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3 389-398(180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한 모든 투자를 통해서 그들은 현대 진리의 사업에 더욱 밀접하게 결속될 것이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 6:19).

인내성 있고 조직적인 일꾼들이, 그들의 자선적 노력의 경향이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배양하며 그들의 개인적 노력이 그들의 유용성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임을 볼 때, 그들은 그리스도와 동역자가 되는 것이 큰 축복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일반적으로 세상에 범람하고 있는 도덕적 흑암을 대항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하기 위하여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부인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활동적이고 열성적인 일꾼이 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업은 마땅히 발전되어야 할만큼 발전될 수 없다.

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는 자신이 공언하는 진리가 실제적인 것임을 느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은 무아적 일꾼이 되어야 한다. 어떤 부자들은 하나님의 사업이 확장되고 돈이 요구되므로 불평을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재물을 요구하는 데 끝이 없다고 말한다. 한 일, 다음에 다른 일이 또 생겨서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이 더욱 발전함으로 그 사업을 수행할 자금의 공급을 요청하는 더 많은 기회와 더욱 긴급하고 빈번한 요구가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하고 싶다.

만일, 조직적인 헌금 제도가 모든 교인들에 의하여 채택되어 충분히 수행될 것 같으면, 금고에는 계속적인 자금의 공급이 있게 될 것이다. 수입은 마치 변함없는 강물처럼, 넘쳐 흐르는 자선의 샘에서 흘러 들어와서 공급될 것이다. 자선은 복음 신앙의 일부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지불된 무한한 값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을 주님의 사업에 헌신하여야 할 요구는 물론, 엄숙한 금전상의 의무를 느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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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주님께서 “네 보던 일을 셈하라” (눅 16:2) 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분과 해결해야 할 빚을 갖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요구를 제쳐놓고 그분께서 베풀어 주신 것을 움켜쥐고 이기적으로 그것을 고수한다면, 그분은 얼마 동안 평화를 유지하시고 흔히 그분의 관대함을 증가시키시고, 축복을 흘러 넘치게 하심으로써 계속하여 그들을 시험하신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교회의 책망 없이 지나갈는지 모른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분께서는 “네 보던 일을 셈하라” 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45) 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며, 그분의 소유가 되는 그대의 몸과 마음은 물론 그대의 재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의무가 그대에게 있다.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를 지불하고 “너희는 값으로 산 것” 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위탁하신 선물을 돌려 드림으로써 영혼 구원의 사업을 돕도록 요구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보혈을 주시고, 우리의 은을 요구하신다. 우리가 부요해진 것은 그분의 가난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선물을 되돌려드리는 일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사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섭리로 하늘에서 직접 그분의 금고에 공급하는 것이 인간을 위하여 최선의 길임을 보셨을 것 같으면,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분은 인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세상을 위한 진리를 공포하기 위하여 천사들을 보내실 방편을 고안하셨을 것이다. 그분은 하늘에 진리를 기록하여, 그것이 살아 있는 글자로서 그분의 요구를 세상에 선포하게 할 수도 있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금이나 은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시 50:10, 12)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우리의 봉사가 필요한 곳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길을 의도적으로 준비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동역자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자선의 활동을 하게 하시고자 사람들 사이에 협력이 필요하도록 정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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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현명한 섭리로써 가난한 자들을 언제나 우리 곁에 두셨으며, 우리가 세상의 여러 가지 형태의 궁핍과 고난을 목격할 때, 우리는 시험을 받고 입증을 받으며, 그리스도인 품성을 계발할 수 있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인 동정과 사랑을 발휘하게 하고자 가난한 자들을 우리 가운데 두신다.

지식이 부족하여 멸망해 가는 죄인들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진리의 빛을 전해 주지 않는 한, 무지와 흑암 가운데 남아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도록 맡겨 주신 일을 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천사들을 보내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할 일을 주셨는데, 그 핵심적인 이유는 그분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당신의 대표자로 우리 중에 두신다. 그분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 (마 25:42) 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고통을 당하는 인간, 고난중에 있는 인간 자녀들의 입장에서 그들과 동일시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필요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며, 그들의 불행을 당신의 품에 안으신다.

황폐한 세상의 도덕적 흑암은 그리스도인 남녀들에게, 무한한 부를 소유하셨으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분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그들의 재물과 영향력을 드리는 일에 개인적 노력을 기울이라고 호소한다. 성령께서는, 그분의 진리의 기별을 보내셨으나 강권함을 받아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동역자의 의무를 느낄 수 있는 자들과 함께 거하실 수 없다. 감정은 변덕스러우므로, 단지 인간적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보다 고상한 근거에서 주어야 할 의무를 사도는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이기심 없이 수고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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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인간들의 구원에 계속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활동적인 자선의 계획을 시작하라는 요구를 성경을 통하여 받고 있다. 도덕적 율법은 안식일 준수를 명하고 있지만, 계명은 그것을 범하는 경우나 그것을 범함으로써 받는 형벌에 의해 속박받는 경우 이외에는 짐이 아니었다. 십일조 제도 역시 그 계획에서 떠나지 않은 자들에게 짐이 되지 않았다. 히브리인들에게 명령한 이 제도는 그것을 창시하신 분에 의하여 폐지되거나 완화되지 않았다. 현재 효력을 전적으로 상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인 시대에 있어서 그리스도만을 통한 구원이 더욱 충만한 빛으로 드러남에 따라 더욱 충실하게 수행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사에게, 영생을 얻는 조건이 계명의 특별한 요구를 자신의 생애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셨는데, 그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표상적 제사 제도가 폐지되었을 때에도 돌비에 새겨진 본래의 계명은 각 시대를 통하여 그것을 지키도록 요구하면서 변함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시대에도 인간의 의무는 제한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세밀하게 정의되고 단순하게 표현되었다.

넓게 퍼져 나가는 진리는 그리스도의 사망 후에 싸움을 지속하기 위하여 더욱 큰 준비를 요구하였고, 이 때문에 자선의 법은 히브리 국가때보다 더욱 긴급하게 필요되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 못지 않게 더욱 큰 선물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원리는 선물과 헌물이 받은 빛과 축복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8) 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축복을 받은 처음 제자들은 구제와 자선을 통하여 반응을 나타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떠나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내리심으로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자아 부정과 자아 희생의 사람이 되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이 고통중에 있을 때 자선 사업에 대하여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 하였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후 8:7). 여기에서, 자선은 믿음과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근면과 어깨를 같이하고 있다. 스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너그러움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청에 귀와 마음을 닫는 자들은 두려운 기만에 빠져 있다. 진리를 지극히 사랑하노라는 공언의 말을 떠벌리기 좋아하고, 진리가 전파되는 일에 흥미가 있다고 말로만 표현할 뿐, 그 일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러한 자들의 믿음은 죽은 것이며, 행함으로 온전해지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영혼을 회심시키되 탐욕의 세력 아래 그대로 남겨 두는 그러한 실수는 결코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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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제도의 근원은 모세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확실한 제도가 모세에게 주어지기 이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종교적인 목적으로 하나님께 헌물을 바치는 것이 요구되었으며, 그 근원은 멀리 아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그들은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헌물로 나타내어야 했다. 이 일은 이어지는 세대를 통해서 계속되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아브라함에 의해 실천되었다. 동일한 원칙이 욥의 시대에도 존재하였다. 돈 한 푼 없는 방랑자로 도망하는 중이었던 야곱이 한밤중에 벧엘에서 돌을 베개하고 쓸쓸하게 혼자 누워 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창 28:22) 라고 주님께 약속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바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드리는 모든 것은 자원해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창고가 마지못해 드린 헌물로 채워지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이기심을 단절시키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화시키는 행동을 하도록 의무를 지워 주심으로써 그를 당신 자신과 동료 인간에 대한 동정과 사랑에 밀접하게 연관되게끔 계획하셨다. 자선의 체계적 계획은, 이기심으로 기울어지며 관대한 행동에 대하여 마음을 닫기 쉬운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마련되었다. 주님은 헌금이 정기적인 것이 되기를 바라시며, 드리는 것이 습관이 되고 자선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느껴지도록 계획하셨다. 하나의 헌물을 통하여 열려진 마음이 이기적으로 냉랭해지고 닫혀지기 전에 또 다른 헌물이 드려져야 한다. 그 흐름은 계속적이어야 하며, 자선의 행동에 의하여 그 통로는 계속 열려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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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된 분량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는 이득의 십분의 일을 정하셨다. 이 제도는 인간의 양심과 자선에 맡겨져 있으며 이 십일조 제도에 대해 인간의 판단은 자유로워야 한다. 이 제도는 자유롭게 양심에 맡겨져 있는 한편, 한 계획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제시되었다. 전혀 강요가 요구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시대에 모든 이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도록 요구하셨다. 그분은 이생의 사물과 달란트를 증가시켜 그분께 돌리도록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그분은 십분의 일을 요구하시되, 이것을 인간이 그분께 돌려드릴 최소한의 것으로 요구하신다. 그분은 내가 내 것인 십분의 일을 요구하는 한편, 너희에게 십분의 구를 준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이 십분의 일을 드리지 않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게 된다. 속죄 제물, 화목 제물, 감사 제물 등이 이득의 십분의 일 외에 추가로 요청되었다.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이득의 십일금을 드리지 않는 모든 행위는 하늘의 책에 그 행위자가 도적질한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한 자들은 그들의 창조주의 것을 사취하게 된다. 이러한 태만의 죄가 저들 앞에 지시될때, 그들이 행로를 바꾸고 그때부터 올바른 원칙을 따라 행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이것은 채주에게 돌려지도록 그들에게 위탁된 재산을 유용한 하늘 기록의 숫자를 바로잡을 수 없다. 하나님과의 불충 실한 거래와 배은망덕의 죄를 회개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8-10). 모든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면,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여기에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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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3:11, 12). 만일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응한다면, 창고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큰 사업을 진행시킬 재물이 풍성하게 공급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일을 위하여 엿새를 주시고 제칠일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따로 떼어 두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십분의 구를 주시고 십분의 일은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요구하신다.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수입의 십분의 일 역시 거룩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을 위하여 따로 떼어 놓으셨다. 그분은 인간에게 맡기신 재물의 수입을 통해서 땅위의 그분의 사업을 추진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옛날 당신의 백성들에게 매년 세 번씩 회집하도록 요구하셨다.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신 16:16, 17). 그들의 수입의 삼분의 일 이상이 거룩한 종교적 목적에 바쳐졌다.

역사상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조직적 자선과 헌물과 연보 제도를 실천할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과 비례하여 그들의 모든 활동에 번영이 따를 것이라는 불변의 약속을 깨달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요구를 인정하고 그분의 요청에 응함으로, 그들의 물질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할 때에, 그들의 창고는 풍성하게 채워졌다. 그러나 그들이 십일조와 헌물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할 때, 그들은 하나님뿐 아니라 자신들의 것도 도적질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을 제한한 것에 비례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실 축복을 제한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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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이 제도가 히브리인들을 얽어맨 엄한 율법 중 하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였던 자원하는 심령의 사람들에게는 짐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영원한 관심사를 잃어버리고 그들이 땅위에서 가진 보화를 영혼들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음으로 저들의 이기적 본성을 강화했을 때 뿐이었다. 이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는 고대의 이스라엘에게 보다 더 긴급한 요구가 주어져 있다. 매우 짧은 시간에 성취되어야 할 크고 중요한 사업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금 제도가 당신의 백성에게서 결코 소홀히 여김을 받도록 계획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마지막 사업을 위해 희생 정신이 확대되고 깊어지도록 계획하셨다.

조직적인 자선은 조직적인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헌물은 자원하는 헌물이다. 참된 그리스도인 자선은 감사하는 사랑의 원칙에서 흘러나온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분이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사람들에 대하여 나타내는 사랑이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모든 정서를 지배하고 모든 정력을 지도하는 전인적 (全人的) 인 지배 원칙이 되어야 한다. 구속의 사랑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부드러운 애정과 자아 희생적인 헌신을 일깨워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이기심을 깨뜨리고 잠자는 동정심을 깨우쳐서, 귀중한 진리의 사업을 위하여 자신의 헌물을 드리게 하고자 마음을 감동시키는 호소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한한 희생으로 우리를 사셨다. 우리의 모든 능력과 영향력은 진정으로 우리 주님의 것이며, 그분을 섬기는 데 바쳐져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의 속박에서 속량받은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게 된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일하신다. 그분은 하늘로 승천하셔서 당신의 피로 산 사람들을 위하여 탄원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상처난 손을 드시고, 당신의 교회가 시험에 빠지지 않고 보존되도록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중보하신다.

만일, 우리의 지각력이 일깨워져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우리 주님의 놀라운 사업에 동참할 수 있다면, 깊고 열렬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불태울 것이다. 우리의 무정함과 냉랭한 무관심이 우리를 경고하게 될 것이다. 감사로 충만한, 사랑으로부터 우러난 온전한 헌신과 자선은 지극히 작은 헌물, 자원하는 희생에 거룩한 향기를 더하여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예물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모든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속주께 드렸을지라도,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매우 가치 있는 것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진 감사의 빚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드린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매우 불충분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우리에게 보잘것없이 보이는 이 예물을 취하여 향기로운 예물로 보좌 앞에 드리게 되며 그것은 가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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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의 진정한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고용된 종으로서 우리의 책임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분은 당신의 고난의 생애와 흘리신 보혈로써 우리에게 삯을 미리 지불하심으로 당신 자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붙들어 매셨다.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은 우리 구주로부터 빌린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청지기로 삼으셨다. 믿음과 사랑으로 드린 우리의 가장 작은 헌물과 가장 비천한 봉사는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을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증진시키기 위한 헌신의 예물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관심과 번영은 모든 관심사를 능가하여야 한다. 쾌락과 이기적 관심을 생애의 주된 목적으로 삼는 자들은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자아를 부인하고,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에 드리는 자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행복을 발견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33) 고 말씀하셨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특징지은 무아적 사랑과 자선의 열매이다.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은 우리 자신의 관심을 고상하고 영원한 관심사에 굴복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첫째 되고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지상에 보화를 쌓아 두지 말라고 명백하게 경고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마음이 하늘의 사물보다 땅위의 사물에 머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야말로 가련한 영혼들이 믿음의 파선을 맛본 곳이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명백한 명령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길을 따랐으며, 돈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생애에서 지배적 정열이 되도록 허용하였다. 그들은 재물을 얻는 노력에 있어서 절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알코올 중독자가 술에 중독되듯이 부를 향한 그들의 비정상적인 욕망에 중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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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과, 그들 자신과 그들의 시간과 그들의 모든 소유가 그분께 속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많은 사람들은 사단이 그들의 돈을 금전상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곳에 투자하도록 제시하는 기만적 유혹에 미혹당하며, 대다수가 거기에 정복된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유의하여 그분의 사업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우선적 사업으로 삼고, 그들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마지막 일로 삼는다. 그들의 재물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돈을 부동산에 붙들어 매어 놓았으므로,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하여 실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이 사실을 그들의 구속주의 사업에 거의 바치지 못하는 데 대한 변명 거리로 삼는다. 그들은 비유에 나온 사람처럼 그들의 돈을 효과적으로 땅에 묻어 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으로 요구하시는 십분의 일을 도적질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 보화에 속한 자신의 것들을 도적질한다.

조직적인 자선의 계획은 어느 한 사람도 무겁게 압박하지 않는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전 16:1, 2). 가난한 자들도 주는 특권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부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이 사업에서 한몫을 감당할 수 있다.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신 교훈은, 가난한 자들의 가장 적은 예물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드려진 기꺼운 예물이면 부자의 가장 많은 헌금과 마찬가지로 받으시는 바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드려진 가난한 자들의 예물은, 성소의 저울에서 드려진 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희생을 유발한 사랑에 의하여 계량될 것이다. 예수님의 약속은, 풍부한 데서 드리는 부자에 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드릴 것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나 그 적은 것을 자진하여 드리는 가난한 사람에 의해서도 분명히 실현될 것이다. 가난한 자는 그가 가진 적은 것을 희생하되, 그 희생을 진정으로 느끼게 된다. 부한 자는 풍부한 중에서 드리므로 부족도 느끼지 않고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지만, 가난한 자는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희생한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체계적 자선의 계획이 마련되었다. 그분의 섭리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종들이 공개된 그분의 섭리를 따를 것 같으면, 모든 사람들이 활동적인 일꾼이 될 것이다.

교회증언 3권 pp. 389-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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