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망 58장 – “나사로야 나오라”

58장 “나사로야 나오라”

가장 확고한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있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강했고 사랑이 깊었으며 또한 구주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가장 큰 이적은 나사로를 위하여 행해졌다. 구주께서는 당신의 도움을 구한 모든 사람을 축복하셨다. 그분은 모든 인간 가족을 사랑하시나 특별히 친근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그분의 마음은 베다니에 사는 한 가족과 두터운 정분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가족 중의 한 사람을 위하여 가장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예수께서는 때때로 나사로의 가정에서 휴식을 얻으셨다. 구주께서는 집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제자들의 후한 대접에 의존하셨으며, 가끔 피로하고 인간의 우정이 갈급할 때에는 분노한 바리새인들의 의심과 질투에서 벗어나 이 평화스러운 가족에게로 도피하기를 즐기셨다. 이곳에서 그분은 진심어린 환영과 순결하고 거룩한 우정을 발견하셨다. 당신의 말씀이 이해되고 소중히 간직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분은 여기서는 단순하고도 완전히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말씀하실 수 있었다.

우리 구주께서는 조용한 가정과 흥미를 가지고 듣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상냥한 마음, 예의와 애정을 사모하셨다. 하늘에서 주신 교훈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분은 언제나 큰 축복을 나누어 주려고 하셨다. 군중들이 야외에서 그리스도를 따라다닐 때에 그분은 그들에게 자연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분께서는 군중들의 이해의 눈을 열어 저들로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세상을 붙드시는가 깨닫도록 노력하셨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옳게 평가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분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주시는, 고요히 내리는 이슬과 촉촉이 적시는 소낙비와 밝은 햇빛에 청중들의 관심이 집중되도록 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사람들이 더욱 충분히 깨닫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청중들은 잘 듣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공중 생애의 피곤한 투쟁에서 떠나 베다니에 있는 그 가정에서 휴식처를 찾으셨다. 이곳에서 그분은 들어서 식별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의 책을 공개하셨다. 잡다한 군중에게는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그분은 이런 개인적인 회합에서 말씀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친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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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놀라운 교훈을 주실 때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듣는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 있었다. 그 때에 음식 준비하는 일로 당황한 마르다가 그리스도께 나아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베다니에 처음 방문하셨을 때의 일이다. 구주와 그분의 제자들이 여리고로부터 도보로 수고스러운 여행을 한 직후였다. 마르다는 그들을 대접하기 위한 준비를 염려한 나머지 손님에게 베풀어야 할 예의를 잊어버렸다. 예수께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온화하고 참을성 있는 말씀으로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보다도 자기에게 더 귀중한 말씀 곧 구주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귀중한 말씀을 그의 심령에 채우고 있었다.

마르다에게 필요되는 “한 가지”는, 침착하고 헌신적인 정신과 장래와 영생에 관한 지식을 깊이 갈망하는 마음과 영적으로 향상하는 데 필요한 은혜였다. 마르다는 잠시 후에 지나가버릴 일을 위해서 덜 염려하고, 영원히 존속하는 일을 위하여 더욱 염려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저들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만들어 줄 그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붙잡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업에는 주의성 깊고 정열적인 일꾼이 필요하다. 마르다와 같은 사람들이 활동적인 종교 사업에 저희 열심을 다할 넓은 분야가 있다. 그러나 그들을 먼저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 앞에 앉게 하라. 근면과 기민성과 정력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화되게 하라. 그러면 그 생애는 선을 위한 무적의 능력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쉬시곤 했던 평화스러운 가정에 슬픔이 찾아왔다. 나사로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 그래서 그의 누이들은 구주께 사람을 보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란 말을 전하였다. 그들은 오라비가 무서운 병에 걸린 것을 알았으나 그리스도께서 각종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음을 보이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고민에 빠진 저희를 그분께서 동정하시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곧 오시라는 긴급한 요구를 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는 기별을 보냈다. 그들은 그분께서 저희 기별에 즉시 응답하여 베다니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에게로 오시리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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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근심스럽게 예수님에게서 오는 소식을 기다렸다. 저희 오라비가 아직 살아서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저들은 기도하며 예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자는 그분을 모시고 돌아오지 못했다. 다만 그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는 기별을 가져왔다. 그들은 나사로가 살게 되리라는 희망에 굳게 매달렸다. 그들은 거의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부드럽게 희망과 격려의 말을 하려고 애썼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붙들어 주시는 은혜를 느꼈기 때문에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구주를 비난하는 말을 하지는 않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기별을 들으셨을 때 제자들은 그분이 기별을 냉정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였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기대한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분께서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이틀 동안 그분은 계시던 그 곳에 머무르셨다. 이렇게 지체하시는 까닭을 제자들은 알 수 없었다. 그분께서 가셨더라면 고통당하는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까 하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베다니에 사는 가족에 대한 그분의 강한 애정을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분께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는 슬픈 소식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마음에서 그 소식을 깨끗이 잊으신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이틀 동안 나사로에 대하여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선구자인 침례 요한을 생각하였다. 그들은 놀라운 이적을 행하실 수 있는 예수께서 어찌하여 요한을 옥에서 신음하게 하고 마침내 참혹한 죽음을 당하도록 허락하셨는지 의심하였다.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도 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생명을 구원하지 않으셨을까? 바리새인들은 때때로 이 질문을 하곤 했는데 그들은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주장을 꺾는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이라고 제시하였다.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시련과 손실과 핍박에 관하여 경고하셨다. 시련이 닥칠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버리실 것인가? 제자들 중 어떤 이들은 저들이 그분의 사명을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들은 모두가 심각한 고민 가운데 있었다.

이틀을 기다린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유대로 가실 양이면 왜 이틀 동안이나 기다리셨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자신들을 위한 염려가 가장 먼저 저희의 마음에 떠올랐다. 그들은 그분께서 가시려고 하는 행로에서 위험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었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지도 아래 있다. 내가 그분의 뜻을 행하는 한 내 생명은 안전하다. 내 날의 열두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내 날의 마지막 남은 부분에 이르렀으나 이 나머지 부분이 있을 동안 내 생명은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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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는 계속해서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걷는 자는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영의 빛은 그의 의무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줄 것이며 그의 사업이 마칠 때까지 바른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지 않은 곳 즉 자기 자신이 선택한 길로 행하는 자는 실족하게 될 것이다. 그에게는 낮이 밤으로 변했으므로 어느 곳에 있든지 그는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얼마나 감동적인 말씀인가! 얼마나 동정심이 가득 찬 말씀인가! 제자들은 저희 주께서 예루살렘에 가심으로 입게 될 위험을 생각하여 베다니의 유가족을 거의 잊어버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으셨다. 제자들은 책망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좀 더 빨리 그 기별에 응하지 않으신 까닭에 그들은 실망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에게 그윽한 사랑을 갖고 계셨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도록 유혹을 받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분은 서둘러 사자와 함께 돌아가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는 말씀은 그들의 마음에 올바른 생각을 일깨웠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고통당하는 친구들을 잊지 않고 계셨음을 확신하였다.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신다.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지며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까지 그분 안에서 잠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셨다. 도마는 유대로 가는 경우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죽음밖에 없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였다. 도마는 그리스도께 대한 유대인들의 증오심을 알고 있었다. 그분을 죽이는 것이 유대인들의 목적이었으나 그분에게 할당된 때가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목적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 때까지 예수께서는 하늘 천사들의 보호를 받으셨으므로 랍비들이 그분을 어떻게 잡아서 죽일 것인가를 음모하던 바로 그 유대 지방에서도 그분께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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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노니”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이상히 여겼다. 구주께서는 과연 고통받는 당신의 친구들의 가정을 고의로 피하셨을까?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죽어가는 나사로는 분명히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광경을 다 보셨고 나사로가 죽은 후 그 남은 누이들은 당신의 은혜로 격려를 받았다. 예수께서는 강한 원수인 죽음과 더불어 투쟁하는 오빠를 보고 마음이 찢어지듯이 슬퍼하는 그들을 목격하셨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제자들에게 말할 때에 그분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맛보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베다니에 있는 사랑하는 그들만을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제자들의 교육도 생각하셔야 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축복이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도록 그분의 대리자로서 세상에 보내질 것이었다. 그들을 위하여 그분은 나사로를 죽도록 허락하셨다. 만일 예수께서 나사로를 병에서 회복시키셨더라면 예수님의 신적인 신분을 가장 명확하게 증거하는 그 이적은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 병실에 계셨더라면 사단이 그를 이길 힘이 없었을 것이므로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생명의 시여자 앞에서 죽음은 그 창을 나사로에게 던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멀리 떠나 계셨다. 원수가 그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은 그분이 정복한 원수로부터 나사로를 다시 찾아오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나사로가 죽음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으며, 고통 받는 누이들은 저희 오빠가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오라비의 죽은 얼굴을 바라볼 때에 구주에 대한 믿음이 격렬하게 시험받을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이 겪는 투쟁으로 말미암아 저희 믿음이 더욱 큰 능력으로 빛나게 될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당한 모든 슬픔의 고통을 경험하셨다. 그분께서 지체하신 것은 그들을 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그들과 나사로와 자신과 제자들을 위하여 승리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너희를 위하여”,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이 미치고 있음을 느끼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큰 낙담의 순간은 바로 하나님의 도움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때이다. 그들은 저희 길의 어두운 부분을 감사함으로 돌아볼 것이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벧후 2:9) 어떻게 건지실 줄을 아신다. 모든 시험과 시련을 통하여 그들을 더욱 굳건한 믿음과 더욱 풍성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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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에게 가는 것을 지체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했다. 그분께서 지체하심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완고하고 불신하는 백성들에게 당신이 과연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또 다른 증거를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이스라엘 집의 방황하는 가련한 양들의 모든 희망을 좌절시키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마음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분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당신은 만물의 회복자시요 생명과 불멸을 가져올 수 있는 분이라는 또 하나의 확증을 주시기로 계획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결코 잘못 해석할 수 없는 증거가 될 것이었다. 그분이 베다니에 가기를 지체하신 이유는 이것이었다. 나사로를 살리는 이 최고의 이적은 그분의 사업과 신성에 대한 주장에 하나님의 인을 찍는 일이었다.

베다니로 여행하는 도중에 예수께서는 여느 때처럼 병들고 곤궁한 자들에게 봉사하셨다. 마을에 도착하자 그분은 사자를 보내 도착했다는 기별을 누이들에게 전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곧 집에 들어가지 않고 길가의 조용한 곳에 머물러 계셨다. 친구나 친척이 죽었을 때에 유대인들이 행하는 큰 허례허식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고용된 애곡자들의 통곡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런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그 누이들을 만나고 싶지 않으셨다. 통곡하는 친구들 가운데는 친척들과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가장 큰 원수들도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의도를 아셨으므로 즉시 자신을 알리지 않으셨다.

매우 조용하게 기별이 마르다에게 전해졌으므로 방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였다. 슬픔에 잠겨 있던 마리아도 그 말을 듣지 못하였다. 마르다는 곧 일어나 주님을 영접하러 나갔으나 마리아는 마르다가 나사로를 장사한 그 곳에 간 줄로 생각하면서 소리내어 울지 않고 슬픔에 싸여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서둘렀으나 그의 마음은 엇갈리는 감정들 때문에 흔들렸다. 그분의 얼굴 표정에서, 항상 나타내시던 똑같은 친절과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예수께 대한 마르다의 신뢰심은 깨지지 않았으나 예수께서 사랑하셨고 자기 역시 극진히 사랑했던 오빠를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일찍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가슴에 깊은 비통함이 있었으나 이제라도 그리스도께서 저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시리라는 희망으로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애곡자들 때문에 떠들썩한 가운데 누이들은 여러 번 이 말을 되풀이하였다.

인간적이고 신적인 동정심으로 예수께서는 슬픔에 가득 차고 근심으로 여윈 마르다의 얼굴을 바라보셨다. 마르다는 지난 일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하지 않고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란 비애에 가득 찬 말로 모든 것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사랑의 얼굴을 바라보며 덧붙여 말하기를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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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마르다의 믿음을 격려하면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대답은, 즉시 변화된다는 희망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마르다의 생각을 그의 오라비의 현재의 부활을 넘어서 의인의 부활로 이끄셨다. 이 일로 그분은 마르다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죽은 의인의 부활에 대한 보증과 구주의 능력이 이를 이루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하셨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마르다의 신앙에 참된 방향을 제시해 주려고 더욱 노력하면서,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리스도에게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요일 5:12)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는 자에게 영생에 대한 보증이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곳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재림의 때를 내다보신다. 그때 죽은 의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겠고 살아 남은 의인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감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곧 행하시려는 이적은 죽은 모든 의인의 부활을 대표한 것이다. 당신의 말씀과 행하신 일로써 그분께서는 자신이 부활의 창시자임을 선언하셨다. 오래지 않아 몸소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분은 사망의 열쇠를 잡고 무덤의 정복자로 서서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당신의 권리와 능력을 주장할 분이셨다.

“네가 믿느냐”는 구주의 말씀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깊은 뜻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분의 신성을 믿는 믿음과 당신께서 하시기를 기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행하실 수 있다는 자기의 신념을 고백하였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이 기회만 오면 예수님을 잡으려고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마르다는 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기별을 전달하였다. 곡하는 이들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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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별을 듣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방에서 나왔다. 마리아가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 알고 조문객들은 그녀를 따라갔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기다리고 계신 곳에 오자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떨리는 입술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애곡자들의 울음소리는 그녀에게 심한 괴로움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조용히 예수님과 따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곳에 있던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질투심과 증오심을 품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슬픔을 다 표시하기를 삼갔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 그분께서는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읽으셨다. 그분은 슬픔을 표명하는 것처럼 행하던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셨다. 그분은 지금 짐짓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무리 중에 얼마는 머지않아 능력 있는 이적을 행하시는 분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자까지도 죽일 계획을 세울 것을 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꾸며낸 슬픔의 옷을 벗길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의분을 참으셨다. 모두가 사실인 말씀을 그분은 하실 수 있었지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당신을 참으로 믿은 사랑하는 사람이 슬퍼서 당신 발 앞에 엎드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그분께서 물으실 때에 그들은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함께 무덤으로 나아갔다. 슬픈 장면이었다. 나사로는 크게 사랑을 받았다. 그의 친구였던 이들이 오라비를 여윈 누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데, 그의 누이들은 그를 위하여 가슴이 찢어지듯이 울었다. 이 인간의 고통, 그리고 이 세상의 구주께서 곁에 서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괴로움을 당한 친구들이 죽은 자에 대하여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분은 인성을 쓰셨으며 따라서 인간의 슬픔에 감응되셨다. 그분의 부드럽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언제나 고통 받는 자에게 동정을 느꼈다. 그분은 우는 자와 같이 우시고 기뻐하는 자와 같이 기뻐하신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신 것은 다만 마리아와 마르다를 동정하는 인간적인 동정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분의 눈물에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인간적인 슬픔보다 더 높은 슬픔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를 위하여 울지 않으셨다. 그 까닭은 그를 무덤에서 곧 불러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지금 나사로를 위하여 슬피 울고 있는 자들 중의 여러 사람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당신을 죽일 계획을 곧 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셨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눈물을 올바르게 해석하기란 얼마나 불가능한 일이었는가! 그분의 슬픔의 원인에 대하여 그분 앞에 드러난 장면의 외부적인 사정밖에는 알지 못하는 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라고 소곤소곤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여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의 씨를 떨어뜨릴 기회를 엿보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고 비웃었다. 만일 나사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다면 왜 그분은 그 때에 나사로를 죽게 내버려두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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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적 안목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증오심을 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죽이기 위하여 계획하고 있는 것을 아셨다. 그분은 지금 겉으로 매우 동정하는 듯이 보이는 자들이 얼마 안 있어 희망의 문과 하나님의 도성의 문을 스스로 닫으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 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상황이 발생하려고 하였는데, 그 결과로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될 것이요 그 때에는 아무도 죽은 자를 위하여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다가올 징벌이 그분 앞에 분명하게 그려졌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이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포위당하는 것을 보셨다. 그분은 지금 나사로를 위하여 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도성이 포위될 때에 죽게 될 것이며, 저희의 죽음에는 희망이 없을 것을 아셨다.

그리스도께서 우신 것은 당신 앞에 전개되는 장면 때문만이 아니었다. 각 시대의 모든 슬픔의 무거운 짐이 그분 위에 놓여졌다. 그분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범법의 무서운 결과를 보셨다. 그분께서는 아벨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세상 역사에는 선과 악의 투쟁이 간단없이 계속되어 왔음을 보셨다. 미래를 내다보실 때에 그분은 고통과 슬픔, 눈물과 죽음이 사람들의 운명임을 보셨다. 각 시대와 각 나라에 사는 인간 가족들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였다. 죄 많은 인간의 재난은 그분의 심령을 무겁게 짓눌렀고 그분이 그들의 모든 고통을 덜어 주려고 하셨을 때에 그분의 눈물샘이 터졌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나사로는 바위 동굴 속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그 출입구는 큰 돌로 막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다. 마르다는 그분께서 시체를 단지 한 번 보고자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장사한 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가 벌써 썩기 시작했다는 말로써 거절하였다. 나사로를 부활시키기 전에 한 이 말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 기만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지난번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기이하게 나타난 데 대하여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막 5:39)고 말씀하셨다. 그녀는 다만 잠깐 동안만 앓았으며 죽었다가 곧 살아났으므로,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녀가 다만 잔다고 하신 것처럼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고 선언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칠 수 없으며 그분의 이적에는 부정행위가 있었던 것처럼 나타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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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어떤 일을 행하려고 하실 때에 사단은 사람들을 움직여서 반대하게 한다. “돌을 옮겨 놓으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가능한 한 내가 일할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여라. 그러나 마르다의 적극적이며 지기 싫어하는 성질은 그 주장을 고집하였다. 마르다는 썩고 있는 시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빨리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마르다의 신앙은 그분의 약속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는 마르다를 책망하셨지만 그분의 말씀은 아주 부드러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왜 그대는 나의 권능을 의심하는가? 왜 나의 요구를 반대하여 이론을 붙이는가? 그대는 내 말을 이미 들었다. 만일 그대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자연의 불가능이 전능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다. 회의와 불신은 겸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참된 겸손이며 참된 자기 포기이다.

“돌을 옮겨 놓으라.” 그리스도께서는 돌을 명하여 옮겨지게 할 수 있었으며 돌은 그분의 음성에 순종했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 곁에 있는 천사들에게 명하여 이 일을 하실 수 있었다. 그분의 명령을 듣고 보이지 않는 손이 돌을 옮겨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돌은 인간의 손으로 옮겨져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이 신성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셨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하여 신성의 능력이 소환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도움 없이 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주어진 능력과 역량을 사용할 때에 그에게 힘을 주고 그와 협력하신다.

명령은 순종된다. 돌이 옮겨진다. 모든 일은 다 공개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이루어진다. 모두들 어떤 속임수도 행해지지 않음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바위로 된 무덤 가운데 나사로의 시체가 놓여 있는데 죽어서 차디차고 움직이지 않는다. 애곡자들의 울음소리가 그친다. 놀라움과 기대에 찬 무리들은 무덤 주위에 서서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주목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조용히 무덤 앞에 서신다. 신성하고 엄숙함이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무덤에 더 가까이 걸어가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참람되다고 그분을 비난한 바 있었으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까닭으로 그분에게 돌을 던졌다. 그들은 사단의 권세로 이적을 행한다고 그분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며 완전한 확신 가운데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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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아버지와 협력하셨다. 언제나 그분은 홀로 일하지 않으셨으며 믿음과 기도로써 이적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려고 매우 주의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셨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관계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가 주어질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주장이 기만이 아니었음을 보게 될 것이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다. 맑고 드높은 그분의 음성이 죽은 자의 귀를 울렸다. 그분께서 말씀하실 때에 신성은 인성을 통하여 번쩍거렸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난 얼굴에서 백성들은 그분의 능력의 보증을 볼 수 있었다. 모든 눈은 동굴의 입구로 쏠렸고 모든 귀는 가장 작은 소리라도 들으려고 기울여졌다. 열렬하고도 근심스러운 호기심으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분의 주장을 실증하든지 혹은 희망을 영원히 소멸시킬 증거, 즉 그분의 신성에 대한 시험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요한 무덤 속에서 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죽었던 자가 무덤 문 곁에 선다. 그의 동작은 그에게 입혀진 수의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놀라서 보고 있는 자들에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다시 인간 일꾼이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본다. 인간은 인간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나사로는 자유롭게 되어, 병으로 쇠약해진 사람처럼 연약하고 비틀거리는 다리로 서는 것이 아니라 혈기 왕성하고 건강한 사람의 활력으로 무리들 앞에 선다. 그의 눈은 총명과 구주에 대한 사랑으로 빛난다.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경배한다.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놀라움으로 처음엔 아무 말도 못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의 장면이 벌어진다. 누이들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저희 오라비의 생명을 도로 찾게 되자 기쁨의 눈물에 목멘 음성으로 구주께 감사를 표시한다. 오라비와 누이들과 친구들이 재회를 기뻐하고 있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 장소에서 떠나가신다. 그들이 생명을 주신 분을 찾을 때에 그분은 이미 거기 계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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