도록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가장 무자비한 원수들도 하나님께서 친히 심으신 포도나무를 파멸시키거나 멸절시키기에 무력하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사단은 발람이 슬픈 경험을 통하여 배운 것 즉, 이스라엘이 죄를 품지 않는 한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도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의 능력과 영향력은 그들의 연합을 깨뜨리고 그들의 품성의 순결을 더럽히는 데 언제나 사용될 것이다. 그의 올무는, 선을 위한 그들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수천 가지 방법으로 놓여진다.
다시 나는 그대에게 모든 생각과 모든 말과 모든 행동에 있어서의 순결의 필요를 강조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우리를 대신하여 해 줄 수 없는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 책임, 개인적 사업이 있다. 그것은 교훈과 개인적 노력과 모본으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사교성을 계발해야 하는데 단순히 오락을 위해서가 아니고 어떤 목적으로 해야 한다.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있다. 개인적 노력으로 그들과 가까이하라. 시험을 받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그대의 문을 열어 주라. 악은 모든 면에서 그들을 초청한다.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고자 노력하라. 그들이 결점 투성이라면, 그 잘못들을 고쳐 주고자 노력하라. 그들을 멀리하지 말고 그들에게로 가까이 가라. 그들을 그대의 화로 가로 데려오고, 그대의 가족 제단에 그들을 초청하라. 그들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할 수천 가지의 사업이 있다. 사단의 정원에 있는 모든 나무는 유혹적이요, 유독한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따 먹는 자는 누구나 저주의 선고를 받는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하늘 가는 길을 깨끗하고 밝고 매력적으로 만들므로, 사단의 파괴적인 마법에서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 것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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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고상한 목적에 사용되도록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다. 우리는 다음 생애를 위하여 예비하는 자로서 이 땅에 존재한다. 우리 중 어떤 사람도 부주의하게 되거나 불확실하게 행동하기에는 너무도 엄숙한 순간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우리의 교제는 온건과 하늘의 정신으로 특징 지워져야 한다. 우리의 대화는 하늘의 사물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말 3:16, 17).
구원의 계획보다 정신을 몰두시키기에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함이 없는 주제이다. 예수님의 사랑, 그분의 무한한 사랑으로 타락한 인류에게 주어진 구원, 마음의 성결, 이 마지막 때를 위한 귀중한 구원의 진리, 그리스도의 은혜 — 이것들은 영혼을 소성케 하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동행하실 때 그들이 느꼈던 기쁨을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느끼게 해 준다. 애정이 그리스도께 집중된 자는 이런 종류의 거룩한 교제를 맛보게 되고 그런 교제를 통하여 신령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대화를 맛보지 못한 자와 감정적인 무의미한 것을 가장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하게 되고 거룩하고 고상한 열망에 대하여 죽어가고 있다. 관능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은 이런 것 때문에 거룩하게 되는 일에 방해를 받는다. 대화가 하찮은 성격의 것일 때 그리고 불만의 냄새가 인간의 동정과 인정을 받고자 나갈 때, 그것은 사랑에 번민하는 감상주의 (感傷主義) 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젊은이들이나 백수가 된 사람들도 안전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진리가 마음 속에서 살아 있는 원칙이 될 때, 그것은 솟아나는 샘물같을 것이다. 그것을 억제하고자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곳에서 용솟음쳐 나올 것이다. 샘물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다. 마음 속에 있는 진리는 생명의 샘물이다. 그것은 피곤한 자에게 생기를 주고 비열한 생각과 말을 제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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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길을 에워싸고 있는 위험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일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도처에 인간의 잔해들, 등한해진 가족 제단, 깨어진 가정을 보게 된다. 원칙의 이상한 포기, 도덕적 표준의 저하가 있다. 노아 홍수와 불에 의한 소돔의 멸망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지상에 쏟아지게 한 죄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완고함을 오래 참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형벌은 확실하다. 세상의 빛이 되었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은 모든 죄악에서 떠나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당시에 진리에 대항하여 나타냈던 것과 똑같은 정신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효로 만들고 있는 자들은 성경 지식의 부족으로 교역자들을 더럽히고 어둡게 하고자 거짓말을 지어낼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구속주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였으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다. 전혀 근거 없는 소문들이 사실로 믿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계명을 지키는 당신의 백성들을 축복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미칠 수 있는 모든 반대와 거짓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옹호하기 위하여 굳게 서 있는 자들을 강하게 해 줄 뿐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보존하는 자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그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 되면 그분의 보호의 손길은 거두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타락과 방종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정말로 원수들을 대항하여 설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분의 백성들이 의를 행하는 백성으로서 세상에서 분리되고 구별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방호벽이 되실 것이며, 그들을 치려고 제조된 무기는 날카롭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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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위험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으로서 모든 죄와 모든 불의와 모든 완고함을 우리들 가운데서 제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여자들은, 용인할 수 없는 친숙성을 조금이라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그들이 언제나 행동의 자제와 예절을 지킬 것 같으면 그들은 많은 유혹의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남자들은 요셉의 생애에서 모본을 발견하고, 아무리 강하게 유혹을 받을지라도 원칙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의를 위하여 강한 남녀들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주변에는 도덕적 능력이 약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확고한 사람들,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는 자들과 친구가 될 필요가 있다. 각 사람의 원칙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가 푸주로 가는 것” (잠 7:22) 과 같이 어리석게도 유혹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을 유혹하도록 원수를 끌어 들인다. 그들은 스스로 기력을 잃게 되고, 도덕적 능력이 약화된다. 결과적으로 수치와 혼란이 야기된다.
하나님의 율법을 옹호하기 위하여 서 있노라고 공언하면서 그 율법의 조항들을 범하는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에 얼마나 경멸스러운가! 그들은 귀중한 사업에 욕을 돌리고 진리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승리할 기회를 준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과 사단을 따르는 자들과를 구분하는 표는 결코 지워져서는 안 된다. 세상과 교회, 계명을 지키는 자들과 계명을 범하는 자들 사이에는 하나님이 친히 그어 놓으신 분명한 선이 있다. 그들은 함께 섞이지 않는다. 그들은 대낮과 밤중처럼 구별된다. 그들의 취미, 그들의 목적, 그들의 직업, 그들의 품성이 다르다. 만일 우리가 사랑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계발할 것 같으면 우리는 추호도 불순에 접근하기를 싫어할 것이다.
주님께서 영혼들을 당신께로 이끄셔서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거룩한 책임감을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성품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란다. 표준을 높이라. 그리하면 각 사람이 몸으로 행한 일을 따라 받게 될 그날에 하늘의 축복이 그대에게 선고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교역자들은 그분의 눈앞에서 사는 것처럼 살고 품성과 진정한 덕성과 경건을 끊임없이 계발시켜야 한다. 그들의 정신과 마음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너무도 철처하게 감화되고, 그들이 전해야 하는 거룩한 기별에 너무도 엄숙해 진 나머지,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과 모든 동기가 세속적이요 육욕적인 것에서 초월할 수밖에 없어져야 한다. 그들의 행복은 금지된 이기적 만족에 있지 않고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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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도는 이것이다. “오, 주님, 당신의 백성들의 눈에 기름을 발라주셔서 그들이 죄와 성결, 불결과 의로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마침내 그들이 승리자로 나타나게 하소서.”
74 장 — 실수한 자들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께서는 접촉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오셨다.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그분은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무한한 구속의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분의 극기와 자아 희생, 그분의 이기심 없는 활동, 그분의 굴욕, 무엇보다도 그분의 생명을 내어 주신것은 타락한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의 깊이를 증거한다. 그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의 사명은 죄인들, 온갖 종류의 죄인들, 모든 방언과 족속에 속한 죄인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속량하고, 그들을 당신 자신과 연합시키고 동정하기 위하여 그들을 위하여 값을 지불하셨다. 가장 그릇된 자, 가장 죄 많은 자들도 간과되지 않았다. 그분의 활동은, 그분께서 주시고자 오신 구원이 가장 필요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개혁의 필요가 크면 클수록, 그분의 관심은 더 깊고, 그분의 동정은 더 크고, 그분의 활동은 더욱 열렬했다. 그분의 위대한 사랑의 마음은 상태가 가장 절망적인 자들과 변화시키는 그분의 은혜가 가장 필요한 자들을 위하여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움직였다.
잃은 양의 비유는, 실수하고 방황하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나타낸다. 그분은 당신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모든 노력을 그들에게 기울이고 그들의 감사와 사랑을 받는 길을 택하지 않으신다. 참 목자는 그를 사랑하는 양떼를 버려 두고, 우리를 떠나 방황하는 양, 찾아오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서 어려움을 참고 위험과 죽음을 직면한다. 열심히 찾은 후에 잃은 양을 발견하면 목자는, 비록 지치고 피곤하고 배고플지라도 그것을 연약한 상태 그대로 자기를 따라오도록 버려두거나 그를 따라오도록 버려두지도 않는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니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그는 그 양을 부드럽게 팔에 안고, 어깨 위에 올려 놓는다. 그리고 우리로 돌아온다. 그는 이웃 사람들을 불러서 잃은 양을 찾은 것을 함께 즐거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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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비유와 잃은 은전의 비유도 동일한 교훈을 알려 준다. 특별히 타락함으로 위험에 처해 있는 모든 영혼은 그리스도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가장 부드러운 그분의 동정과 가장 열렬한 그분의 활동을 요구한다. 한 죄인이 회개할 때 그분의 기쁨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아홉으로 인한 것보다 더 크다.
이런 교훈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분의 사업에 협력하는 자들이 되고, 그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분부하셨다.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고민은 그분이 인간의 영혼을 평가하시는 정도를 입증한다. 이 큰 구원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그분의 동역자가 되겠다고 서약한다. 아무도 자기 자신이 특별히 하늘의 은총을 받은 자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그들의 관심과 주의를 자아에 집중시켜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그분께서 일하신 것처럼 일하고, 무지와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자들을 그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한 백성으로서의 우리들 사이에는 깊고 열렬하고 심령을 울리는 동정과 유혹받고 실수한 자들에 대한 사랑의 결핍이 존재해 왔다. 많은 사람들은, 가장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서 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 다른 길로 가버린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표현하신 심한 냉정과 죄악적인 무관심을 나타냈다. 새로 회개한 자들은 흔히 이내 굳어진 습관이나 특별한 형태의 유혹 때문에 극심한 투쟁을 하며, 어떤 압도적인 정욕이나 성향에 패배하게 되고 경솔이나 실제로 실수의 죄를 범한다. 그의 영적 건강을 회복시켜 주기 위하여 그의 형제들의 노력과 기지와 지혜가 요망되는 것은 이 때이다. 그런 경우에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은 이러하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 6: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롬 15:1). 그러나 그리스도의 동정 깊은 온유는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에게서 얼마나 적게 나타나는가! 한 사람이 실수할 때, 너무도 흔히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그 상황을 나쁘게 보이게 할 자유가 있다고 느낀다. 아마도 다른 어떤 면에서 동일하게 큰 죄들을 충분히 짓는 자들도 그들의 형제를 가혹하고 통렬하게 취급할 것이다. 무지와 부주의와 약점 때문에 범한 실수도 고의적이요 계획적인 죄로 과장된다. 영혼들이 그릇된 길로 나가는 것을 볼 때 어떤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서서,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지. 나는 그들은 전혀 의지할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은 그들의 악한 추측이 옳은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마음으로 환호하면서 사단의 태도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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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리고 경험 없는 자들에게서 크게 불완전한 것을 보게 되고 또한 그것을 참아야 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자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온유한 심령으로 노력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분은 또한 그들을 좌절과 절망과 파멸로 몰아넣을 길을 따르는 데 대하여 우리에게 책임을 추궁하신다. 우리가 날마다 귀중한 사랑의 나무를 성장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편협하고, 냉정하고, 완고하고, 비판적이 될 위험에 처해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에서 멀리 떠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를 의롭다고 평가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예모없고, 무뚜뚝하고, 거칠다. 그들은 밤송이와 같다. 그들은 닿기만 하면 찌른다. 이 사람들은 사랑 많으신 우리 구주를 잘못 나타냄으로 말할 수 없는 해를 끼친다.
우리는 더 높은 표준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에 합당치 못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실수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하신 그 정신을 계발시켜야 한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그분에게 귀중하다. 그들도 동일하게 그분의 은혜의 전리품이요 그 나라의 후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간악한 원수의 올무에, 위험과 더러움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아니면 분명히 멸망하게 된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사실 그대로 본 이상, 우리의 도움과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동정과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접근해 가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열성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열렬하고, 자아 희생적인 노력을 가중시켜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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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업을 등한히 해 온 자들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 19:19) 는 위대한 명령에 비추어 그들이 의무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 책임은 모든 사람에게 지워져 있다. 모든 사람은 질병을 감소시키고 그들의 동료 인간들의 축복을 증진시키도록 요구받고 있다. 만일 우리가 유혹을 물리치는 데 강하면 우리는 연약하고 굴복하는 자들을 도와줄 더 큰 책임을 지고 있다. 우리가 지식을 가졌으면 무지한 자들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재물로 우리를 축복하셨다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우리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이나 같이 갖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도 주위에 있는 자들과 나누는 일 없이 생명의 양식을 먹는 일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찾고 계신 그들의 주님께 성실한 자들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분의 이름을 높인다. 참된 경건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그분의 간절한 열망과 열렬한 활동을 분명히 보여 줄 것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드럽고 차분해지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불타오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동정과 친절이 절로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생애에서 예시된 진리는 숨겨져 있는 누룩처럼,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안에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그분의 모본을 따르고 그분께서 일하신 것처럼 일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정해 놓으셨다. 우리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고, 유혹을 받으면서 활동하고 있는 자들을 실망시키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는 데는 때때로 투쟁이 요구될 것이다. 매일의 기도와 찬양의 생활, 다른 사람들의 길에 빛을 비추는 생활은 열렬한 노력 없이 지탱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귀중한 열매를 맺고, 받는 자 뿐만 아니라 주는 자에게도 축복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이기심 없이 활동하는 정신은 품성의 깊이와 안정과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스러움을 주고,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 포부는 고상하게 된다. 게으름과 이기심이 있을 자리가 없다. 그리스도인 덕성을 활용하는 자들은 자라날 것이다. 그들은 영적 체력과 근육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도록 강해질 것이다. 그들은 명석한 영적 지각, 튼튼하고 증가되는 믿음, 효과 있는 기도의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영혼들을 살피고 있는 자들, 자기 자신을 실수한 자들을 구원하는 일에 가장 완전히 바치고 있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구원을 가장 분명히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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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업은 얼마나 등한히 여겨져 왔는가! 만일 사상과 애정이 완전히 하나님께 바쳐진다면, 실수하고 사단의 유혹을 받고 있는 영혼들을 이전처럼 부주의하고 냉정하게 버려둘 수 있다고 그대는 생각하는가? 이 방황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과 단순함으로 더 큰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한 모든 사람은 그분께서 가장 큰 열성으로 또한 그분께서 무한한 희생을 치르시고 하신 사업,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사업에 가장 큰 열성으로 임할 것이다. 이것은 소중히 하고 지탱해야 할 특별한 사업이며, 약해지도록 결코 허용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각성하여 지금껏 살아온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에서 나와서 사랑의 맥박을 얼어 붙게 하여 무위 (無爲) 에 머물러 있게 한 생각과 사상을 떨쳐 버리도록 요구하신다. 그분은 그들이 저급하고, 세속적인 수준에서 나와서 맑고, 햇빛나는 하늘의 공기를 호흡하라고 명령하신다.
예배를 위한 우리의 집회는 거룩하고, 귀중한 기회가 되어야 한다. 기도회는, 형제들이 피차 간에 비난하고 정죄하는 장소, 매정한 감정과 거친 말들이 있어야 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정신이 나타나는 곳에서 쫓겨나실 것이며, 사단이 지도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들어올 것이다. 그리스도인적이 아닌 냉정한 정신의 냄새가 나는 것은 아무것도 들어오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자비와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모였기 때문이다. 구주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2). 누가 하나님 앞에 서서 흠 없는 품성, 책망할 것이 없는 생애를 위하여 탄원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감히 그들의 형제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겠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구원을 바랄수 있는 자들, 그분의 피의 공로로 용서를 구해야 하는 자들은 동료 죄인들에 대하여 사랑과 동정과 용서를 나타내야 할 가장 강한 책임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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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이여, 그대들이 예배의 장소를 존중하지 않는 한, 그대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형식상으로 그분을 경배할 수는 있지만, 영적 예배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고 말씀하신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결점과 실수들을 생각하는 대신에 그들 자신의 마음을 열렬히 살피고 있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죄를 고백할 일이 있으면 그대의 의무만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무는 그들에게 맡겨 두라.
그대가 딱딱하고 냉정한 정신을 나타냄으로 그대 자신의 품성의 사나움을 간직하고 있을 때, 그대는 그대가 구원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을 물리치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가혹함은 함께 모이고 싶은 마음을 사라지게 하고, 너무도 흔히 그들이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결과를 자아낸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는 동안 주님께서는 그대를 정죄하신다. 주님께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마침내 변화시키는 그분의 은혜가 생애와 품성에 나타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 후 그대들이 함께 모이면, 피차간에 비판하지 않고,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