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연합과 사랑을 보존하도록 권고한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1-6).
사도는 그의 형제들에게, 그가 그들에게 제시한 진리의 능력을 그들의 생애에 나타내도록 권면한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품성과 그분의 구원의 축복을 수범해야 할 것이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요,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뿐이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동일한 정신과 동일한 소망으로 활기를 얻는다. 교회 안에서의 분열은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욕을 돌리고 진리의 원수들에게 그들의 길을 정당화시킬 기회를 준다. 바울의 교훈은 그 당시의 교회만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훈이 우리에게도 전달되도록 계획하셨다.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연합을 보존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성령이 초대 교회에 내렸을 때 형제들은 서로 사랑하였다.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6, 47). 그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수가 적었고, 재산도 명예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세상의 빛은 그들에게서 비쳐 나왔다. 그들의 품성과 그들의 교리가 알려진 곳은 어디에서나 그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의 공포가 되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악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죽기까지 핍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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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의 표준은 사도들의 시대에서처럼 오늘날도 동일하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요구는 그 힘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상태는 초대 교회와 비교해 볼 때 어떠한가? 그 당시의 복음 전파에 따랐던 하나님의 영과 능력은 어디에 있는가?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 (애 4:1) 는가.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하나의 포도나무로 비옥한 땅에 심으셨다. 그분께서는 의의 열매가 맺도록 지극한 관심으로 거름을 주고 그것을 키우셨다. 그분은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사 5:4) 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으신 이 포도나무는 땅으로 기울어져서 덩굴손으로 인간의 지주들을 감았다. 그 가지들은 멀리 넓게 뻗어 가지만 그것은 변질된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는다. 포도원의 주인은,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사 5:4) 하며 부르짖는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큰 축복을 주셨다. 공의는 교회가 이 재물들을 이자와 함께 돌려주기를 요구한다. 교회에게 지키도록 맏겨진 진리의 보화가 증가됨에 따라 그의 책임도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 선물들을 이용하고 완전을 향하여 나가는 대신에 교회는 초기의 경험에서 성취했었던 것에서 떠나가 버렸다. 교회의 영적 상태에 나타난 변화는 점진적이며 거의 깨달을 수 없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교회가 세상의 칭찬과 호의를 구하기 시작하자 그의 믿음은 줄어들고, 그의 열성은 약화되고 그의 열렬한 헌신은 죽은 형식으로 대치되었다. 세상을 향하여 가는 매 발걸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가는 발걸음이었다. 교만과 세속적 야망을 품음에 따라 그리스도의 정신은 떠나가고, 경쟁 의식과 불화와 다툼이 들어와서 교회를 괴롭히고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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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한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3). 시기와 다툼으로 혼란해진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영적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 우리는 말씀을 주신 그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 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르게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다.
교회의 영적 유익을 돌보도록 임명받은 자들은 올바른 본을 보이기 위하여 주의해야 하고, 시기와 질투와 의심의 기회를 주지 말고 언제나 그들이 형제들에게 권유하기를 바라는 사랑과 존경과 예절의 바로 그 정신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에 부지런히 유의해야 한다. 증오나 불친절에 대한 온갖 표현은 제지되어야 하고, 원한의 온갖 뿌리는 제거되어야 한다. 형제들 사이에 어려움이 생길 때는 구주께서 세우신 법칙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 화목을 이루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파당들이 분열 상태를 완고하게 고집할 경우에는 그들이 화합할 때까지 (교인) 자격을 정지시켜야 한다.
교회 안에 시련들이 생길 때 모든 교인들은 그런 어려움의 원인이 내부에 있지 않은지 보기 위하여 각자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영적 교만, 지시하고자 하는 욕망, 명예나 지위를 위한 야망적 갈망, 자제의 부족 등에 의하여, 정욕의 방종과 편견에 의하여, 불안정과 판단의 부족에 의하여 교회가 혼란해지고 평화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어려움은 때때로 험담의 행상인들에 의하여 일어난다. 그들의 속삭이는 암시나 시사는 의심하지 않는 마음에 해독을 끼치고 가장 절친한 친구들을 이간시킨다. 이간질하는 사람들의 악한 사업은, 열린 귀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소문을 전해 달라, … 우리도 소문을 퍼뜨리겠다” 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다. 이 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사이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가정에서 험담이 되풀이되도록 용납해서도 안 되고, 교인들을 비방하는 말을 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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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시기와 다툼의 정신을 억제하는 것을 일종의 신앙적 의무로 여겨야 한다. 그들은 형제들의 우월한 명성이나 번영을 기뻐하되, 심지어 그들 자신의 품성이나 업적이 그 그늘에 가리워지는 것처럼 보일 때도 그러해야 한다. 하늘에서 사단이 추방된 것은 그의 마음 속에 간직된 교만과 야망 때문이었다. 이 악들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제거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훌륭하고 고상한 특성을 모두 가리워 버리고 그 해로운 열매로서 시기와 투쟁을 맺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위대함보다는 참된 선을 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에 대하여 겸손한 견해를 가질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순결과 번영을 위하여 노력할 것이며, 형제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유익과 욕망을 희생하고자 할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불신과 이간과 악의를 일으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권리가 침해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시험을 받을 것인바, 사실상 그런 감정을 가질 참된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것이다. 자아에 대한 사랑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업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유익을 첫째 자리에 놓고 그것을 수호하고 지탱하기 위하여 거의 모든 수단을 다 쓸 것이다. 형제들에게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되면 그들은 구주의 법칙을 따르는 대신에 법정을 찾아가기도 할 것이다.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던 많은 사람들도 교만과 자존심 때문에 그들이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 문제를 놓고 이야기하고 서로 기도하지 않는다. 형제들 간의 언쟁과 싸움과 소송은 진리의 사업에 수치가 된다.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은 교회를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악의 세력이 승리하게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상처를 다시 찌르고 그분을 공공연하게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를 무시함으로써 그들은 교회에 권위를 부여하신 하나님을 모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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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편지한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실망할까 조심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2-16).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반대되는 교리들을 갈라디아인들에게 제시했다. 바울은 그 오류들은 폭로시키고 교정해 주고자 노력했다. 바울은 그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서 분리되기를 매우 열망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이 많은 신자들에게 너무도 크게 미쳤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조치를 취하기가 위험한 것처럼 보였다. 교회의 영적 유익에 해가 될 쟁투와 분열이 생길 위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사랑 안에서 피차간에 도와주기 위하여 애쓰는 일의 중요성을 알려 주고자 노력했다. 그는 우리의 동료들에 대한 의무를 밝혀 주는 율법의 모든 요구가 피차에 사랑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그들에게, 만일 그들이 증오와 쟁투에 몰두하고, 당파들을 짓고, 짐승들처럼 서로 물고 먹으면, 현실의 불행과 미래의 파멸을 스스로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무서운 악을 방어할 수 있는 한 길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가 명령한 바와 같이 “성령을 좇아 행하” 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을 사랑과 연합으로 이끌어 줄 성령의 지도를 끊임없는 기도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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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 다. 그리스도인들이 다툴 때, 사단이 지배하기 위하여 들어온다. 그는 너무도 자주 교회의 평안과 조화를 깨뜨리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얼마나 무서운 쟁투, 얼마나 쓰라린 일, 얼마나 증오스런 일이 매우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되었던가! 불화와 다툼 때문에 어떠한 희망들이 깨어져 버리고,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산산조각이 났던가!
바울은 형제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결점들을 고쳐 주고자 노력하다가 그들 스스로가 똑같이 큰 죄를 범할까 조심하라고 명령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증오와 다툼과 분노와 쟁투와 선동과 이단과 시기는 호색과 간음과 술취함과 살인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육체의 일이므로 그런 죄를 짓는 자들에 대하여 분명히 하늘의 문이 닫힐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막 9:42) 고 주장하신다. 누구든지 고의적인 기만이나 그릇된 모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그릇되게 인도하면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를 비방이나 조소의 대상이 되게 하면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구주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주목하신다.
옛 시대에 형벌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에게 거룩한 것으로 택하신 것을 얼마나 가볍게 여겼는가? 벨사살과 그 귀인 일천명은 여호와의 금 기명을 모독하고 바벨론의 우상들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들이 무시한 하나님께서는 그 부정한 장면을 목격하셨다. 그들의 신성모독의 환락 중에 핏기 없는 한 손이 나타나서 궁전의 벽에 이상한 글을 쓰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왕과 궁중의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 선고한 그들의 운명을 들었다.
그리스도의 종들에 대하여 중상과 거짓의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목격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비방적인 언사는 영혼 없는 기물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피로 사신 자들의 품성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벨사살의 궁전의 벽에 글자를 쓴 그 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평하게 하고 압제한 모든 행동에 대하여 성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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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역사는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들 중 가장 연약한 자들을 방심하지 않고 보호해 주심에 대하여 두드러진 예증들을 제시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행하고 있는 동안 백성들의 본 대열 뒤에 쳐진 피곤하고 연약한 자들은 비겁하고 잔인한 아말렉의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전쟁을 하여 이겼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출 17:14). 후손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모세는 죽기 직전에 그 명령을 다시 반복하였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신 25:17-19).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이방 민족의 잔인함을 벌하셨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면서도 당신의 사업에서 지치고 피곤해진 그들 자신의 형제들에게 싸움을 거는 자들을 어떻게 여기실까? 사단은 그의 지배에 굴복하는 자들에게 큰 능력을 발휘한다. 재판정에서 갈바리까지 살기 등등한 군중을 충동한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곧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 사이에는 우리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외친 것과 동일한 정신으로 고무된 마음들이 있다. 악의 일꾼들은, 그들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한 증인, 곧 거룩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께서는 모든 은밀한 일과 함께 그들의 모든 행동을 심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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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롬 15:1-3). 그리스도께서 연약하고 죄 많은 상태에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동정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의심으로 당혹해 하고 있고,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고, 믿음이 약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들이 볼 수 있는 어떤 친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와서 그들의 요동하는 믿음을 하나님께 고정시켜 주는 연결의 사슬이 되어 줄 수 있다. 아, 이것은 참으로 복된 사업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과 친절하고 부드러운 정신으로 하면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교만과 이기심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라.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 6:1, 2). 여기에 다시 우리의 의무가 우리 앞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영감으로 주어진 이 명령을 어떻게 그처럼 경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나는 근래에 분별 없는 태도를 나타낸 한 형제의 경우를 묘사하는 편지를 받았다. 비록 그것은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고, 두 번 다시 생각할 가치가 거의 없는 매우 사소한 문제였지만, 그 편지를 쓴 여성은, 그것이 그 형제에 대한 그의 신임을 영원히 파괴해 버렸다고 말했다. 만일 그 자매의 생애를 살펴볼 때 더 큰 잘못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정말 놀라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큰 죄를 범해 왔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보시는 것처럼 그것들을 보지 못하는 자들을 형제들과 자매들로서 나는 지금껏 교제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주님께서 이 사람들에 대하여 참고 계시는데 어찌하여 내가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 죄가 바울에게 심히 죄악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그렇게 보이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조금밖에 모르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도 별로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가 피차간에 나타내야 할 그 귀중한 동정을 그처럼 조금밖에 간직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이 연약하고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실수하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형제가 방심한 결과 유혹에 넘어져 그의 평소의 처신과는 달리 어떤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럴 때 그에게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위대하고 선한 사업을 이루어 오신 사람들이 중한 죄를 지은 것을 성경에서 알게 된다.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견책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신 적도 없고, 그분께서 당신의 종들을 버리지도 않으셨다. 그들이 회개했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을 자비롭게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시고,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셨다. 가련하고 연약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그들의 형제들로부터 받아야 할 동정과 인내의 필요가 얼마나 절실한지 생각해 보도록 하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는지 조심하도록 하라. 우리는 사도의 교훈에 유의해야 한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 6:1). 우리도 유혹에 넘어지고 우리가 범죄한 자에게 나타내도록 요구받고 있는 그 모든 인내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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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는 자립적이요 자신감이 강한 자들에게 덧붙여 주의를 환기시킨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갈 6:3-5). 판단과 경험에 있어서 형제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권면과 권고를 멸시하는 자는 위험한 기만에 빠져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마음은 거짓된 것이다. 그는 자기의 품성과 생애를 성경의 표준에 의거하여 시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애의 길에 그릇됨이 없는 빛을 비춘다. 마음을 분리시키고 빗나가게 하고자 일어나는 많은 영향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정직하게 찾는 자들은 바른길로 인도될 것이다. 각 사람은 그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파의 의견에 의해서가 아니고, 또한 어떤 사람의 판단에 의해서도 아니고 하나님 눈앞에서의 그의 진정한 품성에 의하여 마침내 스스로 서거나 넘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경고하고, 권면하고, 권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어떤 사람에게 바른길을 택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일을 고집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짐을 지고 스스로 하나님께 대답하고, 그 자신의 길의 결과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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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그것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가 교회에서 연합과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분명하고 명백한 교훈을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셨다. 형제 자매들이여, 그대들은 이 영감의 명령에 유의하고 있는가? 그대들은 성경을 읽는 자들이며 그 말씀을 실천하는 자들인가? 그대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신 그분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는가?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5, 6).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고후 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