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이 면에서 필요없이 신중을 기한다. 그들은 노인들이나 병자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알기 위해 재산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할 때 자신들이 금지된 구역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이 의무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말씀을 전파하는 것과 같이 엄숙한 의무이다. 여기에 그의 손에 하나님의 돈이나 재산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의 청지기직을 이제 막 바꾸려고 한다. 그는 그분의 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빌려주신 돈을, 단지 그들이 자신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사악한 자들의 손에 줄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업에 대한 관심과 같이 사람의 미래의 유익에 대해 관심과 열망을 느끼고 여호와의 돈에 대한 바른 입장을 취하고 현명한 향상을 위해 그에게 빌려 준 달란트를 사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형제들이 그가 현세의 생명을 잃어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재물도 도적질하고 있는 것을 방관하고 서 있어야 하겠는가? 이것은 그 자신과 하나님의 사업에 두려운 손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재물의 달란트를 하나님의 진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손에 놓음으로 그는 사실상 그것을 헝겊에 싸서 땅에 묻어 두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스스로 그들의 재산을 분배할 수 있을 때 그렇게 하기를 바라신다. 어떤 이들은 질문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사실상 모두 드려야 합니까?”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하도록 요청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재정이 필요한 때는 언제나 자유롭게 이것을 사용함으로 우리 소유가 전적으로 그분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외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또한 진리를 출판하여 이것을 온 세계에 가을 낙엽같이 뿌리는데 소용되는 돈에 대한 요청에 귀를 막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대들에게 자신들이 죽을 때 자선을 베풀 계획을 세워 놓았다는 사실을 알려 줌으로 그들의 탐심을 변명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업을 자신들의 유서 속에 고려해 두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십일조와 헌물에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며 탐욕의 생애를 하며, 그들의 유서에서 아주 적은 부분만 하나님께 돌리고, 매우 많은 몫은 진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친척들에게 돌린다. 이것은 가장 나쁜 종류의 도적질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일생을 통해 도적질했을 뿐 아니라 죽을 때에도 도적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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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의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미래의 생을 위한 준비를 늦추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그대의 청지기직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때가 올 때까지 그분의 사업에 관대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기를 늦추는 것도 큰 실수이다. 그대가 재정의 달란트를 맡기는 사람들은 그대가 행한 것처럼 잘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부자가 이런 위험을 무릅쓴단 말인가! 자신들의 재산을 처분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자들은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보다는 죽음에 바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에 분명히 기록된 하나님의 계획과 정반대로 행동한다. 만일 그들이 선을 행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마치 호기를 잃을까 두려워 하는 것처럼 현재의 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정력을 다하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생에서 그들에게 요구된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음으로 명백한 의무를 등한히 한 자들과, 죽을 때에 유산을 남길 생각으로 자신들의 양심을 잠재운 사람들은 주인으로부터 아무런 칭찬의 말을 듣지 못할 것이며 어떤 상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아 부정을 실천하지 않았으며, 할 수 있는 한 이기적으로 그들의 재산을 붙들었으며, 죽음이 그것을 요구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포기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지체하는 그 일을, 만일 그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의 생명이 건재할 때에 행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며, 자신들이 그분의 청지기로 활동할 때 그들의 의무를 행함으로 만족을 얻으려 할 것이다. 스스로 유언의 집행자가 됨으로 그들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대신에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직접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재산의 청지기로 생각해야 하며, 하나님을 최고의 소유주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을 요구하실 때 우리는 그것을 그분께 드려야 한다. 그분께서 이자와 함께 그분의 것을 받기 위해 오실 때, 탐심을 가진 자들은 그들에게 맡겨 준 달란트를 늘리는 대신, 무익한 종에게 선고된 운명을 자초하였음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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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그분의 종들의 죽음이 손실로 여겨지도록 계획하시는 것은 그들이 발휘해 온 선을 위한 감화와 하나님의 보고를 채우기 위해 그들이 바친 많은 자원하는 헌물 때문이다. 죽으면서 남기는 유산은 생전에 하는 자산을 대신하기에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종들은 선행과 하나님께 드리는 후한 예물로 날마다 유서를 써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용도에 사용된 것에 비해 어울리지 않게 적은 양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매일 그들의 유서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애정을 차지하고 있는 대상들과 친구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의 최고의 친구는 예수님이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셨으며, 그분의 가난함을 통해 부유하게 되도록 그들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 그분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심령과 재산을 가지실만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의 요구를 뒤로 미루며 죽을 때 아주 적은 양을 드림으로 그분을 모욕한다. 이런 부류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은 하나의 충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들이 “온전한 마음 상태” 에 있을 때 시작하는 의도적인 계획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 주자. 그들은 살아서 하나님의 사업을 횡령한 뒤에도 죽은 후에까지 그 횡령을 영속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온 마음의 전적인 동의하에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유서를 임종하는 동안 간직하는데 동의한다. 그들의 유서는 죽음을 위한 준비의 한 부분으로, 그들의 소유가 자신들의 죽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작성된다. 이들은 과연 장차 그들에게 임할 그들의 청지기 직분을 설명하라는 요구에 기쁨으로 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미래, 즉 영생을 얻고 싶으면 이생에서의 선행에 부요해야 할 것이다. 심판이 베풀어지고 책들이 펼쳐질 때,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일에 따라 상을 받을 것이다. 하늘 원장에 절도로 기록된 많은 이름들이 교회의 녹명책에 실려 있다. 이들이 회개하지 않고 사심 없는 관용으로 주님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분명히 충실치 못한 청지기의 운명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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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적인 사업가가 한 순간의 경고도 없이 갑자기 쓰러지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그의 사업을 조사해 보면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에 변호사의 비용으로 그 재산의 다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나가기 때문에, 그의 아내와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사업은 도적질당한다. 주님의 재정의 성실한 청지기들은 그들의 사업 상태가 어떤지를 잘 알며, 현명한 자와 같이 그들은 어떤 비상 사태에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은혜의 기간이 갑자기 마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 요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주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건강한 중에 있을 때 유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고는 우리 형제들이 받아 들여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정 상태를 알아야 하며, 그들의 사업이 혼란에 빠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의 재산을 언제라도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정리해 두어야 한다.
유서는 법적인 효력을 가지도록 작성되어야 한다. 유서를 작성한 후에 주의 사업의 요구에 따라 수시로 기증이 계속될 수 있어, 여러 해 동안 그대로 두어도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다. 형제들이여, 유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죽음이 하루라도 속히 오는 것은 아니다. 유서에 의해 그대의 재산을 친척들에게 나누어 줄 때 하나님의 사업을 잊지 않도록 명심하라. 그대는 그분의 소유를 가지고 있는 그분의 대리자이며 그분의 요구는 그대의 첫째 생각을 차지해야 한다. 그대의 아내와 자녀들을 물론 곤궁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궁핍하다면, 그들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관습이라는 이유로 필요하지도 않은 친척들의 이름을 유서에 길게 기록할 필요는 없다.
재산을 나누는 현재의 이기적인 제도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요 사람의 고안인 것을 마음에 새기도록 하자. 그리스도인들은 유서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개혁자가 되어 현재의 제도를 타파해야 한다. 그대들이 취급하고 있는 것은 주님의 재산이라는 생각을 언제나 갖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이 이런 면에서는 법이다. 만일 한 사람이 그대를 그의 유산을 집행하는 자로 삼았다면, 그대는 유언자의 유서를 자세히 연구하여 아주 적은 양이라도 잘못 분배되는 일이 없도록 하지 않을 것인가? 그대의 하늘 친구가 그대에게 재산을 주셨으며, 이것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분의 유서를 주셨다. 만일 이 유서가 이기심이 없는 마음으로 살펴진다면 하나님께 속한 것은 잘못 분배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사업은, 그들이 감사하고 순종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면 모든 비상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재정을 그분이 주셨음에도 수치스럽게 등한시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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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은 이것으로 그들의 의무가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주님의 사업을 세우기 위해 그들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면서 끊임없이 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 주는 일에 있어서 부지런히 일할 수 있는 계획을 고안하셨다. 그분은 이적으로 그분의 사업을 유지하자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에게는 절약하며 그분의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돈을 사용하는 소수의 신실한 청지기들이 있다. 자아 부정과 관용은 예외가 되는 대신에 법칙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에 점차 필요되는 것은 자금이다. 빛과 진리를 가지고 그들에게 와 달라는 요청이 내외국인들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오고 있다. 이것은 더 많은 일꾼들과 그들을 후원하기 위한 더 많은 재정을 필요로 한다.
아주 소량의 돈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나님의 보고로 흘러들어 오고 있으며, 이것마저 매우 힘든 수고로 얻어진다. 모든 사람의 눈이 열려서 만연되고 있는 탐심이 하나님의 사업의 발전을 얼마나 방해하였으며,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행했더라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을 것인가를 볼 수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개혁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업의 발전을 감히 방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면 이룩했을 사업에 대해 잠들어 있다. 진정한 자아 희생의 정신은, 세상이 오해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복음의 실재와 능력에 대한 논증이 될 것이며, 풍성한 축복이 교회에 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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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일을 멈추기를 요청한다. 어떤 사람들은 유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것을 행할 때, 하나님의 보고로 흘러 들어가야 할 재정을 아들과 딸들에게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유서들은 종종 언쟁과 불화의 원인이 된다. 고대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양에는 그분이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려지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적인 소유를 이기적으로 추구하거나 탐내며 세상적인 쾌락에서 그들의 행복을 찾는 대신 그들 자신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보다 더 나은 나라, 곧 하늘 나라를 찾는다고 분명히 선언하면서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았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하늘의 대주재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지금 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할 수는 없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따라 드리지 않는다. 주께서는 때때로 그들이 기꺼이 드리고자 하는 액수까지 그들의 입을 감하시는 단순한 방법으로, 이기심에 어두워진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신다. 말들이 들이나 우리에서 죽어 있거나, 집이나 곡간이 불에 타 없어지며 수확이 망쳐지는 수가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축복으로 시험하신다. 그리고 만일 십일조와 헌물에서 불성실함이 나타나면 그분의 축복은 거두어진다. “적게 뿌리는 자는 적게 거둔다.” 그리스도의 자비와 그분의 선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또한 진리와 신앙의 명예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대들이 하나님께 자신과 소유를 새롭게 헌신하게 되기를 간청한다. 하늘 궁정을 떠나 자아 부정과 굴욕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정에 비추어 우리 각자는 “나는 주께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 라고 자문해 보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하여 주신 하늘의 큰 선물에 대한 감사에 어울리는 감사의 헌물이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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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드려야 할 양을 결정할 때 마땅히 드려야 할 요구에 모자라게 하기보다 더 많이 드리도록 하자. 이 헌물을 드려야 할 대상을 생각해 보라. 그것을 생각하면 탐심이 물러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큰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의 풍성한 헌물도 그분이 받으시기에는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애정의 대상이 되실 때, 그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옥합에 담긴 귀한 향유의 가치를 헤아리기 위하여 발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탐욕스러운 유다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 오직 헌물이 더욱 향내가 나지 않고 더욱 가치가 없는 것을 후회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분으로부터 자비와 축복들이 동료 인간들에게 흘러나가는 통로로만 자신들을 바라볼 것이다. 동료 인간들의 회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늘의 은사에 그들과 동참하게 된 사람들이 드리는 찬양과 헌물을 통해 하늘로 영광의 환호를 보내게 될 것이다.
43 장 — 교인의 관계
승리하고자 애쓰는 모든 사람은 싸워야 할 자신의 연약함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보다는 그들의 형제들의 결점을 보기가 매우 쉬우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자신에 대해 더욱 부지런하고 비평적이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라면, 모든 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기 이전에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들이 어두움에 처하여 있으면서 그런 상태로 남아 있는 것에 만족하여 빛의 근원이신 분과 연결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빛의 통로로 삼지 않으실 것이다. 자신의 부족을 느끼고 깊은 생각과 가장 열렬하고 끈기있는 기도와 행동을 하도록 스스로를 일깨우는 사람들은 신령한 도움을 받을 것이다. 각자는 자신에 대해 배워야 할 것도 많지만 고쳐야 할 것도 많다. 옛 습관과 관습들은 버려야 한다. 오로지 열렬한 투쟁을 통해서만 이런 잘못들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승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진리의 원칙을 실천함으로써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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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각 개인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감명시켜 줄 그런 말을 할 수 있기를 원한다. 영혼은 반드시 순결해져야 하며, 심령을 살피는 일이 더 많아야 하고, 완고함과 자아 사랑이 극복되어야 하는데 이런 일에는 꾸준하고 열렬한 기도가 필요하다.
거칠고 비판적인 사람들은 일부 개혁자들이 이런 정신으로 일했다는 점을 들어 종종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의 예모가 없는 것을 변명하거나 정당화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이 시대를 위한 사업에는 동일한 정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용하고 완전한 통제하에 있는 정신이 어떤 장소에서나 더 나으며 심지어 거친 집단에서도 더 좋다. 광포한 열심은 아무에게도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거만하고 정열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을 개혁자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들의 이러한 품성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다. 그러나 그분은 이들이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이성의 지배하에 그들의 정신을 두었더라면 열 배의 큰 책임을 이들에게 주셨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이 죄와 불경건과 부정함과 거짓을 비난하며, 때로는 높고 낮은 계층의 사람들 중에 있는 죄악을 정죄하라고 요청을 받고 그분의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줄 때, 이들은 여전히 압제적이며 전제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친절과 사랑, 멸하기보다는 구원하려고 하는 정신을 나타내야 한다.
여호와의 오래 참으심은 그리스도와 함께 동역자가 되기를 갈망하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인내와 사랑의 실수함이 없는 교훈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와 충동적인 베드로를 자신과 연결시키셨는데, 이것은 유다가 탐심이 많고 베드로가 열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위대한 교사이신 그분에게 배워서 그분과 같이 이타적이고 온유하고 심령이 겸손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이 두 사람에게서 좋은 자질을 보셨다. 유다는 재정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만일 그가 생애의 아주 사소한 일에 있어서까지 이기심과 부정과 탐심을 정죄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교훈을 심령에 간직하였다면 교회에 큰 가치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 교훈들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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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주께서는 그분의 청중들에게, 작은 일에 있어서 그의 이웃을 속임으로 자신이 유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기회가 유리하다면 큰 일에 있어서도 속일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려고 하셨다. 엄격한 정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심령으로 하여금 더 큰 부정을 저지르도록 준비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훈과 모본을 통하여 가장 엄격한 고결함이 우리 동료 인간들을 향한 우리의 행위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리스도께서는 계속적으로 바리새인들의 불완전한 생애를 지적하시고 질책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고 공언했지만 그들의 매일의 행위는 불법을 자행했다. 많은 과부와 고아들이, 이득을 위한 탐욕스런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 때문에 그들의 작은 모든 소유를 빼앗겼다.
유다가 만일 진심으로 바르게 되고자 했더라면 이 모든 교훈으로 유익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탐욕은 그를 정복했고 돈에 대한 사랑이 위세를 떨쳤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업을 전진시키는 데 사용되는 돈이 담긴 돈궤를 운반했으며, 작은 양이 때때로 그의 용도에 사용되었다. 그의 이기심은 막달라 마리아에 의해 드려지는 옥합의 예물을 싫어했으며, 그녀가 낭비한다고 나무랐다. 이렇게 해서 그는 배우는 자가 되는 대신, 교사가 되어 그녀의 행위의 타당성에 관해 우리 주님을 가르치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다같이 그들의 품성의 죄된 특성을 고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교훈과 모본의 기회와 특권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위선과 더러움에 대한 그분의 압도적인 견책과 질책을 듣는 동안, 그들은 그렇게 심하게 지탄을 받는 자들이야말로 개혁시키기 위한 간절하고도 지속적인 수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구주께서는 그들의 무지와 과오 때문에 우셨다. 그분은 무한한 긍휼과 사랑으로 그들을 동정하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소리치셨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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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행동에 있어서 충동적이었고 열정적이었으며, 대담하고 비타협적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서 교회에 큰 가치가 될 요소를 보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베드로를 자신과 연결시키심으로, 좋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이 보존될 수 있게 하셨으며 그분의 교훈과 모본을 통하여 그의 기질 안에 있는 모든 거친 것을 부드럽게 하시고 그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억센 것들을 부드럽게 하고자 하셨다. 만일 심령이 참으로 신령한 은혜로 변화된다면 참된 친절과 동정과 예절 바름에 외적인 변화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결코 냉담하거나 접근할 수 없는 분이 아니었다. 고통당하는 자들은 종종 그분이 새로운 원기와 쉼이 필요하실 때 그분의 휴식을 깨뜨렸으나 그분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모습을 보이시고 용기를 주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분은 진정한 예절의 모본이셨다. 베드로는 자신의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후에 뉘우치고 자신의 큰 죄를 인해 진정으로 겸손해졌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심으로써 잘못한 이 제자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유다는 사단의 시험에 굴복하여 그의 가장 좋은 친구를 버렸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배우고 유익을 얻었으며, 그들의 주님이 높이 올라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남겨진 개혁 사업을 전진시켰다. 이 두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연결시키셔서 당신의 교훈과 이타적이고 동정적인 생애의 모본을 통하여 당신에게서 배울 수 있도록 특권을 베푸신 두 부류를 대표한다.
사람이 그의 구주를 더 많이 보고 그분을 더욱 많이 알면 알수록 그는 그분의 형상을 더 많이 닮아 가고 그리스도의 사업에 힘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는 개혁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우리에게 비취는 진리의 빛은 하나님의 영의 초청을 듣게 될 모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부지런히 끈질기게 일할, 단호한 행동과 참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을 요구한다.
비평과 비난이 교인들 사이에 있어야 할 사랑을 종종 대신한다. 이것은 의견 발표와 개인적인 혹평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심지어 종교적인 활동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것들은 목회자들과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나타나서는 안 된다. 교회의 봉사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에만 초점을 맞추어 수행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그들의 특별한 조직을 가지고 교회 내에 들어오게 될 때, 하나님의 진리가 품성 안에 있는 날카로운 점들을 부드럽게 하고 진정시키지 않으면, 교회는 영향을 받아서 평안과 조화가 이 이기적이고 성화되지 않은 특질에 빠져서 희생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심령을 살피고 스스로의 생애를 정결하게 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서 그들의 형제들의 잘못을 찾아내려고 면밀히 살핀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초래한다. 교회의 각 교인들은 그들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떠나 자신들의 연약한 형제들에게 거치는 원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스스로의 영혼을 위해 열심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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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품성 안에 있는 인간적인 요소를 가진 그대로 사람들을 취하셔서, 그들이 그분에게서 훈련을 받고 당신에 대해 배울 것 같으면 그분의 사업을 위해 그들을 교육시키신다. 일부 교인들의 심령에 있는 비통함과 질시와 불신과 시기와 증오의 뿌리는 사단의 작품이다. 이런 요소들은 교회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 형제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열성은 지식에 따른 열심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증거와 관계가 없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