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93일

일요일 준수 운동이 일어남 

오늘날 미국에서는 교회의 제도와 관습에 있어서 국가의 지지를 받으려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바, 그것은 개신교가 로마교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일이다. 그뿐 아니라 개신교도들은 로마교가 유럽에서 잃어버린 최상권을 개신교 미국에서 회복하도록 문을 열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운동에 더욱 큰 의미를 주는 것은 일요일 준수, 곧 로마교가 만들어서 그의 권위의 표라고 주장하는 관습의 강요를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 사실이다. 오늘날 개신교회들에 침투되어 그들로 하여금 일찍이 로마교가 그들 앞에서 한 그대로 일요일을 존중하는 동일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은 로마교의 정신, 곧 세속적 관습과 일치되고,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유전을 존중하는 정신이다.  

미구에 전개될 투쟁에 있어서 어떤 기관들이 이용될 것인지 이해하려면 로마교가 그와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과거에 어떤 수단을 이용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된다. 법왕교와 개신교가 연합하여 그들의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 알고자 하면 로마교가 안식일과 안식일 옹호자들에 대하여 나타냈던 정신을 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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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칙령과 총회들과 세속적 권력에 의하여 지지를 받은 교회의 의식들은 그것들로 말미암아 이교의 축제일이 그리스도교계에서 존경받는 위치를 차지하게 만든 계단들이었다. 일요일 준수를 강요하는 최초의 법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말미암아 제정되었다 (서기 321년). 이 칙령은 도시인에게는 “존경할 만한 태양의 날”에 휴식할 것을 요구하면서 농촌 사람들에게는 농사일을 계속하도록 허락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이교도의 법규이었으나 황제가 형식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후 시행하였다.  

왕의 칙령이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하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 입증되자 평소에 군주들의 은총을 받고자 희망했던 콘스탄티누스의 특별한 친우이며 추종자인 감독 유세비우스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경하였다고 하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 새로운 교리를 증명하는 성경상 증거는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유세비우스 자신이 부지중에 그것이 허위임을 시인하고 그것을 변경한 참 장본인들이 누구임을 지적한다. “안식일에 해야 할 일체의 의무를 우리는 주의 날로 옮겼다” (Robert Cox, Sabbath Laws and Sabbath Duties, p.538) 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아무 근거도 없는 일요일에 대한 논증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안식일을 유린하는데 대담해지게 했다. 그리하여 세상의 영광을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인기 있는 축제일을 받아들였다.  

법왕교가 굳게 확립되자 일요일을 존숭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얼마 동안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을 때에는 경작에 종사하고 여전히 제칠일을 안식일로 여겼다. 그러나 꾸준하게 변화가 이루어졌다. 법정의 신성한 직무에 종사하는 자들은 어떠한 민사소송의 판결도 일요일에 할 수 없도록 금지되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계급의 여하를 불문하고 세속적 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렸으며, 그것을 범할 때는 자유인이면 벌금을, 종이면 태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 후에 그것을 범하는 부자는 재산의 절반을 몰수당할 것이며 그 일을 여전히 고집하는 자는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칙령이 내렸다. 그리고 하류 계급의 사람들은 영구적으로 추방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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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와 일요일 강제 준수의 역사 

기적도 또한 이용되었다. 여러 가지 이상한 말들 중 어떤 농부가 일요일에 밭을 갈려고 쇳조각으로 쟁기를 소제하였는데 그 쇳조각이 손에 철썩 달라붙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하여 그는 2년간이나 그 쇳조각을 붙이고 다니면서 “심한 통증과 부끄러움” (Francis West, Historical and Prac-tical Discourse on the Lord’s Day, p.174) 을 당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후에 법왕은 일요일을 범하는 자들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도록 교구 담임 신부에게 명령하였고,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종의 큰 재난이 그들과 그들의 이웃에게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게 하였다. 일요일에 일을 하다가 벼락을 맞은 자들이 있으므로 이날은 안식일임이 틀림없다는 주장이 어떤 교회 회의에서 논의되었으며 그때부터 개신교도들도 그 주장을 널리 적용했다. 주교들은 “하나님께서 이날을 등한히 하는 것을 참으로 싫어하시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들은 사제들과 목사들, 왕들과 군중들, 그리고 모든 충성된 백성들에게 “이날의 영광을 회복하고 그리스도교의 명예를 위하여 그들의 최대의 노력과 주의를 기울여 이날을 더욱 경건히 준수하도록” (Thomas Morer, Di-scourse in Six Dialogues on the Name, Notion, and Observation of the Lord’s Day, p.271) 호소하였다.  

회의의 결의로서 충분치 못함이 입증되자 세상의 집권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어 일요일에 일을 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법령을 반포하도록 간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로마에서 개최된 종교 회의에서 이전에 결정된 모든 결의가 더 한층 큰 영향력과 권위가 있는 것으로 재보증되었다. 이것들은 종교적 법률이 되어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 국에서 그 나라의 집권자들에 의하여 강요되었다 (Heylyn, History of the Sabbath, pt.2, ch.5, sec.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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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요일 준수를 성경의 권위로 보증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큰 곤란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태양의 날을 숭배하기 위하여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한 여호와의 분명한 선언을 무시해버릴 권리가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있는가 질문하였다. 성경에서 얻어야 할 증거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하여 다른 방편이 필요하였다. 12세기 말엽에 영국의 교회들을 방문한 열렬한 한 일요일 옹호자는 충성된 진리의 증인들에게 거절을 당하였다. 그는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효과가 없으므로 일시 고국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가르침을 강요하기 위한 어떤 방안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그의 그 결함이 보충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으로 주장하는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일요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명령과 이를 순종하지 않는 자를 위협하는 무서운 협박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소위 그 귀중한 문서, 사실은 그것이 지지하는 그 제도와 마찬가지로 비루한 위조물에 불과한 그 문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데 예루살렘의 골고다에 있는 성 시므온의 제단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로마의 법왕궁이 그 출처였다. 교회의 세력과 번영을 도모하기 위하여서는 사기와 위조도 각 시대에 걸쳐 법왕권 제도에 의해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돼 왔다. 

일요일 옹호자의 조작 

그 두루마리는 토요일 제9시, 곧 오후 3시부터 월요일 해 뜰 때까지 노동을 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그리고 그 권위는 많은 이적들이 입증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지정된 시간 외에 일하므로 마비증에 걸린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한 제분업자가 곡식을 갈려고 하자 가루가 나오는 대신에 피가 쏟아져 나오고 물은 힘 있게 흘러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수차 (水車) 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떡을 찌려고 떡반죽을 가마에 넣었던 한 부인은 떡을 꺼내 보니 가마는 매우 더워 있어도 떡은 생반죽 그대로였다. 또 다른 부인은 떡 반죽을 했으나 오후 3시가 되었으므로 월요일까지 두어두기로 했는데 이튿날 본즉 벌써 하나님의 능력으로 훌륭한 떡으로 구워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토요일 오후 3시가 지나서 떡을 구워 그 이튿날 아침에 베어 보니 거기서 피가 나왔다. 이와 같이 터무니없고 미신적인 이야기로 일요일의 옹호자들은 그날의 신성성을 옹호해 보고자 노력하였다 (Roger de Hoveden, An-nals, vol.2, pp.528~5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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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에서도 영국에서처럼 고대의 안식일의 일부분과 일요일을 연결시킴으로써 일요일을 크게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룩하게 지켜야 할 시간은 달랐다. 스코틀랜드 왕이 내린 칙령에는 “토요일 정오 12시부터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 (Morer, pp.290, 291) 고 되었고 그 시간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어떤 사람도 세속적 일에 종사하지 말 것이라고 하였다.  

일요일 신성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법왕교도 자신들은 안식일의 거룩한 권위와 그것을 대신하여 생긴 일요일 제도가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스스로 공공연하게 고백하였다. 16세기에 있은 법왕교 회의는 아래와 같이 분명히 언명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칠일이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날이며 유대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지켜오던 날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안식일을 주의 날로 변경하였다” (S.Bliss, Memoirs of Wm.Miller, pp.281, 282). 하나님의 율법을 함부로 변경한 자들은 그들이 한 일이 어떤 일인가를 모르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들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고 있었다.  

일요일 강요에 대한 개신교의 태도 

로마교회가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정책을 써왔는가에 대한 한 현저한 실례는 왈덴스인들에게 가한 잔악하고 장기간에 걸친 박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는 안식일 준수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넷째 계명을 충실히 지켰기 때문에 유사한 방법으로 고난을 받았다. 에디오피아와 아비시니아 교회들의 역사는 특별히 중요하다. 암흑시대의 어둠속에서 중앙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띄지 않고 세상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는데 그들은 여러 세기 동안 그들의 신앙을 자유롭게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로마는 그들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고 미구에 아비시니아의 황제는 법왕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승인하는 미혹에 빠지게 되었다. 이어서 다른 것들도 양보하게 되었다. 가장 엄한 형벌 아래 안식일 준수를 금지하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Michael Geddes, Church History of Ethiopia, pp.311, 312 참조). 그리고 법왕의 학정은 너무도 쓰라린 멍에가 되었기 때문에 아비시니아 사람들은 그들의 목에서 그 멍에를 벗어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무서운 투쟁 끝에 로마교도들은 그들의 영토 밖으로 추방되고 옛날의 신앙이 회복되었다. 교회들은 그들의 자유를 향유함과 동시에 그들은 로마교의 기만과 광신과 전제적 세력에 대하여 배운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들은 외로운 그들의 영토에서 다른 그리스도교국에 알려지지 않고 지내는 것을 만족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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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교회들은 법왕교가 완전히 배교하기 전에 그 교회가 지켰던 것처럼 안식일을 준수하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제칠 일을 지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관습을 따라 일요일에 노동을 하지 않았다. 로마교가 최상권을 잡게 되자 그는 그 자신이 정한 날을 높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안식일을 유린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교회들은 거의 일천년 동안 숨어서 이 배교에 동참하지 않았다.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자 그들은 참 안식일을 버리고 거짓 안식일을 높이도록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독립을 회복하자마자 그들은 넷째 계명을 준수하게 되었다 (부록 34 참조).  

이와 같은 과거의 기록들은 참 안식일과 그 옹호자들에 대한 로마교의 적의와 그가 창안한 제도를 높이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이 어떠함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교와 개신교가 일요일을 존중하기 위하여 연합하게 될 때 이런 사건이 반복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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