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 깊이 생각하고 돌보는 일을 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데 있어서 개인적 노력과 연합된,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서 습득된 능력은 그 사람을 매일의 의무를 위하여 준비시키며, 아무리 모진 환경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시켜 준다. 우리가 날마다 만날 수밖에 없는 시험들은 기도를 필수적인 일로 만든다.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켜질 수 있도록, 우리는 마음의 갈망들이 도움과 빛과 능력과 지식을 달라는, 말없는 기도로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생각과 기도는 시간을 진지하게, 충실하게 활용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일과 기도, 두 가지 모두 그리스도인 품성을 온전케 하는 데 필요된다.
우리는 이중 생활, 즉 생각과 행동의 생활, 조용한 기도와 열렬하게 일하는 생활을 살아야 한다. 진리의 빛을 받아 온 모든 사람들은 불신자들의 길에 빛 줄기를 비쳐 주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들은 교회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기관들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읽혀지는 산 편지가 되기를 요구하신다. 매일 열렬한 기도로 그 능력, 그 지지, 그 권세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은 고상한 포부, 진리와 의무에 대한 명확한 인식, 드높은 행동의 목적 그리고 의에 대한 끊임없는 주림과 목마름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계속 유지하는 가운데 그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빛, 평화, 평온을 발산하고, 그들 앞에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사업의 이익을 위해 흔들림 없이 충성하는 모본을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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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관들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거의 전적으로 부족하다. 자아가 다스리고 자아가 통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늘은 거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 사람들이 그들이 영원한 세계의 바로 경계선에 있으며, 그들의 미래의 관심사가 그들의 현재 행동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이들 기관에 고용되어 일하는 일꾼들에게 현저한 변화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속임수에 마비되어 있다. 그들은 마술에 걸린 땅에서 잠들어 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건만, 그들은 하나님도, 미래도, 하늘도, 의무 태만이나 책임 회피에 대한 아무런 형벌도 없는 양 부주의하고 무관심한 채로 있다. 그러나 각 사람의 운명이 각자의 행위대로 결정될 때가 신속히 다가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늘의 원부 (原簿) 에 더럽혀진 기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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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꾼들이 그들 자신의 책임에 대하여 각성할 때, 그들이 있는 그대로 그들의 오염된 영혼을 하나님 앞에 놓을 때, 그리고 그들의 열렬한 기도가 그분의 능력을 붙잡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각성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무관심과 불충실로 말미암아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보게 될 것이다. 그 때 그들은, 만일 지성과 재능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계발되고 증진되었더라면 그들이 풍성한 경험을 갖고 그들의 동료 인간들을 구원하는 일에 도구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도 오로지 낮은 표준에 도달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무궁한 세월을 통하여 은혜의 시기 동안에 낭비된 기회의 상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기관들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은 종교적 특권을 너무도 소홀히 해 왔다. 이런 특권들을 무관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사업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사람들은 악한 천사들과 연결되며, 흑암의 구름이며, 다른 사람에게 방해거리가 된다. 그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기관들의 각 부서는 하늘 천사들이 임재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께서 영혼의 성전에서 세속성과 쾌락을 사랑하는 일의 더러움을 씻어 내실 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의무를 신실히 행하고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유리함을 거두어들이려고 열망하면서 기도 모임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신실한 일꾼은 자신을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광선 아래 직접 두기 위해 모든 기회를 활용할 것이며, 이 빛은 다른 사람들에게 반영될 것이다.
그리고 기도 모임에 신실하게 참석해야 할 뿐 아니라 매주 한 번씩 기도 모임이 열려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많은 자비하신 일들이 숙고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불평, 의심 그리고 불신에 대하여 마음껏 말하듯이, 우리가 받은 자비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그렇게 표현할진대,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낙담과 우울함을 끼치는 대신에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길에서 항상 좌절거리들만 보고 시련과 고초에 대하여 말하는 불평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치르신 무한한 희생을 깊이 명상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십자가에 비추어 그들이 받은 모든 축복을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림을 받으시고 우리의 슬픔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드릴 이유를 보게 될 것이며, 우리의 생각과 갈망은 그리스도의 뜻에 굴복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스러운 축복 가운데서 우리는 무한한 사랑의 무수한 증거들과, 곁길로 나가는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애절한 동정을 훨씬 뛰어넘는 자애로운 동정에 대한 무수한 증거를 식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비추어 하나님의 품성을 연구할 때 우리는 자비, 자애로움, 그리고 용서가 공평과 공의와 융합된 것을 보게 된다.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요일 3:1). 보좌 가운데서 우리는 사람을 하나님께 화목시키고 하나님을 사람에게 화목시키기 위하여 견디신 고통의 흔적을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지니신 분을 본다. 측량할 수 없는 자비는 우리에게 무한하시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지만 당신의 아들의 공로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께로 받아들이시는 아버지를 계시해 준다. 오로지 불행과 절망만을 가져다 줄 것 같았던 복수의 구름은 십자가에서 비쳐 나오는 빛으로 비쳐 볼 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글이 거기 기록되어 있음을 드러내 준다. 살라, 죄인아, 살라! 너희 참회하고 믿는 영혼들아 살라! 내가 속전을 지불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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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 주위에 모여야 한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명상의 주제, 대화의 주제, 그리고 우리의 가장 기쁜 감정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을 우리 마음에 생생히 기억하고, 그분의 위대한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사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손에 모든 것을 기꺼이 내맡기려는 우리의 마음 자세를 표현할 목적을 위하여 이런 특별한 방법들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하늘 가나안의 언어를 말하고, 하늘 시온의 노래를 부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십자가의 신비와 영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동료 인간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일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고 느끼게 될 것이다.
41 장 — 서원의 신성함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간략하면서도 비참한 역사는 영감의 붓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모든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이 중요한 교훈은 우리 백성들의 마음에 충분한 무게로 깨달음을 주지 못했다. 유죄 선고를 받은 이들이 예시하는 이 중대한 범죄의 특성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복적 공의에 대한 이 두드러진 증거는 두렵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러한 형벌을 가져올 죄를 반복하는 것에 대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 범죄한 부부의 품성을 비뚤어지게 한 큰 죄는 이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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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는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 특권을 가졌다. 전달된 말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하나님의 자비의 감화는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지상의 소유를 붙들고 있는 그들의 이기적 마음에서 놓이게 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 감화를 받고 있을 때 그들은 특정한 땅을 주께 드리기로 서원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이 하늘의 영향 아래 있지 않게 되자 그 감화력은 약화되고, 그들은 의심하기 시작하며 그들이 한 서원을 이루는 데서 물러섰다. 그들은 너무 성급했던 것으로 생각하고 그 문제를 재고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사단이 즉시 들어가서 그들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
이 사건은 사단의 첫 접근을 방어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먼저 탐욕을 품었다. 그 후 하나님께 바치기로 엄숙하게 서원한 것을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드리기 아까워했다는 사실이 형제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속이게 되었다. 그들은 그 문제를 함께 거듭 이야기하고 땅값 얼마는 드리지 않기로 고의적인 결정을 했다. 그들의 거짓이 알려지자 그들은 즉각적인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이 속인 주께서 그들을 찾아내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드로는 말했다.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3, 4).
교인들의 수효가 신속하게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교회가 타락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특별한 모본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당시에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공언한 모든 사람들과 그 후에 그분의 이름을 믿노라고 공언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서원의 이행에 있어서 성실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경고로 주어졌다. 그러나 속임과 거짓말에 대한 이 두드러진 형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죄들이 자주 그리스도 교회에서 반복되어 왔고 우리 시대에도 널리 파급되어 있다. 유사한 방법으로 행동하고자 유혹을 당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 예증을 하나의 경고로 주셨음을 나는 보았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그분께 드리지 않음으로 그분의 것을 도둑질하고, 진리의 빛과 지식을 땅 위의 어느 곳에나 확산하려는 그분의 경륜을 방해하는 일을 통해, 이기심과 사취가 교회 안에서 매일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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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의 전진이, 당신의 지혜로운 계획으로 백성들의 개인적 노력과 자원하여 드리는 그들의 헌금에 의존하도록 하셨다. 구속의 위대한 계획에서 인간의 협력을 받아들임으로 그분은 인간에게 두드러진 명예를 부여하셨다. 목사는 보냄을 받지 않고는 전파할 수 없다. 빛을 나누어주는 일은 목사들에게만 주어져 있지 않다. 각 사람은 교인이 될 때 그가 공언하는 진리를 생애에 실천함으로 그리스도의 대표자가 될 것을 스스로 서약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분이 승천하시면서 하도록 맡겨 주신 그 사업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
지상에서 그분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분의 도구가 되는 기관들은 유지되어야 하고 출판소들은 세상의 각 곳에 전해질 진리를 출판하는 일에서 큰 일을 하도록 설비들을 갖추어야 한다. 이 기관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므로 십일조와 자원해서 드리는 헌금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그 모든 분야에서 사업을 수행해 나가기 위한 자금이 필요해질 것이다. 진리로 돌아와서 그분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 자들은 그분에게 자원하는 희생과 헌금을 드림으로 그리스도와 동역자가 될 수 있다. 교인들이 마음속으로 자금에 대한 요청이 더 이상 없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이 사실상 하나님의 사업이 발전하지 않아도 만족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 28:20-22). 야곱이 주께 서원하게 된 환경은 우리 시대에 남녀들이 주께 서원하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에게 약속된 줄 알고 있었던 그 축복을 죄된 행동을 통해 얻었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현재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무리 낙담될지라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그분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부족을 크게 나타내었다. 그는 자기가 탐하던 자리에 앉았기에 에서의 분노에서 생명을 건지기 위해 도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손에 지팡이 하나만을 가지고 그는 황량한 지방을 지나 수백 마일을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용기는 꺾이고 분노한 형에게 추적당하지 않기 위해 사람을 피하고자 애쓰면서 그는 자책과 겁에 질려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을 위로해 줄 하나님의 평안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를 상실했다는 생각으로 당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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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의 여행이 끝나 가고 있다. 그는 피곤하고 허기지며, 가정을 잃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이런 일이 자신에게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절망의 검은 구름이 그를 둘러싸고, 그는 자신이 버림받은 자임을 느낀다. 그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공포로 가득해지고 감히 기도할 엄두도 못 낸다. 그러나 그는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이전에 결코 느껴 보지 못한 하나님의 보호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낀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죄를 고백한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어떤 증거를 보여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그의 답답한 가슴은 아무런 안도감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는 완전히 자신을 잃고 그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그를 버린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돌을 모아서 베개를 삼고 하늘을 유일한 이불로 삼고 있는 이 고독하고 슬픔에 눌린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다.
야곱은 밤중의 이상을 통하여 땅에 세워져서 꼭대기가 별무리보다 더 높은, 가장 높은 하늘에까지 닿은 신비한 사다리를 본다. 천사들은 환한 광채가 나는 이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에게 땅과 하늘 사이의 교통의 길을 보여준다. 자비와 보호와 장래의 축복의 약속을 새롭게 해주는 한 음성이 그에게 들린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6) 라고 말했다. 그는 하늘의 사자들을 보고자 기대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의 열렬하고 놀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만 땅 위에 있는 물체들의 어두운 윤곽들과 위로는 빛의 보석으로 빛나는 하늘뿐이었다. 사다리와 빛나는 사자들은 사라지고 그는 상상을 통해서만 그 위에 계신 영광의 왕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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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밤의 깊은 적막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에 접하였다는 생생한 인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마음은 그가 멸절되지 않은 데 대한 감사로 충만해졌다. 그 날 밤 그는 더 이상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룩한 기쁨과 함께 깊고 열렬한 감사가 그의 영혼을 채웠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창 28:18). 그는 거기서 하나님께 엄숙히 서원했다. 야곱은 은혜의 이슬로 새 힘을 얻고 하나님의 임재와 보증으로 격려를 받자 서원을 하였다. 거룩한 영광이 사라지자 그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처럼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서원에 충실했고 그가 한 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계시가 단지 꿈에 불과한 것이고 그가 서원할 때 지나치게 흥분했으므로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였다. 그러나 그 때는 그가 주께 진 빚을 성실히 갚았을 때였다. 야곱은 부자가 되어 있었고 심히 많은 양의 재물이 그의 소유로부터 주님의 창고로 옮겨졌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야곱이 성공한 그 점에서 실패한다.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자들이 그들의 소유를 보유하려는 가장 강한 경향을 갖는다. 그들이 재산에 비례되는 액수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야곱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렸고, 십분의 일을 사용한 것도 계산하여 그가 이방에서 서원대로 할 수 없던 때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 십일조의 이익도 주께 드렸다. 그것은 많은 양이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서가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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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되는 양은 주어진 양에 따를 것이다. 위탁된 자본이 많을수록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돌리도록 요구하시는 예물은 더욱 많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일만 달러 혹은 이만 달러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십일조 제도에 따른 부분뿐만 아니라 속죄제와 감사제를 당신께 드리기를 요구하신다. 레위기의 제도는 재산을 성별하는 것으로 두드러져 있다. 우리가 십일조를 유대인들이 종교적 목적으로 드리는 헌금의 표준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당신의 요구를 최고의 것으로 삼으시고 거의 모든 물품에서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있도록 요구하심으로 그들이 그 시여자를 기억하게 하셨다. 그들에게는 첫아들, 가축의 첫 새끼, 수확의 첫 열매를 위한 속전을 지불하도록 요구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추수하는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 놓도록 요구되었다. 거두어들이다가 손에서 떨어진 것은 무엇이든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남겨 두었고 칠 년마다 한 번씩 그들의 땅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절로 열매를 내도록 묵혀졌다. 그 다음에는 희생제, 속건제, 속죄제, 7년마다 모든 빚을 탕감해 주는 일들이 있었다. 또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후한 대접과 선물을 위한 갖가지 비용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세금이 있었다.
일정한 기간마다 율법의 완전성을 보존하기 위해 백성들은 충실하게 그들의 서원을 이행한 여부에 대하여 조사를 받았다. 양심적인 소수의 사람들은 종교적 사업의 이익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모든 수입의 약 삼분의 일을 하나님께 돌려드렸다. 이러한 헌금액은 백성들의 특수한 계층에서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출되고, 요구액은 소유액에 비례하였다. 이 모든 체계적이고 정규적인 헌금 외에도 광야에서 성막을 세울 때나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울 때처럼 자원하여 드리는 헌금을 요구하는 특별한 목적들이 있었다. 이러한 징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업을 유지하시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백성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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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한 자각이 한 백성으로서의 우리 중에 있어야만 한다. 헌금하는 의무를 소홀히 할 경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매일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기 때문에 심령의 가책을 느끼는 자들은 거의 없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일부러 혹은 우연히 이웃에게 급료를 충분히 지불하지 않거나 정당한 빚 갚기를 거절한다면, 그의 양심이 마비되지 않는 한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를지라도 그는 안식을 얻지 못한다. 소홀히 한 서원과 갚지 않은 서약들이 많을지라도 이 일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가. 이러한 의무 불이행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새롭고 보다 깊은 죄의 자각을 느껴야 한다. 양심은 일깨워져야 하고 이 문제에 열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계산서가 제출되어야 하고 그분의 요구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이 어느 정도로 풍부하든지 적든지간에 그리스도인 사업가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물에 정확히 비례될 것이다. 부의 기만은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멸망시켰다. 이 부한 사람들은 그들이 청지기라는 사실과 “네 보던 일을 셈하라” (눅 16:2) 는 말씀이 그들에게 떨어질 날이 신속히 이르러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였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각 사람은 주어진 선물을 현명하게 사용할 책임이 있다. 비유에 나오는 그 가련한 사람은 가장 적은 선물을 가졌기 때문에 가장 적게 책임을 느꼈고 그에게 위탁된 달란트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바깥 어두움에 내어 쫓겼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막 10:23) 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의 교훈에 놀랐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혼을 인도하는 일에 성공적으로 일한 목사가 세속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그의 거룩한 사업을 포기할 때 그는 배교자라고 불리게 되고 그가 잘못 사용한 그 재능에 대해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사업가, 농부, 기술자, 상인, 법률가로 일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교인이 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재능이 전혀 다를지라도 개인적 노력과 재물을 통해 하나님의 사업을 진전시켜야 할 그들의 책임은 목사들에게 지워진 책임 못지 않다. 복음을 전하지 않을 경우 목사에게 주어지는 화는, 사업가가 그의 다른 재능으로 동일한 결과를 성취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동역자가 되지 않을 때 분명히 그에게도 똑같이 주어질 것이다. 이 사실이 개인에게 똑똑히 자각될 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과도한 말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사실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행위가 계속 이와 모순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