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4 9-18(199일)

섹션 26 — 교회에 대한 증언

1 장 — 성경 전기

성경에 기록된 생애는 실제적 인물들의 확실한 역사이다. 아담으로부터 그 후대를 통하여 사도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실제로 일어났던 명백하고 꾸밈없는 사실에 대한 서술과 실제 인물들의 진실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영감적인 역사가 선한 사람들의 생애에 있어서 그들의 도덕적 품성을 손상시키는 사실들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일으키는 주제이다. 불신자들은 큰 만족감으로 이 죄악들을 빙자하여 그 범죄자들을 조롱한다. 영감 받은 기록자들은 인간의 약점과 결함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거룩한 역사의 페이지들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거짓되게 증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서기관들은 자신의 의도대로 기록하지 아니하고, 성령에 의해 지시되는 대로 기록하였다. 그들은 사실 그대로의 진리를 기록하였으며, 이 엄격하고 말하기 힘든 사실들은 우리의 유한한 마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계시되었다.

진실이 위장되지 아니하고 그 주된 인물들의 죄가 감추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최상의 증거 중 하나이다. 일상 생활에서 일어난 일을 진술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사람에 대해 공정한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입증된 사실이다. 우리가 그 내력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확한 진실에서 벗어나지 않고 기록한다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마음은 편견에 사로잡히기가 너무 쉬우므로, 어떤 주제를 공평하게 다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회고되는 인물의 결점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거나 그의 덕성이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것은 기록하는 자가 그에 대해 호감이나 악한 감정의 편견을 가진 대로 되는 것이다. 역사가가 아무리 공평하고자 해도, 진정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사실에는 모든 비평가들이 의견을 같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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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간의 약점을 초월하는 거룩한 영감은 단순하고 적나라한 진실을 말해 준다. 흠없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전기가 쓰여졌는가! 그들은 일상의 가정 생활과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흠없는 경건의 모본으로 빛을 발한다. 그들의 성결의 아름다움을 훼손한 흠이 없으며, 그들 역시 인간이 당하는 일반적인 유혹을 받기 쉬운, 진토에 불과한 존재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줄 아무런 결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영감의 펜이 그들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인가! 거기에는 인간의 약점, 이기심과의 투쟁, 완고, 교만, 숨겨진 죄악들, 영과 육 사이의 계속적인 싸움들이 계시되었을 것이다. 은밀한 일기에서조차 필자 자신의 죄악적인 행동은 그 책장에 기록되지 않는다. 때때로 죄악과의 투쟁이 기록되기는 하나, 대개는 정의가 승리를 거두었을 때에만 그렇게 된다. 물론 그 기록에 칭찬할 만한 행동과 고상한 노력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나, 그것 역시 필자가 정직하게 그의 생애의 충실한 기록을 남기려는 의도를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 친구들이 살펴볼지도 모르는데, 우리의 결점을 공개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의 훌륭한 성경이 영감 받지 못한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면 아주 다른 형태로 제시되었을 것이며, 본성적인 연약함이나 간교한 원수의 유혹과 투쟁하고 있는, 잘못을 많이 저지르는 유한한 인간들이 이를 연구할 때 그들의 용기를 꺾는 그러한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의 역사 속에 주요한 인물들의 신앙 경험에 대한 정확한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큰 책임을 맡기신 자들이, 오늘날 우리들이 투쟁하고 흔들리고 흔히 잘못을 범하는 것처럼 때때로 유혹에 넘어져서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악한 본성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새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낙담한 우리의 마음에 용기가 된다. 이런 사실을 기억함으로 우리는 스스로의 투쟁을 새롭게 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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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해진 큰 이적들과 그들의 우상숭배와 배은 망덕에 대한 형벌은 물론이요 그들의 불평과 반역적 불만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기록되어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증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신을 피하고 그분의 진노를 벗어나도록 하나님의 경고로 주어져 있다. 만일 히브리인들의 죄악이 거룩한 기록에서 빠져 버리고 그들의 미덕만이 기록되었다면, 그 역사는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그 교훈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불신자들과 죄를 사랑하는 자들은 고대에 하나님께서 권위를 부여하신 사람들의 악함을 들어서 자신들의 범죄를 변명한다. 그들은 이 거룩한 사람들이 유혹에 넘어져 죄를 저질렀다면 그들 역시 잘못을 저지른 죄가 있을지라도 놀랄 일이 아니라고 자위하며, 그와 같은 범죄의 실례가 그들 앞에 있으므로 결국 그들은 그렇게 나쁜 존재가 아니라고 암시한다.

공의의 원칙은 거룩한 기록을 읽게 될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실에 대한 충실한 진술을 요구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증거들을 분별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그리고 불순종의 형벌에 대하여 교훈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유익과 경고를 위하여 낙원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역사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의 슬픈 결과도 기록되었다. 그 기록은 완전하고 분명하다. 에덴에서 인류에게 주어진 율법은 그 계명을 불순종할 경우에 따르게 될 형벌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 후에 유혹과 타락의 이야기가 따르고, 잘못을 범한 우리의 조상들에게 형벌이 가해졌다. 이 실례는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보응의 공의로움이 결코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과 그분의 계명에 대한 엄격한 존경을 피조물에게서 요구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기 위하여 주어졌다. 율법이 시내산에서 선포되었을 때, 거기에 부수된 형벌은 얼마나 명확하고, 그 계명을 어길 때 따른 징벌은 얼마나 확실하고, 그 사실에 대한 증거에 기록된 각각의 경우는 얼마나 뚜렷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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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임무에 충실한 영감의 펜은 노아, 롯, 모세,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을 정복한 죄악들을 우리에게 말해 주며, 엘리야의 강한 정신까지라도 그 두려운 시련의 시간에 유혹에 빠져든 사실을 알려 준다. 요나의 불순종과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과 바울과 바나바의 날카로운 대립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실패와 결함들이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성령에 의해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믿는 자들의 생애가 그들 뒤에 오는 모든 세대의 교훈이 되게 하기 위한 의도로서, 그 모든 결함과 어리석음이 모두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만일 그들에게 흠이 없었다면 그들은 인간 이상의 존재들이었을 것이며 우리의 죄된 속성으로 그처럼 탁월한 지점에 도달하려 할 때 낙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투쟁하고 넘어진 것과 다시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승리한 것을 볼 때, 우리는 용기를 갖게 되고 타락한 속성으로 우리 앞길에 놓인 방해물을 극복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범죄를 형벌하시는 데 성실하시다. 그분은 범죄자를 경고하고, 죄악을 책망하고, 심판을 선고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조롱하는 자들이 비웃고 성도들이 유감으로 여길 정도로 그분의 백성들의 죄악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는가 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그 모든 것이 그들을 교훈하고 그들로 하여금 기록된 악을 피하고 주님만을 섬긴 자들의 의를 본받게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그러한 교훈을 필요로 한다. 이는 죄가 드러남과 동시에 거기에 따르는 보응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의 슬픔과 통회, 죄로 병든 영혼의 통곡은 과거로부터 우리에게로 내려왔고 그 때의 사람들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를 필요로 하였음을 알려 준다. 그것은 그분은 범죄를 벌하시는 분이신 동시에 회개하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주께서는 당신의 섭리 가운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경고하는 것이 옳은 일임을 보셨다. 직접적인 명령을 통하여, 거룩한 기록을 통하여, 그리고 예언의 신을 통하여, 그분은 당신의 뜻을 그들에게 알려 주셨다. 나의 사업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결점과 오류들을 명백하게 알리는 것으로 되어 왔다. 어떤 개인들의 죄악이 드러났다고 해서, 실수가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보다 그들이 주님 보시기에 더 악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러나 나의 사업을 택하는 것이 내게 속한 일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나의 일임을 보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생애의 잘못과 악행은 같은 유혹에 빠지기 쉬운 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록되어 있다. 한 사람의 경험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바위를 피하도록 경고하는 횃불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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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사단의 올무와 책략은 드러나고 그리스도인의 품성 완성의 중요성과 그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계시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 주신다. 그들의 독특한 죄악이 책망을 받을 때, 반역적 감정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기질의 소유자들이 많다. 이 세대의 정신은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사 30:10) 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의 영은 진리만을 말한다. 죄악은 넘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사랑은 식어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마음이 사악한 데 눈멀어 있으므로 그들의 연약하고 속절없는 상태를 깨닫지 못한다. 자비롭게도 하나님께서는 휘장을 들어올리시고 그들에게 그들의 숨은 죄악과 행동의 동기를 분별하는 보이지 않는 눈이 있음을 보여 주신다.

일반 교회의 죄악들은 회칠로 가리워진다.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 죄악에 빠지고 범죄에 젖어 들어간다. 바벨론은 무너져 각종 더러운 것과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혐오할 만한 죄악이 그리스도교라는 가면 아래서 은신처를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생애는 그들이 믿는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 율법이 없으면, 범함도 없고 죄도 존재하지 않는다. 죄는 불법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그분의 뜻에 반대된다. 그것이 일단 순종의 멍에를 벗어 던지게 해 보라. 그것은 부지중에 범죄의 무법 세계로 빠져들 것이다. 순수하고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떳떳하게 말하는 자들 가운데 범죄가 편만하고 있다. 그들의 행동은 주께서 보시기에 가증하고 그들은 영혼의 원수와 협력한다. 계시된 진리의 빛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성결의 아름다움은 그들에게 있어서 그림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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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박약한 기초 위에 하늘에 대한 소망을 세우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것을 볼 때,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마치 그분에게 도전하고 그분의 말씀의 효력을 무효로 만들 듯이 무한하신 분의 율법을 모욕한다. 사단이라 할지라도 거룩한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율법을 증오하는 어떤 교역자가 강단에서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설교를 감히 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신성 모독을 인하여 기뻐 날뛴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어떠함을 보았다. 범죄와 불법이 그의 생애를 채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율법의 온전한 의미를 그에게 계시해 줄 때, 얼마나 큰 변화가 그의 마음에 일어나는가! 벨사살 왕처럼 그가 전능하신 분의 손가락이 쓴 글을 읽고 이해할 때, 죄에 대한 자각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우레가 그를 혼수 상태에서 깨워 줄 때,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비를 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겸손한 간구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귀를 기울여 기꺼이 들으신다. 그분은 회개하는 자들을 위로하지 않고는 결코 돌려보내지 않으신다.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필요와 잘못들을 내게 보이시는 것을 합당히 여기셨다. 그것은 나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나, 나는 충실하게 하나님의 성령의 지시를 따라 범죄자들 앞에 그들의 결점과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비방의 혀를 자극하였고 내가 위하여 일하고 고난 당하는 자들이 내게 대하여 분노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해서 나의 길에서 돌아서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할 일을 주시고 그분의 도우시는 힘으로 붙들어 주셨으므로 나는 그분이 내 앞에 제시해 준 이 고통스러운 의무를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성령께서는 경고와 심판을 선고하되 아름다운 자비의 약속도 보류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을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길을 깨닫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그들이 걸어갈 곧은 길과 그들을 흑암과 낙망을 통하여 인도할 빛을 발견할 것이다. 다윗은 그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지혜를 배우고 지존자의 징계 아래 겸손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참된 상태에 대한 선지자 나단의 충실한 묘사는 다윗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 죄를 버리게 했다. 그는 온유하게 충고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시 19:7) 한다고 그는 부르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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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는 죄인들은 그들의 범법이 지적되고 그들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주어질 때 낙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을 위한 이와 같은 노력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그들을 구하기를 원하시는지 보여 준다. 그들은 영생을 유업으로 얻기 위하여 그분의 충고와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을 범한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한 진리의 빛으로 그들의 죄의 흉악성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죄악을 그들 앞에 제시해 주신다. 그런 후에 그 죄를 영원히 버리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다.

부조들의 시대, 다윗의 시대, 선지자와 사도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하나님은 죄에서 구원하기에 강력하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내신 사실이, 기록된 거룩한 역사에서 허다한 경우들을 볼 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가르침을 받고자 갈급해야 하며, 엄밀한 심판의 조사를 견딜 품성을 완성하기 위하여 열성을 내야 한다.

성경의 역사는 낙심하는 마음을 하나님의 자비의 소망으로 붙들어 준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실망 가운데 투쟁하고 우리가 넘어진 것처럼 유혹에 넘어졌으나 그들의 위치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을 볼 때, 우리는 낙담할 필요가 없다. 영감의 말씀은 잘못한 영혼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비록 부조들과 사도들이 인간적 약점에 굴복했으나 믿음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고, 주님의 능력으로 그들의 싸움을 싸우고 영광스럽게 승리하였다. 그와 같이 우리도 속죄의 희생의 공로를 의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아담의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역시 인간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각 세대를 통하여 비할 데 없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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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 — 교회의 통일성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신체의 모든 다른 지체들이 연합하여 온몸을 이루고 각 지체가 온몸을 주관하는 머리에 순종하여 각자의 직책을 수행하듯이 그리스도 교회의 교인들은 하나의 균형진 몸 안에 연합하여 온몸이 성화된 머리에 복종해야 한다.

교회의 발전은 그 교인들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지연된다. 교회와 연합하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한 개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거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있으면, 우리의 이름이 교회의 녹명책에 올라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늘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수가 없다. 우리는 그분과 하나가 되어 일하면서 세상에서 그분의 충실한 대표자가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요일 3:2). 우리는 늘 이 거룩한 관계를 마음속에 기억하고 하늘 아버지와 사업에 불명예를 초래할 일은 전혀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매우 고상한 것이다.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신도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준행하며 구속주의 오심을 기다리노라고 공언한다. 하나님께 성실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가장 엄숙한 경고의 기별이 위탁되어 왔다.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놓여진 그 큰 의무를 인정한다는 사실들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의 빛을 아주 분명하게 비춤으로 우리가 매일의 생애에서 하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과, 우리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유업을 같이 나눌 상속자이며 그분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와 같을 것임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의 교인으로서, 그리고 주님의 포도원의 일꾼으로서의 개인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연약한 형제들이 우리를 도와주도록 고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귀하신 구주께서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연합시키고, 우리의 약점을 그분의 능력과, 우리의 무지를 그분의 지혜와, 우리의 무가치함을 그분의 공로와 연합시키도록 초청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중 아무도 중립적 위치에 설 수는 없다. 우리의 영향은 주님을 위하거나 반대하는 것 중 어느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활동적인 매체가 되거나 아니면 원수의 활동적인 매개체가 된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모으거나 흩어 버리는 자가 된다. 진정한 개심은 근본적인 변화이다. 마음의 흐름과 정서의 경향 자체가 바뀌어야 하며 생애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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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진리의 토대 위에 완전히 연합하여 서도록 한 백성을 인도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 (딛 2:14) 시려고 당신 자신을 세상에 주셨다. 이 정결케 하는 과정은 교회를 모든 불의와 부조화와 다툼의 정신에서 깨끗하게 하고 헐어 버리는 대신에 세우게 하고 그들 앞에 놓인 큰 사업에 그들의 정력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모두 믿음으로 연합하도록 계획하신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기도는 당신의 하늘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처럼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세상이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해주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이 가장 감동적이고 놀라운 기도는 각 시대를 거쳐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르러 왔다. 그분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 (요 17:20)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은 그들의 생애를 통하여 이 기도에 부응하고자 얼마나 열렬하게 애써야 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맺은 관계의 신성함을 깨닫지 못하고 교회의 제재나 징계에 순종하기를 매우 싫어한다. 그들이 취하는 행동은 그들이 연합된 교회의 판단보다 그들 자신의 판단을 더 높이고, 교회의 음성에 반대하는 정신을 고무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일에 주의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교회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공통된 결점을 가질 수 있고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경솔하게 취급될 수 없는 권위를 그들에게 주었다.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당신의 교회에 능력을 위탁하셨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요 20:23).

교회와 맺은 관계를 경솔하게 끊어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길이 장애를 받거나 그들의 주장이 생각만큼 지배적인 영향을 나타내지 못할 때 교회를 떠나가겠다고 위협한다. 사실상 교회를 떠남으로 그들 스스로가 가장 큰 손해를 입게 된다. 왜냐하면 교회의 영향이 미치는 경계를 넘어감으로 그들은 스스로를 세상의 유혹에 완전히 내놓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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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신자는 교회와 연합하는 일에 전심 전력해야 한다. 교회의 번영이 그의 첫 번째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보다 교회에 더 유익되게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가 없을 때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모든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어떤 일이 이루어진다. 많은 돈을 쓸데없는 사치에 낭비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식욕은 만족시키면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재물을 드리는 것은 큰 부담으로 여긴다. 그들은 교회가 부여하는 모든 특권의 유익은 기꺼이 받으려 하면서도 그 비용은 다른 사람들이 지불하도록 놔두기를 좋아한다. 사업의 발전에 참으로 깊은 관심을 느끼는 자들은 언제 어디서 그 사업에 자금이 필요하든지 간에 그 사업에 자금을 투자하는 데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서로 화평하고 분열되지 않은 연합체로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움직임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들의 품성에 드러내는 일을 엄숙한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개인적 판단을 몸체인 교회의 판단에 양보하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을 위하여 산다. 그들은 스스로 흠이 없다고 자부하면서 대단히 만족스럽게 자신의 생애를 바라보지만,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분의 명백한 말씀에 노골적으로 반대되는 생애를 하고 있다. 외형적 준수는 인간의 영혼의 절실한 필요를 결코 충족시켜 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시험하는 심판의 날에 서게 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을 믿는 완전한 신뢰, 어린아이처럼 그분의 약속을 믿는 의존, 그리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헌신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백성이 확고하고 진실한지 시험하고 모든 불의에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백성을 고난의 풀무 가운데서 연단하셨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이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가장 심한 시험을 견딘 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 이 믿음의 위대한 행동이 아브라함의 품성을 눈부신 광채로 빛나게 한다. 그것은 주님을 믿는 그의 완전한 확신, 곧 어떤 것이라도, 비록 약속의 아들이라도 그분께 아끼지 않고 드릴 수 있는 확신을 강력하게 예시해 준다.

교회증언 4권 pp.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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