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요구할 권리가 조금도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 즐겨 우리의 구속을 담당하신 것은 얼마나 뛰어난 사랑이며 겸손인가! 그러나 우리의 크신 의원께서는 모든 영혼에게 주저하지 않는 순종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황에 대한 처방을 스스로 내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의지와 행동을 완전히 지배하셔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상태와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업의 성격과 방법에는 모든 세상의 원칙과 반대되고 인간의 마음의 교만과 상치되는 것이 많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그분의 손에 완전히 맡기고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신뢰하도록 요구하신다.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우리의 도덕적 품성이 올바랐으므로 보통 죄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낮출 필요가 없다고 뽐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들의 괴수와 똑같은 방법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도록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힘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완전히 의지해야 한다. 자아는 죽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에서 온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이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시 115:1).
진정한 믿음에 사랑이 뒤따르고 사랑에 순종이 뒤따른다. 회개한 사람의 모든 힘과 정욕은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분의 영은 새롭게하는 능력이므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꾸어준다. 이 경험은 진리를 믿노라고 고백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하고 있다는 말을 하게 되어 나는 슬퍼진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죄악적 욕망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공언한다. 그들은 마음을 하나님께 결코 굴복시키지 않았다.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그들은 등과 함께 은혜의 기름을 그릇에 담는 일을 등한히 했다.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믿노라고 공언하고 심지어 진리를 가르치노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죄의 속박에 매여 있다고 말하는 바이다. 저열한 정욕은 마음을 더럽히고 심령을 부패케 한다. 가장 비열한 죄악 가운데 있는 어떤 사람들은 사단을 더욱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하여 하늘의 제복을 빌려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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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요일 3:9).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 되고, 하나님의 소유인 몸과 정신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가장 엄숙한 서약에 매여 있음을 느낀다. 죄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의 속에서 정복된다. 그는 날마다 이렇게 물어 본다. “여호와여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 116:12). “주여, 나로 무엇을 하게 하시려나이까?”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멍에가 목을 괴롭히고 있다고 결코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 가장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에게 기쁨이 된다. 그는 자신의 부족에 맞추고자 하나님의 명령을 낮은 표준으로 내리고자 하는 대신에 그 명령을 이루는 수준을 높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날에 서기 위하여 준비하고자 하면 그와 같은 경험은 우리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이제 은혜의 시기가 지체되고 있는 동안, 자비의 음성이 아직 들리고 있는 동안은 우리가 죄를 버릴 수 있는 시간이다. 도덕적 흑암이 장례의 휘장처럼 땅을 덮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깃발을 든 자들의 빛은 더욱 밝게 비추고 하늘의 빛과 사단 흑암과를 구분해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은혜 안에 완전히 설 수 있는 충분한 준비를 해주심으로 아무것도 부족이 없이 우리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해주셨다. 그대들은 준비하고 있는가? 그대들은 혼인 예복을 입고 있는가? 그 의복은 속임과 불순과 타락과 위선을 결코 가리워 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눈은 그대들을 주시하고 있다. 그것은 사상과 마음의 의도를 알아낸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람들의 눈에서는 숨길 수 있을지라도, 우리의 창조주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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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죽음에 내어 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리셨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은혜의 보좌 앞에 아뢸 수 있다. 우리는 무가치하지만 그분을 통하여 모든 영적 축복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분께 나오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있는가?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 듣고 알 것이 아니고, 읽고 알 것이 아니고, 믿고 알 것이 아니라, —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 34:8) 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하는 대신에 그대들 스스로 맛을 보라.
경험은 실험으로 얻은 지식이다. 체험적 신앙이 오늘날 필요하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어떤 사람들 — 사실상 많은 수의 사람들 — 은 신앙적 진리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새롭게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의 마음에 결코 느껴본 적이 없다. 이 사람들은 성령에 의하여 기록된 경고와 책망과 교훈의 증언들에 유의하는 일에 언제나 느리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믿지만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아무런 열렬한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늘을 믿지만 그것을 얻기 위하여 희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혼의 가치를 믿으며 오래지 않아 그 구속은 영원히 끝나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기회들을 등한히 한다.
그들은 성경을 읽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위협적인 경고가 경성하게하지 않고 그 약속이 그들과 함께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탁월한 일들을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지 말도록 금지하신 길을 따른다. 그들은 피난처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옳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즐기지 않는다. 그들의 모든 지식은 그들의 정죄를 가중시킬 뿐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선하시다는 사실을 결코 맛보지 않았고 경험을 통하여 배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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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평판이 좋든 나쁘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오늘날 이렇게 하고 있는 자는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은 거짓되이 예언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결과적으로 무엇이 이루어질 것인가? 그들의 일이 그 모든 결과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검토될 때 어떤 결정이 내릴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의 싸움이다. 사도 바울은 그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정사와 권세를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시 그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 (히 12:4)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렇다. 오늘날은 죄를 간직하고 변명한다. 예리한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을 쪼개지 않는다. 신앙이 바뀌었는가? 하나님께 대한 사단의 적의는 감소되었는가? 신앙 생애는 한때 어려움을 가져다 주고 극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것이 매우 쉬워졌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흑암의 세력과 타협해 왔다.
엄격한 증언이 되살아나야 한다. 하늘로 향해 가는 길은 우리 구주의 시대보다 오늘날 더 순탄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버려져야 한다. 우리의 신앙 생애를 방해하는 모든 방종은 끊어 버림을 당해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된다면 오른눈이나 오른손도 희생되어야 한다. 우리는 즐겨 우리 자신의 지혜를 버리고 어린 아이처럼 하늘나라를 받아들이고자 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택한 세속적인 친구들을 즐겨 버리고자 하는가?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을 즐겨 희생하고자 하는가? 영생의 상급은 무한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얻어야 할 목적의 가치에 상응한 노력을 하고 희생을 할 것인가?
우리가 이루는 교제는, 아무리 제한된 것일지라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준다. 우리가 그 영향을 받는 범위는 친밀의 정도, 교재의 항구성 (恒久性), 우리가 교제하는 자에 대한 사랑과 존경 등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친숙과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흠없는 모본되신 그분과 같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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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 — 얼마나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일인가! 만일 우리가 그런 교제를 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어떤 희생도 불사할 것 같으면 그 교제를 누리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다. 초기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들은 그분을 찾고, 발견하고 따랐다. 그들은 집에서, 식탁에서, 골방에서, 들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교사와 함께 있는 학생들처럼 그분과 함께 있었고, 날마다 그분의 입술에서 거룩한 진리의 교훈을 받았다. 그들은 마치 종들이 그들의 의무를 깨닫기 위하여 주인을 쳐다보듯이 그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섬겼다. 그들은 훌륭한 병사들이 그들의 사령관을 따르듯이 그분을 따르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다. 그들은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 (계 17:14) 이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 2:6).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같아지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목과 논평의 주제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 큰 변화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품성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더욱 밀접히 닮으면 닮을수록 그 자신에 대한 견해가 더욱 겸손해 질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목격되고 느껴질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일에 가장 깊은 체험을 가진 자들은 교만과 자고심에서 가장 멀리 옮겨져 있다. 그들은 자아에 대해서는 가장 겸손한 생각을 갖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탁월함에 관하여서는 가장 고상한 관념을 가진다. 그들은 그분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가장 낮은 자리가 그들에게는 너무도 명예스로운 자리임을 느낀다.
모세는 광채로 빛나는 그의 얼굴이 그 자신처럼 하나님과 교통하지 않은 자들에게 고통과 위협이 된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생애에 나타난 그 자신의 향상에 대하여 매우 겸비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빌 3:12) 고 말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께 크게 영광을 받았다. 그는 거룩한 이상 (異像) 가운데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가서, 알려 주도록 허락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그 곳에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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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 요한은 우리 구주께로부터 선지자들 중 가장 크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이 사람의 말과 십자가의 종들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의 말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침례 요한이 그리스도이냐는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주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주장한다. 그의 제자들이 사람들의 주의가 새 선생에게로 향해졌다는 불평을 했을 때, 요한은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 다만 약속하신 분의 선구자에 불과한 것으로 주장해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신랑처럼 그분의 백성의 애정의 첫째 자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요 3:29-31, 33).
오늘날 하나님의 사업에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일꾼들이다. 자부심이 강하고, 질투심과 시기심이 많고, 비평적이고 흠을 찾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그분의 거룩한 사업에 사용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어떤 선한 일을 성취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은 목회직에 용납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나 재물이 없어서 괴로움을 겪지는 않으신다. 그분은 진실하고 성실하며, 순결하고 거룩한 일꾼들,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피와 거룩하게 하는 그분의 영의 은혜가 필요함을 느끼는 자들을 부르신다.
나의 형제들이여, 하나님은 그대들의 질투와 시기, 그대들의 가혹함과 분쟁 때문에 슬퍼하신다. 이 모든 일을 통하여 그대들은 사단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께는 순종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원칙에 확고하고, 의무에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사업에 열성이 있으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겸손하고 겸비하며, 온유하고 부드럽고 인내하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영혼들에게 사랑을 나타내고 즐겨 용서해 주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또한 그분에게서 배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한다. 사람들이 그것과 반대의 기질을 나타낼 때, 그들이 교만하고, 허왕되고, 경솔하고, 세속적인 마음을 나타내고, 탐욕적이고, 불친절하고, 비판적일 때, 우리는 그들이 누구와 교제하고 있으며,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를 들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마법을 믿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령과 교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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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하는 바이다.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4-18).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례 요한에게 몰려왔을 때, 그 담대한 의의 전도자는 그들에게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 3:7, 8). 이 사람들은 합당치 못한 동기로 요한에게 나왔다. 그들은 유해한 원칙을 품고 타락한 행동을 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참 상태를 깨닫지 못하였다. 교만과 야심으로 충만해진 그들은 그들 자신을 높이고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향을 강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어떤 수단도 서슴치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이런 계획을 더 잘 실천하기 위하여 요한의 손에 침례를 받고자 나왔다.
요한은 그들의 동기를 읽었으므로 엄격한 질문으로 그들을 대했다.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만일 그들이 그들의 마음에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 같으면, 그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열매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그 경고를 사람의 음성으로 들었다. 그들은 요한이 말하는 능력과 담대함에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그들의 마음에 확신을 주지 않았으므로 필연적 결과로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들은 마음의 변화에 대한 증거를 보이지 않았다. 요한은 그들에게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외형적 의식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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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지자의 책망은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그들은 진리를 지지하는 분명하고 확신 있는 논증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서보다는 인간적 추론의 결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죄인된 그들의 상태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없고, 진정으로 마음을 깨뜨리는 일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처럼, 그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큰 비하 (卑下) 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전혀 없고 질투, 시기, 또한 칭찬과 인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업적 때문에 교만으로 충만한 독선적인 형식주의자들보다 하늘 나라에서 더 먼 사람은 없다. 그들은 요한이 독사의 자식,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계층에 속한다. 그런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고, 의심을 받지 않은 채 우리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들은 가장 부도덕한 방탕자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단의 사업에 봉사한다. 왜냐하면 방탕자는 그의 참모습을 가장하지 않고 그의 상태를 그대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신다. 그런 열매가 없으면 우리의 신앙 고백은 아무 가치가 없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결코 부른 적이 없는 자들 사이에서도 진실한 신자들을 일으키실 수 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 3:9).
하나님은 마음과 생애가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죄를 범하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호의를 보이지 않으실 것이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마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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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사업을 등한히 하면서 목사를 칭찬하고 추켜 세우는 자들은, 그들이 목사에게 돌아온 것이지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준다. 우리는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묻는 바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기별을 통하여 그대들이 들은 것은 성령의 음성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소리였는가? 맺힌 열매가 나무의 성격을 증거할 것이다.
외형적 형식이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없다. 가장 성자다운 사람이 집례한 의식도 성령의 침례를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음에 역사하셔야 한다. 거듭나게 하는 그 능력을 경험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알곡 가운데 있는 쭉정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철저하게 정하게 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장차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 (말 3:18) 를 분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하나님께로서 난 모든 사람들 안에서 드러날 것이다. 투쟁과 싸움은 성령으로 지배받는 자들 사이에서는 생길 수 없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 (사 52:11). 교회는 그 목사가 견지하는 표준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회개한 목사와 회개한 백성이 필요하다. 마치 그들이 회계해야 할 자인 것처럼 영혼들을 돌보는 목사들은 양떼들을 평강과 거룩함의 길로 이끌어 갈 것이다. 이 사업에서의 그들의 성공은, 그들이 은혜와 진리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나는 성장에 비례될 것이다. 교사들의 영혼과 육체와 정신이 거룩해 질 때 그들은 그와 같은 성화의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감명 깊이 새겨 줄 수 있다.
무심한 방법으로 신앙적 문제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진정한 심령의 갈급성과 산 믿음 없이 영적 축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별로 효력이 없다. 그리스도의 주변으로 가까이 밀려간 방황하는 군중은 그 접촉에서 생명의 능력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불쌍하고 고통받는 여인이 큰 필요를 느끼고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는 치료의 능력을 느꼈다. 그의 접촉은 믿음의 접촉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접촉을 아시고, 마지막 때까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교훈을 거기서 주시고자 작정하셨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당신에게서 나간 줄 아시고 무리를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그런 질문에 놀라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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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한 여자를 주목하셨다. 그 여자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에게는 큰 기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제넘은 일을 했던가? 그에게 이루어진 것을 알고 그는 떨면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다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부드럽게,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30, 31, 34)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무관심한 접촉과 믿음의 접촉이 구별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산 믿음의 활용이 없는 기도와 설교는 허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접촉은 우리에게 하늘의 능력과 지혜의 보고를 열어 준다. 그리하여 진흙으로 된 기구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의 이적들을 이루신다.
이러한 살아 있는 믿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크게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이 진실로 우리의 소유임을 알아야 하고, 그분의 정신이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고 세련되게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종들이 온유와 사랑과 함께 진정한 믿음을 가진다면, 그들이 어떤 사업을 이루겠는가! 어떤 열매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타나겠는가!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육신적 방심에서 그대들을 깨우기 위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대들의 위험을 보았다. 교회안에는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공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에서 이 두 계급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권면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4, 5).
가장 (假裝) 된 연합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이룬 진정한 연결과는 크게 다르다. 진리를 믿는다는 공언은 사람들을 교회에 속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산 포도나무와 생명적 연결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참 제자와,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분을 믿는 믿음이 없는 자들을 구별하는 하나님의 척도가 주어져 있다. 한 무리는 열매를 맺고 있지만 다른 무리는 열매가 없다. 한 쪽은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의 칼에 자주 전정을 당하지만 다른 쪽은 마른 가지들로서 머지않아 산 포도나무에서 잘려 나가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