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형식과 내용
이와 같이 외형상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과 의식은 죄에 빠진 영혼들의 갈망을 우롱 (愚弄) 하는데 불과하고 그 내부의 부패를 증거한다.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것에 매력을 갖게 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에서 비쳐오는 빛 가운데서 참된 그리스도교는 순결하고 아름답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 참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외관상 장식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은 성결의 미와 겸손하고 안정된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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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상 아름다움이 반드시 순결하고 고상한 사상의 지표는 아니다. 고상한 예술 지각과 우아하고 세련된 취미가 세속적이며 육욕적인 사람의 심중에도 흔히 있다. 그들은 흔히 사단에게 이용되어 사람들에게 심령의 필요를 잊어버리게 하고 미래의 생애와 영생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무한한 구원자에게서 돌아서서 이 세상만을 위하여 살도록 만든다.
외관을 치장하는 종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매력적이다. 천주교 예배의 화려한 모습과 의식에는 매혹적이며 황홀케 하는 일종의 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기만당하여 로마교를 바로 하늘 가는 문인 것처럼 쳐다보게 된다. 오직 진리의 기초 위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성령으로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들만이 로마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스도께 대한 체험적 지식을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경건의 모양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종교가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종교이다.
교회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주장은 로마교도들에게 마음대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는 의식 (儀式), 곧 그것이 없으면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그 의식 또한 죄를 범하도록 허용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해주는 경향이 있다. 타락한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심중의 은밀한 사상과 생각을 고백하는 자는 자신의 인간성을 저하시키고 심령 속에 있는 온갖 고상한 능력을 저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사제 (司祭), 실수와 죄가 많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너무도 흔히 음주와 방종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자기 생애에 있는 죄를 고백함으로 그의 품성의 표준은 저하되고 그로 말미암아 더럽혀진다. 그는 하나님을 타락한 인간과 같은 분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제가 하나님의 대표자의 위치에 서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그 비열한 고백은 이 세상을 더럽혀서 마지막 멸망을 받게 하는 많은 죄악을 흘려 내보내는 보이지 않는 원천이다. 그러나 방종을 좋아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마음을 펴놓는 것보다 자기와 동일한 인간에게 고백하는 일이 더욱 좋게 여겨진다. 또한 인간성에서 볼 때 고행을 하는 것이 죄를 버리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일이며 육체를 베옷과 쐐기풀로 괴롭게 하고 쇠사슬로 제어하는 편이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보다 더욱 쉽다. 육신의 마음으로는, 무거운 멍에를 메는 것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보다 더욱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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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와 초기의 유대교
로마교회와 그리스도 초림 당시의 유대교와는 현저한 유사점이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원칙들을 비밀리에 유린하면서 표면상으로는 그 조문들을 엄격히 지켰다. 그리고 까다로운 요구와 유전을 첨가시켜 그것을 준수하는 일이 고통스럽고 괴롭게 만들었다.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을 존중하노라고 공언했던 것처럼 로마교도들은 십자가를 존중하노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징을 높이면서도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는 그것이 대표하는 그분을 부인한다.
로마교도들은 십자가를 교회에, 강단에 그리고 그들의 의복에 붙인다. 어디에서나 십자가의 휘장을 보게 된다. 외관상으로는 어디서나 그것이 존경과 높임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들은 무의미한 유전과 거짓된 해석과 엄격한 규칙들의 무더기 아래 묻혀 버린다. 완고한 유대인들에 관한 구주의 말씀은 오히려 로마 천주교의 지도자들에게 더욱 정확히 적용된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 (마 23:4) 한다. 양심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거스름으로 받는 진노를 두려워하고 있는 한편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사치와 쾌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고 있다.
성상 (聖像) 과 유물 예배, 성자 (聖者) 들에게 드리는 기도, 법왕 숭배 등은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에게서 떠나가게 하려는 사단의 간계이다. 사단은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오직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의 분에게서 그들의 주의를 이탈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사단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고 말씀하신 분을 대신할 어떤 대상에게로 그들을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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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은 하나님의 품성과 죄의 성질과 대쟁투에 걸려 있는 진정한 문제를 잘못되게 나타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의 궤변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의무 관념을 박약하게 하여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그릇된 관념을 갖게 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그분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게 만든다.
사단은 그의 품성 속에 본래부터 있는 잔인성을 창조주께 돌리고 그것을 종교 제도에 구현시키고, 예배의 형식에 나타내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워지자 사단은 그들을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일에 자신의 대리자로 삼는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관념이 곡해됨으로써 이교국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사람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우상 숭배의 형태 하에서 무섭고도 잔인한 일들이 자행되어 왔다.
잔인무도한 박해
로마 천주교는 이교와 그리스도교의 형태를 혼합하고 또한 이교처럼 하나님의 품성을 잘못 나타내며, 그에 못지않은 잔인하고 역겨운 수단들을 사용해 왔다. 로마교의 전성시대에는 그의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기 위하여 고문하는 기구들이 사용되었다.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화형주가 있었다. 심판 때까지는 결코 알려지지 않을 어떤 규모의 대량 학살들이 감행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주인이 되는 사단의 지배 아래 그들의 희생물이 된 자들에게 최대의 고문을 하면서도 그 생명을 종식시키지 않는 방법을 고안하기 위하여 연구하였다. 많은 경우에 사람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극악무도한 고문을 반복하였으므로 고통받는 자의 신체가 투쟁을 포기하였으며 그는 죽음을 즐거운 해방으로 환영하였다.
이런 것이 로마교에 반대하는 자들의 운명이었다. 로마교는 그 신봉자들에게도 채찍질과 굶주림의 고통과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온갖 육체적 고통과 낙담시키는 방법으로 징계를 과하였다. 하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회개한 자들은 자연의 법칙을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지상 생애를 복되고 즐겁게 해주시고자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줄을 끊어 버리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선천적 애정을 억제해 버리고 그들의 동료 인간들에게 대한 동정의 생각과 감정을 갖는 것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로 생각하여 그것들을 억누르기 위한 헛된 노력에 그들의 생애를 허비한 무수한 희생자들이 교회의 묘지에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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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수백 년 동안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들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교국의 중심부와 그 전역에서 사단이 나타낸 잔학성을 알고자하면 로마교의 역사를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이 거대한 기만의 조직을 통하여 악의 왕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그의 목적을 수행한다. 사단이 자신을 변장하는 일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그의 사업을 수행하는 일에 참으로 성공적임을 알 때 우리는 그가 성경에 대하여 그처럼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더욱 잘 깨달을 수 있다. 성경이 읽혀지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무거운 짐들을 하나도 사람들에게 지워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회개하고 상한 심령과 겸손하고 순종하는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자칭 그리스도의 대표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 가운데 남녀들이 하늘에 적합한 사람들이 되려면 수도원에 묻혀야 한다는 아무런 모본도 주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랑과 동정심을 억제해야 한다고 결코 가르치지 않으셨다. 구주의 마음은 사랑으로 넘쳐 있었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완전해지면 질수록 그의 감수성은 더욱 예민해지고 죄에 대한 지각은 더욱 밝아지며 고통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심은 더욱 깊어진다. 법왕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품성을 우리 구주의 품성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하늘의 왕으로 존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감옥이나 고문대에 넘겨주신 일이 있었는가? 그분께서 당신을 믿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등한히 여김을 받으시자 사도 요한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질문하였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쫓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 9:54).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눈으로 당신의 제자를 보시며 그의 과격한 정신을 책망하셨다.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 (눅 9:56 난외 주).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그 정신은 그분의 대표자라고 공언하는 사람의 정신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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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로마교는 그의 무서운 잔학성의 기록을 변명으로 덮어 버리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세상을 대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같은 차림으로 나서지만 실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지나간 시대에 존재했던 법왕교의 원칙들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가장 암흑한 시대에 고안된 교리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천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 개신교도들이 존경하고자 하는 법왕교는 종교 개혁 당시에 세상을 지배하였고 그 당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그의 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걸고 항쟁한 그 동일한 로마교이다. 그는 왕들과 군주들을 다스리고 하나님께 속한 권한을 가졌노라고 공언하던 동일한 교만과 뻔뻔스런 주장을 오늘날도 가지고 있다. 그의 정신은 인류의 자유를 억압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죽인 당시와 똑같이 오늘날도 잔인하고 포학하다.
법왕교는 성경의 예언이 마지막 시대에 배도하는 일이 있으리라고 말한 바로 그대로의 단체이다 (살후 2:3, 4).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편리한 길을 취하는 것이 그의 정책의 하나이다. 그는 여러 가지 가변적인 모양 아래 변함없는 뱀의 독을 감추고 있다. “우리는 이단자나 이단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Lenfant, vol.1, p.516) 고 법왕교는 주장한다. 성도의 피로 기록된 천여 년의 기록을 가진 이 세력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일부로 인정되어야 할 것인가?
가톨릭교와 개신교
천주교가 개신교와 옛날처럼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고 오늘날 개신교 국가들이 주장하는 바는 이유가 없는 말이 아니다. 어떤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법왕교에서 일어난 변화가 아니다. 개신교가 종교 개혁 시대 이래 크게 타락하였기 때문에 천주교는 오늘날의 개신교와 매우 비슷해진 것이 사실이다.
개신교회들이 세상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노력해 옴으로써 거짓된 사랑이 그들의 눈을 가리워 버렸다. 그들은 모든 악을 선으로 믿는 것이 옳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필연적인 결과로서 그들은 마침내 모든 선을 악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제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어진 믿음을 옹호하는 위치에 서는 대신에 이른바 로마교에 대하여 무자비한 견해를 가졌던 것을 사과하고 그들이 완고하였던 점에 대하여 용서를 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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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부류의 사람들, 로마교에 대하여 아무런 호감도 갖지 않는 많은 사람들까지도 그 세력과 영향력에 대하여 별반 위험을 느끼지 아니한다. 많은 사람들은 중세기 동안에 퍼져있던 지적· 도덕적 흑암이 로마교의 교리와 미신과 압박을 조장하게 되었으므로 현 시대의 지성적 발달과 일반적인 지식의 보급과 종교 문제에 대한 자유사상의 진보 등이 편협과 압제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계몽된 시대에 그런 상태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조롱을 받고 있다. 지적·도덕적·종교적 큰 빛이 이 시대를 비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펼쳐져 있으므로 하늘로부터 오는 빛이 이 세상을 비추고 있다. 그러나 주어진 빛이 크면 클수록 그 빛을 곡해하고 거절하는 자들의 흑암은 더욱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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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가 인심을 얻는 비결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하면 개신교도들은 법왕교의 정체를 알고 그를 싫어하며 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부하므로 그들을 진리로 인도해주도록 겸손하게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깨닫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한 가지로 무지하다. 그들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양심을 진정시켜야 하므로 가장 신령적이 아닌 것, 가장 굴욕적이 아닌 것을 찾아 구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방법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는 방법이다. 법왕교는 그런 사람들의 요구에 잘 맞도록 되어 있다. 법왕교는 거의 전 세계를 망라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 곧 자기의 공로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과 그들의 죄 가운데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적합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 법왕교가 세력을 얻는 비결이 있다.
지적 어둠이 심했던 시대가 법왕교의 성공에 유리했던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지적 빛이 밝은 시대도 꼭 마찬가지로 그의 성공에 유리하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지나간 시대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눈이 가리워져 자기들의 발 앞에 펼쳐 있는 그물을 보지 못하고 걸려들었다. 이 시대에 “소위 과학” 이라는 인간의 그릇된 이론에 눈이 부시어 올무를 분별하지 못하고 마치 눈이 가려진 것처럼 그리로 걸어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능을 창조주로부터 받은 선물로 생각하고 진리와 의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과 야심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들 자신의 이론을 더욱 높이기 때문에 총명이 무지보다 더욱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리하여 성경에 대한 믿음을 암암리에 손상시키는 오늘날의 거짓 과학은 암흑시대에 있어서 지식을 억제함으로써 로마교의 발전의 길을 열어 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형태로 법왕교를 받아들이게 하는 일에 성공적인 길임이 입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