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4 219-228 (220일)

그대는 너무도 마음을 터놓지 않고 살아 왔다. 그대는 그 사업의 여러 다른 부서에서 종사하는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대는 이해심 있게 처신하기 위하여 마땅하리 만큼 친밀하게 그들과 의논하지 않았다. 그대가 이렇게 했더라면 그대는 더욱더 능률적인 일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너무도 과도하게 그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처신해 왔고, 그대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수행해 왔다. 일꾼들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가 결여되어 왔다. 그대 편에서의 이러한 친밀성의 부족 때문에, 그리고 그대가 너무도 빈번히 충동과 느낌에 의해 처신하여 그들이 그대에게 접근하기를 두려워해 오기 때문에, 그대를 도울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 그들의 지식을 그대에게 나누어주기를 꺼려 왔다.

세상의 구주께서는 천사들의 숭경을 받으셨다. 그분은 하늘 궁정에서 왕자이셨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의 영광을 제쳐놓으시고 당신의 신성을 인성으로 옷 입히셨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가 되셨다. 그분은 하늘의 부요와 영광을 떠나셨고, 우리가 당신의 가난을 통하여 부요하게 될 수 있도록 가난하게 되셨다. 3년 동안 그분은 집 없는 방랑자로서 이곳 저곳으로 여행하셨다. 그러나 이기적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적은 세상적 보화를 버리도록 요구받거나, 그분께서 기꺼이 자신의 귀중한 생명을 주신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활동하도록 부름을 받으면 불평하고 투덜댈 것이다. 오, 이 얼마나 큰 배은망덕인가! 어떤 사람도 그가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하여 어떠한 희생도, 그리고 온갖 희생도 할 수 있다고 느끼기 전에는 구속의 축복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위해 행해진 모든 희생은 드린 자를 부요케 하며, 그분을 위하여 견딘 모든 고통과 궁핍은 하늘에서 이긴 자들의 최종적인 기쁨을 증가시킨다.

그대는 참 희생과 진정한 자아 부인에 대해서 별로 알고 있지 못하다. 그대는 곤궁과 그대의 정력의 완전한 소진 (消盡) 등에 대해서는 거의 경험이 없다. 그대의 짐은 가벼웠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중대한 책임들을 져 왔다.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던 젊은 청년은 이런 대답을 들었다. “계명을 지키라.” 그는 자신 있게 그리고 자랑하듯이 대답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내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 예수께서는 이 젊은이를 불쌍히 바라보셨다. 그분은 그를 사랑하셨다. 그분은 그가 하신 말씀들이 이 청년과 자신을 영원히 분리시키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의 영혼의 악덕의 중심부를 건드리셨다. 그분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 젊은이는 하늘을 원하기는 했지만, 그의 지상 보화로부터 그의 애정을 떠나게 할만큼 충분히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생명에 들어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조건들에 굴복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매우 슬퍼했다. 왜냐하면 그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며, 그는 그 재산이 영원한 상급과 맞바꾸기에는 너무도 귀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구원을 받으려면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었다. 그 답이 이제 주어진바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세상적 마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그의 부를 희생할 수 없었다. 그의 결정은 하늘을 포기하고 그의 세상 보화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이의 운명을 확정시킨 바로 그와 동일한 결정을 현재 내리고 있는지!

-220-

우리 중 어느 누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인가 할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열렬히 그것을 부여잡고 최대의 열심을 다하여 그분과 동역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믿음을 매우 혹독하게 시험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바로 그 시련들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더욱 더 가깝게 인도하도록 계획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의 모든 짐들을 그분의 발 앞에 내려놓고 그분께서 그것과 교환하여 우리에게 주실 평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대는 새로운 회심을 필요로 한다. 그대는 진리를 통하여 성화되고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을 가져야 하며, 온유하고 겸손하고, 그대의 구속주로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할 필요가 있다. 그대의 교만과 독립은 하나님의 성령의 복된 감화에 마음을 닫고 있으며 마음이 딱딱하게 다져진 대로 (大路) 처럼 감수성이 무뎌지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아직도 여전히 믿음의 큰 공과를 배워야 한다. 그대가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 그대가 예수에게 떨어져 완전히 깨어질 때, 그대는 승리, 즉 그대가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그 승리의 기쁨을 상급으로 받을 것이다. 그대가 명확한 안목으로 과거를 회고해 볼 때 생애가 오로지 당혹 뿐이요 무거운 짐뿐인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때 예수께서 친히 그대 가까이 계셔서 그대를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노력하고 계셨음을 볼 것이다. 그대의 아버지께서는 그대 곁에 계셔서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그대를 굽어보고 계시며, 제련자 (製鍊者) 가 귀한 광석을 정련하듯이 그대의 유익을 위하여 고통을 주고 계시다. 그대가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왔을 때, 그분은 위로하고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그대 가까이 계셨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좀처럼 보지 못하며, 그분이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대로 그분의 도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결코 되어 있지 않다.

-221-

그대가 병들었든지 건강하든지, 풍부하든지 곤궁할 때를 막론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일편단심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살겠다는 단호한 결심으로 하나님께서 공개하시는 섭리를 따라가기를 배울 때 그대는 얼마나 큰 승리를 얻게 될 것인가. 자아는 매번 접촉될 때마다 살아 있고 떨리고 있다. 자아는 그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복하고 신실한 자들의 상급을 받을 수 있기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20 장 — 조화의 필요

하나님의 영께서는 진리 안에 있는 신자들 가운데 분열과 다툼이 있는 곳에는 거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런 감정들이 표현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마음을 점령하고 그리스도인 교회를 특징지어야 할 평화와 사랑을 몰아낸다. 그것들은 가장 충만한 의미에서 이기심의 결과이다. 이 악은 지나친 자부심이나 다른 사람들의 인정 (그 인정이 받으려고 하지 않는데 얻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을 받고자 하는 과도한 갈망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자기를 높이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에 의해 포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분의 거룩한 은총으로 말미암는 축복을 받기를 기대할 필요가 없다.

건강 기관에서의 도덕적 및 종교적 영향은 하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고상하게 되어야 한다. 이기심의 방종은 그 곳에서 확실히 하나님의 영을 슬프시게 할 것이다. 의사들, 감독자들, 그리고 조력자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조화롭게 일해야 한다.

사도 유다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유 22). 이런 의심은 편파적인 정신으로 행사되어서는 안된다. 다음과 같이 암시하는 정신의 뒤를 밀어 주어서는 안된다. “네가 나에게 호의를 보이면 나도 너에게 호의를 보일 것이다.” 이것은 성화되지 않은 세상적 정책,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정책이다. 이것은 이득을 얻기 위하여 호의와 찬탄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통하여 이득을 얻기를 기대하면서 특정인들을 편애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는 다른 사람보다 우리가 더 큰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풂으로 그들의 선한 의지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잘못을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각 사람은 시기, 적대, 불신, 흠을 찾는 것, 그리고 불화의 정신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222-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른다. 우리는 한 가족의 자녀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쌓아올리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존경과 영향을 약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을 때, 우리는 원수를 기쁘게 하고 우리가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그분을 슬프시게 한다. 예수께서 자신의 고귀한 생애에서 나타내신 친절과 자비는, 우리가 동료 인간들과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들인 자들을 취급하는 방식에서 우리에게 모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이롭게 하시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의 은총들에 대하여 너무도 무관심하다. 무한한 친절로 사랑을 받았건만 우리들 중 다수가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너무 적다. 우리는 오류 가운데 있다고 상정 (想定)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너무도 가혹하며, 우리 자신의 행위에 관한 아주 작은 비난이나 의문에 대해서는 너무도 민감하다.

암시가 던져지고 서로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이 던져지지만, 동시에 이런 암시와 비평을 던지는 바로 그들은 자신의 실패들에 대하여는 눈이 멀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실수를 볼 수 있으나 그들 자신의 실수를 볼 수 없다. 우리는 날마다 하늘의 은택을 받는 자들이며,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하는 감사가 넘쳐 나와야 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이웃에 대하여 동정하도록 만들어야 하며, 그들의 관심사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도록 해야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생각과 묵상은 사단의 암시들에 대해 영혼의 통로를 닫을 것이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날마다 입증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분의 은총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그분의 간청에 무관심하다. 그분은 당신의 친절의 영과 당신의 사랑과 관용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려고 애쓰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친절의 표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며 그분께서 우리가 배우기를 갈망하시는 사랑의 공과에 대하여 별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하만과 같이 하나님의 모든 은총들을 잊는다. 왜냐하면 모르드개가 그들 앞에 있고, 욕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이 당신의 원수들을 위해 그분의 고귀한 생명을 주신 우리의 사랑하는 구속주의 정신인 사랑이 아니라 증오와 적의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일한 아버지를 모시고, 동일한 불멸의 본향을 향하여 가고 있으며, 동일한 엄숙한 믿음을 향유하고 동일한 시험하는 기별을 믿노라고 공언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싸우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처럼 서로 싸우고 있다. 사업의 같은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서로 사이가 나쁘며,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영과 불화하고 있다.

-223-

칭찬에 대한 사랑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부패시켜 왔다. 건강 기관과 관련을 맺어 온 사람들이 때때로 수립된 계획에 대하여 흠을 찾는 정신을 나타내 왔으며, 사단은 그들에게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할 권한을 주었는데, 그들은 이 사람들을 비난받을 점이 없다고 받아들인 반면에 죄 없는 자들은 잘못 행했다고 고소를 당해 왔다. 자기 자신의 헛된 행위를 기뻐하고 자신의 탁월한 자질을 자랑하면서 자아를 높이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열등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쓰며, 무정한 자가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을 주장하는 것은 사악한 교만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의 교훈에 유의할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분부하셨다.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기초되어 있으며, 그것은 서로 사랑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감사와 겸비와 오래 참음이 가득하다. 그것은 자아를 희생하고 오래 참고, 자비롭고 용서성이 많다. 그것은 전 생애를 성화시키고 그 영향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뻗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적개심이나 시기심을 품을 수 없다. 영원한 사랑의 하늘 원칙이 마음을 채울 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것이다. 그저 그들로부터 호의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행동의 원칙이며, 품성을 변화시키고, 충동을 제어하며, 정욕을 통제하고 적의를 굴복시키고 애정을 향상시키고 고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단순히 “나와 나의 것” 을 포함하도록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으며, 천사 일꾼들의 그것과 조화된다. 영혼 속에 이 사랑을 품으면, 그것은 전 생애를 향기롭게,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정련 (精練) 시키는 영향을 끼친다. 그것을 소유하면 우리는 운명의 신이 미소를 짓든지 얼굴을 찌푸리든지 행복할 것이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을 또한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정신이다. 영혼에게 참된 고결함과 존엄 (尊嚴) 을 주고 우리의 생애를 주님의 그것에 동화되도록 하는 것은 하늘의 단장 (丹粧) 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좋은 특질들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우리가 자신이 아무리 존귀하고 세련되었다고 간주할지라도, 영혼이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사랑의 하늘 미덕으로 침례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선함이 부족하며, 모든 것이 사랑과 화합뿐인 하늘에는 부적합하다.

-224-

이전에 하나님을 사랑했고 날마다 그분의 은총을 누리며 살았던 어떤 사람들이 지금은 끊임없는 불안 가운데 있다. 그들은 자아를 육성시키고 있기 때문에 어둠과 절망적인 우울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도 열심히 자신들을 소중히 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각해야 할 다른 모든 것들은 이것에 파묻혀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것으로는 어떤 사람도 행복을 얻을 수 없도록 하셨다. 우리 주님의 기쁨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수고와 수치를 견디는 것에 있었다. 그분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모본을 따르고 우리 동료 인간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사는 데서 행복하게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짐을 지라는 주님의 초청을 받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과한 멍에를 메고 우리 자신의 짐을 지는 데서는 쉼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멜 때는 영혼에게 쉼이 있다. 주님을 위하여 어떤 위대한 일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선을 행하고, 자아를 잊고, 자아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햇빛을 가지고 감으로써 그들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자애로운 동정심이 나타내져야 할 필요성이 매우 크다. 죄를 그럴듯한 말로 발뺌하고, 악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에 모욕을 끼치는 그런 맹목적인 동정이 아니라, 생애를 지배하는 원칙이 되는 사랑,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선행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사랑이 크게 필요된다.

-225-

건강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병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은 그분의 특별한 돌봄의 대상이었다.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분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병자들을 치료하도록 사명을 주셨다. 70인을 보내실 때, 그분은 그들에게 병자를 고치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도록 명하셨다. 그들의 육체적 건강이 제일 먼저 돌봄을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사도들이 전파할 그러한 진리들로 말미암아 접촉될 수 있도록 길이 준비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상의 구주께서는 설교하시는 것보다 병 걸린 자들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셨다. 지상에 있는 그분의 대표자들인 그분의 사도들에게 하신 그분의 마지막 분부는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치는 것이었다. 주께서 오실 때 그분은 병자들을 방문하고 고통 당하는 자들의 궁핍을 덜어 준 자들을 칭찬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소한 일들의 강력한 영향과 그것이 영혼의 구원에 미치는 관계를 배우는 데 더디다. 건강 기관에서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일할 수 있는 넓은 밭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들이 등한히 여김을 받고 있는 동안 큰 존경으로 우러름을 받는 특권 받는 소수가 되기를 의도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하늘의 왕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자신을 낮추사 가장 비천한 자들에게 수종드셨고, 사람이나 지위에 따라 사람을 편애하지 않으셨다.

사업에 전심을 다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건강 기관에서 그들의 보호 아래 맡겨진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데 있어서 주님을 위해 할 일이 충분함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 주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가장 굴욕적인 직무를 수행하신 후 당신의 모본을 따르도록 그들에게 권고하셨다. 이것은 그들이 가장 낮은 성도보다 우월감을 느껴서는 안된다는 사상을 그들 앞에 계속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고귀한 신앙을 공언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우리 주님의 속히 오심을 고대하는 사람들은 그들 주위의 세상과는 다르고 또 구별되어야 하며, 선한 일에 열심인, 특이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과 구별시키는 특색들 중에 그들의 겸비와 온유함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헛되이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평안이 여기 있다. 명예와 지위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동등되거나 아마도 더 높고자 하는 야심을 갖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하고 신실한 종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러한 자아 확대의 정신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던 때에도 사도들 가운데 다툼을 일으켰다. 그들은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크냐 하는 것으로 논쟁을 벌였다. 예수께서는 앉으시고 열두 제자를 부르사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 9:35).

-226-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녀의 아들들이 그분의 왕국에서 하나는 우편에, 다른 하나는 좌편에 앉도록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왕국의 명예와 영광은 이 세상의 명예와 영광과는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 주셨다. 크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겸비하게 시중 들어야 하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 자녀들에게 봉사자요 종으로 일하셨듯이, 종이 되어야 한다.

다시 우리 구주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지위와 이름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8-12).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거룩한 율법을 율법사에게 상기시키셨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눅 10:37).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일어난다. “누가 나의 이웃이오니까?” 그분의 대답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우리의 동정과 친절한 봉사가 필요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의 이웃이라고 가르친다. 고통 당하고 빈곤한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핍을 우리가 알게 되었을 때 가능한 한 그것들을 경감시켜 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 비유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채택하는 것이 좋을 한 원칙이 도출되었다. 먼저 궁핍한 자들의 세속적 필요를 채워 주고 그들의 신체적 필요와 고통을 채워 주라. 그러면 그대는 마음에 접근할 길이 열린 것을 발견할 것이며, 그곳에 미덕과 종교의 좋은 씨를 뿌릴 수 있다.

-227-

행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바 그런 품성에 도달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리스도의 현저한 특색의 하나는 그분의 자아 부정과 자선 (慈善) 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오지 않으셨다. 그분은 두루 다니며 선을 행하셨으며, 이것이 그분의 양식이요 음료였다. 우리는 구주의 모본을 따름으로써 그분과 거룩한 교통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날마다 그분의 품성을 모방하고 그분의 모본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축복이 될 것이며, 현세에서는 자신을 위하여 만족을, 내세에서는 영원한 상급을 얻을 것이다.

21 장 — 신실한 경고에 대한 반대

1875년 1월 3일,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일하실 수 있기 전에, 캘리포니아의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해져야 할 큰 사업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진리의 원칙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그들이 하나님과 바르다고 자위하고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참된 증인의 권고에 유의하려고 부지런히 인내심 있게 열성을 다하여 애씀으로써만 정상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그들은 냉담하고, 형식적이고, 뒤로 물러간 상태에 있다. 참된 증인께서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5-19).

-228-

G 형제여, 그대가 그것에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에게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그대의 영적 능력과 은혜 안에서의 성장은 그대를 구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신 그대의 구주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사랑의 봉사와 선행에 비례될 것이다. 그대는 다음과 같은 사도의 당부를 받고 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 6:2).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신앙을 단순히 공언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대는 일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대는 그분의 율법을 범하는 자이다. 그대는 그대의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대는 마지막 여섯 계명을 순종하는 생애를 살거나 그대의 이웃을 그대 자신처럼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대는 하나님이나 그대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대가 행할 용의가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도움으로 영혼들이 진리로 인도될 수 있도록 그대에게서 선행, 자아 부정, 자아 희생, 그리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헌신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선행만으로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지만 우리는 선행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과 능력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후에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는 우리가 큰 희생을 했으며, 우리가 우리의 연약한 봉사의 대가로 큰 상급을 받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것과 육적인 안전감 (安全感) 은 마치 그대를 강철 줄로 묶듯이 그대를 사방으로 차단시켜 놓았다. 그대는 열심을 내고 회개할 필요가 있다. 그대는 그분께서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캘리포니아에서 하고 있는 일을 반대하는 방침을 따르는, 불평을 가진 자들과 동조함으로써 불행하였다. 잘못된 사람들이 그대의 동정을 얻어 왔다. 그대의 마음이 하나님과 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는 그분께서 그대에게 보내신 빛을 받지 않았다. 그대는 주께서 사랑으로 그대에게 보내신 견책을 저항하려고 센 고집을 부렸다. 그대는 이런 일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대 자신의 참된 상태에 관하여 그대의 눈을 감으려고 시도했다. 그대가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보내신 견책과 경고의 음성에 유의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대가 그대의 품성의 결점들을 개혁하든지 그대로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대는 어느 날 그대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항하는 정신으로 싸우면서 반항적인 입장에 섬으로써 무엇을 상실해 왔는지를 깨달을 것이다. H 목사에 대한 그대의 증오심은 놀라울 지경이다. 그는 이 해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견디고 희생하고 수고해 왔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한편 마음과 생애에 있어서 성별되지 않은 채 그대는 I와 J와 연합하여 잔인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종을 감히 다루려고 했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시 105:15)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대가 지금까지 해 온 대로 백성들을 위하여 빛과 진리를 주셔서 파송하신 사람들에 대항하여 맞서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그대의 영향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사 선포하도록 하신 진리로부터 영혼들을 돌이키게 하는지 조심하라. 이는 무서운 화가 그대 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증언 4권 pp. 219-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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