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1 449-458 (45일)

81 장 — 목사의 아내

1863년 6월 5일, 나는 사단이, 하나님께서 진리를 전하도록 택한 목사들을 낙심케 하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언제나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일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가정의 감화를 통하여, 헌신하지 못한 배우자들을 통하여 하는 것이다. 그가 그들을 지배할 수만 있으면, 그는 그들을 통하여,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말씀과 교훈으로 활동하고 있는 남편에게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되풀이하여 주신 경고와, 목사의 아내에게 속한 것으로 지적된 의무들을 보았으나, 그 경고들은 오래 지속되는 감화를 주지 못했다. 주어진 증언들은 짧은 시간 동안만 효력을 나타냈다. 그들은 그 빛을 부분적으로만 따랐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헌신은 잊어버린바 되고, 많은 사람들은 받은바 빛과 특권을 이용하고 빛의 자녀로 걸어가도록 그들에게 지워진 거룩한 책임을 경시했다. 만일, 휘장이 걷히어져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상황을 하늘이 어떻게 여기는지 볼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들은 각성하게 될 것이고, 각 사람은, 내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각각 두려움을 안고 질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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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 목사의 아내는 남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가 십자가를 져야 할 필요를 강조하고 극기의 중요성을 역설할 때, 그의 아내의 매일의 모본은 흔히 그의 설교와 반대되므로 설교의 힘을 소멸시켜 버린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는 큰 방해가 되어, 흔히 그의 남편을 그의 의무와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게 한다. 그는 어떤 죄를 그가 범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유용하게 되고자 애쓰고, 영혼들을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도와 주기 위하여 노력하는 대신에, 그는 일에서 떠나 무익한 생활을 하고자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과, 이타적이고 거룩한 원칙에 의하여 강권함을 받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남편과 천사들과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목사의 아내가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남편의 선교 사업에 동행할 때 좋지 못한 불만을 나타냄으로 남편의 사업을 방해하는 것은 큰 죄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남편의 사업에 동참하고 자신의 관심과 활동을 그와 연합시키기 위하여 온갖 기회를 찾는 대신에, 그는 자주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좀더 안이하고 자기 마음에 맞게 만들 수 있는지 연구한다. 그들 주위의 상황이 그가 원하는 만큼 순조롭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항상 그렇게 되지 못할지라도), 그는 향수에 젖어 있거나 쾌활의 부족과 불평의 말로 남편을 괴롭혀서 그의 일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어 그의 불만 때문에 남편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곳에서 떠나가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남편이, 그의 불쾌한 마음을 동정하고, 변덕스럽고 불만에 찬 그의 감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업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불쌍한 영혼들과 함께 기도하고 이야기하며, 그들의 구원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향수병에 걸릴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기심 없는 활동에 대한 보상으로서 즐거운 만족감을 매일 매일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부를 수 없다. 우리의 목사의 아내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위하여 희생하거나 고난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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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목사의 아내들이 궁핍과 환난을 당했다. 그들의 남편이 투옥과, 때로 죽음을 당하면, 그 고상하고 자아 희생적인 부인들은 남편과 함께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상급은 남편에게 주어진 것과 동일할 것이다. 보드맨 부인과 자드슨 부인은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그들의 배우자들과 함께 고난을 겪었다. 그들은 온갖 의미에 있어서, 흑암 중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춰 주는 사업에 있어서 그들의 배우자들을 돕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숨겨진 비밀들을 나타내 주기 위하여 가정과 친구들을 희생하였다. 그들의 생애는 끊임없는 위기였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들의 큰 목적이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들은 기꺼이 고난을 당할 수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았다. 그분의 극기와 희생을 우리의 어떤 목사들의 아내들의 시련과 고난과 비교해 보면, 그들이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만일, 목사의 아내가 불만과 낙담의 말을 한다면, 특별히 남편의 성공이 주변의 상황에 좌우되는 상황일 경우에는, 남편에게 미치는 영향은 절망적이며, 그의 활동을 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경향을 초래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종은, 성향을 의무에 굴복시키고자 하지 않는데서 생기는 아내의 감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불능의 상태가 되거나 하나님의 일터에서 떠나야 할 것인가? 아내는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의무에 일치시키고, 그리스도와 진리를 위하여 이기적 감정을 버려야 할 것이다. 사단은 이기적이요 안일을 사랑하는 배우자를 통하여 목사들의 활동을 지배하고자 많은 일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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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목사의 부인이 남편의 출장에 동행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특별한 쾌락을 위하여 방문하거나 대접을 받고자 하지 말고, 남편과 함께 활동해야 한다. 그는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하여 남편과 동일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만일, 가정을 돌보는 일이 장애가 되지 않는다면, 그는 남편과 즐겨 동행하면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남편의 활동을 도와야 한다. 온유와 겸손, 그리고 고상한 자신감을 가지고, 그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탁월한 영향을 끼치고, 자신의 몫을 담당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집회에서도 짐을 지고, 가족 제단의 주변과 화롯가에서의 대화 등을 통하여 한몫을 감당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대하며, 그들은 그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만일, 이런 기대가 실현되지 않으면, 남편의 감화는 절반 이상 소멸된다. 목사의 아내는 마음만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가 자아 희생의 정신을 소유하고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거의 남편과 동일하게 유익한 일을 함께 할 수 있다.

진리의 사업에서 일하는 자매 일꾼들은 특별히 목사가 할 수 없는 자매들 사이의 상황을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다. 목사의 아내는, 경솔하게 버려서는 안 되고 또한 버릴 수도 없는 책임을 지고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빌려 준 달란트를 이자와 함께 요구하실 것이다. 그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남편과 함께 열렬하고 성실하고 하나같이 일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소원을 결코 강하게 주장하지 말고, 남편의 활동에 대한 관심의 부족을 표현하지 말고, 향수 어린 불만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 이 모든 육신적 감정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성취시켜야 할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감정과 쾌락과 육신적 취향 등과 상치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은, 유익한 일을 하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즐겁고 기꺼이 희생되어야 한다.

목사의 아내들은 헌신적이고 경건한 생애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가 없고 그들에게 극기와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 신앙을 갖고자 할 것이다. 스스로 고상하게 서고, 힘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개인의 책임을 감당하는 대신에, 그들은 많은 부분의 시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영적 생명을 그들에게서 얻고 있다. 만일, 그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심을 가지고 자신 있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들의 애정을 예수님께 집중시키고, 산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을 섭취할 것 같으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그들의 남편을 어느 정도로 도와주고, 끝날에 얼마나 큰 상급을 받겠는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음성이 가장 아름다운 음악과 같이 그들의 귀에 들릴 것이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라고 하는 음성은 그들이 위기에 처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한 모든 고난과 시련을 천 배나 그들에게 보상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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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계발시키지 않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서 별로 유용한 생애를 살지 않은 자들은 그들이 일한대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에는 그들이 물결을 따라 견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열렬하고 끊임없이 노를 사용하며 바람과 물결을 거슬러 저어 가야 할 상황이 되면, 그들은 그리스도인 품성에 있어서 정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어려움과 대결하여 활동하지 않고, 노를 내려놓은 채 안락하게 물결을 따라 떠내려간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짐을 지고 열렬하고 힘들게 일함으로써 물결을 거슬러 그들을 끌어당겨 주기를 기다린다. 그들이 이같이 게으름에 굴복당할 때마다 그들은 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사업에서 일할 마음을 약화시킨다. 영원한 영광을 얻는 자는 오직 성실한 정복자뿐이다.

목사의 아내는 그와 교제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언제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도움이 되든지 커다란 장애가 되든지 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모으든지 널리 흩어 버리든지 한다. 목사의 배우자들에게는 자아 희생적 선교 정신이 부족하다. 자아가 첫째이고, 그리스도는 둘째가 되거나 심지어 셋째가 되기까지 한다. 목사는 그의 아내가, 영적 도움이 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영혼들에게 유익이 되고, 선을 행하기 위하여 참고 견디고 고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결코 함께 데리고 다니지 않아야 한다. 남편들과 함께 가는 자들은 그들과 연합해서 일하러 가야 한다. 그들은 시련과 실망에서 면제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유쾌한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는 안 된다. 감정이 의무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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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타협하지 않고, 고상한 믿음과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가지고 여행을 준비했다. 번민으로 찢어진 마음을 안고, 그는 약속의 아들을 깊은 애정으로 바라보는 당당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아브라함은 고난을 당했으나,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를 대적하여 반역하게 하지는 않았다. 의무, 엄격한 의무가 그를 지배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타협하거나 한순간도 거기에 굴복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의 독자는 엄격하고 자애롭고 고통 중에 있는 아버지 곁에서 걸어가면서, 애정 어린 모습으로 아버지의 애칭을 거듭거듭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라고 질문했다. 아, 성실한 아버지에게 이 얼마나 큰 시험인가? 천사들은 놀라운 마음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성실한 하나님의 종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결박까지 하여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었다. 그 때, 천사가 소리쳤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보았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공언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생애를 실천하는 것은 위대하고 신성한 일이다. 불멸의 면류관을 얻고, 선한 행실에 대한 기록과, 하늘에 기록된 의무 수행의 내용을 보게 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나무는 열매로써 판정된다. 각 사람은 그의 고백이나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고 행위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고백을 했느냐는 질문은 결코 하지 않고, 어떤 열매를 맺었느냐 하는 질문을 할 것이다.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다. 그러나, 나무가 좋으면, 나쁜 열매를 결코 맺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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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장 — 특허권

우리의 형제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유망하게 보이는 새로운 사업에 종사함으로 스스로 말려들고 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들은 실망을 경험하게 되고, 가족을 부양하고 진리의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되어야 할 재산이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과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양심적인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확신을 버리고, 영적 기쁨을 상실하고, 정신적 번민으로 건강마저 어려움을 당한다.

진리를 믿는 자들은 절약의 원리를 실천하고, 단순하고 건전한 식생활을 하고, 언제나 그들의 재정 범위 안에서 사는 것을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 형제들은 세속적 문제와 영적 문제를 잘 관리하는 경험 있는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에 착수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많은 난관에서 자기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형제들이 적은 수입으로 만족하고 그 적은 것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이, 그들의 조건을 더욱 좋게 만들기 위하여 위험한 길을 달려감으로 계속적인 손실을 당하는 것보다 더욱 낫다. 특허권 판매에 종사하고 있는 어떤 안식일 준수자들은 경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형제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재물을 특허권에 투자하도록 권유해 왔다. 이런 자들은 그 형제들이 담당해 준 손실을 보상해 주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서 결백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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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11 — 교회에 대한 증언

83 장 — 의복의 개혁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그대들의 주의를 의복에 관한 문제로 다시금 집중시키는 이유는, 내가 전에 기록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고, 또한 내가 기록한 바를 믿고자 하지 않는 자들이 이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교회에 혼란을 야기시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서 답신을 보내지 못한 어려운 문제들에 관한 많은 편지들이 내게 왔다. 이제 나는 그 질문들에 대하여 대답하는 바이다. 나는 이제, 나의 증언에 관한 한 그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는 바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증언 10호에서 내가 기록한 것이 “생활의 방법” 이라는 제목으로 쓴 나의 증언과 일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동일한 견해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같이 서로 상치되는 두 개의 견해가 아니다. 만일, 거기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표현의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증언 10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경우에서도, 불신자들에게 우리의 믿음을 비난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상하고 독특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우리를, 우리의 독특한 신앙상 불가피한 것 이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진리를 믿는 어떤 사람들은 자매들이 미국식 의상을 입는 것이 건강에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모양의 의복이 불신자들에게 우리의 감화를 손상시켜 그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만든다면, 비록 우리가 결과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우리는 그런 의상을 결코 입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의상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너무 많다고 생각함으로 기만을 당한다.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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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식 의상을 입는 자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뒤엎고 그분의 특별한 지시를 무시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신명기 22장 5절을 보았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소위 개혁 의복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것은 얌전하고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전혀 적합하지 않은 불건전한 의복이다.

여자들이 그들의 의복과 모습에 있어서 가능한 한 이성 (異性) 과 유사해지고자 하고, 그들의 옷을 남자들의 옷과 흡사하게 만들고자 하는 경향이 더해 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증한 일이라고 선언하신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딤전 2:9).

여성의 권리와 소위 의복의 개혁을 옹호하는 운동에 가담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셋째 천사의 기별과의 모든 관계를 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전자의 정신이 후자의 정신과 조화가 될 수는 없다. 성경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관계와 권리를 분명히 밝혀 놓았다. 강신술사들은 꽤 넓은 범위에 걸쳐서 이런 독특한 의복의 형태를 적용해 왔다. 은사의 회복을 믿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흔히 강신술사라는 낙인을 받았다. 그들이 이 의상을 입으면, 그들의 감화는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강신술사들과 같은 위치에 놓고, 그들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소위 의복의 개혁에는 그 의복에 꼭 같이 발맞추어 경솔하고 무모한 정신이 따른다. 그런 모양의 의복을 입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서 품위와 겸양이 떠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일관되고 합리적인 길을 따르기를 바라고 계심을 보았다. 자매들이 미국식 의상을 입으면, 그들 자신의 감화는 물론 남편들의 감화도 소멸시키게 될 것이다. 그들은 웃음과 조소 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 구주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 16).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해야 할 큰 일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감화를 감소시키거나 소멸시킬 길을 택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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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前述) 한 것은, 남자들이 입은 것과 유사한 의복의 스타일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으로 내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여자의 의복의 공통적 스타일을 보게 되었으며, 그것들을 교정하기 위하여 교회증언 10호에 있는 다음의 권면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미국식 의상을 입거나, 후프를 사용하거나, 보도와 거리를 쓰는 긴 옷을 입음으로 극단에 치우치는 것이 우리의 믿음과 일치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여인들이 그들의 옷 길이를 땅바닥에서 한 인치나 두 인치 간격을 두도록 입는다면, 그들의 옷은 아담해질 것이며, 옷이 훨씬 쉽게 깨끗이 보존될 수 있으므로 조금 더 오래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복은 우리의 믿음과 일치될 것이다.”

이제 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 것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발췌하여 인용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다르게 옷을 입음으로써 스스로를 유별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고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의복을 정숙하고 건전하게 입는데 관한 의무감을 따름으로 그들이 유행에 뒤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을지라도 그들은 세상과 같아지기 위하여 그들의 옷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경우에는, 온 세상이 그들과 다를지라도 그들은 바르게 설 수 있는 고상한 자립성과 도덕적 용기를 나타내야 한다. 만일, 세상이 성경과 일치되게 점잖고 편리하고 건전한 모양의 의복을 소개한다면, 그와 같은 스타일의 의복을 입는 것이 하나님이나 세상과의 관계를 바꾸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들의 의복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극단을 피해야 한다. 그들은 칭찬이나 비난에 개의치 말고, 겸손하게 솔직한 태도를 취하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올바른 길을 고수해야 한다.

교회증언 1권 pp. 449-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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