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그에게 다윗의 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 시체는 버림을 입어서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또 내가 그와 그 자손과 신하들을 그들의 죄악을 인하여 벌할 것이라 내가 일찍 그들과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에게 선포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한 그 모든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다 하라” (렘 36:30, 31).
두루마리를 불태운 것은 문제의 끝이 아니었다. 기록된 말씀은 거기 담긴 견책과 경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역적인 이스라엘에게 선언하신, 신속히 닥쳐오는 형벌보다 훨씬 쉽게 제거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록된 두루마리조차도 여호와의 명령에 의해 다시 만들어졌다. 무한하신 분의 말씀이 파괴되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취하여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 왕 여호야김의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하였더라” (렘 36:32).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먼저 경고하심 없이 그의 백성에게 심판을 보내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들을 순종으로 돌이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하시며, 그들에게 회개할 충분한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심판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지 않으신다. 사람의 진노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그의 활동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하나님은 감옥의 벽을 뚫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실 수 있었고, 심지어 그들의 박해자들이 그들의 영향을 제한하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 수단을 통해서 그분의 종들의 유용성을 증가시킬 수 있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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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현재 하나님께서 증언 가운데 주신 충실한 견책을 멸시한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그 사악한 왕이 그렇게 했듯이, 기록된 견책과 경고의 말씀을 태워 버리는 지경까지 나아갔다는 것이 이상 가운데서 내게 보여진바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협들에 대하여 반대한다고 해서 그것의 집행이 방해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의 선택한 도구들을 통하여 말해진 여호와의 말씀에 도전하고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그분의 노를 격동시킬 뿐이며, 마침내 범죄자에게 확실한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자주 죄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견책을 전달하고자 선택하신 대리자들에 대한 분노가 불붙는다. 항상 그러해 왔고,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한 것 때문에 예레미야를 박해하고 투옥시켰던 그런 동일한 정신이 오늘날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되풀이해서 주어진 경고들에 유의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허영에 아첨을 떨어 주고, 그들의 죄악을 강화시켜 주지만, 환난의 날에 그들을 도와주지 못할 거짓 선지자들을 좋아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된 종들은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주신 의무를 신실히 수행하기 때문에 모욕, 등한 그리고 오전 (誤傳) 을 통하여 그들에게 닥치는 어떤 시련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용기와 인내로 대처해야 한다. 그들은 옛날의 선지자들과 세상의 구주께서도 세상을 위하여 학대와 박해를 견디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대로 기록된 두루마리의 불태운 것으로 표명된 바, 바로 이런 반대에 맞닥뜨릴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위하여 사람들을 적합하게 만들고 계신다. 품성의 결점, 외고집, 이기적 우상숭배, 흠을 찾는 일에 빠지는 것, 적의, 다툼은 하나님의 진노를 격동시키며, 그것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들로부터 제거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죄악들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사단의 간계에 속임을 당하고 눈멀게 된 자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더듬고 있는 데도 자신들이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한다. 고대 이스라엘 가운데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중에도 불평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자아 사랑이, 받아 마땅한 견책에 상처를 입고 있을 때, 현명하지 못한 동정을 보임으로 반역 중에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견책자이신 하나님의 친구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세상에 계속 존재하는 한 그분의 백성들에게 견책과 경고를 보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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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쪽에 용맹스럽게 서는 사람,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복하라고 격려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비행을 버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굳세게 해주는 자들이 여호와의 참된 친구들이며, 그분은 사랑 가운데서 그분의 백성들의 실수들을 바로잡으려고 애쓰고 계시는 바, 그 이유는 그들을 씻고 온갖 더러움에서 그들을 정결케 하여 그분의 거룩한 왕국에 적합하게 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에서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이 새 왕이나 조정의 신하들이나 그 땅의 백성들도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해지는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를 개시했지만, 애굽인들을 대항하는 데 그들의 군대를 돌리기 위해 한동안 예루살렘을 떠났다. 시드기야는 한 사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그들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그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선지자의 두려운 대답은 갈대아 군대가 돌아와서 그 성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처럼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가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 말라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가령 너희가 너희를 치는 갈대아인의 온 군대를 쳐서 그 중에 부상자만 남긴다 할지라도 그들이 각기 장막에서 일어나 이 성을 불사르리라” (렘 37:9, 10).
예레미야는 그의 일이 완수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성을 떠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거짓 선지자들 중 한 사람의 아들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그 사람은 그가 원수 편에 가담하려고 했다고 보고하였다. 예레미야는 그 거짓된 고소를 부인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소환되었다. 방백들은 예레미야를 미워했기 때문에 그 거짓 선지자의 아들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가 예언했던 재앙을 그들에게 가져온 것은 바로 그였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분노한 그들은 그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
여러 날 동안 감옥에 머물러 있는 후, 시드기야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게 하고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는지 그에게 은밀히 물었다. 예레미야는 다시 그 나라가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어질 것이라는 그의 경고를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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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관대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바벨론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내 주 왕이여 이제 청컨대 나를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하여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덩이씩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다할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렘 37:18-21).
이 악한 왕은 예레미야에 대한 어떤 믿음도 공개적으로 감히 표명하지는 못했지만,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그에게서 정보를 얻도록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선지자가 선포한 대로 하나님의 뜻에 굴복함으로써 그의 귀족들과 백성들의 반대 의견에 용감히 맞서기에는 너무도 연약했다. 마침내 예레미야가 고집스럽게 악한 일을 예언하는 일을 계속한다고 하여 격노한, 권세 있는 직위에 있는 사람들이 왕에게 가서, 그 선지자가 살아 있는 한 그는 재앙을 예언하는 일을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들은 그 선지자는 나라의 원수이며, 그의 말들은 백성들의 손을 연약하게 해 왔고, 그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었으며, 그들은 그를 죽여 없애기를 원한다고 왕에게 역설했다.
겁 많은 왕은 이런 비난들이 거짓임을 알았으나, 나라의 높고 영향력 있는 직위를 차지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의 거짓말을 믿는 체 했으며, 예레미야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처치하도록 그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에 따라 그들은 선지자를 취하여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 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에 빠졌더라” (렘 38: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한 친구를 일으키셨다. 그 친구는 그를 위하여 왕께 탄원하여 그를 다시 시위대 뜰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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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왕은 은밀히 사람을 보내 예레미야를 데려와 그에게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충실히 말하도록 명하였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단정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고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붙이지도 아니하리라” (렘 38:15, 16). 그러자 예레미야는 다시 왕의 귀에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발했다. 그는 말했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입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컨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붙이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예레미야가 가로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붙이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고한 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존하시리이다” (38:17-20).
여기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자비가 나타나 있다. 저 마지막 시간에서조차도, 만일 그들이 그분의 요구 사항에 순복한다면 백성들의 생명은 부지될 것이며, 성은 전란 (戰亂) 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되돌아서기에는 자신이 너무 멀리 갔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대인을 두려워했고,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 두려웠고, 그의 생명을 위하여 두려워하였다. 그처럼 늦은 때에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도 굴욕적인 일이 될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바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들이노라. 나는 이 모든 경고들을 앞에 두고서 원수들에 맞서서 감히 싸움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면서 왕에게 자신과 그의 백성을 구하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고뇌하면서 왕에게 그가 피할지라도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며 그의 모든 소유물은 바벨론 왕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는 하려고만 하면 그 성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그의 발걸음을 돌이키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의 권면과, 그가 참으로 멸시하는 사람들, 그들의 소원에 그처럼 쉽게 굴복한 그의 품성의 연약성을 조롱한 사람들의 권면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의 성년 (成年) 의 고귀한 자유를 포기하고 여론에 굽실굽실하는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가 어떤 확정된 악한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옳은 것을 위해 담대하게 설 만한 과단성이 있지도 않았다. 그는 예레미야가 말한 진리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권면을 순종할 도덕적 정력은 없었고, 꾸준히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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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영혼을 휘어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선지자와 만났었다는 것을 그의 조신 (祖臣) 들과 백성들이 알게 되는 것을 꺼릴 만큼 너무도 유약했다. 만일 이 겁 많은 통치자가 백성 앞에 용감히 서서, 이미 절반쯤 성취된 선지자의 말을 믿고 있다고 선포했었더라면 얼마나 큰 황폐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나는 여호와를 순종하고 이 성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것을 막겠다. 나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들의 은총을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감히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고, 나는 죄를 증오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전능자의 권면을 따를 것이다.” 그렇게 했더라면 백성들은 그의 용기 있는 정신에 경의를 표했을 것이며,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던 사람들은 의를 위하여 굳게 섰을 것이다. 바로 이런 두려움 없는 행동과 이런 방침의 정당성은 그의 신하들의 존경과 충성심을 유발시켰을 것이다. 그는 충분한 지지를 받았을 것이며, 이스라엘은 화재, 살육, 그리고 기근으로 인한 말할 수 없는 화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드기야의 유약성은 일종의 죄악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인하여 두려운 형벌을 받았다. 원수들은 저항할 수 없는 산사태처럼 휩쓸고 내려와서 그 성을 초토화시켰다. 히브리 군대들은 혼란 중에 격퇴당했다. 그 국가는 정복당했다.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혔고, 그의 아들들은 그가 보는 데서 죽임을 당했다. 그 후에 그는 그의 비참한 백성들의 비명 소리와 그들의 집들을 태우고 있었던 화염의 포효 소리를 들으면서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잡혀갔다. 그의 눈은 눈두덩에서 빼내짐을 당했으며, 그는 바벨론에 도착해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것이 불신과 불경건한 권면을 따른 데 대한 형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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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 죄는 특별히 불쾌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백성들의 평강이 하나님의 기별자들의 견책과 경고들로 인해 불필요하게 깨뜨려지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들은 평탄하고 기만적인 가르침들을 사용하여 죄인들의 영혼들을 속여 치명적인 안락에 빠지게 만든다.
하나님의 종들은 자애롭고 동정 깊은 정신을 나타내고, 백성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들이 어떤 사사로운 동기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노의 기별들을 전달하는 일을 즐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백성들을 타락시키고 있는 죄들을 지적하는 일에 있어서 꽁무니를 빼서는 안된다. 또한 그들의 오류로부터 돌아서서 여호와께 순종하도록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분투하기를 그쳐서는 안된다.
죄를 덮어 가리우고 범죄자의 마음에 그것을 덜 괴롭게 보이도록 애쓰는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행동에는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진노가 뒤따를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방법들을 타락한 사람들의 희구에 맞추어 결코 조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 거짓 선지자는 예레미야가 그의 혹심한 탄핵으로 백성들을 괴롭게 했다고 하여 정죄하였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형벌의 위협을 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번영을 약속함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이런 방침은 백성들을 강퍅케 만들어 참 선지자의 권면을 저항하도록 만들었으며, 그에 대한 그들의 적의를 증폭시켰다.
하나님께서는 악행하는 자들에게 조금도 동정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의 죄들을 그럴싸하게 얼버무리거나, 그분께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선언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평안하다 평안하다” 고 외칠 자유를 아무에게도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별을 전달하도록 보내신 종들에 대하여 반역을 선동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하여 반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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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장 — 신실한 견책이 필요함
나는 1875년 1월 5일, 나의 마지막 이상에서 주어진 바 다음의 증언을 1875년 버몬트 장막회의 예배들 사이에 나의 텐트에서 썼다. 이것은 1875년 1월 _____ 에서 있었던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뒤이은 여름 동안에 일어난 사태의 진전은 언뜻 보기에 가혹한 것처럼 보이는 이 증언을 충분히 정당화시켜 준다. 9월에 나는 그 증언의 몇 부분을 그 교회에 읽어 주었고, 위대한 사업이 우리의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교회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이 비천한 사업에 대하여 그 증언을 주는 바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께서만 다스리셔야 하는 곳을 어둠이 점점 더 장악해 가고 있다. 그러나 교역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들이 어떤 부서에서 일하든지 개인적 노력과 개인적 책임의 필요성을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들의 종사하고 있는 사업의 신성성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일반 사업 (체) 과 같은 수준으로 간주하고 있다.
자아를 희생하는 생활이 평화와 자유의 생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이기심이 지배하고 있다. 그들 자신을 만족시키고, 주로 그들 자신의 이익을 구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조차도 행복을 얻는 데 있어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임무에 충실치 못한 사람은 누구나 보다 더 큰 임무에 충실치 못하다. 자신에게 위임되어 있는 작은 임무들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일을 태만히 한다면, 그는 자신이 더 큰 책임을 맡을 능력이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일에 전력 투구하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일편단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 의무들을 규정하고 그들의 책임의 충만한 중요성을 깨닫는 데는 빠르지만, 그들 자신의 것을 쉽게 인식하는 데는 실패한다. 개인적 충성과 각 개인의 책임감이 특별히 건강 기관[지금은 요양원]에, 그리고 기관과 교회와 학교에 필요된다. 만일 이들 기관들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물어 보기 위해 돌이키지 말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지시하신 일이 무엇인지 들으려고 열렬히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사업의 각 부서에서 큰 변화를 목격할 것이다. 각 사람의 마음의 언어가,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도 내 대신 내 일을 해 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결코 나의 태만을 회복시켜 줄 수 없다” 가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이 전에 결코 본 적이 없었던 그런 방식으로 진척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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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나약함을 초래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행하기를 기다리면서 이처럼 행동을 억제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력을 보존하는 것은 그것을 줄어지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모든 종들로부터 절대적인 순종과 자원하는 복종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있어서는 머뭇거림이나 자아 방종이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에는 일치가 없다. 하나님의 사업에 대한 얼마나 큰 헌신의 결여와 돌봄의 부족이 _____ 에 있었는지.
A의 마음은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주신 위대한 시여자께 그것에 대하여 셈하지 않으면 안될 역량들과 재능들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마음은 성별되지 않았고, 생애는 그의 공언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년 이상이나 하나님의 신성한 사업과 밀접히 관련을 맺어 왔다. 얼마나 많은 빛을 그가 받았으며, 얼마나 많은 특권을 그가 누렸던가! 그는 견실한 그리스도인 품성을 계발시킬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를 누려 왔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우시면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에게 적용된다. “너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았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 19:42). A여, 하나님의 보응이 그대를 위협하고 있다.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눅 19:44).
B는 동일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처럼 철두철미하게 이기적이지는 않다. 둘 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행동은 그리스도인 생활과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 그들은 안정감, 침착,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부족하다. B에게 있어서 은혜의 역사는 너무도 한결같이 피상적이다. 그는 그리스도인 되기를 갈망하지만, 자아에 대한 승리를 유지하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그의 확신에 따라 행동하려고 분투 노력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는 것은 한담이나 공허한 의도들이 아니라 행동이다.
A여, 그대는 사랑의 간청에서 뿐 아니라 견책, 권면, 그리고 경고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왔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무리들과 함께 호산나를 외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일상 생활의 고요 가운데서, 아무런 특별한 흥분이나 광적인 기쁨이 없을 때에, 그 때 참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험이 이르러 온다. 그대의 마음이 차가워지고, 그대의 열성이 줄어들고, 종교적 활동들이 싫어지는 것은 바로 그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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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정말로 등한히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나의 행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4) 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부과된 조건이다. 이것이 사람의 품성을 입증하는 시험이다. 우리는 자주 느낌에 속으며, 감정은 결코 확실한 방위 수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가변적이고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감각적인 인상들에 의존함으로써 현혹 당하고 있다. 참된 시금석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떤 희생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떤 승리를 얻고 있는가” 이다. 이기적인 정신이 정복되고 임무를 등한히 하려는 시험이 물리쳐진바 되고 정욕이 굴복되고 그리스도의 뜻에 자원하는, 기쁨에 찬 순종을 드리는 것이 간헐적인 경건이나 정서적인 신앙보다 그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훨씬 더 큰 증거들이다.
그대들 둘 모두는 견책을 싫어해 왔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 가운데 그대의 가장 좋은 친구이신 분에 대하여 불만과 불평을 항상 일으켜 왔다. 그분은 항상 그대에게 유익을 주려고 노력하고 계시며, 그대들이 존경해야 할 온갖 이유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대들은 그분과 분리되고, 그분께서 그대들의 행동에 관하여 말하라고 그분의 종들에게 주신 말씀들에 반기를 듦으로써 하나님의 영을 근심시켜 왔다. 그대들은 이런 훈계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을 배척해 왔고, 그것을 마음에서 멀리 했으며, 그대들의 행동 거지에 있어서 부주의하고 무관심하게 되어 버렸다.
A 형제여, 그대는 하나님께서 그대의 길에 비취도록 허락하신 큰 빛으로 축복을 받아 다년간 귀중한 경험들을 해 왔다. 나는 그대에 관하여 말하는 한 음성을 들었다. “이것은 열매 없는 나무다. 왜 이 열매 없는 가지들이,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차지할 수도 있는 공간에 그늘을 드리우는가? 그것을 찍어 버리라. 왜 땅만 버리느냐?” 그 때 나는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간청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그것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려 두라. 내가 그 뿌리 주위를 파고 그것을 전정 (剪定) 할 것이다. 한번 만 더 시험해 보자. 만일 그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찍어 버려도 좋다.” 열매 없는 나무에게 유예의 기간이 조금 더 허락되었다. 열매 없는 생명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조금 더 긴 시간이 허락되었다. 주어진 기회들이 선용될까? 하나님의 영의 경고들이 유의될까? 그의 구속주께서 은혜스럽게 제공하신 그 구원을 경멸해 온 예루살렘에 관하여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실질적으로 또한 그대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 23:37). 그리스도께서는 애원하셨고 또 초청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은 그가 구원하러 오신 백성들에게서 보답을 받지 못했다. 그대는 가련하고 스스로 속임을 당하고 눈멀어 버린 유대인들이 그들의 시대에 그러했던 것보다 지금 당신의 시대에 조금도 더 잘하고 있지 못하다. 그대는 그대의 복된 특권들과 기회들을 잘 증진시키고 그리스도인 품성을 온전케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늘 반역적이었고, 그대는 참으로 개심하여 하나님의 요구 사항에 순종하면서 살기 위해 자신을 낮추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증언 4권 pp. 179-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