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장 — 목사들의 태도와 의복
에베소서 3장 6, 7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네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 (목사) 이 되었노라.” “내가 목사가 되었노라.” 진리를 백성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그리되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9절 이것은 혀로 전파되는 말씀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설교와 기도에만 유창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게 하며, 듣는 이들에게 그분이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며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로새서 1장 28, 29절은 듣는 이들에게 인상을 주는 것은 삶과 행동을 우아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가 인식되고 느껴지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다른 것들도 고려해야 한다.
-610-
어떤 이들이 이런 것들을 소홀히 하였는데, 이것들은 내게 주어진 빛에 의하면 중요한 것이다. 설교단에서 말하는 사람의 몸가짐과 그의 태도, 말하는 방법등이 사람들에게 여러 인상을 남긴다. 만일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된다면, 그들이 남기는 인상은 진리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며, 꾸민 이야기를 들어왔던 사람들에게 특히 새로운 인상을 줄 것이다. 그가 가르치는 거룩하고 고상하게 하는 진리와 걸맞게 목사의 태도가 단정하고 위엄을 갖추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하면 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좋은 인상을 줄 것이다. 옷입는 데 주의하는 것은 중요하다. 현대 진리를 믿는 목사들에게서 이것이 부족하였다. 어떤 이들의 복장은 매우 단정하지 못하였다. 옷을 잘 어울리게 차려 입는 일과 그리스도의 목사답게 색깔을 맞춰 입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 이들의 옷은 단정치도 않았다. 어떤 목사들은 백성들 앞에 나아갈 때 밝은 빛의 윗도리를 입고 바지는 어두운 색을 입거나, 어두운 색 윗도리에 밝은 색 바지를 입음으로 멋으로나 짜임새로나 걸맞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목사는 그들에게 질서의 모본을 보여 준다. 단정함과 옷의 취향을 백성들에게 제시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는 허술한 옷차림이나 멋이 결여된 것을 제시하여 그들이 그것을 따르는 위험도 낳게 한다. 검정이나 어두운 빛깔의 옷감이 설교단의 목사에게 잘 어울리며 두세가지 색깔로 짜여진 옷보다는 백성들에게 더욱 좋은 인상을 줄 것이다. 나는 고대 이스라엘 자손을 유의하여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섬기는 자들이 마땅히 입어야 할 의복의 형태와 옷감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진 것도 보았다.
-611-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팔이 세상을 움직이며, 우리를 지탱하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분을 섬기는 자들의 의복에 의해서 존경도 받으시며 경멸도 받으신다는 증거를 주셨다. 그분께서는 그분을 섬기는 일에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하여 특별한 지시를 베푸셨다. 그분께서는 심지어 그들의 집들을 정리하는 것에 대한 지시를 주셨고, 그분을 섬기는 자들이 입어야 할 옷을 명시하셨다. 그들은 모든 일에 질서를 유지해야 하며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였다. 하나님께서 산 위에 내려오셔서 그분의 거룩한 율법을 백성들에게 들리도록 모세에게 주셔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게 한 지시를 읽어 보자. 그분께서는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모세에게 명하셨는가? 제삼일을 위해 준비하라. 제삼일에 여호와께서 산 위에 내려오셔서 온 백성들에게 보이실 것이다. 그들은 산 주위에 방책을 쳐야 하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게 하라. 그 위대하시고 능하신 하나님, 아름다운 에덴을 창설하시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신 그분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백성들이 질서와 정결을 지니기를 원하신다. 그 능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셔서 그들의 옷을 빨도록 하여 그들이 여호와 앞에 나올 때에 옷에 불순함이, 몸에 불순함이 없도록 하셨다. 그리고 모세는 산 아래로 내려가 백성들에게로 갔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옷을 빨았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정결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하여 모세는 회중과 제단 사이에 대야를 설치해야 하였다. “그는 그 곳에 물을 붓고 그것을 씻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은 그들의 손과 발을 거기서 씻고 회막에 들어가고 여호와 앞에 들어갔다.
-612-
이것은 위대하시고 능하신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분의 거룩한 임재앞으로 나아갈 때 그분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느슨함과 허름함이 없어야 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모든 주의의 목적이 무엇일까? 단순히 하나님께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인가? 그분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에 그칠 뿐인가? 내게 주어진 이유는 곧 백성들에게 바른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이 주의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그들의 옷과 태도를 통해 보이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하나님과 그 거룩한 봉사에 대하여 엄숙함과 경외심을 잃게 될 것이다. 만일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올 때 조심하고 세심하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보인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요구에 대하여 숭고한 생각을 갖게 해줄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그분의 일이 신성하며, 그분의 일과 관련된 모든 것은 거룩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부정이나 불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야 하며, 모든 부정한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로부터 제거되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내게 주어진 빛에 의하면 이 방면에 있어서 부주의하였다. 나는 바울이 말하듯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몸은 소홀히 하고 마음만 예배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자발적인 겸손, 이 마음뿐만의 예배와 몸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늘을 기쁘게 하는 겸손이 아니다. 그 겸손은 세심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설교하는 모든 사람과 행동과 의복 등을 바르고 적당하게 하여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이 우리의 거룩한 종교를 잘 드러내게 할 것이다. 옷 자체가 불신자들에게 진리를 권장할 것이다. 그것 자체가 설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것들이 자주 거룩한 단상 위로 올라간다. 단상 위에서 한 목사가 다른 목사와 이야기하며 웃고 사업에 대한 부담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이 거룩한 부름에 대한 엄숙한 느낌이 없는 것처럼 나타내는 것은 진리를 먹칠하고 거룩한 것을 비천한 일상적 수준으로 내린다.
-613-
그 모본은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제거하고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하시고자 돌아가신 복음의 걸구한 가치를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다. 내게 주어진 빛에 의하면 목사들이 등단하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 엄숙히 도움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인상을 줄까? 그러면 백성들 위에 엄숙함과 두려움이 임할 것이다. 그들의 목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다. 그가 백성들 앞에 감히 서기 전에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다. 엄숙함이 백성들 위에 임하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가까이 임할 것이다. 목사들은 단상에 올라오자마자 먼저 하나님께 시선을 드려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나의 힘의 원천임을 알려야 한다. 복장에 부주의한 목사는 자주 감각이 세련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이런 방면에 잘못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고치고 더욱 주의해야 한다. 어떤 영혼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시초의 요인이 목사의 단정치 못함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첫 인상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그 목사의 모습과 그가 제시하는 진리들을 잘 연결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옷이 그를 불리하게 한다. 게다가 그가 대표하는 백성들은 그들의 옷매무새에 주의하지 않는 부주의한 계층의 사람들이라 하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은 그런 계층의 사람들과 상관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게 주어진 빛에 따르면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 백성들이 나태한 것이 분명하다. 때로 목사들은 일주일간 빗질을 하지 않은 것처럼 흐트러진 머리로 단에 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외모에 무관심함으로 수치를 당하신다. 옛적에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하며 제사장의 직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특별한 종류의 의복을 착용해야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일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것을 분명히 일러 주셨다.
-614-
세숫대야가 제단과 회중 사이에 놓여져서 그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오기 전에, 회중들 앞에서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백성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먼지를 떨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너무 높고 거룩하기 때문에 그들이 이 조건들에 부합되지 않으면 죽음이 뒤따를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어떤 목사들의 복장을 살펴보자.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어떤 목사들은 그들의 복장을 잘못 갖추어 적어도 어느 정도 그들의 영향력을 파괴하고 있다. 색깔과 매무새에 있어서 정갈하지 못한 것이 드러난다. 그러한 복장으로 인해 어떤 인상을 주게 되는가? 그들이 종사하고 있는 일이 밭을 가는 일상적인 일보다 거룩하지도 않고 고상하지도 않다는 인상을 준다. 목사는 그의 모본으로 거룩한 사물들을 평범한 것으로 격하시킨다. 이러한 목사들의 영향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이들이 그들의 노력을 통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빈번히 그들의 설교자들을 모방하여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격하될 것이다. 이 사람들을 다시 모양 잡아 바로 세워서 그들에게 참된 질서와 사랑을 가르치기는, 전혀 진리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보다 더욱 힘들 것이다. 주께서는 그분의 목사들이 순결하고 거룩하며, 그들의 생활 속에서 진리의 원칙들을 바로 나타내며, 그들의 모본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높은 수준에 올리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모든 사람들이, 비록 진리의 교사는 아닐지라도, 개인적 청결과 단정함을 유지하며 또한 그들의 집안에서나 활동 범위내에서 청결하고 규모를 유지하기를 요구하신다.
-615-
우리는 살아 있는 편지로서 모든 이들에게 읽혀지고 알려진 바 세상의 모본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특히 진리를 타인에게 가르치는 이들이 모든 악의 모양이라도 버리기를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내가 받은 빛에 따르면 목회는 신성하고 고귀한 일이며, 이 일을 맡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마음 속에 모셔야 하며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행동으로 그들의 의복으로, 말로, 말하는 양식을 통하여 그분을 가치있게 나타내고자 하는 열렬한 소망을 나타내야 한다. 그들은 경외심으로 말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에게 끼친 엄숙한 감명을 그들의 목청을 돋구고 진리를 고함치듯 선포함으로 망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진리가 제시되면 진리는 그 감미로움과 그 능력과 엄숙성을 많이 잃게 된다. 그러나 목소리가 제대로 발해지고, 엄숙성이 있으며 감동적으로 조절되면 그것은 더 큰 감명을 자아낼 것이다. 바로 이런 어조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그분께서는 엄숙함으로, 감명을 주셨고 감동시키는 방법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고함치는 소리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가? 그것은 백성들에게 진리에 대한 더욱 숭고한 견해를 심어 주지 않으며 그들을 더욱 깊이 감명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듣는 자들에게 싫증이 나게 하며 설교자의 발성 기관을 망가뜨린다. 어조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데 큰 몫을 담당한다. 많은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발성법을 통해 그들의 생명력을 소모하고 그들의 폐와 발성 기관을 파괴한다. 어떤 목사들은 말로 외워야 하는 어떤 과목의 내용이 있는 양 그들이 해야 할 말을 급히 토해 내는 습관을 만들어서 가능한 한 빨리 서둘러서 마쳐 버린다. 이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적당한 주의를 기울이므로 모든 목사들은 분명하고 감명적으로 스스로를 교육할 수 있으며, 숨도 쉬지 않고 급히 말을 뱉어 내지 않게 될 것이다.
-616-
목사는 적당한 방법으로 말해야 한다. 그래서 그가 말을 전할 때에 백성들의 마음에 사상이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토해 버리면 백성들은 뜻을 알아 채지 못하게 되며 그들이 받아야 할 중요한 감명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달리 전달되었다면 좋았을 그 진리가 그들에게 영향을 줄 기회가 없게 된다. 목구멍으로 말하여 말이 발성기관의 최상부에서 나가게 함으로 발성기관을 항상 초긴장시키고 자극하는 일은 건강을 유지하는 일에서나 그 기관들의 효율을 증진시키는 일에 있어서 최선의 방법이 못된다. 그대들은 충분히 숨을 들어 마신 후에 복부의 근육에서부터 작용이 시작되도록 해야 한다. 폐는 단지 통로만 되게 하고, 그것에 의존하여 일하지 말라. 만일 복근을 사용하여 깊은 뱃속에서 소리가 나오게 한다면 일 천명에게 말할 때에라도 마치 열 명에게 말하듯 쉽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목사들 중에 어떤 이들은 저음조가 더 나은 감명을 주고 그들의 힘을 아껴줄 수 있는 데도 길고 진부한 기도와 큰소리를 냄으로 자살 행위를 하고 있다. 보라! 그대들이 생명과 건강의 법칙을 무시하고 전진하며, 순간의 충동을 따르는 동안 그대가 쓰러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지 말라. 그대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시작할 때에 쓸데없는 핑계와 긴 서두로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다. 그대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이말 저말 하지 말고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그들을 위하여 주신 것에 따라 그대의 할 일을 시작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거의 반 시간이나 변명의 말로 채운다. 그리하여 시간은 다 흘러가 버린다. 그들이 주제에 이르게 되면, 그들이 진리의 핵심을 짚으려 하면 백성들은 힘이 다 빠져서 그 진리의 힘을 볼 수 없고 감동을 받을 수도 없다. 그대들은 현재 진리의 핵심들을 교통 표지판처럼 분명히 제시하여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대가 제시하고자 하는 논거와 그대가 견지하는 입장을 알게 될 것이다.
-617-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울음 섞인 소리로 백성들에게 설교한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겸손의 모양으로 감명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행위는 복음 사역을 고양시키기보다는 저하시킨다. 목사들은 진리를 영광으로 가득하게 하여 전파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바로 나타내는 방법으로 설교하며 목사에게 어울리는 위엄을 지녀야 한다. 목사들이 올리는 긴 기도들은 큰 실패를 낳았다. 어떤 이들이 하듯이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목과 발성 기관들을 상하게 한 후에 그들은 고된 일로 쓰러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요구를 받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상해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기도하는 것이 설교하는 것보다 더 발성 기관을 상하게 한다고 느낀다. 이것은 부자연스런 자세와 머리를 숙이는 방법에 따른 결과이다. 그들은 서서 말하며 몸에 무리가 오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기도할 때의 자세는 완전히 자연스런 것이어야 한다. 긴 기도는 피곤케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다. 반시간이나 십오분도 너무 길다. 하나님께 그대가 원하는 바른 말씀드리기에는 몇 분이면 족하다. 그리고 그대들은 백성들을 맡아서 그들이 기진하지 않게 기도와 헌신에 대한 그들의 흥미가 감소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들은 기진하는 대신에 신선해지고 힘을 얻게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경건의 연습에 있어서 고성으로 억지로 소리를 내어 긴 기도를 하고 긴 설교를 함으로 실수하고 있다. 그 목사는 전혀 불필요한 일을 힘겹게 함으로 자신을 쓸데없이 피곤케 하고 백성들을 지치게 하였다. 목사들은 백성들에게 전달되고 감명을 끼치는 방법으로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감명적이며 엄숙했다. 그분의 음성은 곡조와 같았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음성에 멜로디를 담도록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618-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큰 능력을 갖고 계셨다. 우리는 그분보다 훨씬 아래에 있으며 훨씬 뒤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노력은 여전히 미약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지니셨던 영향력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모본이신 그분께 가능하면 가까이 접근하고자 시도하여 백성들에게 최대의 가능한 영향을 줄 수 있게 스스로를 교육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 우리의 몸가짐, 옷차림, 이 모든 것이 설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말로만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에 관련된 모든 것이 그들에게 설교가 되어야 하며, 그들에게 좋은 감명을 끼치며, 전해진 진리가 그들의 폐부를 찌르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은 사회에서 더 나은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사업의 소상한 성격, 그 신성성과 거룩함,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그것에 적합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오늘처럼 깊이 깨달은 적이 전에는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이 그렇게 해야함을 알게 되었다. 내가 먼저 적합하게 차려야 하겠고, 거룩한 기름부음으로 적합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더이상 타인을 가르칠 수 없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을 알아야 한다. 나는 내가 경건의 비밀을 이해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 속에 있으며 나의 삶이 그분의 뜻과 일치되는지,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나의 말은 진실되며 나의 행동은 바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의 잊을 뻔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목사가 그의 목회에서 발휘해야 하는 영향력이다. 그의 일은 단상에 서는 일로 마치는 것이 아니다. 그 곳에서 일이 시작될 뿐이다. 그는 여러 다른 가정들을 방문하여 그리스도를 그 곳에 전달하며, 거기서 설교하며, 설교를 그의 언행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가 가정들을 방문할 때에 그는 그들의 상태를 알아내야 한다. 그가 양떼의 목자인가? 목자의 일은 단상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양무리와 개인적으로 말해야 한다. 부모들에게서는 그들의 상태를, 자녀들에게서는 또한 그들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감독으로 삼으신 양무리를 먹여야 한다.
교회증언 2권 pp. 609-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