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2 19-28 (73일)

“그래, 그들이 떨어져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고 해.” 공언하는 그분의 제자들에게서 나타나야 할 예수님의 동정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이 부족할 때에 이 불쌍하고, 실수하며, 경험 미숙한 영혼들은 사단에게 맞아서 믿음의 파선을 하기 십상이다. 실수하는 자들의 잘못과 죄가 많다 하더라도 우리 형제들은 위대한 목자의 온화함을 나타내기를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불쌍한 길 잃은 양을 위한 그분의 다함없는 보호와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의 목사들은 여러 주일 수고하며 가르친다. 그리하여 새 영혼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기뻐하게 된다. 그러나 형제들 중 성급하고 단호한 성질이 있는 사람들은 감정을 터뜨려 “그래, 우리를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지” 라는 투의 급한 말을 내뱉으므로 목사들의 수고를 5분 이내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리는 일을 한다. 우리는 먼저 교인들의 잘못을 시정하기 전에는 근처의 흩어진 양무리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이 이 불쌍한 영혼들을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에 대한 부담감이 없다. 사실상 그들은 마음을 닫아 두고 영적인 활동이 없으므로 영적으로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까지 전반적인 사업을 사랑하며 사업을 뒷받침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잘 받들 것이었다. 그러나 과부와 고아와 연약한 양들을 돌보는 데는 결정적인 부족이 있었다. 전반적인 사업에 대한 약간의 관심을 제외하곤, 자기 가족 이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좁은 신앙관으로 그들은 영적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곳에는 안식일을 지키며, 집회에 참석하고, 조직적으로 헌금에 참여하지만 교회 밖을 맴도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 교회에도 적합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도격의 교인들이 그 교회의 어떤 이들과 마찬가지 태도를 가지고 그들에게 거의 격려하지 않거나 전혀 도와주지 않으면 그들이 하나님의 힘을 얻어 일어나서 개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리가 그 교회와 함께 일하며 그들이 실수하는 자들을 위해 애쓰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할 때에 그 장소의 사업에 관계하여 내가 전에 본 것들이 내 앞에 많이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크게 잘못하여 교회 밖에 있는 이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양을 찾으러 나가지 않음으로 큰 실수를 범한 자들을 위해 예리한 증언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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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이 증언들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최악의 실망을 경험하였다. 큰 잘못 중에 있는 사람들은 예리한 증언으로 책망을 받았을 때에, 증언이 공중석상에서 읽혀졌을 때에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시인하였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이들은, 사업과 증언의 둘도 없는 친구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그들에게 선포된 증언의 내용만큼이나 그들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위주에 자신과 가족만 생각하며, 남들을 돌보지 못하였고 배타적이었으며, 귀중한 영혼들이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교만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들은 크게 요동하고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증언들은 유사한 곤란을 당하는 이웃들을 참아주어야함을 그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증언들을 존중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증언으로 시험을 받을 때까지 그렇게 느끼게 된다. 그들은 혹이 의심하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 그들은 의심을 표명하는 자들을 가혹하게 대한다. 그들은 증언에 대한 열의를 나타낸답시고 난도질 하면서 겸손보다는 자기의 의를 내세운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실 때에 그들은 물처럼 연약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시련을 견뎌내지 못한다. 이것들은 그들에게 실수하는 자를 향한 겸손과 겸양과 온유함과 그리고 다함 없는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 주님께서는 실수하는 사람, 연약하고 떠는 사람, 진리로부터 배도한 사람조차도 우리 안으로 돌아오라고 특별히 부르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교회 안에 거의 없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 적다. 그 불쌍한 영혼들을 가로막고 서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가혹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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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들이 도움을 받기 전에 이러저러한 과정을 통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잃은 양을 찾아 나서야 하는 특별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잃은 양의 감동적인 비유를 읽어보라. 눅 15:1-7: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영접하여 함께 잡수시므로 불평하였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는 이 불쌍한 죄인들을 멸시하였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어린 마음을 꾸짖으시기 위해, 모두에게 깊은 감명을 남기기 위해 주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다음의 몇 가지를 주목하라.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버려 두었다.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다녔다. 그 불행한 양을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우리에서 벗어난 교인들을 위하여 교회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멀리 떠나 방황한다면 여러분이 손을 쓰기 전에 돌아오도록 기다리지 말고 그들을 찾아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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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을 찾았을 때에 기쁨으로 메고 와서 큰 즐거움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잘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수고하는 복되고 기쁜 일을 설명한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교회는 행복한 교회이다. 잘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동정과 사랑의 마음이 생기는 사람, 위대한 목자의 우리 안으로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복된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죄인 하나를 도로 찾으면 하늘에서는 아흔 아홉의 의인 때문에 생기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은 영혼을 사로잡는 얼마나 귀한 생각인가! 실수하는 사람들을 돕다가 물든다고 생각하며 돕기를 꺼리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이며 가혹한 영혼들은 이 선교 사업의 달콤한 맛을 모른다. 그들은 빗나간 한 사람을 구조한 것에 대해 온 하늘이 기쁨으로 채워지는 일의 복됨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소견이 좁고 편협한 감정으로 막혀 있으며 이슬이나 비가 내리지 않는 길보아 산처럼 메마르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강한 사람을 일하지 못하게 하면 허약해진다. 남을 위해 짐지기를 마다하는 교회나 사람들은 자신에게만 치중하게 되며 영적 나약함을 당하게 된다. 수고는 강한 사람을 강하게 유지시켜 준다. 영적인 수고, 힘쓰고 짐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힘을 더해 주는 것이다. 4월 18, 19일, 안식일과 일요일 우리는 그린빌에서 우리 형제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 A 형제와 B 형제가 우리와 함께 있었다. 남편은 여덟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25, 26 양일간 우리는 라이트 교회에 있었다. 이 사랑스런 백성들은 우리를 반가이 맞았다. 여기서 남편은 여덟 명에게 침례를 주었다. 5월 2일 우리는 몬트레이의 교회에서 큰 회중을 만났다. 남편은 잃은 양의 비유를 분명하고 힘있게 설교했다. 그 말씀은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주었다. 빗나간 어떤 자들은 교회 밖에 있었으며,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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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교회 내의 어떤 이들의 딱딱하고, 퉁명스럽고, 무정한 입장이 그들이 돌아오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이었다. 그 말씀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울렸고 모두가 시정할 의사를 나타내었다. 일요일에 우리는 알레간에서 큰 회중에게 세 번 설교했다. 우리는 9일에 배틀크릭 교회에서 집회할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몬트레이에서 이제 일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몬트레이로 돌아가서 그 교회와 함께 한 주일 더 일할 것을 결정하였다.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일이 잘되어 갔다. 교회는 가득 찼다. 우리는 몬트레이에서 그렇게 단시일에 사업이 진척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첫날에 오십 명이 기도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왔다. 형제들은 잃은 양들에 대해 깊은 깨우침을 얻었고, 냉정함과 무관심을 자복하고 바로 섰다. G.T.레이 형제와 S.러머리 형제는 좋은 간증을 하였고, 형제들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열네명이 침례를 받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중년 남자로 예전에 진리를 반대하였던 사람이다. 사업은 엄숙함과 자복과 많은 애통으로 이루어져 나아갔다. 그리하여 총회년의 열렬한 수고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몬트레이의 그 좋은 사업이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레간에서 여러 주일을 보낼 생각으로 약속을 조정하였다. 방금 마친 총회는 큰 재미가 있었던 기간이었다. 남편은 여러 짧은 시간들을 이용하여 큰 수고를 하였다. 그에게는 쉼이 필요했다. 지난해 동안 우리의 수고는 우리 백성들이 좋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총회시에 우리에게 동정과 자비와 돌보는 손길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큰 자유를 누렸고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 가운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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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 —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함

내게 나타난 바로는 안식일 준수자들은 재물이 늘어가면서 더욱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들고 있다. 그들은 궁핍한 자의 필요를 알지 못한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소홀히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소홀히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가능한 한 가난한 자들의 빈곤과 고통을 해소시키는 것이 예수를 섬기는 일인지 깨닫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수고하는 자가 되는 일, 자아 부정의 노력을 요구하는 선행을 인내로 계속하는 일은 하늘이 미소를 보내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충실한 일은 열렬하고 가장 거룩하다고 생각되는 최상의 예배보다도 더 가납된다.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것이다. 기도와 권고와 도와주는 말은 빈번히 나무에 매다는 값싼 열매이다. 그러나 선행 즉 곤핍한 자나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은 좋은 나무에서 저절로 자라는 참된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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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이것이다.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좋은 열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맺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선한 말, 자선의 행위,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동정하는 것이다. 실의와 슬픔으로 눌린 마음을 동정하게 되고, 궁핍한 자에게 나누어 주며 벗은 자를 입히며, 나그네를 집안에 들이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천사들은 매우 가까이 머물 것이며, 하늘에서는 응답의 선률이 울려퍼질 것이다. 정의와 자비와 자선의 행위는 하늘에서 노래가 된다. 아버지께서는 그 보좌에서부터 자비를 행한 사람들을 보시며 그들을 가장 귀한 보배로 헤아리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보석들을 모을 때에 그들이 나의 것이 될 것이라.” 궁핍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 베푼 자비는 바로 예수님께 베푼 것처럼 간주된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고통당하고 압제받는 자를 동정하고, 고아를 가까이 할 때에 그대는 예수와 더 긴밀한 관계에 들어간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41-46).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고통당하는 백성들과 하나됨을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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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그네 된 자는 나였다. 벗은 자는 나였다. 병든 자는 나였다. 옥에 갇힌 자는 바로 나였다. 네가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음식을 즐길 때에 나는 여기서 멀지 않은 길거리 다리 밑에서 굶주리고 있었다. 네가 내 앞에서 문을 쾅 닫았을 때에, 멋진 가구로 가득 찬 네 방이 텅비어 있을 때에 나는 잠 잘 곳이 없었다. 네 옷장에는 갈아 입을 옷들이 여러 벌 있었다. 너는 궁핍한 자를 도와줄 수도 있었다. 돈을 불필요하게 낭비하였다. 나에게는 적당한 옷이 없었다. 네가 건강을 구가할 때에 나는 병들어 있었다. 네가 자유로이 다닐 때에 나는 불행히도 감옥에 갇혀서 묶여 있었고, 내 마음은 우울했으며 나의 자유와 희망은 박탈당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그 고통당하는 제자들과 하나님을 여기서 표현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형편을 자신의 형편으로 취하신다. 그분은 몸소 고통당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여, 가난한 자와 고아를 소홀히 하는 것은 그들 속에 계신 예수를 소홀히 하는 것임을 알라. 나는 고귀한 신앙을 가졌다고 공언하나 자기애와 이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내가 기록하는 바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자기의 생활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위해 산다. 남들을 위해 행하기 위해 희생하는 것, 남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자신을 불리하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해당도 안 되는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추호도 생각지 않는다. 자아는 우상이 되었다. 귀중한 시간이 흘러가지만 하늘 기록에는 친절한 행동, 남을 위한 희생, 주린 자를 위한 공궤, 벗은 자를 입힘, 나그네를 영접한 일 등이 남아있지 않다.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생각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다. 그들의 받은 복을 얻으려는 이들이 가치 있는 사람임을 그들이 안다면 이 방면으로 무엇인가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감행하는 데는 덕이 있다. 우리는 혹 천사를 대접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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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아 주어야 할 고아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일을 떠맡으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일은 그들이 하고 싶은 것보다 더 많은 일감을 주며, 자신을 즐겁게 할 여유를 남겨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금이 조사하실 때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너그럽지 못하고, 이기적인 영혼들은 천국이 일한 사람들의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의 것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애쓴 사람들을 위하여는 아무런 상급도 없다. 임금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발한 무서운 형벌은 이 경우에는 그들의 큰 죄악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행한 일의 결과로 정죄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죄를 당한다. 그대는 하늘이 맡겨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대는 자신을 기쁘게 하였으므로 자신을 기쁘게 하는 자들과 분깃을 같이 하게 된다. 나의 자매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자선을 베푸는 자들이 되라. 인자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그대가 착한 아이를 발견한다면 맞아들여 돌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착하지 않은 아이를 맞아 못된 습관을 버리도록 훈계하고 새로운 것을 가르치며, 자제하도록 가르치는 일은 거절할 것이다. 무식한 자를 가르치고, 악행만 배운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개조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이들을 그대에게 맡기셨다. 그들은 허름한 보자기에 쌓인 축복의 선물이다. 몇년전에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집없는 아이들에게 가정을 제공하는 일로 시험을 받는 것을 보았다. 많은 이들이 진리를 믿기 때문에 가정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반대와 핍박 때문에 신자들은 집에서 쫓겨날 것이고 집을 가진 자들은 집없는 자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줄 의무가 있다. 최근에 나는 하나님께서 소위 믿는 백성들을 특별히 이 문제로 사랑할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는데, 그분의 빈곤으로 우리가 부하게 되도록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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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이 세상에서 더 나은 나라, 하늘 나라를 찾는 순례자들과 나그네들을 위하여 집을 마련하시기 위해 희생을 치르셨다. 그 은혜의 백성인 우리가, 불멸의 유업을 기대하는 우리가, 집없는 자들과 영세인들을 집에 들이는 일을 거절한다든지, 꺼려 한다면 말이 되는가? 예수의 제자들인 우리들이 나그네가 찾아올 때에 집안 사람들과 모르는 사이라고 문전 박대해도 되는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는 사도의 명령이 오늘날에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말인가? 나는 우리 백성들이 이기심을 나타내는 것 때문에 날마다 고통을 당한다. 필요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보호가 놀랄 정도로 결핍되어 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앞길에 축복을 감추어 두셨는데 어떤 이들은 그것 때문에 향락이 달아날까 두려워 건드리지도 못한다. 천사들은 우리가 선행할 기회를 이용하는지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남들을 축복하면 그들이 우리를 축복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다르게 만드셨다 어떤 이는 가난하고, 혹 부하고, 혹 고통을 당하고 그래서 모두가 품성을 계발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목적이 있기에 가난한 자를 우리 중에 두셨다. 우리가 시험을 받고, 입증받고, 우리 마음에 있는 바를 계발시키도록 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자기 집으로, 자기 마음 속으로 초청해 들이지 않으려는 핑계들을 많이 들었다. “우리 집에 준비한 것이 없는데 음식 장만해 놓은 것도 없고, 그러니 저 분들은 다른 곳으로 가시도록 하지.” 그리고 그 곳에서 대접이 필요한 사람들을 맞아들이지 않기 위한 다른 구실들이 나올 수도 있다. 그리하여 방문객들은 크게 섭섭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는 소위 믿는다고 하는 형제 자매들의 대접에 관해서 불쾌한 감정을 지니고 떠나간다. 집에 먹을 것이 없으면, 자매여,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모방하여 이웃집에 가서 말하라.

교회증언 2권 pp.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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