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죄가 이스라엘 온 군대를 패배시켰다. 그 형제에 대해서 한 사람이 취한 그릇된 노선은 그 잘못을 발견하여 착취를 당하는 자의 일이 옹호될 때까지 그분의 백성으로부터 하나님의 빛을 돌아서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부드러운 감정과 식별력을 소유하도록 요구하시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넓어지고, 그들의 정서가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인색한 것이 아니라, 폭넓고 깊게 되기를 요구하신다. 고상한 동정심과 폭넓은 마음, 사심 없는 자선이 필요하다. 그럴 때에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형제들에 대한 친절한 동정심, 부드럽고 사려 깊은 사랑과 관심을 메마르게 하는 이기심 때문에 교회가 고통을 겪고 있는 한, 모든 덕성은 부식된다. 이사야의 금식에 대해서 연구해야 하며 약속된 풍성한 축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유하도록 지시된 원칙들이 그들 안에 있는지의 여부를 식별하려는 정신으로 면밀한 자기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가난한 자와 고통을 겪는 자가 학대를 받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신다. 만일 그들이 모든 멍에를 부수어 학대받는 자를 풀어 준다면, 또한 그들이 비이기적이고 궁핍한 자들에 대하여 친절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면, 그때에 약속된 축복들은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만일 교회 안에 맹인으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재판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맹인, 고난당하는 자, 과부와 아버지가 없는 자들의 후견인으로 우리를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언급되어 있는 걸림돌은 맹인의 발 앞에 놓아두어 걸려 넘어지도록 한 걸림돌이 아니라,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그 맹인 형제들의 영향력에 손상을 끼치고 그의 이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그의 번영을 가로막기 위해서 취하는 어떠한 노선이든지 의미한다.
맹인으로 가난하고 병든 형제, 다른 사람에게 신세 지지 아니하려고 스스로를 돕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형제를 가능한 모든면에서 그의 형제들이 격려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의 형제라고 공언하고, 자신의 모든 기능을 사용하여 신세 지지 아니하되 맹인에게 근심과 걱정을 안겨 주고 그의 길을 가로막음으로써 자기 의무를 망각한 이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의 기도를 가납하시기 전에 회개와 회복이 필요될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불행한 형제에 대해 부당하게 행하도록 허용한 하나님의 교회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저들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노력할 때까지 죄책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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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사람이 아간의 경우를 알고 있다.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위하여 그것은 신령한 역사에 기록되었는데, 특별히 말세를 만난 이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백성이 그 원수들 앞에서 수치스럽게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된 것 때문에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었다. 주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수 7:10). 너희에게서 나의 임재를 까닭도 없이 거두어 내가 수치를 안겨 주었겠는가? 까닭도 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는가? 아니다. 그분께서는 그의 기도가 응답을 받을 수 있게 되기 전에 그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수 7:11). 그분은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수 7:12) 고 선언하신다.
여기 있는 이 예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에 걸려 있는 책임에 대해서, 또한 당신의 임재를 소유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행하도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업에 대해서 몇 가지 사상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어느 교회에서든지 저들의 흑암의 원인을 찾지 아니하고, 저들 속에 있는 학대에 대해서 알아보지 아니한 죄이다. _____ 교회는 그들 속에 있는 잘못, 저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잘못에 대해서 좀더 자각할 때까지 살아 있고, 번영하는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들에 대해서 잘못을 범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모든 이의 마음 속에 동정심을 일깨우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고상하고 자비로운 감정을 행사하도록 한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그분과 조화를 이루어 일할 것이며, 그분의 모본을 따라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울 것이다. E 형제의 눈먼 것은 무서운 고통이며, 모든 사람은 맹인에게 눈이 되어 가능한 한 그의 상실을 적게 느끼도록 해주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눈을 밝혀서 이익을 얻을 만한 기회를 살피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들에게 혼란을 가져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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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를 통해서 맹인에게 발명 능력을 주심으로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이 특권에 대해서 그에게 불평을 토하고,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로부터 받을 수 있는 축복을 그에게서 도적질하는 것을 금하신다. 맹인은 시력을 상실함으로 모든 면에서 불리하다. 맹인이 흑암으로 옷 입혀진 세상 속에서 길을 더듬는 것을 보고 긍휼과 동정을 발하지 않는 마음은 정말 딱딱하기 이를 데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부드러워져야 한다. 맹인은 한 사람의 얼굴도 바라 볼 수 없으나 그 곳에서도 친절한 동정과 진실된 자비는 읽을 수 있다. 그는 천연계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창조하신 작품들 속에서 그분의 손가락을 추적할 수 없다. 실망이 그들을 휩싸고 있는 한, 그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은 그들에게 안위와 축복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시력의 축복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눈먼 것과 모든 세속적 축복을 얼마나 빨리 바꾸고자 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흑암의 세계 속에 갇혀 있고, 다른 이들은 이득을 취했을 뻔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권리들이 짓밟히고 있다.
47 장 — 동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의무
I 형제의 가족에 관한 일을 나는 보게 되었는데, 내가 이곳에 온 이래 그 일이 내 마음 속에 너무 강한 인상을 남겼으므로 나는 그것에 관해 쓰고자 한다. I 형제여 내게 보여진 바대로는 마치 문둥병처럼 그대에게 달라붙어 있는 이기심이 그대의 가정 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 이기심이 발견되어서 정복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흉악한 죄이기 때문이다. 한 가족으로 그대들은 스스로의 뜻과 쾌락과 편의를 너무 오랫동안 도모하여 왔으며, 따라서 다른 이들이 그대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대의 생각, 계획, 노력은 그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대는 자아를 위해서 살고 있다. 만일 계발하기만 한다면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것이 그대의 기쁨이 되기까지 증가하고 강화되었을 사심 없는 자비를 그대는 계발시키지 않는다. 그대에게는 인생의 목표, 곧 돈 이상의 큰 가치를 지닌 것을 그대에게 안겨줄 목적이 있다고 스스로 느낀다. 그대는 인간에 대해서 좀더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 그대는 그대의 영혼을 좀더 그리스도께 밀접하게 연결시킬 것이며 그분의 성령으로 적셔져서 그 어느 것도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그대를 떨어지게 할 수 없는 굳건함으로 그분께 밀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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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산 포도나무이시다. 만일 그대가 그 포도나무의 가지라면 그 속에 흐르는 생명의 자양분은 그대를 살찌게 할 것이요, 그대는 메마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한 가족으로서, 또한 한 개인으로서 그대들은 스스로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관련되어 있다고 공언한다. 그러나 그대를 성소의 저울에 달아볼 때, 부족함이 드러났다. 그대들 모두에게는 전적인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 후에야 비이기적이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다. 철저한 회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대의 성품상의 결점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그대에게 줄 수 없다. 그대 모두에게는 세상적 정신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2:15) 라고 말하였다. 그대의 이기적인 정신은 그대의 마음을 편협하고 왜소하게 하여 그대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게 한다. 그대에게는 순결하고 때묻지 않은 경건이 필요하다. 진리의 단순성은 그대로 하여금 다른 이의 불행에 대해서 동정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대의 동정과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성품의 이러한 특질들을 행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행하도록 주신 필생의 사업 중 한 부분이다.
십자가를 지고 비이기적인 동기로 타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중에 자아 부정을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면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자아 부정을 실천하는 어려움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대는 그리스도께로 영혼을 인도할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결코 응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 그대에게 요구하고 계신다. 우리 주위에는 동정과 사랑에 굶주린 이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궁핍과 고통과 부족 속에 있는 이들에 대해 동정과 사랑을 자연스럽게 흘려 내보낼 그 겸비한 사랑이,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대에게도 거의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인간의 얼굴 자체는 영혼의 거울로서 다른 이들에게 읽혀진 바 되며, 선악간에 현저한 감화를 끼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우리 형제를 감시하고 그들의 죄에 대해 회개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해야 할 사업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으며, 그분을 두려워하는 중에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그것을 단호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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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다른 공언하는 이들의 흠을 찾아내어 그들의 행위를 정죄한다고 해서 우리의 잘못된 것 하나라도 변명이 되거나 상쇄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우리의 규범으로 삼거나 다른 이들이 잘못을 범한다고 해서 우리의 행위 중 그 어느 것에 대해서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양심을 주셨다. 그분의 말씀 속에 대원칙들이 놓여져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그리스도인적 삶과 일반적인 행실에 있어서 우리를 인도하기에 충분하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한 가족으로서 그대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대들은 결코 그 동료 인간에 대해 인간에게 지워져 있는 의무의 짐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 하시니라”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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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영생을 얻는 조건이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우리 구주에 의해서 명백하게 진술되었다. 다치고 약탈당한 사람은 우리의 관심과 동정과 자비의 대상자들을 대표한다. 만일 우리 눈에 띄는 가난한 자, 불행한 자, 어떠한 처지에 빠졌든지 상관없이 그러한 이들의 처지에 대해서 태만하게 행한다면, 우리는 영생에 대한 보증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동정과 자비를 베풀고 있지 않는데, 이는 그들이 우리의 혈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두번째 큰 계명을 범한 자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 마지막 여섯 계명이 기초되어 있다. 한 가지라도 범한 자는 모두를 범한 자이다. 인류의 필요와 고통에 대해서 그 마음을 열지 않는 자는 십계명의 첫 네 계명 속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저들의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다. 우상이 심령과 애정을 요구하고 하나님께서 존귀함을 받지 아니하시고 절대 주권을 행사하시지 않는다.
그대들은 한 가족으로서 서글프게 실패하였다.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그대들은 계명 준수자가 아니다. 그대는 어떤 면에서는 아주 엄격하지만, 더욱 중한 것, 하나님의 심판, 자비와 사랑에 대해 등한히 하였다. 세상의 관습이 그대들에게 결코 규범이 될 수 없지만 수많은 유형의 불행에 빠진 이들을 향해서 세상이 보여주고 있는 따뜻한 동정과 사랑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이들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그들을 시험하고, 입증하고, 하나님께서 읽고 계시는 바 그들 속에 있는 것을 계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 중에 던져 놓으신 이들을 향하여 많은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행한다. 그분께서는 환난을 당한 자, 과부, 고아에 대해서 보여주는 모든 이기적 행동, 모든 무관심한 행동을 주목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죄자, 부족한 자, 율법을 범한 자” 라고 기록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어떠했는가에 따라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궁핍한 자 괴로움을 겪고 있는 자를 등한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도의 인격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 대한 의무 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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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경우가 하나님 앞에서 검토될 때, “그들이 무엇을 믿는다고 공언하는가?” 라는 질문이 발해질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행하였는가?” 를 묻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말씀을 준행하는 자였는가?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서 살았는가, 혹은 남을 축복하기 위하여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아를 부정하면서 친절과 사랑의 행실을 통해 자선을 행하였는가? 만일 기록을 통해서 저들의 성품이 친절, 자아 부정, 자선 등으로 특징지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복된 확신과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잘 하였도다” (마 25:21).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4). 그리스도께서는 그대의 현저한 이기적 사랑과 또한 타인의 재난과 궁핍에 대한 그대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슬픔과 상처를 당하고 계신다.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노력이 수없이 많이 무시되고, 명백히 상실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선을 행하는 일에 피곤을 느끼는 것에 대한 구실이 될 수 없다. 예수께서 당신이 보살피시는 나무로부터 과실을 발견하기 위해서 오시지만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시는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노력의 결과에 대해서 실망할 수 있으나,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재난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어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삿 5:23). 당신의 자녀라고 공언하는 이들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실망을 당하시는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랑에 대하여 오해의 여지가 없는 증거들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분은 당신의 가난을 통해서 우리가 부유해지도록 가난하게 되셨다. 그분은 우리가 멸망받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도록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신다고 해서, 또한 그분께서 저들에게 나누어 주신 당신의 사랑과 무한한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자가 그토록 적다고 해서, 만일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지기를 거절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끈질기고, 고통을 감내하는 노력을 장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용기가 현재 필요되는 것이지, 느릿한 낙담과 성마른 불평이 필요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일해야 하며, 우리의 성향과 쾌락을 연구하거나 우리 자신을 섬기고 우리 자신을 빛나게 하고자 할 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즉각적인 결과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어찌하여 활동하지 않으면서 실망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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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업은 단순히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선을 위해서 주님의 포도원에서 수고하는 것이다. 우리의 감화는 타인에게 축복 혹은 저주가 된다. 우리는 하늘을 위하여 완전한 성품을 형성하기 위해서 이 곳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불평을 토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쓰디 쓴 것을 기록하는 일을 벗어나서 해야 할 어떤 일을 갖고 있다. 우리의 대적은 우리가 쉬도록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좌절과 역경을 당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사단이나 사단의 감화력 아래 있는 이들이 우리를 잘 대접해 줄 것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충성되기만 하다면, 우리의 모든 고투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할 뛰어난 능력의 천사들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의 광야에서 우리를 위해서 사단을 정복하셨다. 그분은 사단보다 강하시며, 잠시 후에 사단을 상하게 하사 우리의 발 밑에 두실 것이다.
가족적으로, 또한 개인적으로 그대는 그대의 구주의 사업에 참여하여 열렬하고 활동적으로 섬기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대는 지나치게 게으르고, 그대가 할 수 있고 마땅히 짊어져야 할 수많은 무거운 부담들을 타인이 짊어지도록 하였다. 그대의 영적 활력과 축복은 그대가 수행하는 선행과 사랑의 수고에 비례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 6:2) 고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선행, 자아 부정, 자기희생, 타인의 유익을 위한 헌신을 요구한다. 우리의 선행만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지만, 선행 없이 우리는 분명히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한 후에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했을뿐 기껏해야 무익한 종이요, 하나님의 지극히 작은 은총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 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요 우리의 기쁨의 면류관이 되셔야 한다.
자기 의와 육욕적인 안전이 마치 벽처럼 그대를 둘러싸 가두어 버렸다. 한 가족으로서 그대는 독립심과 교만한 정신을 품고 있다. 이러한 요소는 그대를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다. 이것은 하나의 잘못, 곧 분별되어 정복당해야 할 결점이다. 그대가 스스로의 오류와 잘못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대는 스스로에 대해서 지나치게 좋게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대의 생애의 실수들을 보고 고백을 통해 제거하는 것은 그대에게 힘든 일이다. 거의 모든 면에서 그것이 올바르든지 그릇되든지 간에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 그대는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을 바로잡기에 너무 늦은 때가 오기 전에 그대의 마음을 겸비와 기도로 예수께 가까이 가져오고, 그대 자신을 알기 위하여 노력하라 그대가 깨어 일어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지 않는 한, 그대는 잃어버린바 될 수밖에 없다. 그대는 냉랭하고, 무감각하고, 동정심이 전혀 없는 갑옷 속에 갇혀 있다. 다른 이들과의 교제 속에 생기와 따뜻함이 거의 없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다. 그대는 그대보다도 불행한 이들의 필요와 형편에 대해서 부주의하고 무관심하다. 그대 주변에 영적으로 갈망하는 이, 말과 행실 속에 표현되는 사랑을 갈망하는 이들이 있다. 친구로서의 동정과 다른 이들에 대한 부드러운 관심의 진정한 감정은 지금까지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축복을 그대의 영혼에 안겨 줄 것이며, 선을 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에 강림하셨고 우리가 마땅히 그분의 생애를 복사해야 할 우리의 구속주와 더욱 밀접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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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의 사랑과 동정
저들에게 마땅히 주었어야 할 사랑과 동정에 굶주려 죽어 가는 이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저들의 아내를 사랑하나 너무 이기적이어서 그것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들은 거짓 위엄과 자존심을 갖고 있으며, 말과 행실로 저들의 사랑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다. 아내의 마음이 부드러운 감사와 애정의 말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결코 알지 못하는 남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동반자를 앗아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불평하면서 그들의 사랑하는 자를 그 시야에서 묻지만, 만일 그들이 그 동반자들의 내적인 생애를 바라다 볼 수 있다면, 그들은 자기의 행동이 저들이 일찍 죽음을 맞이한 데 대한 원인이 되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친절하고 예의바른 사람이 되게 하며, 자신의 의견을 그토록 완강하게 고집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이다. 우리는 자아에 대해서 죽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우리보다도 낫게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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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표준이건만, 그분의 공언하는 백성이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갔는가! 우리의 종교적 신앙은 이론적일 뿐 아니라 실천적이어야 한다.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경건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가장 작은 자의 권리에 대해서도 우리가 짓밟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당신의 몸의 지체와 우리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사랑안에 거한다.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이 숨쉬는 대기를 흐리고 냉랭하게 만들면서 날아오는 이기심의 영향력은 영혼에 질병을 일으키고, 때때로 사망에 이를 만큼 차갑게 한다.
순결하고 비이기적인 사랑과 사심 없는 자선을 계발하는 것은 그대에게 커다란 십자가일 것이다. 그대의 의견과 생각을 굽히고, 그대의 판단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그대에게 커다란 십자가가 될 것이다. 그대의 가족 중 여러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가족들을 현재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 아버지의 집에 다소간에 존재하였던 것과 동일한 정신이 그들의 난로 곁으로 날라져 왔으며, 그 가족 구성원의 외부에 속하는 자들은 그것을 느낀다. 그들은 달콤한 단순성, 그리스도와 같은 부드러움, 비이기적인 사랑이 부족하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이기적인 성격적 특성을 정복하여 참 포도나무 되신 분의 열매맺는 가지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요 15:8) 라고 말씀하셨다. 그대는 예수께서 그대 곁에 가까이 오시고, 그대의 가정과 그대의 심령 속에 그분께서 거하시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대는 올바른 것에 대한 지식을 소유해야 할 뿐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올바른 동기로부터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주어진 조건들에 응한다면, 그대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말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순결하고 비이기적인 동기에서 우러난 올바른 행동들과 선행 속에 있다. 내적인 단장이 부족하면서 외적인 의를 소유하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5-7).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빛과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모으는 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밖으로 헤쳐 버리는 자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감화력이 있으며, 그 감화력은 타인의 현재와 미래의 유익을 위하든지, 혹은 저들의 영원한 상실을 위하든 지간에,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교회증언 3권 pp. 519-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