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5 199-208 (283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매우 밀접하게 접촉되어 있다. 만일 휘장이 거두어진다면 우리는 악한 천사들이 그들의 흑암을 우리 주변에 밀어넣고 온 힘을 다하여 기만하고 멸망시키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악한 사람들은 악한 영들에게 둘러싸여 영향과 도움을 받는다. 믿음과 기도의 사람은 하나님의 지도에 심령을 굴복시켜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빛과 힘을 그에게 가져다 준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빛과 어둠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사단을 섬기는 일보다 더 크게 반대되지는 않는다. 선지자 엘리야는 그가 두려움 없이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호소할 때 참 빛 가운데서 그 문제를 제시했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왕상 18:21).

자기 자신을 사단의 마력에 맡기는 자들은 그것을 통하여 큰 유익을 얻은 것으로 자부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길이 현명하거나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가? 생명이 연장된다고 그럴까? 세속적 이득을 얻는다고 그럴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은 결국 이익이 될까? 그와 같은 외관상 이득은 모두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이었음이 입증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단의 세력에서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구축해 놓으신 단 하나의 방호벽도 벌을 받지 않고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은 옛 지계표를 보존하는 데 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사 8:20).

21 장 — 예수님을 바라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감정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그들의 발전이나 쇠퇴를 그것으로 판단함으로써 그들의 신앙 생애에 있어서 심각한 잘못을 범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받은 증거를 찾기 위하여 마음 속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유일의 소망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 (히 12:2) 는 데 있다. 그분에게는 희망과 믿음과 용기를 고취시켜 주는 모든 것이 있다. 그분은 우리의 의요, 우리의 위로요 기쁨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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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얻기 위하여 마음 속을 쳐다보는 자들은 지치고 실망할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속죄하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간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공로를 의지할 때 우리는 안식과 평안과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을 온전히 구원하신다.

우리는 매일, 매 시간 예수님을 의지할 필요가 있다. 그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는 현실의 모든 짐을 지고 그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장래의 어려움을 미리 짐작하고 압도당한다. 그들은 내일의 짐을 오늘 지고자 끊임없이 애쓰고 있다. 그와 같이 그들의 어려움 중 상당 부분은 상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준비도 갖추어 놓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직 오늘만을 위한 은혜를 약속하신다. 그분은 내일의 염려나 어려움을 지지 말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 기 때문이다 (마 6:34).

예상되는 불행을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은 지혜롭지 않고 그리스도인적이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현재의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늘의 의무를 이행하고 그 시련들을 견디도록 요구하신다. 우리는 오늘 말과 행동으로 잘못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 산 믿음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원수를 정복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임재 없이 만족한 채 안식하지 않으리라고 작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 날이 우리에게 허용될 수 있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경계하고 일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애는 참으로 얼마나 열렬해질 것인가! 우리는 모든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참으로 밀접하게 따라가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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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기도의 특권을 올바르게 깨닫고 이용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는 예수님께 가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그분께 알려야 한다. 우리는 더 큰 어려움은 물론이요 우리의 작은 염려와 걱정을 그분께 가져갈 수 있다.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기도로써 그것을 주님께 가져가야 한다. 우리가 발걸음마다 그리스도의 임재가 필요함을 느낄 때, 사단은 그의 시험을 개입시킬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가장 선량하고 동정 깊은 친구에게서 우리를 분리시키려고 그는 심사 숙고해서 노력한다. 우리는 예수님 외에 아무도 우리의 막연한 친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 안심하고 알릴 수 있다.

형제 자매들이여, 그대들이 예배를 위하여 모일 때 예수님께서 그대들을 만나신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서 그대들에게 즐겨 복을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믿으라. 자아에게서 눈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고, 비할 데 없는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라. 그분을 바라봄으로써 그대들은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대들이 기도할 때는 간단 명료하게 하고, 바로 요점으로 들어가라. 그대들의 긴 기도로 주님께 설교하지 말라. 마치 배고픈 어린이가 그의 육신의 아버지께 떡을 구하듯이 생명의 떡을 구하라. 만일 우리가 단순함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할 것 같으면 그분께서는 필요한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목사들이 설교하기 전에 드리는 기도는 흔히 길고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그 상황의 필요나 백성들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전 주제를 두루 언급한다. 그런 기도들은 골방에서는 적합하지만 공중 앞에서 드려져서는 안 된다. 청중들은 지루해져서 목사가 기도를 그쳐 주기를 바란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기도에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믿음으로 그대들의 구주께로 가서 그 상황에 필요한 것을 그분께 말씀드려라. 그때에 필요한 축복을 얻기 위한 간절한 욕망으로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하라.

기도는 가장 거룩한 영혼의 활동이다. 그것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열렬해야 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발한 새 마음의 욕망이어야 한다. 탄원자가 거룩한 임재 앞에 있음을 느낄 때 자아는 잊어버린바 된다. 그는 인간적인 재능을 과시하기 위한 욕망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자 노력하지 않고, 영혼이 갈망하는 축복을 얻고자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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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어떤 축복이 우리에게 소유될 것인가! 나는 더욱 열렬하고 효과적인 기도가 있기를 바란다.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그분을 찾는 모든 사람들을 도우시는 분이 되실 것이다.

22 장 — 일꾼들을 부름

세속적 정신과 이기적 정신은 교회에서 많은 축복을 박탈했다. 우리는 교회의 유용성이 제한된 것은 교회에 하나님의 빛과 능력이 독단적으로 억제되었기 때문이라고 가정할 권리가 없다. 과거에 잘 지도된 노력에 뒤따른 성공의 정도는 그런 생각을 반박한다. 성공은 언제나 이루어진 활동에 비례했다. 교회의 유용성을 제한한 것은 오직 활동과 희생의 제한이다. 선교 정신은 약화되고, 헌신은 저조되고, 이기심과 탐욕, 탐심과 사기가 교인들 사이에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에 유의하지 않으시는가? 그분께서는 마음의 의향과 목적을 읽으실 수 없는가? 열렬하고, 뜨겁고, 회개하는 기도는 하늘의 문을 그들에게 열어 주고 은혜의 소나기가 내리게 해 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분명하고 확고한 견해는 그들의 세속적 마음을 제거해 주고 겸손과 참회와 감사로 그들의 심령을 채워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 된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치명적인 영적 질병이 교회에 있다. 교인들은 사단에게 상처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기 위하여 놋뱀을 쳐다보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 너무 많은 요구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갈바리의 십자가의 영광을 보거나 그 능력을 느낄 만큼 충분하게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 그들은 진리가 요구하는 극기와 헌신을 이따금 일별하지만, 그것이 달갑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그들은 미구에 그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당신이 제시한 조건에 응하고자 유의하지 않는 한 그들을 유용하고 유능하게 하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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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신 빛을 도처에서 크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요구들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허지로 돌아가고 있다. 누가 하나님과 그분의 사업에 자기 자신을 헌신해야겠다는 부담을 느끼고 있는가? 이 부르심에 부응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격을 갖추고 있는 젊은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진리의 빛이 결코 뚫고 들어가지 못한 넓은 지역들이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어느 쪽을 바라보든지, 우리들은 거두어들여지기 위하여 준비된 풍성한 수확물을 보게 된다. 그러나 거두어들이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진리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가 드려지고 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대들은 어떤 종류의 성공을 바라고 있는가? 그대들의 게으름에 적합한 성공인가, 그대들의 이기적 방종에 적합한 성공인가? 그대들 편에서의 어떤 노력도 없이 스스로 유지되고 지탱될 수 있는 성공인가?

엄숙한 사업에 적합한 일꾼들을 일터로 내보내기 전에 바람이 미치지 않는 곳에 누워 있는 자들에게 불편을 느끼게 할 결정적인 변화가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각성이 있어야 하고, 영적 혁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열이 고조되어야 한다. 지상의 모든 민족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한 계획들이 세워지고 실천되어야 한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그들 주변에서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는 동안 잠자도록 어르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태만에 대하여 주님께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마 20:7).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교회에 적용된다. 왜 그대들은 그분의 포도원에서 재능껏 일하고 있지 않는가? 그분께서는 거듭거듭,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마 20:4) 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하늘에서 온 이 은혜로운 초청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하여 무시당해 왔다. 그대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에 꼭 알맞은 때가 아닌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각 사람을 위한 사업이 있다. 하늘에서 온 음성은 그대들을 순종하도록 엄숙히 부르고 있다. 이 음성에 유의하여, 어떤 장소에서나, 어떤 재능으로나 즉시 일하러 가라. 왜 그대들은 종일 여기에 게으르게 서 있는가? 그대들에게는 해야 할 사업, 그대들의 최선의 정력을 요구하는 사업이 있다. 귀중한 생애의 매 순간은 그대들이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에게 이행해야 할 어떤 의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나태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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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들을 구원하는 위대한 사업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모든 흑암의 악마들이 이 사업을 반대하고 있는 동안 영광중에 있는 모든 천사는 그것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마음 속에 간직된 영원한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그분의 모든 부를 상속하는 후사로 삼으시고자 제안하심으로 영혼들의 위대한 가치를 우리에게 실증하셨다. 그분은 범죄한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 앞에 드러내 주고 그분을 의로우시며, 또한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으로 제시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롬 15:3). 그분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사업은 타락한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이기심은 그분의 면전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 이기심, 곧 세상의 죄는 교회의 편만한 죄가 되었다.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그분께서는 모든 이기심의 뿌리를 강타하신다. 그분은 아무것도, 그분 자신의 명예와 하늘의 영광까지도 보류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이 축복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자들에게서 합당한 극기와 희생을 기대하신다. 모든 사람은 그의 역량껏 일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모든 세속적인 고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도외시되어야 한다. 세속적 유익을 위한 유일한 욕망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업을 더욱 잘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관심사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관심사는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들이 별개의 것이 되고 구분되어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 있노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목표를 열렬하게 추구하여 똑같이 이기적으로 그들의 물질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 번영을 첫째로 구하게 되는데, 어떤 것도 이것에 필적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그들이 그들 자신을 위하여 특정한 분량을 모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들은 만난 (萬難) 을 무릅쓰고 그들의 소유를 증가시켜야 하고, 영혼들은 진리의 지식이 없어서 죽어야 한다. 그들의 소유와 그들의 상품과 그들의 가옥과 그들의 토지와 비교할 때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한 영혼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영혼들은 그들이 무엇인가를 할 준비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재물을 섬기는 이 사람들을 게으르고 불성실한 종들이라고 부르신다. 그러나 재물은 그들이 가장 부지런하고 헌신적인 그의 종들 중에 속한다고 자랑한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의 소유를 안락과 쾌락에 희생시킨다. 자아는 그들의 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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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손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신 예수님께 영혼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이기심은 그리스도의 박애와 사랑이 교회에서 물러가게 하고 있다. 주님의 곳간이 비어 있는 동안 수백만의 그분의 돈은 세속적 정욕을 만족시키는 데 낭비된다. 나는 이 문제를, 나에게 제시된 그대로 그대들 앞에 어떻게 제시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해마다 수많은 돈이 의복을 자랑하는 마음을 만족시키는 데 소비된다. 바로 그 돈은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나는 식탁을 거의 온갖 진미의 음식으로 차리고, 좋은 의복에 대한 거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는 가정들을 보았다. 그들은 번창하고 있는 사업을 하고 있거나 좋은 급료를 받고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돈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가족들을 위하여 사용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는 일인가? 이 사람들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하여 주의 깊이 절약하고 좋아하는 기호를 부인하는 일에 어떤 책임을 느끼고 있는가? 이와 같이 쓸데없이 낭비된 자금 중 얼마를 앤드루스 목사가 이용할 수 있다면 그에게 큰 축복이 되고, 그의 생명이 연장되는 편의가 주어질 것이다. 더 큰 계획들을 수행하는 일에 사용될 더 많은 자금이 있을 것 같으면 선교 사업은 백 배나 더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도록 의도하신 자금은 안락과 행복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품들을 구입하는 데 허비된다. 그런데 그 자금이 진리를 확장시키는데 그처럼 크게 필요한 자금이 아니었을 것 같으면 그런 물품들을 소유하는 것이 죄가 안 될 수도 있었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대들 자신의 것은 구하고 있으면서 예수그리스도의 것은 구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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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므로 온갖 형태의 이기심이 교회에서 제거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세웠던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조화와 연합과 형제 우애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활동은 어느 곳에서나 보이게 될 것이다. 온 교회는 불이 붙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희생의 불꽃으로 타오를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단 위에서 사뤄지도록 자신의 극기의 열매를 드릴 것이다. 유용성의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고 불쌍한 죄인들을 영원한 파멸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접촉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일에 한층 더 큰 활동이 있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유행과 상관없이 평범하고 검소한 의복을 입고, 우리의 식탁이 언제나 온갖 사치와 낭비를 피하고 단순하고 건전한 식물로 차려지고, 우리의 가옥들이 평범하게 세워지고 그와 같이 꾸며진다면, 거룩하게 하는 진리의 능력을 보여 주게 되고, 불신자들에게 효력 있는 감화를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세상과 동화되고, 어떤 경우에는 기상 (奇想) 을 다한 꾸밈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보다 뛰어나고자 두드러지게 노력하고 있는 동안 진리의 전파는 조금밖에, 혹은 전혀 효과가 없게 될 것이다. 진리를 믿노라고 이미 공언하고 있는 자들이 그들의 믿음과 행동이 상치되고 있는 데 누가 이 시대를 위한 엄숙한 진리를 믿겠는가? 하늘의 창들을 우리에게서 닫아 버린 분은 하나님이 아니시고 세상의 습관과 행동에 일치된 우리 자신의 상태이다.

요한계시록 14장의 셋 째 천사는 하늘을 급히 날아가면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 (계 14:12) 들이 여기 있다고 부르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업의 성격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너무도 중대한 기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그 기별을 전함에 있어서 날아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들은 굶주린 세상에 전해 줄 생명의 떡을 손에 쥐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강권한다. 이것은 마지막 기별이다. 이 기별이 그 사명을 다한 후에는 더 이상 주어질 자비의 초청은 없다. 얼마나 큰 책임이 지워진 기별인가! 은혜스런 초청의 말씀을 전할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큰 책임이 지워져 있다. “성경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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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자는 누구나 ‘오라’고 말해야 한다. 목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그러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그 초청에 가담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공언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품성과 의복에 의해서도 마음을 끄는 감화를 나타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을 위한 수탁자, 사람들에게 거룩한 진리를 유증 (遺贈) 해 주신 분의 뜻을 집행하는 자들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탁의 위엄과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23 장 — 하나님의 인

“그가 또 큰소리로 내 귀에 외쳐 가라사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겔 9:1,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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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바야흐로 하늘 성소의 속죄소를 떠나 복수의 옷을 입으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빛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심으로 당신의 진노를 쏟으시려 하신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전 8:11).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내신 인내와 오래 참으심으로 부드럽게 되는 대신에 그들의 악행으로 마음을 굳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한계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 영역을 넘어가고 있다. 그들은 은혜의 한계를 넘어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간섭하셔야 하고 그분 자신의 명예를 옹호하셔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아모리 족속에 대하여,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 함이니” 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이 족속이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두드러진 처지에 있었지만 아직은 죄악의 잔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족속을 완전히 멸망시키도록 명령하실 수 없었다. 사람들이 아무런 핑계를 할 수 없도록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더 좋은 변화가 보이지 않는 한, 그분의 심판이 그들에게 내릴 것이었다.

무한하신 분께서는 틀림없이 정확하게 모든 나라에 대한 기록을 여전히 보관하고 계신다. 회개하라는 부르심으로 그분의 자비가 제공되어 있는 동안 이 기록은 열린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양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특정한 분량에 이르게 되면, 그분의 진노의 역사 (役事) 가 시작된다. 기록은 종결되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도 끝난다. 그들을 위한 자비의 호소는 더 이상 없어진다.

각 시대를 내려다보고 있던 선지자에게 이 시대가 그의 이상 앞에 제시되었다. 이 시대의 나라들은 전례 없는 자비를 받아 왔다. 가장 좋은 하늘의 축복이 그들에게 주어져 왔다. 그러나 늘어난 교만, 탐심, 우상 숭배, 하나님께 대한 경멸, 야비한 배은 망덕이 그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기록을 신속히 종결짓고 있다.

교회증언 5권 pp. 199-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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