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5 739-748 (337일)

빌립이 예수님께 와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라고 요구하자, 구주께서는 그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8, 9) 고 대답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를 대표하는 자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스스로 주장하신다. 그분의 품성의 고귀함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통하여, 그분의 자비와 부드러운 동정을 통하여 그분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의 체현 (體現), 곧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 앞에 서신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후 5:19) 라고 말한다. 오직 우리가 위대한 구속의 계획을 명상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을 올바로 식별할 수 있다. 창조의 사업은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범죄하고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만은 무한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깊이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의 율법이 유지되고 그 공의가 옹호되면서도 죄인은 용서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하” (롬 3:26) 시고자 하늘 자체가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 주어졌다. 그 선물에 의하여 사람들은 죄의 파멸과 타락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바울은 “너희는 …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고 말한다.

형제들이여, 나는 사랑받은 요한처럼 그대들에게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요일 3:1) 라고 호소하는 바이다. 죄인이요 외인 (外人) 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사랑이며, 얼마나 무한한 사랑인가!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아버지” 라는 사랑스런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애정의 표시이며 우리에 대한 그분의 부드러운 관심과 관계의 보증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은혜의 후사들을 바라보시면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 (히 2:11) 신다. 그들은 타락한 적이 없는 천사들이 가진 것보다 더욱 거룩한 관계를 하나님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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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의 통로를 통하여 여러 세대를 거쳐 내려온 아버지의 모든 사랑, 사람들의 심령 속에 열려진 긍휼의 모든 샘들은 하나님의 무한하고 다함이 없는 사랑과 비교해 볼 때, 끝없는 대양에 대한 작은 실개천에 불과하다. 그것은 혀로도 말할 수 없고, 붓으로도 묘사할 수 없다. 그대는 매일의 생애에서 그것을 명상할 수 있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성경을 탐구할 수도 있다. 그대는 또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을 깨닫기 위하여 노력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모든 능력과 재능을 총 동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안 (彼岸) 에는 무한이 있다. 그대는 여러 해 동안에 걸쳐 그 사랑을 연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주셔서 세상을 위하여 돌아가게 하신 그분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결코 완전히 깨달을 수는 없다. 영원 자체도 그것을 결코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속의 계획을 명상할 때 우리는 이 위대한 주제들을 차츰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 바랐던 그 축복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지 못하게 하는 사물에 몰두되게 하는 것이 사단의 끊임없는 연구 과제이다. 그는 그들이 이해력을 어둡게 하고 심령을 낙담케 할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유혹하고 낙담케 하는 영향으로 둘러싸인 악과 타락의 세상에 처해 있다. 구주께서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2) 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주위에 있는 무서운 악, 도처에 있는 반역과 허약에 그들의 눈을 고정시킨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이 마침내 슬픔과 의심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이런 것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은 맨 먼저 대 기만자의 교묘한 역사를 마음으로 생각하며 그들의 경험에서 용기를 잃게 하는 것들을 숙고하는 한편 하늘 아버지의 능력과 그분의 비할데없는 사랑은 보지 않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사단이 의도하는 그대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능력을 그처럼 작게 생각하면서 의의 원수가 그처럼 큰 능력으로 옷입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강대 (强大) 하심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는 사단의 손아귀에서 우리 자신을 구출해 내기에 전혀 무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정해 놓으셨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께서는 그 싸움을 우리를 위하여 싸울 능력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 넉넉히 이” (롬 8:37) 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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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약함과 배교에 대하여 끊임없이 곰곰이 생각하고 사단의 능력을 한탄할 때 우리에게는 아무런 영적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 명시된 조건들과 일치되게 당신께 나오는 모든 사람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고 또한 구원하신다는 이 위대한 진리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하나의 산 원칙, 곧 우리를 위하여 행해진 희생 제사의 효력으로서 확립되어야 한다. 우리의 일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의 편에 두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속죄의 피를 통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보증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길을 이끄시는 곳으로 걸어간다. 그분은 사단이 우리의 길에 던지는 어두운 그림자를 제거해 버릴 능력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흑암과 낙담 대신에 그분의 영광의 햇빛이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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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 우리의 의라는 사실을 앎으로써 끊임없이 강해져야 한다. 사단의 흑암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우리는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빛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세상에 비취게 하고, 그분께서는 사단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시고 지탱해 주는 그분의 팔이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붙들어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해야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요 16:27) 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고정된다면, 그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 들어 가셨” (히 6:19, 20) 음을 입증할 것이다. 실망이 다가올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환난을 기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크고 작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위탁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갖가지 불만의 요인 때문에 난처해 지지 않으시고 우리의 무거운 짐 때문에 압도당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보호는 각 가정에 미치고 각개인을 둘러싼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사업과 우리의 슬픔에 관심을 가지신다. 그분은 모든 눈물을 주시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에 공감하신다. 지상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통과 시련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목적을 성취시켜서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히 12:10) 하시고 그분의 임재에서 발견되는 완전한 기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자 허락된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4). 그러나 성경은 가장 강한 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것이 중요함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베드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벧후 1:2, 3) 고 말한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욥 22:21) 고 명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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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벧전 1:16) 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영감받은 사도는 또한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고 주장한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고 거의 지워졌다. 잃어버린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복음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에 협력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지 못하고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그분의 형상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것이 이 지식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고상한 품성과 직분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빈약한 견해들은 그들의 신앙 경험을 편협하게 했고 거룩한 생애에서의 그들의 전진을 크게 훼손시켰다. 한 백성으로서의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개인적 신앙은 부진한 상태이다. 많은 형식과, 많은 기계적인 것과, 많은 입술만의 신앙이 있다. 그러나 더욱 깊고 더욱 확고한 것이 우리의 신앙 경험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모든 시설들, 우리의 출판소들, 우리의 학교들, 우리의 병원들, 그 밖의 다른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우리는 현재의 위치에서 훨씬 더 앞서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고 생애와 품성을 통하여 복되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사업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신것은 우리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빛과, 사람들의 마음에 접근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특권들에 비교해 보면, 우리 사업의 결과는 너무도 적은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신 진리가 지금껏 계시되었던 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계획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우울과 슬픔으로 채워져 있고, 우리 주변에 있는 흑암과 악을 생각하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낼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간증이 영혼들을 구원하는 능력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그대로의,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의 능력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부지런하고 경건하게 성경을 살펴야 하고, 우리의 이해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되어야 하고, 우리의 마음은 믿음과 소망과 끊임없는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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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그분의 의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 품성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우리의 매일 매시간의 일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2) 는 사도의 말씀에 밝혀져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더욱 밝아지고 우리의 믿음은 더욱 강해지고 우리의 소망은 더욱 확고해진다. 우리는 그분의 순결과 사랑,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고자 그분께서 치르신 희생 등에 관한 생각에 너무도 몰두되어 있기 때문에 의심과 낙담에 관하여 이야기할 의향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은혜와 자비의 현현,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고 새롭게 하기 위한 성령의 역사 등이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너무도 가까이 연결시켜 그분의 품성을 분명히 깨닫게 해줌으로 우리는 사단의 교묘한 기만을 식별할 수 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공로에 의지함으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빛과 평안과 기쁨의 축복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위대한 일들을 바라볼때, 우리는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요일 3:1) 라고 부르짖게 된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바라봄으로써 변화하게 된다. 하나님과 우리 구주의 사랑을 깊이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의 완전함을 명상함으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함으로 우리는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불쾌한 그림들 — 범죄와 타락과 실망, 사단의 세력에 대한 증거들 — 을 함께 모아서 우리의 기억의 방에 걸어 두고 그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탄식하기를 마침내 우리의 심령이 실망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해서는 안 된다. 낙담한 영혼은 흑암의 사람이며, 그 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빛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빛이 비취지 못하도록 막아 버린다. 사단은 그의 승리의 그림들의 효과를 보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을 믿음 없고 낙담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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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더 밝고 유쾌한 그림들이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자. 복스러운 그분의 사랑의 그림들을 귀중한 보배처럼 함께 모아서 그것들을 끊임없이 바라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아들은, 인류를 사단의 세력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아버지의 보좌를 떠나 그분의 신성을 인성으로 옷 입히셨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승리는 인류에게 하늘을 열어 주고, 사람의 시야에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임재의 방을 계시해 준다. 타락한 인류는 죄가 그들을 빠뜨린 멸망의 함정에서 구출을 받고, 우리 구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시험을 견뎌 왔으며, 무한하신 하나님과 다시 연결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고 그분의 보좌에 이르기까지 높임을 받았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영혼의 방들을 유쾌하게 꾸미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그림들이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우리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고후 4:17) 하는 사실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하나님은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 거기에는 거룩함이 최고의 위치에 놓이며, 하나님과의 완전한 조화를 깨뜨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그 곳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하늘의 정신은 이 곳에서 우리의 마음에 거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금 하늘의 사물들을 명상하는 데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지식을 탐구하는 데 흥미가 없고 그리스도의 품성을 바라보는 데 기쁨이 없다면, 그리고 거룩함이 우리에게 아무런 매력을 주지 못한다면, 하늘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헛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되는 것은 그리스도인 앞에 끊임없이 제시되어야 할 높은 목표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복되고 정 (淨) 한 본향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이 주제들에 대한 명상, 복스러운 하나님의 약속들을 맛볼 때, 사도는 “내세의 능력” (히 6:5) 을 맛보는 것으로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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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우리 앞에는, 사단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살후 2:9, 10)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막 13:22) 하는 대쟁투의 마지막 싸움이 놓여 있다. 만일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증가되는 빛이 필요한 한 백성이 지금껏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율법의 보관자가 되고 당신의 품성을 세상 앞에서 옹호하도록 부르신 백성이다. 그처럼 거룩한 위탁을 받은 자들은 그들이 믿노라고 공언하는 진리들을 통하여 신령해지고, 고귀해지고, 생기로워져야 한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골 1:9, 10) 하신다는 말로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묘사된 경험이 교회에 이보다 절실히 필요한 적이 없고, 교회가 누리도록 하나님이 이보다 더 간절히 열망한 적도 없었다.

90 장 — 말씀이 육신이 됨

신성과 인성의 연합은 가장 귀중하고 가장 오묘한 구속의 계획에 속한 진리들 중 하나이다. 바울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딤전 3:16) 라고 말한 것은 이것에 관한 것이다.

이 진리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과 불신의 원인이 되어 왔다.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못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친히 인성을 취하셔서 타락한 인류와 접촉하고 그들을 건져낼 수 있게 되셨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죄로 어두워지고 그들의 정신 기능은 마비되고 그들의 지각은 둔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인성을 옷입은 그분의 신적인 특성을 분별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는 이같은 이해의 부족은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성취하시고자 열망하신 사업에 장애가 되었다. 그러므로 당신의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분은 자주 당신의 위치를 규명하고 옹호할 필요가 있었다. 당신의 오묘하고 신적인 특성을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은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진리의 능력에 적응되게하는 일련의 생각 속으로 이끌고자 하셨다. 다시 그분은 거룩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천연계의 사물들을 사용하셨다. 마음의 흙은 이리하여 좋은 씨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그분은 당신의 청중들로 하여금 그분의 관심이 그들의 관심과 동일하고 그분의 심장이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있어서 그들을 동정함으로 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셨다.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가장 존귀한 랍비들이 소유한 것보다 훨씬 우월한 능력과 탁월함이 그분 안에 나타나 있음을 보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단순과 위엄과 능력으로 특징지워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의식 중에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요 7:46) 라고 부르짖었다. 백성들은 그분의 말을 즐거이 들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랍비들 — 진리의 수호자로서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에 불성실한 그들 자신 — 은 무리들을 그들에게서 떠나 생명의 빛되신 분에게로 이끌은, 계시된 바로 그 은혜 때문에 그리스도를 미워했다. 그들의 성향 때문에 유대 민족은 그분의 신적인 특성을 분별하지 못하고 구속주를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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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신성과 인성의 연합은 성경에도 존재한다. 계시된 진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 (딤후 3:16) 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들의 언어로 표현되고 인간의 필요에 적절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 (요 1:14) 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불리워지신 것처럼 하나님의 책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성경을 대적하는 하나의 논지 (論旨) 가 되기는 커녕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을 굳게 해 주어야 한다. 성경의 어떤 부분들은 신적 (神的) 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성경의 영감을 주장하지만 반면에 다른 부분들은 인간적인 것이라 해서 거절하는 자들은 신성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접촉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인간의 구속 (救贖) 을 위한 하나님의 사업에는 신성과 인성이 결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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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론적 비평가들이 비영감이라고 주장해 온 많은 성경절들이 있지만, 인간의 필요에 가장 적절하다는 점에 있어서 그것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녀들에게 보내는 그분 자신의 기별이다. 이것에 대한 하나의 아름다운 예증이 사도 베드로의 역사에 나타난다. 베드로는 투옥되어 이튿날 죽임을 당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밤에 그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 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행 12:6, 7). 갑자기 잠을 깬 베드로는 그의 감방에 충만한 밝은 빛과 하늘 사자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에 놀랐다. 그는 그 장면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알았다. 당황함과 기쁨으로 그는 차가운 밤 공기로부터 보호받음 없이 감옥에서 나갔을 것이다.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하나님의 천사는 그 사도의 필요에 대한 적절한 관심을 나타냈다.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행 12:8). 베드로는 기계적으로 순종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의 계시에 너무 황홀해졌기 때문에 자기의 겉옷을 입을 생각을 못했다. 그러자 천사는 그에게 명령했다.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 갈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행 12:8-10). 사도는 그가 예루살렘의 거리에 홀로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 하나의 꿈이나 환상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행 12:11).

교회증언 5권 pp. 739-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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