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된 의복을 사용하도록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 백성들은 그 장점들을 식별하고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렇게 했어야 했다. 반대의 방향으로 나간 악한 결과가 지금 보이게 되었다. 위생병원에서 의사들과 조력자들은 의복에 관한 주님의 교훈에서 크게 벗어났다. 지금은 단순함이 흔치 않다. 영감의 붓이 묘사한 산뜻하고 장식없는 의복 대신에, 거의 모든 형태의 의복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딴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개혁된 의복을 준비하는 데 요구된 노력에 대하여 불평한 바로 그 사람들이 지금은 쓸데없는 장식에 있어서 크게 극단으로 치우쳐 버렸다. 이 모든 것은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의복이 경건을 공언하는 여인들에게 어울리는 단순한 모양 그대로 만들어졌을 때 들어갈 수 있는 것의 두 배의 비용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유행적인 의복을 만드는 것은 빈번히 의복 그 자체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든다. 그리고 재료의 두 배 정도가 때때로 주름을 잡는 데 소모된다. 여기에 교만과 허영이 나타나고, 진실한 원칙에 대한 큰 결함이 보인다. 만일 그들이 평범하고 단순한 의복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면 매주의 수입에 의존되어 있는 자들이 그들 스스로 재봉 일의 대부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일이 불가능하다. 재봉사의 청구서가 그들의 적은 급료에서 상당 액수를 가져 간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유행을 따름으로 우리 자매들의 마음이 그분으로부터 떠나가지 않도록 방어하는 하나의 장벽으로서 개혁된 의복을 계획하셨다. 그 장벽을 제거한 자들은 반드시 따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짐을 지지 않았다.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습관을 찬성하고, 성경의 표준과는 완전히 다른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과 배교적인 것의 현 상태를 초래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몫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시험해 오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자매들이 그들의 성향을 따름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교만을 드러낼 수 있도록 의복에 관한 증언이 진정되게 하셨다. 개혁된 의복이 추천된 것은 세속적인 현상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로 유행을 따르지 못하도록 방어하기 위해 이 의복이 필요했다는 생각을 경멸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에 교만을 품고 있다는 것과,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그대로의 것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허락하셨다. 개혁된 의복이 가하는 제한이 그들에게 필요했다는 것이 이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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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의 모든 자매들이 적당한 길이의 단순하고 장식 없는 의복을 입었다면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일치는 하나님께 훨씬 더 기쁨이 되었을 것이며, 4년 전에 제시된 다양성보다 훨씬 더 건전한 영향을 세상에 미쳤을 것이다. 우리의 자매들이 일반적으로 개혁된 의복을 마땅히 착용해야 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덜 반대할 만한 다른 형태의 것이 지금 나타나 있다. 그것은 쓸데없는 주름이 잡히지 않고, 맨 겉에 입는 스커트를 동이지 않고 뒤로 매지도 않았다. 그것은 헐렁한 웃옷이나 품이 넉넉한 블라우스와 스커트로 되어 있는데, 스커트는 거리의 먼지와 진흙을 피할만큼 충분히 짧다. 재료는 큰 무늬 형태의 것이 아닌 평범한 색깔의 것이어야 하고, 짧은 의복에서처럼 사지를 감싸주는 동일한 주의가 주어져야 했다.
우리의 자매들이 이 스타일의 의복을 받아들이고 사단이 고안하여 끊임없이 바꾸는 유행을 본받기를 거절할까? 어떤 변덕스런 유행이 다음 번에 있을 것인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라고만 걱정하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옷을 입은 후에 다음 번에는 더 간소한 것을 만들겠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만일 세상의 유행에 맞추는 것이 옳은 일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이라면 도대체 변화를 만들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만일 그것이 잘못이라면 정말로 변화를 이룰 필요보다는 잘못된 상황에서 더 오래 머무는 것이 최선일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대들에게, 그대들이 유행을 따라 의복을 만드는 일에 나타낸 열성과 열심, 기량과 인내를 상기시키고 싶다. 최소한 성경의 표준에 일치하기 위하여 동일한 열심을 나타내는 것이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시간과 재물이 옷들의 유행에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대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었던 그릇된 모본을 바로 잡기 위하여 그대들은 어떤 희생을 즐겨 치르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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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유행을 본받기 위하여 그들의 거룩한 품성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의 자매들에게 하나의 수치이다. 우리 자신의 마음의 왜곡이 그 이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경로를 통하여 감화를 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과 너무도 불일치하기 때문에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우리를 조롱거리로 만든다.
진리를 깨달은 많은 영혼들이 우리의 자매들이 나타낸 교만과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진리를 반대하도록 정해져 버렸다. 전파된 교리들이 분명하고 조화롭게 보였기 때문에 청중들은 진리를 받아들일 때에 그들이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의복에 있어서 너무 많은 과시를 하고 있는 우리의 자매들을 보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완전히 우리와 똑같이 옷을 입고 있다. 그들이 고백하는 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다면 그들은 결국 기만당한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미구에 오실 것이고 각 사람의 상황이 영원한 생명이나 죽음으로 결정될 것이라고 진정으로 생각했다면 그들은 현존하는 유행과 일치되는 의복에 시간과 돈을 바칠 수 없었을 것이다.” 소위 믿노라고 공언하는 그 자매들은 그들의 의복이 전하고 있는 설교를 너무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닌가!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의복은 그리스도와 함께 모으기도 하고 멀리 흩어버리기도 하는 매일의 산 설교자들이다. 이것은 농담으로 넘겨버릴 수 있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의복 문제는 진지한 숙고와 많은 기도를 요구한다. 많은 불신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유행의 노예가 되도록 허락한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경건을 크게 공언하는 어떤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의복처럼 옷을 입는 것을 볼 때 그들은 그런 면에서 잘못되지 않다고 단정한다.
영감의 사도는,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 말했다. 온 하늘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세상에 끼치는 날마다의 감화를 주시하고 있다. 나의 자매들이여, 그대들의 의복은 그리스도와 거룩한 진리를 위하여 혹은 세상을 위하여, 그 어느 한 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느 쪽인가? 우리는 우리가 나타내는 감화에 대하여 모두 하나님께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의복의 부주의를 조장해서는 안 된다. 복장은 적절하고 온당해야 한다. 비록 10센트짜리 싸구려 옷일지라도 산뜻하고 깨끗하게 간수되어야 한다. 만일 주름장식이 없다면 착용자는 스스로 그것을 만들므로 상당한 비용을 덜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손수 세탁하고 다림질할지라도 극히 적은 액수만을 벌 뿐이다. 가족들은 유행에 따라 자녀들의 옷을 입히느라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의 낭비인가! 어린 아이들은 주름이나 장식은 없지만 깔끔하고 깨끗한 옷을 매우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런 스타일의 옷은 세탁하고 다림질하기가 너무 쉬우므로 노력이 짐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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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의 자매들은 이 시대의 유행을 섬기기 위해, 해야 할 봉사를 하나님께로부터 도둑질하고 그분의 사업에 드려져야 할 돈을 그분의 금고에서 도둑질할 것인가? 의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시간도 허비되고, 돈도 낭비된다. 정신과 마음의 교양은 등한시 된다. 품성은 의복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온유하고 안정된 정신의 장식은 무한한 가치가 있으며, 이 귀중한 영혼의 장식을 얻기 위한 우리의 기회들을, 보잘 것 없는 것을 좇는 데 낭비하는 것은 가장 사악한 어리석음이다.
자매들이여,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을 위하여 고귀한 사업을 할 수 있다. 여자는 그가 가진 능력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질문에 모두 흡수되어 버리도록 의도하지 않으셨다. 여자를 위한 보다 높은 목적, 숭고한 목표가 있다. 그는 그의 능력을 계발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혼들을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는 위대한 사업에 그들을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면 인기 있는 교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보다는 하나의 극장처럼 보인다. 각종 스타일의 유행적인 의복이 그곳에 전시된다. 이 유행적인 교회들 중 하나에서 한 참석자가 하는 말을 나는 들었다. “그것은 유행을 연구하는 데 너무도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의복의 다양한 스타일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알겠지만, 나는 각기 다른 모양과 다른 색상으로 된 여러 가지 의복의 효과를 관찰함으로써 나의 사업에 큰 유익을 얻는다. 그 긴 옷자락과 아름다운 모자를 유의해 보았는가? 나는 그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금방 알게 되었다. 나는 실제로 활용할 공부를 하루 종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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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나 전파된 설교에 관해서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예수께서 장식과 화려한 의복의 과시에 들떠 있는 이 무리들을 어떻게 여기실까 하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집이 얼마나 모욕을 받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그런 교회들을 방문하셨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집을 모독한 그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으시겠는가?
그러나 가장 큰 악은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에게 대한 영향력이다. 거의 그들이 세상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유행의 요구에 굴복한다.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구원에 관해서보다 의복에 관하여 더 많이 듣는다.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들이 성경보다 늘 최신 유행의 옷을 입는 사람들을 더욱 열렬히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의복의 외적 과시가 품성의 단장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다. 좋은 의복을 더럽힌 데 대해서 심한 질책이 따른다. 그리하여 마음은 끊임없는 제지 아래 안달하고 불안해진다.
비뚤어진 품성은 더럽혀진 의복만큼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는다. 아이는 덕성에 관해서보다 의복에 관해서 더 많이 듣는다. 어머니가 그의 구주보다 유행과 더 친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모본은 너무도 자주 유해한 분위기로 젊은이들을 두른다. 유행의 복장으로 가장한 악이 아이들 사이로 들어온다.
의복의 단순함은 양식 있는 여자를 가장 우월하게 보이게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품성을 입고 있는 의복의 스타일로 판단한다. 화려한 의복은 허영과 약점을 드러낸다. 얌전하고 경건한 여자는 단정하게 옷을 입을 것이다. 세련된 취미와 교양 있는 마음은 단순하고 적절한 의복의 선택에서 드러날 것이다.
결코 소멸되지 않고, 이생에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불멸의 미래에서 흐리지 않는 영광으로 빛날 장식이 있다.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정신의 장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부유한 의복으로 영혼을 입히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유행의 경배자들은 등한히 한 영혼을 상기해야 한다. 화장하는 데 낭비한 모든 시간은 지성을 황폐해지도록 버려둔 데 대해 그들을 책망할 것이다. 그리하여 생애의 모든 목표와 목적을 향상시키고 고상하게 해 줄 개혁이 있게 될 것이다. 외모를 위하여 황금 장식을 구하는 대신에, 금보다도, 아니 보석보다도 더 귀중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열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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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의 제단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품성의 힘도 육체의 힘도 거의 없다. 그들은 큰 목적 없이 살아가며, 그들의 생애가 가치 있는 결과를 이루지도 않는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정신과 마음을 의복과 과시를 좋아하는 데 빼앗기고 있는 여자들을 만난다. 여자다움의 혼은 위축되고 축소되었으며, 그들의 생각은 그의 가련하고 비열한 자아에 집중되어 있다. 유행의 의복으로 단장한 젊은 부인이 거리에 있는 몇 사람의 신사들 곁을 지나가자 그들 중 하나가 그 여자에 관하여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이런 대답이 나왔다. “그 여자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예쁜 장식을 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쓸모가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의복과 쓸데없는 장식의 방법들을 본받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통탄할 일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여자들의 의복에 관하여 귀중한 교훈을 한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우리가 강조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과 일치한다. 우리는 성경의 독자요 성경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순종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관습에 맞출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돈을 섬길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정반대로 걸어가면서 마음의 평안과 하나님의 인정을 얻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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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일치되고자 하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금과 진주와 값진 성장 (盛裝) 으로 단장하는 일에서 세상의 관습과 일치되는 데 대하여 망설이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착용하기에는 너무도 양심적인 사람들은 마음이 좁고, 미신적이요, 심지어 광신적이라고까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교훈들을 우리에게 주기로 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것들은 무한한 지혜를 가진 하나님이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무시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위험과 손실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금지된 장신구들을 고집하는 자들은 마음속에 교만과 허영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주목을 끌고자 욕망한다. 그들의 의복은, 나를 쳐다보라, 나를 칭찬하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사람의 본성 속에 선천적으로 존재한 허영은 방종을 통하여 꾸준히 증대해 간다. 마음이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자 고정되면 사람의 쓸데없는 모든 장식은 사라진다.
사도는 외적인 장식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과 직접 대조되는 위치에 놓고 후자의 가치를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는 말로 견주어 증언한다. 외적인 장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온유와 안정한 심령의 특성 사이에는 결정적인 상처가 있다. 심령을 평안과 기쁨이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 오직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자 노력할 때 뿐이다.
의복을 사랑하는 마음은 도덕을 위태롭게 하고 여자를 정숙과 온건으로 특징지어진 그리스도인 여성과 반대되게 한다. 화려하고 엄청난 의복은 너무도 흔히 착용자의 마음속에 육욕을 자극하고 보는 자의 마음에 저열한 정욕이 일어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의복에 있어서의 교만과 허영의 방종 후에 빈번히 품성의 파괴가 따르는 것을 보신다. 그분께서는 값진 의복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을 질식시킨다는 것을 아신다.
사람들이 의복에 더 많은 돈을 쓰면 쓸수록 더 적게 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힐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흘러가야 할 자비의 물줄기는 말라버린다. 쓸데없는 장신구에 대하여 자아를 부인함으로 저축된 모든 돈은 궁핍한 자들에게 주어질 수도 있고, 복음 사업을 지원하고, 외국으로 선교사들을 보내고, 오류의 흑암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빛의 광선을 비추기 위한 출판물들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주님의 금고에 들어갈 수도 있다. 쓸데없이 사용된 모든 돈은 그 사용자로부터 선을 행할 귀중한 기회를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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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매들이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대들이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시간을, 쓸데없이 치장하는 데 썼는가? 얼마나 많은 돈을 그대들의 상상력을 즐겁게 하고 그대들 자신처럼 헛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썼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돈이었다. 그대들이 그것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선을 행할 수 있었던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그대들은 이생과 미래의 불멸의 생애에서 어떤 손실을 받았는가! 모든 영혼은 그 몸으로 행한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목적과 동기를 읽으신다. 모든 행동과 은밀한 것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그분의 눈에 펼쳐진다.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도 그분의 주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고 높이는지 아신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애정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하늘의 사물에 두고 있는지, 육신적이요 정욕적이요 악마적인 사물에 두고 있는지 아신다.
그대들이 쓸데없이 엄청난 의복을 그대들의 몸에 걸칠 때 그대들은 벗은 자들을 입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이 쓸데없이 다양한 값진 음식물을 식탁 위에 벌여 놓을 때, 그대들은 주린 자들을 먹이기를 등한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공언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의 기록이 어떠하겠는가? 나는 그대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금고 속에 넣으라고 요구하시는 돈,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져야 할 부분을 어리석고 손해가 되는 방종에 쓰지 말라고 호소하는 바이다. 우리 자신을 값진 의복으로 단장하지 말고, 경건을 주장해 온 여자들처럼 선한 행실로 단장하도록 하자. 과부와 고아들의 부르짖음이 우리를 거슬러 하늘로 상달되지 않도록 하자. 영혼들의 피가 우리의 의복에서 발견되지 않도록 하자. 마음의 교만을 간직하므로 귀중한 은혜의 시간이 낭비되지 않도록 하자. 방문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은 없는가? 그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어야 할 흐린 눈은 없는가? 그대들의 위로의 말과 그대들의 기도가 필요한 낙심하고 절망한 자들은 없는가?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번영케 하실수록 교만과 허영의 방종은 꾸준히 증가되어 가지 않았는가? 그대들이 귀중한 시간을 의복의 연구에 바치고 있는 동안, 내적인 단장은 소홀해지고, 은혜 가운데 자라나는 일도 없다. 그대들은 더 한층 경건해지는 대신에 세속적인 마음으로 점점 더 바뀌어가고 있다.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 천박한 식욕이 거룩한 사물에 대한 그대들의 감각을 흐리게 한다. 왜 예수님을 사랑하노라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이 영혼을 파멸시키는 이런 방종에서 벗어나지 않는가! 세상은 과시와 유행과 쾌락에 미쳐 있다. 방탕은 꾸준하고 무섭게 증가 일로에 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높은 공언에 진실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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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을 부끄러워하신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그분과 닮아 있는가? 우리의 의복은 어떤 점에서 성경의 요구와 일치되는가? 나는 백성들의 죄가 내게 지워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게 할 것이다. 여러 해에 걸쳐 나는 글을 통해서 그리고 설교자의 위치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분명하고 결정적인 증언을 해 왔다. 나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권면을 선포하는 일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해야 한다. 세속적인 것과 교만이 거의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이유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자매들이여, 더 이상 그대 자신의 영혼과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나는 그대가 뒤로 물러가게 된 중요한 원인이 의복을 사랑하는 그대의 마음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중요한 책임들을 등한히 하게 하므로 그대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을 좀처럼 발견하지 못한다. 지체하지 말고, 그대가 뒤로 물러가게 된 원인을 제거하라. 그것이 그대 자신의 영혼과 하나님께 대한 죄가 되기 때문이다. 죄의 속임수로 굳어지지 말라. 유행은 지성을 타락시키고, 우리 백성들의 영성을 침식하고 있다. 유행에 대한 순종이 우리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들에게 파급되어 있으며, 다른 어떤 세력보다도 우리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나는 우리 교회의 규율들이 매우 불충분함을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금지되어 있는, 의복에 나타난 모든 교만의 전시는 교회의 징계를 위한 충분한 이유가 되어야 한다. 경고와 호소와 권유를 받으면서도 왜곡된 뜻을 여전히 따르고자 고집한다면 그것은 마음이 그리스도와 결코 동화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간주될 수 있다. 자아, 오직 자아만이 숭배의 대상이며, 그렇게 공언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은 많은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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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백성으로서의 우리에게 하나의 무서운 죄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교인들에게 그들의 믿음과 일치되지 않는 방법으로 옷을 입도록 허용한 것이다. 우리는 즉시 일어나서 유행의 유혹에 대하여 문을 닫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교회들은 타락하게 될 것이다.
63 장 — 적당한 교육
교육은 책에서 얻는 지식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적당한 교육은 지적 훈련뿐만 아니라 건전한 도덕과 올바른 태도를 얻게 하는 훈련을 포함한다. 우리는 학생들을 가정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그들의 책임을 깨닫지 못하고 이 젊은이들에게 적당한 감화를 끼치기를 등한히 할 것에 대해 많은 염려를 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대학에서 받을 수 있었던 모든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너무도 흔히 이런 질문이 주어진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우리의 집에서 방을 쓰고 있는 학생들에 대해 나는 어떤 보호, 어떤 짐이나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나는 그대들이 자녀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관심이라고 대답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말씀하신다. 그대들의 지붕 아래 들어온 젊은이들의 영혼은 그대들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영혼처럼 주님의 눈에 귀중하다. 젊은 남녀들이 부드럽고 차분한 가족권의 감화에서 분리될 때, 그들을 위하여 가정의 감화를 만들어주는 것이 그들의 보호를 맡은 자들의 의무이다. 그들은 이와 같이 큰 부족을 채워주므로 강단에 선 목사들과 똑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덕의 유혹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줄 감화로 이 학생들 주위를 둘러주고,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은 하늘이 승인하는 사업이다. 중요한 사업들이 추진되어야 하는, 이 큰 사업의 중심부에 사는 자들에게 무거운 책임들이 지워져 있다. 배틀크릭에서 가정을 선택하는 자들은 믿음과 지혜와 기도의 남녀들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