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와 선지자 48장 – 가나안의 분배

48장 가나안의 분배

벧호론의 승리는 신속히 남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를 “쳤”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수 10:40, 43, 11장).

이스라엘 군사가 거둔 승리를 보고 두려워한 북방 팔레스틴 족속들은 이제 이스라엘을 대항하기 위하여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 동맹의 두령은 메롬 호수 서편 영토를 가진 하솔 왕 야빈이었다.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다. 이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에 가나안에서 만났던 어떤 군대보다 큰 군대였으며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이 왕들이 모여 나아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함께 진쳤더라.” 다시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기별이 전달되었다.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라.

여호수아는 메롬 호수 가까운 동맹군의 진지를 습격하여 그들의 군대를 완전히 전멸시켰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고로 그들을 격파하고…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 죽”였다. 가나안인들의 자랑이었던 병거와 말들을 이스라엘은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병거들은 불사르고 말들은 힘줄을 끊어 전쟁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거와 말들을 사용하지 말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야 했다.

도성들은 하나하나 점령당하고 동맹군의 요새인 하솔도 불타 버리고 말았다. 전쟁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으나 그 종말에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지배자임이 밝혀졌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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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록 가나안인들의 세력은 꺾였지만 그들을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그들은 팔레스틴 서쪽 해안을 따라 펼쳐진 비옥한 평야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북쪽에는 시돈인들의 영토가 있었다. 레바논도 역시 시돈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었고 애굽 쪽에 있는 남쪽 땅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전쟁을 계속하지 않았다.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는 지도자의 직임을 양도하기 전에 수행하여야 할 또 다른 일이 있었다. 이미 정복한 부분도 있고 아직 점령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으나 그 땅을 전부 각 지파에게 분배해 주어야 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분배된 기업의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일은 각 지파의 의무였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수를 그들의 앞에서 몰아내실 것이다. 백성들이 당신의 언약을 충실히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보다 큰 영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땅의 분배는 대제사장 엘르아살과 각 지파의 족장들의 도움을 받아 행하도록 여호수아에게 위임되었고 각 지파의 구역은 추첨으로 결정해야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하게 될 때 각 지파에게 분배될 전 영토의 경계는 모세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었고 분배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각 지파마다 1명씩 족장이 임명되었다. 레위 지파는 성소 봉사를 전담하고 있었으므로 이 분배에 들지 못하였으나 가나안의 각 곳에 있는 48 성읍을 기업으로 배정받았다.

토지 분배에 들어가기 전에 갈렙은 자기 지파의 두령들과 함께 나아와 특별한 요구를 제출하였다.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이제 갈렙이 이스라엘에서 최고 연장자였다.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정탐꾼들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었고 그들은 허락의 땅에 대한 좋은 보고를 가져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올라가 그 곳을 정복하자고 백성들을 격려한 자들이었다. 갈렙은 그 당시의 자기의 충성의 보상으로 허락된 다음의 약속을 여호수아에게 상기시켰다.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수 14:6~15). 그런고로 헤브론을 그의 소유로 줄 것을 요구하였다. 헤브론은 여러 해 동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집이 있었으며 그 곳 막벨라 동굴은 그들이 장사된 곳이었다. 헤브론은 무서운 아낙인들의 본거지였고 그들의 무서운 외모는 정탐꾼들을 몹시 무서워 떨게 하였으며 그로 인해 온 이스라엘의 용기는 꺾이고 말았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 갈렙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바로 그 곳을 그의 기업으로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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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은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이 45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고 말하였다. 이 요구는 유다 두령들의 지지를 받았다. 갈렙은 자신이 자기 지파로부터 토지를 분배하는 데 참여하도록 임명된 자이었으므로 그의 요구를 제출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들과 함께 연합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위를 행사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했다.

갈렙의 요구는 즉시 수락되었다. 갈렙 이외에는 이 거인의 성채를 정복하도록 안심하고 맡길 만한 자가 없었다. “여호수아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니라. 갈렙의 신앙은 지금도 그가 다른 정탐꾼들의 악한 보고를 반박하는 증언을 하던 그때의 신앙과 똑같았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을 점령하게 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의 오랜 방랑 생활을 견디었으며 범죄한 형제들로 인하여 실망과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대하여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고 오히려 광야에서 그의 형제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에 자기를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때의 모든 난관과 위험과 재앙 중에서는 물론이고 가나안에 들어와 전쟁하는 여러 해 동안에도 여호와께서 그를 보호하셨으며 이제 그는 80세가 지났으나 그의 기력은 쇠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이미 정복된 땅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정탐꾼들이 정복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그 곳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신앙심을 동요시켰던 큰 세력을 가진 바로 그 거인들에게서 그들의 요새를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탈취하고자 하였다. 갈렙의 요구는 그가 명예나 세력을 얻으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용감한 노 전사(老戰士)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모본을 보여 각 지파를 격려하여 저희 조상들이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땅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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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은 40년 동안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기업을 얻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거기서 아낙의…세 아들을…쫓아내었”(수 15:14)다. 그는 이와 같이 자기 자신과 자기 집을 위하여 기업을 얻었으나 그 열심은 줄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기업을 얻은 것을 만족히 여겨 주저앉지 않고 민족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욱더 정복하고자 전진하였다.

비겁한 자들과 반역자들은 광야에서 멸망당했으나 의로운 정탐꾼들은 에스골의 포도를 먹을 수 있었다. 각각 저희 신앙에 따라 상벌을 받았다. 믿지 않는 자들은 저희가 두려워하던 대로 사건이 성취되어 가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나안을 기업으로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들은 전도에 가로놓인 어려움보다는 전능하신 조력자의 능력을 바라보았으므로 아름다운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옛 위인들이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한” 것은 다 믿음으로 행한 일이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히 11:33, 34; 요일 5:4).

토지의 분배에 관하여 갈렙의 정신과는 전혀 다른 정신을 드러낸 다른 요구가 있었다. 이 요구는 요셉의 자손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의 반 지파가 제출했다. 저희 수가 많은 것을 고려하여 이 지파들은 두 몫의 영토를 요구하였다. 제비로써 그들에게 할당된 곳은 가나안에서 가장 부요한 곳이며 샤론의 비옥한 평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골짜기에 있는 많은 중요한 성읍들은 아직도 가나안인들이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이 지파들은 그들의 소유를 점령하는 수고와 위험을 피하고 이미 정복된 영토에서 다른 부분을 더 요구했다. 에브라임 지파는 여호수아 자신이 속한 지파로서 이스라엘 중에 가장 큰 지파 중 하나였다. 그 수로 볼 때 그들은 자연히 특별한 고려를 받을 만하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들은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수 17:14~18)고 하였다. 그러나 확고부동한 지도자 여호수아는 엄격한 공의에서 떠난 일이 없었다.

여호수아는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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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대답이 불평의 참 원인이 무엇임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가나안인들을 쫓아내려는 믿음과 용기가 부족하였다. 그들은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철병거가 있나이다”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리라고 보증하셨으므로 에브라임 사람들이 갈렙과 같은 용기와 신앙을 소유하였더라면 그들 앞에는 어떠한 원수도 설 수 없었을 것이다. 난관과 위험을 피하려는 그들의 명백한 욕망은 여호수아의 단호한 책망을 받았다. 여호수아는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가나안 사람들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큰 민족이었으므로 그들은 저희 형제들처럼 충분히 자신들의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는다면 그들은 철병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까지 길갈이 이스라엘 민족의 본부였고 성소가 그 곳에 있었다. 그러나 성소는 그것이 영구적으로 안착할 곳으로 선택된 장소로 옮겨야만 하였다. 그 곳은 에브라임 땅에 있는 작은 성읍 실로였다. 이곳은 가나안 땅의 거의 중앙에 있었고 모든 지파들이 출입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이곳은 완전히 정복한 땅의 일부였으므로 예배자들은 출입하는 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수 18:1~10)다. 성막을 길갈에서 옮길 때에 지금까지 진을 치고 있었던 지파들은 성막을 따라가 실로 가까이에 장막을 쳤다. 이 지파들은 저희 소유지로 분산될 때까지 실로에 머물러 있었다.

엘리의 죄악으로 블레셋인의 수중에 들어가고 그 후 실로가 망하기까지 법궤는 3백 년 동안 실로에 안치되어 있었다. 법궤는 그후 이곳 성막으로 되돌아오지 않았으며 마침내 성소 봉사는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옮겨지고 실로는 무의미하게 되었다. 지금은 한때 실로가 있었던 곳을 나타내는 유적들이 있을 뿐이다. 오랜 후에 실로의 운명은 예루살렘을 경고하는 데 사용되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같이 너희가 의뢰하는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 곳에 행하”(렘 7:12, 14)리라고 선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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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땅 나누기를 마치고” 모든 지파가 저희 기업을 배당받은 후에 여호수아는 자기의 요구를 제시했다. 갈렙에게처럼 그에게도 기업에 관한 특별한 약속이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광막한 지역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읍을 하나 요구하였다. “여호수아의 구한 성읍…을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였었더라”(수 19:49, 50). 이 성읍에 “남은 분깃”이란 뜻으로 딤낫세라란 명칭이 주어졌는데 이는 정복한 땅을 제일 먼저 취하는 대신에 자기 백성 중 가장 미천한 자들까지 다 분배받기까지 자기의 요구를 연기한 정복자 여호수아의 고상한 인격과 무아적 정신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레위인에게 배당한 성읍 중 여섯 성읍-요단강 양쪽에 있는 각각 세 성읍-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어 살인자가 도피하여 신변의 안전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이 성읍들의 지정은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민 35:11, 12)는 모세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다. 모세는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고 말하였다. 이 자비스러운 제도는 사적복수(私的復讐)의 관습이 있던 옛날에는 필요했다. 그 때에는 살인자에 대한 형벌이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나 상속인에게 부과되어 있었다. 죄의 증거가 분명한 경우에는 법관의 취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복수자는 어디든지 죄인을 추적하여 발견하는 대로 그를 죽일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그 때에 이 습관을 폐지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보셨다. 그러나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의 안전을 보장할 길을 마련하셨다.

도피성은 가나안 땅 어느 곳에서든지 한나절 안에 갈 수 있는 곳에 분산 배치되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평탄하도록 잘 손질하였다. 그 모든 길을 따라 표주(標柱)들을 세워 도망하는 자가 일순간도 지체하지 않도록 분명하고도 큰 글씨로 “도피”란 말을 기록하여 두었다. 히브리인이나 이방인이나 우거하는 자들이나 누구든지 이 도피성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죄한 자를 성급히 죽이지 말아야 하는 반면에 실제로 죄가 있는 자는 결코 형벌을 피하지 못하게 하였다. 올바른 집권자가 도피자의 사건을 공정히 심판하여 고의적으로 살해하지 않은 일이 분명한 자만을 도피성에서 보호하였다. 그러나 범죄자는 복수자의 손에 넘겨주었다. 보호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는 지정된 보호소 안에 체류한다는 조건으로만 받아들여졌다. 만일 한계선 밖에서 방황하다가 복수자에게 발견되면 그는 여호와의 보호를 무시한 대가로 자기의 생명을 지불해야 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으면, 피난하고 있던 자들은 자유를 얻어 그들의 소유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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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죄에 대하여 심문할 때에 비록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있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피고인을 정죄하지 말아야 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무릇 사람을 죽인 자 곧 고살자를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민 35:30)라고 지시하셨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와 같은 지시를 모세에게 주신 이는 그리스도이셨다. 위대한 교사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쓰시고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에게 범죄자를 처리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에 한 사람의 증언으로 무죄 석방하거나 유죄 선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반복하셨다. 한 사람의 견해나 의견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를 결말지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사건에 있어서 두 사람이나 그 이상 연합하여 그들이 함께 책임을 져야 하며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마 18:16)여야 한다.

살인죄로 심문을 받는 자가 유죄로 판명되면 아무런 속죄나 배상금으로라도 구원할 수 없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피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창 9:6; 민 35:31, 33; 출 21:14)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 국가의 안전과 순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살인죄를 엄중히 처벌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고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지정된 도피성은 그리스도 안에 준비된 피난처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이 땅의 도피성을 마련하셨던 동일한 자비로우신 구주께서는 그의 보혈을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을 위하여 저희가 둘째 사망에서 피하여 안전함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한 피난처를 준비하셨다. 어떠한 권세도 용서를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영혼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1, 34; 히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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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으로 도망하는 자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가족과 직업을 모두 버려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도 없었다.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에 안전한 땅으로 피하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다른 모든 이해관계를 포기해야 하였다. 피로도 잊고 어려움도 돌아보지 않았다. 도피자는 그 성벽 안에 도달하기까지는 감히 한 순간도 발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신처를 찾을 때까지는 영원한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도피자가 불필요한 배회나 부주의로 인하여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빼앗기는 것처럼 지체함과 무관심이 영혼의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 대적 사단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는 모든 사람들을 추적하고 있다. 사단의 위험에 민감하지 못하고 영원한 피난처에서 보호를 받으려고 열렬히 노력하지 않는 자들은 파괴자 사단의 제물이 될 것이다.

언제고 도피성 밖으로 나아가는 죄인은 복수자의 손에 빠졌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따라야 함을 배웠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인이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죄인은 믿음과 순종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 27).

이스라엘의 두 지파 갓과 르우벤은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그들의 기업을 받았다. 유목민들에게 광활한 고원 지대와 길르앗과 바산의 풍부한 삼림이 그들의 양떼와 소떼를 위하여 가나안 본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광대한 방목지를 제공해 주는 데 매력을 느껴 이곳에 정착하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두 지파와 반 지파는 그들의 몫에 해당한 군사를 보내어 다른 지파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가서 다른 지파 모두가 기업을 얻을 때까지 그들과 함께 싸울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그 의무를 충실히 감당해 냈다. 열 지파가 가나안에 들어갈 때(수 4:12, 13) 사만명의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서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저희 동포들 곁에서 용감히 싸웠다. 이제 그들이 저희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시간이 이르렀다. 그들은 저희 동포들과 연합해서 싸웠으므로 노획물을 분배받아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 금, 동, 철과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여호수아 22장 참조) 돌아갔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가족과 가축과 함께 현재 남아 있었던 자들과 분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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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들은 여호와의 성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게 되었으며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목격한 여호수아는 그들의 고독한 유랑 생활 중에 저희 변경에 사는 이방 족속들의 관습에 빠지게 될 유혹이 얼마나 강할 것인지를 알고 마음속 깊이 근심하였다.

여호수아와 다른 지도자들의 마음이 아직도 불길한 예감에 눌려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이상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적적으로 강을 건넌 곳에서 멀지 않은 요단강변에 두 지파와 반 지파는 실로의 번제단과 비슷한 큰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의 율법은 성전 이외에 다른 예배하는 곳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고 그렇게 하는 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만일 이 제단의 목적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을 그냥 둔다면 그것은 백성들을 참 신앙에서 돌아서게 할 것이다.

백성들의 대표자들이 실로에 모이고 그들의 흥분과 분노가 고조되어 곧바로 범죄자들을 대항해서 싸움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가장 신중히 생각하는 자들의 감화를 받아 먼저 대표자들을 보내어 두 지파와 반 지파에게서 그들의 행위에 대한 설명을 듣기로 하고 각 지파에서 한 명씩 방백 열 명을 선택했다. 그 우두머리는 비느하스였는데 그는 브올의 사건에서 열성으로 이름을 떨쳤던 자였다.

두 지파와 반 지파가 그처럼 큰 의심을 받을 행위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공연히 행한 것은 잘못이었다. 대사들은 저희 동포가 범죄한 것으로 생각하고 날카로운 책망으로 그들을 대하였다. 대사들은 그들이 여호와께 반역하였다고 비난하고 바알브올과 연합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떠한 형벌이 내렸는지를 기억하도록 명하였다. 비느하스는 온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하여 갓과 르우벤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희생 제단이 없는 땅에 거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건너편 너희 동포들의 소유지에서 분깃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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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으로 피고인들은, 그들의 제단은 희생 제물을 드리려 함이 아니요 다만 그들이 요단강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지라도 가나안에 있는 동포와 동일한 신앙을 가졌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들은 장차 그들의 자손들이 이스라엘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성막에서 제거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 때에는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의 모형을 따라 세운 이 제단이 그것을 세운 자들 역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대사들은 큰 기쁨으로 이 설명을 받아들이고 즉시 이 기별을 가지고 그들을 보낸 자들에게로 돌아갔다. 싸움을 하려던 생각은 모두 사라지고 백성들은 연합하여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그들의 제단에 그것을 세운 목적을 지적하는 이름을 붙여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미래의 오해를 방지하고 유혹의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가장 가치 있는 동기에 의하여 행동하는 자들 중에서도 단순한 오해로 인하여 큰 어려움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정중하고 관대하게 다루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하고 치명적인 결과까지 따르게 되는가! 열 지파는 아간의 사건에서 하나님이 그들 중에 존재하는 죄악을 발견하기에 조심 없이 행한 일에 대하여 어떻게 견책하셨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신속하고 진지하게 행하기로 결심하였으나 먼젓번의 과오를 피하려는 노력 때문에 반대편의 극단에 치우치게 되었다. 그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하여 정중하게 문의하는 대신에 그들은 비난과 정죄로 저희 동포들을 대하였다. 만일 갓과 르우벤 사람들이 동일한 정신으로 반박하였더라면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죄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한편으로는 완만하게 행하는 것을 피하는 일이 중요한 반면에 가혹한 형벌과 근거 없는 의심을 피하는 일 또한 다 같이 중요하다.

자신들의 행위에 관하여 자책하는 데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과오를 범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을 매우 혹독하게 취급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일찍이 비난과 힐책으로 그릇된 태도를 교정 받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 바른길에서 아주 멀리 떠나가고 저희 마음이 굳어져서 죄를 뉘우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친절한 정신과 겸손하고 관대한 태도가 과오를 범한 자를 구원할 수 있고 많은 허물을 가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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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우벤 족속과 그 동료들이 나타낸 지혜는 본받을 가치가 있다. 참된 종교적인 사업을 추진시키고자 정직하게 노력하였으나 그들은 잘못 판단을 받고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울분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기 전에 저희 형제의 비난을 예의와 인내로 다 들은 후에 자신들의 동기를 충분히 설명하고 저희의 무죄함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뻔한 어려운 사건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거짓 비난 아래서라도 의로운 자들은 침착하고 사려 깊게 행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잘못 해석된 모든 것들을 잘 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사정을 안전하게 위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죄를 찾아내신 것처럼 분명히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의 사정을 옹호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행하는 자들은 오래 참고 온유하게 행하는 사랑을 소유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사이는 연합과 우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전에 드리신 그리스도의 기도는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하나가 되게 하여 세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었다. 이러한 가장 감명적이고 놀라운 기도가 각 시대를 통하여 내려와 현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는 당신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라고 말씀하신 까닭이었다. 우리는 진리의 한 원칙도 희생하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이같은 연합의 상태에 도달해야 함이 우리의 끊임없는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증거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말씀하셨다. 사도 베드로도 교회에게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 9)고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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