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5 169-178 (280일)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 (고전 13:6) 한다. 사랑에 물든 마음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약점을 보고 슬픔에 싸인다. 그러나 진리가 승리하고, 다른 사람의 훌륭한 명성을 가리웠던 구름이 사라지거나 죄가 고백되고 바르게 교정되는 것을 볼 때, 그는 기뻐한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7).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참아줄 뿐만 아니라 그런 참음이 가져다 주는 어떠한 고난이나 불편도 기꺼이 감수한다. 이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 (고전 13:8) 한다. 그것은 결코 그 가치를 상실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하늘의 속성이다. 그것을 소유한 자는 그것을 귀중한 보배로 하늘 도성의 문을 통과하여 들어올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다. 불화와 다툼은 사단의 일이며 죄의 열매이다. 우리가 한 백성으로서 화평과 사랑을 맛보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피차간에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각 사람은 이렇게 자문해 보도록 하라. 나는 사랑의 덕성을 소유하고 있는가? 나는 오래 참고 온유하게 되는 길을 배웠는가? 이런 하늘의 특성이 없으면, 재능과 학문과 웅변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귀중한 보화를 그처럼 가볍게 평가하고 그처럼 적게 구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바울도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2-15).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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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께 그처럼 큰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구속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사람들에 대하여서도 가장 신성한 의무를 우리에게 지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과 똑같은 동정과, 똑같은 자비와 이타적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이기적 야망과 우월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애정을 차지하실 때 사라질 것이다.

우리 구주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한 큰 축복이 조건들 아래 여기에 간구되고 있다. 이런 조건들을 우리가 우리 입으로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자비대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적용되도록 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취급하시는 기준이라고 주장 하신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 15). 얼마나 놀라운 계약인가! 그러나 그 말씀이 얼마나 적게 이해되고 있으며 유의되고 있는가. 가장 흔한 죄악들 중 하나이며, 가장 유해한 결과가 따르는 하나의 죄는 용서하지 않는 정신을 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적의나 복수심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들이 용서해 주는 것처럼 용서해 달라고 구할 것인가. 분명히 그들은 이 기도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러한 기도를 감히 입술로 가져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 시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한다. 그러하거늘 우리가 어떻게 우리와 같은 동료 죄인들에게 가혹한 마음과 적의를 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의 모든 교제에서 이 기도의 원칙을 실천할 것 같으면 얼마나 복스러운 변화가 교회와 세상에서 이루어지겠는가! 이것은 성서 신앙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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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깨닫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요구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늘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거짓 기초 위에 건설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성취할 은혜를 주시지 않을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 앞에 제시된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날에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사도를 통하여,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롬 12:9, 10) 하라는 권면을 받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유발된 순결하고 이기심 없는 사랑과, 세상에 널리 보급되어 있는 무의미하고 기만적인 허식을 우리가 구별하기를 바란다. 이 저속한 모조품은 많은 영혼들을 그릇되게 이끌어 왔다. 그것은 범법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성실하게 보여 주는 대신에 그에게 동의함으로써 옳은 것과 그릇된 것 사이의 구분을 말살시켜 버릴 것이다. 그런 행위는 진정한 우정에서 결코 나오지 않는다. 그런 행동을 유발시키는 정신은 오직 육적 마음에 거한다.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친절하고, 동정적이고,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동안, 그는 죄악과의 조화를 느낄 수 없다. 그는 악을 미워하고, 불경건한 자들과의 교제나 우정을 희생하고서 선한 것에 집착한다. 우리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도 즐겨 감수하고 있는 한, 그리스도의 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4:17-19). 사도는 그의 형제들에게, 그들이 복음을 믿노라고 공언한 후에 이방인들처럼 행동하지 말고 매일의 행실을 통하여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한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과 권위로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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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한때 그들은 부패하고, 타락하고, 육욕적인 정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세속적 마취제에 의하여 중독되고, 사단의 간계에 의하여 눈이 멀고, 당혹감을 느끼고, 속임을 당하였다. 이제 그들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로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그들의 생애와 품성에 결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고 생애가 개혁되지 않은 교인들의 교회 가담은 교회가 약해지는 근원이다. 이 사실이 흔히 무시된다. 어떤 목사들과 교회들은 교인들이 증가되는 것을 너무도 바라기 때문에 비그리스도인적 습관과 행실을 정죄하는 성실한 증언을 하지 않는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들이 이름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고 있으면서 행동으로는 세상 사람이 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들은 사단의 백성이었지만, 지금부터는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생애는 그들의 주인이 바뀐 것을 증거해야 한다. 일반 대중의 견해는 그리스도교의 공언에 호감을 갖는다. 경건의 모양을 옷입고 교회의 명부에 이름을 등록하는 데는 극기나 자아 희생이 별반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없이 교회에 소속된다. 이런 점에서 사단은 승리한다. 이런 회심자들은 사단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이다. 그들은 다른 영혼들을 유혹하는 자가 된다. 그들은 부주의한 자들을 멸망으로 유혹하는 거짓된 빛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을 속인 (俗人) 들을 위하여 넓고 유쾌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칠고 좁은 길을 평탄하게 하시거나 넓히지 않으셨다. 우리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걸어가신 것과 동일한 길 — 겸손과 극기와 희생의 길 — 을 따라가야 한다.

목사들은 그들 스스로의 마음이 진리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고 있는지 보고, 그들의 회심자들도 그 결과를 얻도록 활동해야 한다. 목사들과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순결한 신앙이다. 마음 속에서 죄악을 제거해 버리고 열렬한 간구로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뻗는 자들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그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위한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용서와 순결과 하늘을 얻을 기회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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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겸손하고 통회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거룩한 지혜와 능력을 얻기 위하여 진실하고 열렬한 탄원을 자주 하나님의 보좌에 드리는 자들은 적극적이고, 유력한 그리스도의 종이 되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큰 재능은 소유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예수님을 굳게 의지함으로 그들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있어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통하여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거룩한 사업을 온 심령을 다해서 해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느껴야 한다. 그들의 노력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어야 하지, 백성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성실한 목사를 그리스도의 대사로 존중하고 있는한, 그들은 사람의 칭찬을 모두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 5:1, 2). 사람은 악한 행동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분리시켰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원하는 모든 사람이 죄에서 해방되어 창조주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도록 당신의 생명을 주셨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러한 큰 희생을 하게 만든 것은 그분께서 구속받은 거룩한 우주를 내다보셨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처럼 비싼 값을 치르고 산 특권을 받아들였는가? 우리는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인가, 그렇지 않으면 흑암의 왕의 종인가? 우리는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들인가, 바알을 경배하는 자들인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인가, 우상을 섬기는 자들인가?

외관상 신전은 보이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상 (像) 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우상숭배를 할 수도 있다. 간직된 사상이나 대상의 우상을 만드는 것은 나무나 돌로 신들을 조각하는 것과 똑같이 쉬운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에 대하여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바알의 종들처럼 사실상 거짓 신을 섬기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와 천연계를 통하여 계시된 그대로의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 대신에 안치된 어떤 철학적 우상을 섬기고 있는가!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공의와 자비가 그분의 보좌의 속성이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들, 곧 우리 구주를 통하여 나타나신다. 그분은 인내와 오래 참으심의 하나님이시다. 만일 그런 분이 우리가 숭배하고 있는 분이며, 그분의 품성을 우리가 본받고자 애쓰고 있는 분이라면 우리는 참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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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으면, 우리에게 전가된 그분의 공로는 아름다운 향기처럼 하나님 아버지 앞에 상달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 심겨진 우리 구주의 품성의 은혜는 우리 주변에 귀중한 향기를 발산할 것이다. 우리의 생애에 고루 퍼져 있는 사랑과 온유와 인내의 정신은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깨뜨리는 힘이 되고 믿음을 극렬히 반대하는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줄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 2:3, 4, 14, 15).

허영과 이기적 야망은 많은 영혼들을 파선시켜 온 암초이며 많은 교회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헌신을 거의 모르는 자들, 하나님과 거의 연결을 이루고 있지 않는 자들이 제일 높은 자리를 가장 열렬하게 구할 자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연약함과 그들의 품성의 결함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의 젊은 목사들이 개심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지 못할 것 같으면, 그들의 활동은 교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장애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우지는 않았다. 예수님을 끊임없이 쳐다보는 자들은 그분의 극기하는 사랑과 깊은 겸손을 깨닫고 그분의 모본을 따르게 될 것이다. 교만, 야망, 기만, 증오, 이기심은 마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특성들은 부분적으로 억제되었으나 마음에서 철저하게 뿌리 뽑히지는 않았다. 유리한 환경을 만나면 그것들은 새롭게 돋아나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열매를 맺는다. 여기에 무서운 위험이 놓여 있다. 여하한 죄라도 그것을 간직하는 것은 우리를 파멸시키고자 방심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을 뿐인 원수를 간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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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 3:13). 나의 형제 자매들이여, 그대들은 말의 선물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 그대들은 혀가 언제나 계발된 양심과 거룩한 애정의 명령을 순종하도록 그것을 제어하는 법을 배웠는가? 그대들의 대화는 경솔, 교만과 악의, 기만과 불순에서 벗어나 있는가? 그대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만이 없는가? 말은 현저한 능력을 발휘한다.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그를 섬기는 데 혀가 바쁘게 사용되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제어하기 힘든 그 지체를 통제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탁월해질 수 있는 방법을 열렬하게 연구하고 있는 자들은 차라리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 (약 3:17) 는 지혜를 얻는 법을 연구해야 한다. 나는 많은 목사들이 이 말을 심령의 돌비에 새겨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았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마음 속에 형성된 사람은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 (약 3:13) 것이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벧전 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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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길이 그처럼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그 길로 가고 있지 않는가? 왜 그들은 한마음이 되기 위하여 연구하고 기도하고 열렬하게 노력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악은 악으로, 욕은 욕으로 갚는 대신에 형제로서 사랑하기 위하여 피차간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자 노력하지 않는가?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 —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않는 것 — 에 응하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구주의 모본을 즐겨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달라고 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필요한 훈련에 응하고자 하지 않는다. 시험이 닥치고 시련이나 어떤 난처한 일이 생기면, 마음은 반역을 하고 혀는 독을 지닌 화살이나 황폐시키는 우박과 같은 말을 쏟아 놓는다.

험담은 듣는 사람에게보다는 말하는 자에게 훨씬 더 중하게 내리는 이중의 저주이다. 분열과 분쟁의 씨를 뿌리는 자는 그 자신의 심령에서 치명적 열매를 거둔다.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자, 악을 추측하는 자는 얼마나 불행한가! 그는 진정한 행복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9). 은혜와 화평은 구설의 다툼에 동참하지 않는 자들에게 임한다. 추문의 행상인들이 이 가정에서 저 가정으로 지나가고 있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가정을 정숙하게 수호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너무도 흔히 쓸데없고 경박하고 악의에 찬 험담에 허비된 시간은 더욱 높고 고상한 목적에 바쳐져야 한다. 만일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이 하나님을 위한 선교사들이 되어 병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을 방문하고 실수한 자들을 위하여 꾸준하고 친절하게 활동 하기를 원한다면, 다시 말해서, 그들이 모본되시는 분을 본받으려고 한다면 교회는 그 모든 영역에서 번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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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담의 죄는 악한 생각을 품는 데서 시작된다. 궤휼은 온갖 형태의 불순을 포함한다. 불순한 생각이 용납되면 부정한 욕망을 품게 되고, 심령이 더럽혀지면 그 정직성도 손상된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죄를 짓지 않으려면 우리는 바로 처음부터 죄를 피해야 한다. 모든 감정과 욕망은 이성과 양심에 굴복되어야 한다. 모든 부정한 사상은 즉시 배척되어야 한다. 그대의 밀실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가 되라. 믿음으로 기도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라. 사단은 그대의 발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주시하고 있다. 그대가 그의 간계를 피하고자 하면 그대는 위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믿음과 기도로써 복음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다. 어떤 사람도 강제로 범죄하게 할 수는 없다. 그 자신의 동의를 먼저 얻어야 한다. 정욕이 이성을 지배하고 불의가 양심을 이기기 전에 심령은 범죄의 행동을 의도해야 한다. 유혹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죄에 대한 핑계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벧전 3:12). 시험받는 영혼이여, 주님께 부르짖으라. 속절 없고 무가치한 그대로 그대 자신을 예수님께 던져 버리라. 그리고 바로 그분의 약속을 주장하라. 주님께서는 들어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육신적 마음의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시험을 받을 때마다 도와주실 것이다.

그대는 죄 가운데 빠져 있는가? 그렇다면 지체하지 말고 자비와 용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으라. 다윗은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자, 회개와 겸손으로 그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 토로했다. 그는 그의 면류관은 잃어버려도 견딜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기고는 견딜 수 없다고 느꼈다. 자비는 지금도 여전히 죄인에게 뻗혀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방황하고 있는 동안 내내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렘 3:22). 만일 우리가 호소하는 성령의 음성에 유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시 1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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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장 — 사업상 근면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잠 22:29).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 10:4).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10, 11).

구약과 신약에 있는 근면에 대한 많은 권면은 우리의 생활 습관과 신앙적 감정과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분명히 알려 준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그 모든 기관이 적당하게 계발되기 위하여서는 많은 운동이 필요 되도록 구조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 사업에 너무도 지나치게 몰두되어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반대의 극단으로 기울어져서 그들 자신이나 그들에게 예속되어 있는 사람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충분하게 활동하지 않는다. _____ 형제는 이런 부류에 속한 한 사람이다. 그가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는 사실상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그가 부주의한 게으름에 빠져 있거나 가족의 부양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 적은 일에 분망해 있는 반면에 그는 가장 무거운 책임과 짐을 그의 아내가 지도록 허용한다. 그는 여러 시간 동안 앉아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관하여 그의 아들들과 이웃 사람들과 더불어 잡담을 한다. 아내요 어머니 되는 사람은 먹을 음식과 입을 의복을 준비하기 위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반면에 그는 태평하며 여유 자작하다.

이 형제는 가난한 사람이므로 그가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권을 주장하고 남자답게 되지 않으면 언제나 사회에 짐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진정으로 바라기만 하면 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만일 부주의하고 무관심할 것 같으면 그가 얻을 수 있었던 위치를 더 큰 활동력과 사업적 기량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의 형제여,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지금 처해 있는 가난한 위치에 놓이도록 결코 계획하지 않으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대에게 그런 육체적 체질을 주셨는가? 그대는 그대의 형제들이 그들의 재산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처럼 그대의 체력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재산을 그대의 체력과 바꿀 수 있을 것 같으면 오늘날 이득을 얻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대와 입장이 바뀌어졌을 것 같으면 그들은 정신과 육체의 힘을 다 같이 부지런히 사용하므로 미구에 궁핍에서 벗어나고 어떤 사람에게도 전혀 신세를 지지 않게 될 것이다. 환경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어떤 원한을 가지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신 힘을 그대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힘이 활동하지 않으므로 녹슬어 버리도록 의도하지 않으시고 사용하므로 강화되도록 의도하셨다.

교회증언 5권 pp. 169-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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