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8 59-68 (420일)

등한히 한 사업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약탈당하고 상처를 입은 불쌍한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버림을 받아, 도움이 가장 필요한 그를 도와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배틀크릭에 있는 많은 사람들, 매우 많은 사람들을 대표한다.

만일 배틀크릭에서 일들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처럼 함부로 쓴 자금의 적은 부분만이라도 남부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다면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유산이 이상하게도 등한히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다. 새 지역들이 손도 안 댄 채로 버려져 있는 데도 축적된 특권들에 의하여 교만과 과시를 좋아하는 마음이 충족된다. 관리자들의 불공평과 하나님의 재산을 이기적으로 사용한 데 대하여 하나님의 책망이 그들에게 주어진다.

외방 선교에 무엇인가 이루어졌고, 국내 선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너무 많은 지역이 개척되지 않은 채로 버려졌다. 사업은 너무도 많이 중앙으로 집중되었다. 배틀크릭의 사업들은 비대하여져 있다. 이 사실은 일터의 다른 지역들이 마땅히 소유했어야 할 시설들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틀크릭에서 함께 요구해 왔고 또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주장해 온 건물들의 신축과 확장에 점점 더 많은 준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계획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밀접하게 연관된 많은 기관들을 가짐으로써 큰 유익이 있었다는 것과, 그들이 서로간에 힘이 되고 교육과 직업을 구하는 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주장들을 해 왔다. 이것은 인간의 이론에 의한 것이다. 인간적인 견해에서 볼 때, 배틀크릭에 그처럼 많은 책임들이 쇄도함으로써 많은 이점들이 주어진다는 사실이 인정될 것이다. 그러나 시야가 확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60-

사업의 중심지로 만들 필요가 있는 도시들에서 일을 시작하기 위하여 이 사업들은 많은 부분으로 갈라져야 한다. 이미 초과된 배틀크릭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하여 요긴한 영적 유익을 지금 빼앗기고 있은 많은 지역에 건물들이 세워지고 그런 곳에 책임들이 집중되어야 한다. 주께서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은 자들 편에서 취하는 이런 관리 때문에 영광을 받지 못하신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합 2:14; 요 17:3).

이방인의 구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문제라고 오랫동안 사료되어 왔다. 그러므로 그들의 어두운 영역으로 빛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국내의 선교 사업도 똑같이 필요하다. 이방인들이 바로 우리의 문에까지 와 있다. 우상숭배의 무지가 바로 우리 가정의 그늘 안에 있다. 유색인들을 위하여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을 이미 가지고 있고, 무수한 기회들을 가졌으면서도 자기들의 특권에 대하여 절반도 감사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받는 것에 비하면 유색인들의 특권은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제시해 주라. 그리하면 그것이 품성을 변화시키기 위해 누룩처럼 작용할 것이다.

우리는 남부 지역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죄스럽게 등한시한 그 지역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떤 계획이 실천되지 않을까를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가장 열렬히 고대해 왔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어떤 제안도 어떤 결정도 나는 보지 못하고 있다.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계획되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만일 그렇다면 주께 영광을 돌리는 바이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우리의 의무가 가장 결정적인 방법으로 수행되어 왔으면서도 남부 지역은 우리의 손끝도 대지 않았다. 지금 나는 이 등한시한 주님의 포도원의 부분을 그대들 앞에 다시 제시하면서 깊은 열망을 느끼는 바이다. 이 문제는 나에게 거듭거듭 제시되어 왔다. 나는 밤에 깨움을 받았고, 내가 네 앞에 펼쳐 준 것을 사람들이 듣던지 듣지 않던지 상관하지 말고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61-

우리 학교에서의 성령

쿠란봉, N.S.W.

1896년 5월 10일

나는 사업의 중심부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대들에게 여러 해 동안의 경험을 되돌아보고 그대들이 “잘하였다” 는 말을 진정으로 들을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나는 우리 학교의 교사들에게 다음의 질문들을 신중하고 경건하게 생각해 보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나는 모든 죄에서부터 심령이 정결해지고 완전히 성화되기 위하여 하나님과 협력하고 있는 자로서 내 자신의 심령을 개인적으로 살펴보았는가? 그대들은 젊은이들에게 진리로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를 교훈과 모본으로 가르칠 수 있는가?

그대들은 성령을 두려워한 적이 있는가? 때로는 이 성령께서 어디에나 편만한 감화력을 가지고 배틀크릭에 있는 학교와 다른 지역에 있는 학교들로 오셨다. 그대들은 그분의 임재를 깨달았는가? 그대들은 하늘의 사자에게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돌렸는가? 성령께서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입히고자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대들은 “하늘의 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 분명하니 모든 공부를 제쳐 두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립시다” 라고 말했는가? 그대들은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학생들과 함께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면서 주께서 그대들에게 제시하신 축복을 받고자 간구했는가?

위대하신 교사께서 친히 그대들 가운데 계셨다. 그대들은 그분께 영광을 돌렸는가? 그분께서는 교육자들 중 어떤 사람들에게는 낯선 분이셨던가? 하늘에서 온 이 사자를 환영하거나, 혹 쫓아 버리기 위해 적절한 권위를 가진 어떤 사람을 부르러 보낼 필요가 있었던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분께서는 그대들 가운데 임재해 계셨다. 그러나 마치 일반 공부에 바쳐진 시간들이 너무도 귀중하기 때문에 하늘 사자의 역사하심을 위하여 시간들이 주어질 수 없다는 듯이 학교에서는 공부에만 시간이 바쳐져야 하고,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식의 생각이 표현되지는 않았는가?

-62-

만일 그대들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성령을 제지했거나 물리쳤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회개하도록 간청하는 바이다. 만일 우리의 교사들 중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그 문을 닫아 버리고 자물쇠로 잠가 버렸다면, 나는 그들에게 열쇠로 문을 열고 열렬한 마음으로 “나와 함께 거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도록 호소하는 바이다. 성령께서 그분의 임재를 그대들의 교실에 드러내실 때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주께서는 우리의 일상적인 수준의 수업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하늘의 중요한 교훈을 오늘 우리를 위하여 갖고 계심을 알리신다. 우리가 그 교훈을 듣도록 하자.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해 그분께 간구하자.”

내가 이 하늘의 손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바를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성령께서는 학교 시간 동안에 젊은이들을 품고 계셨다. 그러나 어떤 마음들은 너무도 냉랭하고 어둡기 때문에 그들이 성령의 임재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늘의 빛은 거두어져 버렸다. 그 하늘의 방문자께서는 모든 이해력을 열어 주셨을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지혜와 모든 분야의 공부에 관한 지식을 주셨을 것이다. 주님의 사자는 죄를 깨닫게 하고 오랫동안 하나님과 멀어진 결과로 굳어진 마음들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오셨다.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젊은이들을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오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재산이다. 그러므로 교육자들은 교사가 되어 젊은이들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격을 갖추기 전에 “고등교육” 이 필요하다.

교사는 물리적인 우주에 관하여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도 있고, 또한 생물들의 구조, 기계 기술의 발명, 자연 과학의 발견 등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그는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다. 하늘의 근원에서 나온 원칙이 우리의 행동에 침투되고 우리를 하나님께 붙들어 매어야 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도 참된 과학의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꼴 지워지고 단장되고자 하는 자는 가장 고상한 하나님 작품의 견본이 된다. 우리의 창조주와 교통하면서 사는 모든 사람은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능들을 최선껏 사용할 책임을 그들에게 지우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지 않을 것이고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다.

-63-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분의 말씀에서 얻게 된다. 매일의 헌신과 봉사에서 얻는 참된 경건의 체험적 지식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최고의 계발을 보증한다. 우리의 모든 능력을 하나님께 바치는 이같은 헌신은 자고 (自高) 의 마음을 방지한다. 하나님의 능력의 부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게 축복이 되는 길로 우리의 최고의 능력들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줄 지혜를 얻기 위한 우리의 진실한 노력을 영광되게 한다. 이 능력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고 자아 중심적이 아닐 때, 그것들이 하나님의 사업에 사용되도록 그분께서 주신 재능임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

하늘이 위탁한 정신의 능력들은 보다 높은 능력으로 취급되고, 육체의 왕국을 지배해야 한다. 타고난 식욕과 정욕은 양심과 영적 능력의 지배 아래 놓여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결코 타락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을 결코 천하거나 거칠게 만들지 않고, 무례하거나 거만하게 만들지 않고, 성미가 급하거나 냉혹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취미를 세련되게 하고, 판단력을 거룩하게 하고, 생각들을 깨끗하고 고상하게 하여 그것들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게 해 준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그분의 이상은 가장 높은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있는 그 이상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통하여 당신의 품성의 사본을 주셨다.

-64-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지금껏 알려진 가장 위대한 교사이시다. 그러면 그분께서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 앞에 제시하시는 표준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역에서 완전하심과 같이 사람도 그의 영역에서 완전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이상은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이다. 끊임없는 향상의 길이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우리에게는 얻어야 할 목적, 도달해야 할 표준이 있는데, 그것은 선하고 순결하고 고상하고 고결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품성의 완성을 향해 계속적인 노력과 끊임없는 전진과 향상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3, 14).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그들의 거룩함이다. 위를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우리의 길을 재촉할 때, 모든 능력은 최선의 건강 상태로 유지되고, 충실한 봉사를 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능력들은 한계점에 이르기까지 발휘되어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눅 10:27). 사람은 스스로 이 일을 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간은 어떤 부분을 담당해야 하는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2, 13).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런 선한 일도 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도록 부르신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지 않으시면 그는 회개할 수조차 없다. 한편 주께서는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회개했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어떤 사람에게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끊임없이 이끌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끌려가겠다고 수락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은 참회로 녹아질 것이다.

-65-

사람은 영생을 위한 이 큰 싸움에서 한 몫을 할당받고 있다. 그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반응해야 한다. 흑암의 세력을 깨뜨려 버리는 데 투쟁이 요구될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 일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나태한 중에 구원받아야 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불멸을 위한 싸움에서 모든 근육을 힘껏 사용하고 모든 능력을 활용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부족을 채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도 나태한 중에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눅 13:24; 마 7:13, 14).

성령을 대항하여 활동함

나는 우리 학교에 있는 학생들에게 침착해지기를 간청하는 바이다. 젊은이들의 경솔한 언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 그들의 운동과 놀이는 유혹의 홍수가 들어오도록 문을 연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지적 능력 안에 하나님의 하늘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들의 생각이 값싸고 천박해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따라 형성된 품성은 확고한 원칙, 순결하고 고상한 포부를 나타낼 것이다.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의 능력과 협력할 때 고상하고 거룩한 충동이 분명한 결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교육자들의 맹목적인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것, 온갖 종류와 온갖 수준의 부도덕이 지배권을 쥐고자 싸우며,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을 막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신다. 가장 경박한 대화, 값싸고 왜곡된 사상들이 품성의 직물에 짜여진다.

-66-

천박하고 세속적인 쾌락을 위한 파티들,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기 위한 모임들은 땅에서 온 정신에 의하여 고무된다. 그것들은 사단에게 바치는 공물 (供物) 이다. 자전거 광의 전시는 하나님께 욕 돌리는 일이다. 그분의 분노가 그런 일을 하는 자들에 대하여 일어난다. 이런 욕망 충족에서 정신은 음주에서처럼 곤드레만드레 취하게 된다. 저속한 교제가 들어오도록 문이 열린다. 저급한 길로 뛰어들도록 허용된 사상들은 미구에 인간의 모든 능력을 왜곡시킨다. 고대의 이스라엘처럼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먹고 마시고, 놀기 위하여 일어난다. 환희와 주흥, 환락과 광희가 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젊은이들은 공부를 위하여 그들의 손에 놓여진 책들의 저자의 모본을 따른다. 그 가장 큰 해독은 결국 이것들이 품성에 끼치는 영구적인 효능에 있다.

이런 일에서 주도적인 자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오점을 하나님의 사업에 가져다준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그들의 평생을 통하여 그 흉터를 지니게 할 것이다. 그 악행자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범법자를 용서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기 위하여 언제나 예민하고 민감하게 보존되어 있어야 할 식별력은 대부분 파괴된다. 너무도 흔히 인간적인 고안과 상상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영혼들은 그들이 성령의 증거에 대하여 등을 돌리고 있으면서도, 값싸고, 저속하고, 심지어 불신적인 정서를 붙잡고자 맹목적이요 지각없이 행동할 것이다.

정의에서의 이탈

쿠란봉, N.S.W.

1898년 1월 12일

나는 주께서 자비롭게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고 계심을 기뻐한다. 그분께서 여러 번 오셨던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분의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역사하셨던 것을 생각할 때 나의 마음은 떨린다. 그러나 즉각적인 효력이 지나가고 나면 하나님의 자비로운 처사들은 잊어버린바 되었다. 교만, 영적 냉담 등이 하늘에 기록되었다. 풍성한 자비와 하나님의 은혜로 방문을 받았던 자들은 불신으로 그들의 구속주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

-67-

구주께서는 배틀크릭에서 자주 그대들을 방문하셨다. 구주께서는 낙심 중에 죽게 된 자들의 마음속에 영적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자 열망하면서 실지로 예루살렘의 거리를 걸어다니셨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오셨다. 그분의 임재와 그분의 용서와 그분의 치유의 선물로 그처럼 크게 축복을 받은 도시들이 그분을 거절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큰, 아니 보다 더 큰 짝사랑의 증거를 배틀크릭에서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은혜와 축복을 당신의 교회에 풍성하게 주시지 않았던가? 그분께서는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고자 용서와 의의 기별을 가진 당신의 종들을 보내지 않으셨던가?

예루살렘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빛 가운데서 걸어가기를 거절할 때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본이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진리를 맡은 자로서 하나님께 은총을 받았다. 그러나 그 백성은 진리를 왜곡시키고, 탄원과 경고들을 무시했다. 그들은 그분의 권면을 존중하지 않았다. 성전 뜰은 매매와 약탈로 더러워졌다. 이기심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 질투와 투쟁이 간직되어 있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영역에서 이득을 구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어찌 너희를 버릴 수 있겠는가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서 돌아서셨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 23:37).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못한 우리의 교회들을 보시고, 우리의 교육 기관들을 보시고 슬퍼하고 우신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과 똑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는 배틀크릭에 조사를 하기 위하여 오신다. 출판사는 신성을 더럽히는 전당 (殿堂) 으로, 부정한 매매와 거래의 장소로 변하였다. 그것은 불공평과 사기가 이루어지는 곳, 이기심과 악의와 질투와 정욕이 주도권을 잡은 곳이 되었다. 그러나 그릇된 원칙에서 이런 일을 하도록 이끌려 온 자들은 그들의 그릇된 행동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경고와 간청이 그들에게 주어지면 그들은 “그가 비유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다. 경고와 책망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취급되어 버렸다.

-68-

그리스도께서 감람산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셨을 때, 그분께서는 모든 교회 안에 이같은 상태가 존재하고 있은 것을 보셨다. 경고들은 그처럼 큰 빛을 받았던 예루살렘 백성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로 내려온다. 이 백성은 우리 앞에 하나의 경고로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의 경고를 거절함으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죄를 되풀이하고 있다. 주께서는 인간이 보지 못하고 볼 수도 없는 것 곧 배틀크릭에서 인간이 고안해 내고 있는 모든 것의 결과를 보신다.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다. 그분께서는 백성들의 죄가 회개를 느낄 수 없는 경계선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그들의 눈앞에 빛을 환하게 비추셨다. 그러나 공의롭고 의로운 원칙으로부터 떠나가는 긴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은 빛과 진리, 공의와 자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곳에 스스로를 두었다. 이 경로가 바로 그들의 본질의 부분이 되었다.

나는 원칙에 있어서 그릇된 행동의 길에 연합한 모든 자들에게, 결정적인 개혁을 이루고 그 후로는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호소하는 바이다. …

이것은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니고 진리이다. 나는 다시 묻는다. 그대들은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왕상 18:21).

교회증언 8권 pp. 59-68

Posted in

ad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