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2 209-218 (92일)

온 하늘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장면을 주시하였다. 상실된 세상의 영광스런 구속자가 아버지의 율법을 범한 형벌을 당하고 있었다. 그분은 당신의 피로 그분의 백성을 거의 속량하시게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정당히 치르고 계셨다. 이것을 통해서 죄와 사단의 운명을 끝내며, 그의 군대가 사라지게 할 것이었다. 죽어가는 구주가 겪었던 것과 같은 고통과 슬픔을 당했던 사람이 어디 있었던가! 아버지의 불쾌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분의 잔은 더 썼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그렇게 빨리 끝나게 한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죄의 무게였고, 아버지의 진노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아버지의 영광과 지탱하시는 임재가 떠났다. 어두움으로 마음이 무거워져서 그의 창백한, 떨리는 입술에서는 고뇌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연합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고뇌와 고통당하는 중에 맹목적이고 속임을 당한 사람들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고뇌할 때에 그분을 조롱하였다. 그러나 생기 없는 천연계는 오히려 피흘리며 죽어가는 창조주와 함께 신음하였다. 땅은 흔들렸다. 태양은 그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빛을 내지 않았고 하늘은 구름으로 덮였다. 천사들은 더이상 차마 볼 수 없어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돌아가신다! 그분이 절망 가운데 계신다! 당신의 아버지의 인정하시는 미소는 사라졌다. 천사들은 그 무서운 시간의 어두움을 밝히는 것을 금지당했다. 그들은 단지 놀람 속에서 아버지의 율법을 범한 사람 대신 벌을 당하는 그들의 사랑하는 사령관, 하늘 임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죽어가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의심이 밀려왔다. 그분은 무덤 저편을 바라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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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뚫고 정복자로 나오는 것과 그분의 희생을 아버지께서 가납하시는 것에 대한 밝은 희망이 생기지 않았다. 세상의 죄는 가장 무섭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느껴졌다. 그분이 놀라운 흑암속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께서 죄를 불쾌히 여기시며, 그 벌은 죽음이라는 사실이었다. 죄는 아버지께 매우 거스리는 것이므로 그분이 당신의 아들과 다시 화목하게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될 지경이었다. 아버지께서 그를 영원히 떠나셨다는 심한 시험이 십자가상에서 이런 외마디 소리를 지르게 하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그들 위에 쏟아질 때 갖게 될 심정을 느끼셨다. 막막한 절망이 죽음의 장막처럼 그들의 죄 많은 영혼에 엄습해 올 때에 그들은 죄의 악함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고통과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그들을 위하여 이루어졌다. 그들이 기꺼이 그리고 반갑게 구원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들이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도록 강요를 당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들이 하늘의 혜택을 거절하고 죄의 쾌락과 유혹을 택한다면, 그들 나름대로 선택권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영멸의 삯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히 분리될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희생을 멸시하였다. 그들은 행복한 삶을 상실할 것이며 순간의 죄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영광을 희생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뇌에 찬 숨 속에 믿음과 희망은 떨렸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인과 가납의 표로 그분의 사랑받는 아들에게 지금까지 주셨던 보증을 제거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의 구주는 그동안 그에게 힘을 주었던 증거 즉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가납하셨고 그분의 사업을 기뻐하셨다는 증거들에 의지하였다. 그분의 죽음의 고뇌 속에서 그 귀한 생명을 버릴 때에 그분은 그가 지금까지 순종하기를 즐겨했던 분을 오직 믿음으로만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좌우를 물론하고 마음을 밝게 해주는 분명하고 환한 빛을 보지 못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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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육중한 어둠 속에 싸여 있었다. 삼라 만상이 함께 겪는 두려운 암흑 속에서 구주께서는 그 신비한 잔을 다 비우셨다. 그분의 앞에 있을 승리에 대한 밝은 희망과 확신을 부정한 채 그분은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의 품성과, 공의와 자비와, 그 위대한 사랑을 아셨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손에 자신을 던졌다. 천연계의 동요 속에서 놀란 관중들은 갈바리의 사람이 죽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천연계는 그 창조주의 고통 속에 참여하였다. 동요하는 대지, 깨어지는 바위들은 죽은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다. 강한 지진이 있었다.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 관원들과 관중들은 해가 어두움속에 감추이고, 발밑에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깨어지는 소리를 듣자 공포에 사로잡혔다. 떠들고 조롱하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할 때에 침묵 속에 돌아갔다. 놀란 무리는 어두움 속에서 도성으로 가기 위해 물러가며 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포 속에서 길을 가며 가슴을 두드렸다. 그들은 겨우 들리게 서로 속삭였다. “우리가 무죄한 사람을 죽였도다. 만일 그가 주장하던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찌할꼬?” 예수께서는 성취하시고자 목적하신 바를 이루기 전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마지막 숨 속에 “다 이루었다” 고 소리지르셨다. 사단은 그 때 패배하였다. 그는 자기의 세상이 끝난 줄을 알았다. 천사들은 “다 이루었다” 는 말씀에 기뻐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존한 구속의 위대한 경륜은 그렇게 이룩되었다. 아담의 자손들이 순종의 생애를 통하여 결국 하나님의 보좌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으로 인해 하늘에는 기쁨이 있었다. 오,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가! 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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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를 위해 대신 죄값을 치르게 하시다니.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영광의 처소에서 그분과 함께 살게 되다니. 오, 인간이 무엇이길래,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토록 큰 대가를 치러야 하였던가! 사람이, 하늘 왕께서 인간 대신 죽음으로 이루어진 큰 희생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만 있다면 구원의 경륜은 광대하게 될 것이며, 갈바리를 회상하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부드럽고, 거룩하며, 쾌활한 감정을 일깨울 것이다. 그들의 마음과 입술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에 대한 찬송이 늘 있을 것이다. 갈바리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마음 속에는 교만과 자긍의 정신이 번창하지 못할 것이다. 인류의 구속의 위대한 가치와 하나님의 귀한 아들의 보혈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별로 가치가 없게 보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재물도 한 사람의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기에 넉넉치 않다. 십자가에 달려서 죄지은 영혼들을 위해 고통당하신 그리스도가 가졌던 사랑을 그 누구가 측량할 수 있을까? 이 사랑은 측량할 수 없고 무한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고 계셨다. 비록 그분이 흑암의 세력으로 더불어 가장 격심한 투쟁을 겪으셨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오히려 그분의 사랑은 더욱 강해졌다. 그분은 아버지의 임재가 가려지는 것을 겪어내셨고, 심지어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영혼의 비탄의 외침을 쏟아 놓기까지 하였다. 그분의 팔이 구원을 이루셨다. 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대가가 치러졌다. 최후의 투쟁 속에서 “다 이루었다” 는 축복의 말씀이 나왔는데 그 소리는 온 천연계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 일에 흥분하며, 그들의 관심은 새롭고 신나는 오락에 가 있는 반면 그들의 마음은 냉랭하고 하나님의 사업에는 꽁꽁 얼어 붙은 것처럼 보인다. 가련한 형식주의자여, 그대를 흥분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주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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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관심이 이 속에 있다. 이 주제에 대하여 잠잠하고, 열성이 없는 것은 죄다. 갈바리의 장면은 가장 깊은 감동을 요구한다. 이 주제에 대하여 열심을 보이는 것은 무방하다. 탁월하고, 무리한 그분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의 막중한 짐을 지고 고통스런 죽음을 왜 당하셔야 했는지는 우리의 사상과 상상력으로 도무지 다 이해할 수 없다. 그 놀라운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는 도무지 측량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은 구주의 무한한 사랑의 깊이를 명상하는 것으로 채워져야 하며, 영혼은 감동되어 마음이 녹고 애정은 세련되고 고상하게 되며 모든 품성은 완전히 변화되어야 한다.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리의 구원이 엄청난 값에 이루어진 것을 고려할 때에 이 큰 구원을 등한히 하는 자들에게 임할 운명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공언하면서 구주의 요구에 겸손히 순종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겸손한 제자로서 십자가를 지고 구유에서부터 갈바리까지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한 형벌은 어떤 것일까!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어떤 이들은 중보에 대해서 좁은 견해를 갖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의 형벌 중에 적은 부분만을 위해 고통을 당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사랑하는 아들에 의해 감지되었을 때에 고통의 시간 동안에, 그분이 아버지의 사랑과 가납의 증거를 얻었다고 가정한다. 그분 앞에 있던 무덤의 입구가 밝은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앞날의 영광의 변함없는 증거를 갖고 있었다고 가정한다. 여기 큰 실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가장 고통스런 고뇌는 당신의 아버지의 불쾌히 여기심을 느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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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한 그분의 영적 고뇌는 너무 심한 것이어서 인간이 그것을 깨닫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구주의 자기 비하와 겸손과 희생의 역사는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역사보다도 더 깊은 흥미를 일깨우지도 못하며, 영혼을 감동시키고 삶에 영향을 더 끼치지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고문에 의해 서서히 죽어 갔으며, 다른 이들은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런 죽음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가장 잔인하게 돌아가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신체적 고통으로 말하면 그분을 위하여 똑같이 고통하였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의 고통은, 그분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준 사람들의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는가? 만일 그리스도의 고통이 신체적인 것에 국한되었다면 그분의 죽음은 다른 순교자들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고뇌 속에서는 신체적 고통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세상의 죄가 그분 위에 있었다. 그분이 위반된 법의 형벌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을 느끼셨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영혼을 압도한 것이었다. 절망을 준 것은 아버지의 얼굴이 감취어진 것 즉 당신의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그분을 버리셨다는 느낌이었다. 순결하신 갈바리의 사람이 고통을 당하실 때에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 놓은 그 아픔을 온전히 그리고 뼈저리게 느낄 수 있으셨다. 그분은 흑암의 세력에 의해 압박을 당하셨다. 미래를 비출 한 가닥의 희망의 빛도 없었다. 그리고 그분은 사단의 능력과 투쟁하고 계셨는데, 사단은 그분이 자기의 손아귀에 들어 있으며,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보다 더 강하며,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버리셨으며, 그분도 역시 자기와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은총을 벗어났다고 선포하였다.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었다면 왜 죽어야만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건져내실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혹심한 고뇌 속에서도 고문하는 원수에게 조금도 굴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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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천사들의 군대가 하나님의 아들을 둘러쌌다. 그러나 거룩한 천사들은 그 진을 뚫고 비웃고 조롱하는 원수들과 싸우지 않도록 명령을 받았다. 하늘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고뇌하는 영을 돕지 못하도록 금지당하였다. 바로 이 무서운 흑암의 시간에 아버지의 얼굴은 감취어지고, 악한 천사들의 군대가 그분을 휩싸고 있고, 세상의 죄가 그분 위에 있을 때에 그분의 입술로부터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순교자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겪은 고뇌와 비견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삶과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더 넓고 더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속죄를 바로 이해할 때에 영혼 구원의 무한한 가치를 느낄 것이다. 영생의 일과 비교할 때에 다른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랑의 구주의 권고는 얼마나 무시되었는가! 세상에 마음을 바쳐버리니, 이기적 관심이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문을 닫아버렸다. 위선과 교만, 이기심과 욕심, 시기, 악의, 욕망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가득 차서 그리스도께서 차지할 공간은 없다. 그분은 영원히 부하셨다.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사, 그분의 가난함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 그분은 빛과 영광으로 싸여 계셨으며,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하늘 천사들에 의해 둘려 계셨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본성을 입으시고 죄지어 죽을 인생들 가운데 사시려고 오셨다. 여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 있다. 이것은 지식을 초월한다. 경건의 비밀은 크다. 우리의 영혼은 인간에 대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주제에 의해 생기를 얻고, 고양되며, 매료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감사와 존귀와 영광과 권세가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라고 찬양하는 일에 모든 구원받은 무리와 함께 동참하기 위한 준비로써 그 신비한 사랑을 이 땅에서 어느 정도 명상하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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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장 — 교회에 주는 경고

_____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에 서있지 않다. 나는 지난봄 _____ 에서 영혼을 추수하는 일에 대해 지시를 받았는데, 그대들의 마음이 그 일을 위해 준비되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대들은 그 사업이 당시에 그대들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믿지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대들의 불신과는 상관 없이 그 사업은 진행되었으며, 그대들은 전혀 서로 협조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증거들을 보았는데, 자비의 음성이 죄인과 타락한 자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초청하는데, 그대들은 왜 그 일의 부담을 진 자들과 연합하려 하지 않았는가? 왜 그대들은 주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는가? 그대들 중에 어떤 이들은 무감각하고 둔하여지고 어리둥절한 것처럼 보이며, 그 사업에 전적으로 참여하려는 준비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그 일에 동조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을 붙이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 교회의 미지근한 상태를 잘 반영하는 증거였다. 그대들은 세속적인 정신으로 인해 문을 두드리며 들어오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을 위해 문을 활짝 열 마음이 없다. 그대들을 당신의 피로 구속하신 영광의 구주께서 문간에서 들어가기를 고대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대들은 문을 활짝 열어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문을 조금 열어 그분께로부터 빛이 약간 들어오게 하였으나 하늘의 방문자를 영접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을 모실 장소가 없었다. 그분을 위해 따로 두어야 할 곳은 이미 다른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예수께서 그대들에게 간청하셨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대는 문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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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동안 그대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싶은 생각이 났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떠나가고, 그대의 특권인 하늘의 방문자와 교통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문을 열고 정성껏 구주를 모셔들였다. 예수께서는 강제로 문을 열게 하지 않으신다. 그대들이 문을 열어야 하며 그분을 참으로 영접하여 그분을 고대하는 심정을 보여 드려야 한다. 모두가 세상의 쓰레기를 다 치워버리고 예수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면 그분은 들어오셔서 그대들과 함께 유하셨을 것이며, 그대들을 통하여 이웃을 구원하는 큰일을 성취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준비가 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업은 그대들 가운데서 큰 능력으로 시작되었다. 물러간 자들이 돌아왔고, 죄인들이 회개하였으며 그 소리가 근방 일대에 울려 퍼졌다. 그 마을이 동요하였다. 교회가 주님의 도움을 구하였더라면, 뒷수습 준비가 온전히 되었더라면 _____ 와 _____ 에서와 또 그 인근 지역에서 그동안 전혀 구경해 보지 못한 일이 이루어질 뻔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의 마음이 일깨움을 받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그 일에 너무 무관심하였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해 오던 어떤 이들에게는, 그 때가 영혼들의 구원이 달려 있는 심각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때에 그들의 마음을 자신 이외에 다른 곳에 빼앗기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짐을 지우셨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당분간 포기하려고 하였다. 그대들이 우리와 함께 가서 주께 도움을 구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그리하였다. 그러나 이 일에 완전히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냄에 있어서 배은 망덕한 태도가 그대들 가운데 있었다. 그대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의 표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대로 잘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영과 일하기 위해 뜻을 모았다면 그대들은 현재와 같은 상태에 머물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귀한 일이 그대들 가운데서 진행되는 동안 그대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으며, 영적으로 시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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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의 비유를 그대들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대들은 하늘의 교사가 의도하신 교훈을 배우지 못하였다. 그대들은 둔한 제자들이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읽어 보라.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낙심자들이 몇 명 있었다. 양 우리로부터 빠져나가서 흑암에 거한 자들이다. 특히 A 형제의 경우는 독특하다. 그가 떠나가기 전에 모든 지혜로 그 일을 방지하지 못하였다. 그가 떠난 후에도 그를 돌이키는 일에 부지런히 애쓰지 않았다. 그를 위해 슬퍼하기보다는 그에 관해 험담하는 일이 더 많았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그는 우리에게 가까이 올 수 없었으며, 그의 마음은 형제들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으며, 결국 그를 구원하는 일은 더욱 어렵게 되고 말았다. 비유에 나온 목자가 양을 찾으러 나간 일과 이 일은 얼마나 다른가? 아흔 아홉은 들판에 내버려 둔 채로, 위험에 노출된 채로, 양떼를 떠난 외로운 양은 더 큰 위험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그 한 마리를 구하려고 아흔 아홉은 내버려져 있었다. 그 교회의 어떤 형제들은 A 형제가 되돌아오는 일에 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위엄과 교만을 풀어 놓고 그를 빛 가운데로 돌아오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물러서서 근엄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를 찾아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오도록 하자.” 그의 형제들의 생각을 읽은 그로서는 이 일이 불가능하였다.

교회증언 2권 pp. 209-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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