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날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다사(多事)한 날이었다. 그분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잘 아는 예증으로 당신의 나라의 성격과 그 나라가 건설되는 방법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다시 설명하면서 최초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씨 뿌리는 자의 일에 비유하셨고 당신의 나라의 발전을 겨자씨의 성장과 가루 서말 속에 넣은 누룩의 영향에 비유하셨다. 의인과 악인의 최후의 대 분리는 곡식과 가라지 그리고 고기잡이 그물의 비유로 설명하셨다. 그분께서 가르치신 진리의 탁월한 귀중성은 감추인 보화와 극히 값진 진주의 비유로 예증된 동시에, 집 주인의 비유로써 그분은 제자들이 당신의 대리자로서 어떻게 일하여야 할지를 가르치셨다.
그분께서는 종일 가르치고 또 치료하셨다. 저녁이 되었으나 군중은 여전히 예수님에게 밀려왔다. 예수께서는 잡수시거나 쉴 여가도 거의 얻지 못하고 날마다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셨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악의에 찬 비평과 오전(誤傳)을 퍼뜨리며 예수를 따라다녔는데, 이것이 그분의 수고를 한층 더 힘들고 괴롭게 만들었다. 이제 날이 저물어 그분은 매우 피곤함을 느끼고 호수 건너의 한적한 곳에서 쉬기로 결심하셨다.
게네사렛 동부 해변은 호숫가 여기저기에 동네들이 있었으므로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쪽과 비교하면 적막한 지방이다. 그 곳에는 유대 사람들보다 이방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갈릴리와는 별로 왕래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한적함을 그 곳에서 얻으실 수 있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곳으로 가자고 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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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는 군중을 떠나보내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황급히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들만 떠난 것은 아니었다. 해변 가까이에는 다른 고기잡이배들이 있었는데 이 배들은 여전히 그분을 보고 싶어 하며 말씀 듣기를 갈망하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삽시간에 가득 찼다.
구주께서는 마침내 군중들의 압박에서 놓여나셨다. 피곤과 시장기를 이기지 못한 예수께서는 뱃전에 누워 이내 잠이 드셨다. 잔잔하고 상쾌한 저녁이었다. 호면은 한결같이 고요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둠이 하늘을 덮더니 바람이 게네사렛 동쪽 연안 일대의 산골짜기들을 맹렬히 엄습하고 뒤이어 호수에는 폭풍이 일었다.
노한 바다에 해는 져서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포효(咆哮)하는 바람에 격동하는 파도는 제자들이 탄 배를 사납게 때리면서 삼켜 버릴 듯이 위협하였다. 생애를 그 호수에서 보낸 강인한 어부들은 많은 폭풍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그들의 배를 안전하게 이끌어 올 수 있었으나 이번만은 그들의 능력과 기술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태풍에 붙들려서 꼼짝할 수가 없었고 배에 물이 차는 것을 보자 희망을 잃고 말았다.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데 열중한 그들은 예수께서 선상(船上)에 계신 것을 잊어버렸다. 저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죽음만이 앞에 놓인 것을 깨닫자 저들은 누구의 명령으로 바다를 횡단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던가를 기억하였다.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에게 있었다. 무기력과 절망 속에서 그들은 “선생님이여, 선생님이여!”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짙은 암흑은 그들의 시야에서 그분을 숨겼다. 그들의 목소리는 태풍의 노성에 삼켜졌으며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의혹과 공포가 그들을 엄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버리셨는가? 질병과 사귀와 사망까지도 정복하셨던 그분께서 이제 당신의 제자들을 구하실 힘이 없으시단 말인가? 비탄 가운데 있는 그들을 왜 돌아보지 않으시는가?
그들은 다시 불렀으나 성난 강풍의 비명 소리밖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들의 배는 벌써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잠깐 후에는 분명히 주린 바닷물이 저들을 삼켜버릴 것이었다.
갑자기 번갯불이 암흑을 꿰뚫자 그들은 예수께서 그 소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워 주무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놀람과 절망으로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외쳤다. 제자들이 위기 가운데서 죽음과 싸우고 있을 때에 그분께서는 어떻게 그토록 평안히 쉬실 수 있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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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예수께서는 잠이 깨셨다. 눈부신 번갯불이 그분을 비췄을 때 그들은 하늘의 평화가 그분의 얼굴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분의 시선에서 자아를 잊은 부드러운 사랑을 느끼자 마음을 그분께로 향하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부르짖었다.
그같이 부르짖은 영혼은 결코 무시당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최후의 노력을 다하기 위하여 그들의 노를 붙잡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서신다. 태풍은 격노하고 파도는 그들을 덮치며 번갯불은 그분의 얼굴을 환히 비춘다. 그분께서는 자비의 봉사에 그토록 자주 쓰셨던 손을 드시고 성난 바다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씀하신다.
폭풍은 그치고 큰 파도는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구름이 걷히고 별들은 반짝거린다. 배는 고요한 바다 위에 떠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며 슬픈 듯 이렇게 물으신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
제자들에게 침묵이 흘렀다. 베드로까지도 자신의 마음에 가득 찬 경외심을 감히 표현하려들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뒤쫓아 오던 배들도 제자들처럼 위기를 겪었다. 공포와 절망이 그 배에 탄 자들을 사로잡았으나 예수님의 명령으로 소란한 광경은 고요하게 되었다. 노한 폭풍은 배들을 매우 가깝게 몰아서 배에 탄 자들이 모두 다 이적을 보았다. 폭풍에 뒤따른 고요 속에서 두려움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저희끼리 “저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고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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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잠에서 깨어 폭풍을 대하셨을 때 그분은 극히 평온하셨다. 그분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었으므로 말이나 표정에 두려워하시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전능하신 능력에 의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조용히 쉬신 것은 “땅과 바다와 하늘의 주”의 입장에서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을 그분은 버리셨던 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능력에 의뢰하셨다. 예수께서 쉬신 것은 믿음 곧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였으며 폭풍을 잔잔하게 한 그 말씀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예수께서 믿음으로 아버지의 보호 안에서 쉬신 것처럼 우리도 구주의 보호 안에서 쉬어야 한다. 제자들이 그분을 의뢰하였다면 저들은 평강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위기를 당했을 때 저희의 두려움은 그들의 불신을 드러내 주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예수님을 잊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저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저희가 자아 의뢰의 절망에서 그분께로 돌아갔을 때뿐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흔히 제자들과 같은 경험을 하는가! 시험의 태풍이 점점 거세지고 번갯불이 무섭게 번쩍거리며 파도가 우리를 덮칠 때 우리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 계심을 잊어버리고 홀로 폭풍과 싸운다. 우리의 희망이 사라지고 멸망 직전에 빠질 때까지 우리는 자신의 힘을 의뢰한다. 그 때에야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를 구해주시도록 그분께 요청한다면 우리의 부르짖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불신과 자아 신뢰를 슬프게 책망하시지만 우리가 요청하는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일이 결코 없으시다. 육지든 바다든 우리가 구주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구주께 대한 산 믿음이 인생의 바다를 잔잔하게 할 것이요, 그분께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위험에서 건져내실 것이다.
태풍을 잔잔하게 하신 이적 가운데는 또 하나의 영적 교훈이 있다. 각 사람의 경험은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0, 21)는 성경 말씀의 진리를 증거한다. 우리의 평화를 파괴한 것은 죄다. 자아가 정복되지 않을 때 우리는 쉼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는 마음을 지배하는 격정을 다스릴 수 없다. 제자들이 성난 폭풍을 잔잔하게 하는 데 무력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이 점에는 무력하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의 큰 물결을 향하여 잔잔하라고 말씀하신 그분께서는 각 사람에게 평안하라고 하신다. 태풍이 아무리 격렬할지라도 “주여 구원하소서” 하고 부르짖으면서 예수께 돌아오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영혼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그분의 은혜가 인간의 격정으로 인한 분란을 잔잔하게 하므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마음은 평안함을 얻는다.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 107:29, 30).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롬 5:1; 사 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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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구주와 그분과 함께 한 동료들이 해변에 닿았을 때에 떠오르는 햇빛은 평화의 축복인 듯 바다와 땅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그들이 바닷가에 발을 딛자마자 격노한 태풍보다 더 무서운 광경이 저희 눈앞에 전개되었다. 무덤 사이의 숨는 장소에서 두 명의 광인이 마치 저들을 갈기갈기 찢기라도 할 것처럼 달려들었다. 그들의 몸에는 저희가 결박에서 도망칠 때에 끊어버린 쇠사슬이 걸쳐 있었다. 그들이 날카로운 돌로 자신을 상하게 한 곳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길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빛났으며 사람다운 면모는 저들을 사로잡은 사단으로 말미암아 말살된 것처럼 보였고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야수에 더 가까워 보였다.
제자들과 일행은 무서워 도망쳤다. 그러나 곧 그들은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을 깨닫고 그분을 찾기 위하여 돌아섰다. 그분께서는 저희가 도망간 그 자리에 서 계셨다. 태풍을 잔잔하게 하시고 전에 사단을 대면하사 그를 정복하셨던 그분께서는 이 사귀 들린 사람들 앞에서 도망치지 않으셨다. 이를 갈고 입에 거품을 뿜으면서 그들이 가까이 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파도더러 잔잔하라고 손짓하셨던 그 손을 드셨다. 그들은 더 가까이 나올 수 없었다. 그들은 격노하였으나 그분 앞에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분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그들에게서 나오라고 더러운 영들에게 명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그 불행한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을 뚫고 들어갔다. 그들은 그들을 괴롭히는 사귀들에게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이 가까이에 계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들은 구주께 경배하기 위하여 그분의 발아래 엎드렸다. 그러나 그들이 구주의 긍휼하심을 간구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에 사귀가 그들을 통하여 격렬하게 부르짖으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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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 때에 그들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사귀들은 괴로움을 당하는 이 사람들을 접촉의 매개물로 이용하여 저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마시도록 예수께 간청하였다. 그다지 멀지 않은 산허리에 큰 돼지 떼가 먹이를 먹고 있었다. 사귀들은 이 돼지 떼 안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예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셨다. 즉시 공포가 그 돼지 떼를 엄습하였다. 돼지들은 미친 듯이 낭떠러지 아래로 달음질쳐서 해안에서 멈출 사이도 없이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몰사하고 말았다.
그 동안 이 사귀 들린 자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빛이 그들의 마음을 비췄다. 그들의 눈은 지성적인 광채를 발하였다. 매우 오랫동안 사단의 형상으로 일그러졌던 용모가 갑자기 온화해지고 피 묻은 손은 조용해졌으며 그들은 즐거운 음성으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비탈에서 돼지를 지키던 자들은 이 모든 일들을 보고 그들의 주인과 모든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급히 떠나갔다. 온 동네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놀라면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모여들었다. 이 두 사귀 들린 자들은 그 지방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아무도 그들이 있는 곳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가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어떠한 행인에게도 마귀의 격노로써 대들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옷을 입고 제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저들을 완쾌시키신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광경을 본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돼지를 잃은 것이 사단의 포로들이 구원 받은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돼지의 소유주에게 이런 손실을 당하게 허락하신 것은 바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의 사물에 골몰하여 영적 생애의 큰 관심사를 돌아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저들이 당신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기적 무관심의 마력을 깨뜨리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세속적인 손실로 말미암아 아깝고 성이 나서 구주의 자비하심에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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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미신이 생기고 공포가 일어났다. 이 외인을 그들 가운데 머무르게 했다가는 더 큰 재난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재정적인 파탄을 염려하여 그분께서 계시지 못하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예수님과 함께 호수를 건넜던 자들은 전날 밤에 일어났던 모든 일 곧 태풍을 만나 위기에 빠진 일이며 바람과 바다가 어떻게 잔잔해졌던가를 다 얘기하였다. 그러나 저들의 말은 효과가 없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예수님의 주위에 모여들어 그들에게서 떠나가 주시기를 간청하였으므로 그분께서는 이에 응하여 곧장 배에 오르사 맞은편을 향하여 떠나셨다.
거라사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자비의 산 증거를 저희 눈으로 보았다.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속적인 이익이 위태롭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저들의 눈앞에서 흑암의 임금을 내쫓은 그분을 방해꾼으로 취급함으로써 하늘의 선물인 그분을 그들의 문전에서 돌아서시게 하였다. 우리는 거라사 사람들처럼 실제로 그리스도에게서 돌아설 그런 기회는 없다. 그러나 순종하면 세속적인 이익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예수의 임재로 인해 금전상의 손실을 당치 않기 위하여 그분의 은혜를 거절하고 그분의 성령을 내쫓는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광인들의 생각은 이와는 매우 달랐다. 그들은 저희를 구원하여 주신 분을 따르고 싶었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의 생애를 괴롭혔고 폐인으로 만들었던 귀신들로부터 안전하다고 느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려고 할 때에 그들은 그분 곁에 가까이 서서 발아래 무릎을 꿇고 저들을 곁에 있게 하여 늘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저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주께서 저들을 위하여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전하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곧 이방인 가정에 가서 저희가 예수님에게서 받은 축복에 대하여 전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구주와 떨어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방의 동네 사람들과 접촉할 때에 그들은 반드시 큰 곤란에 부딪힐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로부터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그분께서 지시한 사업을 할 자격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책임을 지적하시자마자 그들은 곧 순종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자신의 집안과 이웃에게 전했을 뿐 아니라 데가볼리 지방을 두루 다니며 그분의 구원하는 능력을 전파하며 마귀에게서 저들을 자유케 하신 사실을 말하였다. 이 일을 함으로써 그들은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구주께 더 가까워지는 일은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일하는 중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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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침을 받은 두 광인은 그리스도께서 데가볼리 지방에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신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잠깐 동안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을 특권을 누렸다. 저들은 그분의 설교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가르칠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증거를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저희가 아는 것 곧 그리스도의 능력에 관하여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에 감동을 받은 사람이 각기 행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랑받은 제자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요일 1:1~3)하노라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아는 바와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전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계단 한 계단씩 예수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길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적절한 요점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어떻게 시험하였으며 그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지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 아는 바를 증거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주께서 요구하시는 증거인데, 이런 증거의 부족으로 세상은 멸망해 가고 있다.
비록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분께서는 저희가 선택한 흑암 가운데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분에게 떠나가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거절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빛을 보내시되 저희가 듣기를 거절하지 않을 자들을 통하여 전하셨던 것이다.
돼지를 몰살시킴으로써 사단은 사람들을 구주에게서 돌아서게 하고 그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전국적으로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없었던 큰 깨우침을 주었고 그리스도께 주의를 돌리게 하였다. 구주께서는 떠나셨지만 그분께서 고쳐주신 사람들은 그 곳에 머물러서 그분의 능력을 증거하였다. 흑암의 임금의 매개물이었던 자들이 빛의 통로가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의 사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놀라운 소식을 듣고 기이히 여겼다. 그 온 지방에 복음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예수께서 데가볼리로 돌아오시자 사람들은 그분 주위에 모여들었고 삼일 동안에 한 동네의 주민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지방에서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기별을 들었다. 심지어 사귀의 능력까지도 우리 구주의 지배를 받았고 악의 활동은 선을 위해 역이용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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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사에서 사귀 들린 자를 만난 일은 제자들에게 교훈이 되었다. 그것은 사단이 온 인류를 끌어내리고자 애쓰는 그 타락의 깊이를 보여 주었고 또 그의 권세에서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보여 주었다. 무덤에 살면서 사귀 들려 억제할 수 없는 정욕과 끔찍한 육욕의 노예가 되었던 이 비참한 사람들은 인간이 사단의 지배 아래 넘어갈 때에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 준다. 사단은 항상 사람들의 감각을 혼란시키고 악한 마음을 품게 하며 강포와 죄악을 범하게 하려고 힘쓰고 있다. 사단은 신체를 허약하게 하고 지능을 어둡게 하며 심령을 타락시킨다. 사람들이 구주의 초청을 거절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사단에게 굴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생의 각 분야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많은 무리들이 오늘날 사단에게 굴복하고 있다. 포악과 죄악이 세상을 뒤덮고 죽음의 휘장처럼 도덕적인 암흑이 사람이 사는 곳을 둘러싼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단은 그럴듯한 유혹으로 사람들에게 점점 더 악한 일을 행하게 하여 결국에는 완전히 타락하고 멸망하게 한다. 사단의 권세를 막는 유일한 방벽은 예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이다.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사단은 사람의 원수요 파괴자로, 그리스도는 사람의 친구요 구원자로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영은 사람에게서 품성을 고상하게 하고 고귀하게 하는 모든 것을 계발시킬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몸과 심령과 정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 예수께서는 우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품성을 얻게 하려 하”시며, 우리를 부르사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살후 2:14; 롬 8:29)려 하신다.
그리하여 사단의 도구로 전락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의의 사자로 변화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고하라고 보냄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