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 2권
섹션 15 — 교회에 대한 증언
서 론
나의 형제 자매들은 증언 15가 이렇게 속히 나오리라고 거의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많은 개인 증언들이 있고, 그 중에 어떤 것은 뒷부분에 실렸다. 그리고 나는 일반적인 위험과 오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의무에 관한 이상을 이러한 증언들을 줌으로 제시하는 길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주님께서 내게 보여 주신 것보다 직접적이며 강하게 제시할 방도가 달리는 없다.
증언 14호가 대총회가 열리기 며칠 전에 그대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그 증언은 내가 그것을 위해 중요한 문제를 마련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므로 서둘러서 인쇄를 마쳤다. 사실상 증언 14호는 이 문제를 다룰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증언 15호를 위한 문제를 확보해 놓고서 나는 하나님의 축복이 그의 사랑하시는 백성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이것을 그대들에게 내어 놓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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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 경험담
[1868년 2월 7일부터 1868년 5월 20일까지]
우리가 집으로 돌아와서, 여행과 활동의 고무적인 영향이 가신 후에 우리는 동부 지역 순회 여행이 고된 일이었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 관하여 보여 주셔서 말로 전한 것을 글로 써 달라는 독촉의 편지를 내게 보내왔다. 그리고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경우들이 있는데 다 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많이 필기하는 것은 나를 견뎌내지 못하게 할 것 같다. 나는 용기가 꺾였고, 착 가라앉은 상태로 여러 날을 보내었다. 자주 쓰러지기도 했다. 이런 건강과 정신 상태에서 그렇게 많이 써야 하고, 많은 사람에게, 그것도 그중 얼마는 도무지 무가치한 사람에게 써야 하는 나의 의무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어디엔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히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2월 5일 저녁에 앤드류스 형제는 우리의 예배당에서 백성들에게 설교했다. 그러나 그 저녁 나는 거의 실신해 있었고, 호흡이 없는 상태로 나의 남편의 부축을 받았다. 앤드류스 형제가 집회로부터 돌아오자 그들은 나를 위하여 특별 기도회를 열었다. 그래서 나는 다소 기운을 차렸다. 그날 밤 잠을 잘잤다. 이튿날 아침 기운은 없었지만 나는 몸이 확 풀리고 용기가 생겼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흰 옷감을 내게 가져왔다. 그리고 내게 규격이 다른 여러 사람들의 옷으로 재단하라고 하면서 성격과 상황에 대해 모든 설명을 더해 주었다. 나는 옷감을 잘라서 요구될 때에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하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내가 옷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옷을 입을 자격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저것이 내가 끊어야 할 마지막 옷감인가 하고 물었다. 그게 아니라는 답을 들었다. 내가 일을 끝내자마자 또 해야 할 일감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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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놓인 일의 양에 나는 기가 꺾였다. 그래서 내가 지난 20년간 남의 옷을 위해 옷감을 재단했는데, 나의 수고는 보답이 없고 나 역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나는 내게 옷감을 가져온 사람에게 내가 옷을 지어 입혀야 하는 어느 한 여인에 대해 말했다. 나는 그녀가 그 옷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그녀에게 제공하는 것은 시간과 재료의 손실이 될 것이라 말하였다. 그녀는 매우 가난했고, 지능이 낮았고, 버릇이 단정하지 못함으로 새 옷을 곧 더럽힐 것이었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옷감을 재단하라. 그것이 네 임무이다. 손해는 내가 보는 것이며 네가 보는게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듯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뜻하신 바를 펼치신다. 그러나 너는 이것이 잘될른지 저것이 잘될른지 알지 못한다. 그처럼 불쌍한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생활의 축복을 많이 받은 다른 사람들은 좋은 환경과 지력을 소유하였고, 개선의 이점이 많이 주어졌지만 결국 밖에 버려 둠을 당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불쌍한 영혼들은 이 약한 빛에 의해 살아왔고, 그들이 가진 바 능력의 최선을 다해서 개선을 하였으며, 개선을 위한 완전한 빛과 충분한 혜택을 누렸던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발전을 이루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자 나는 오랜 가위질로 못이 박힌 손을 거두고, 이런 일을 계속하는 것을 생각하니 움츠려들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말하였다. “옷감을 재단하라. 아직 쉴 때가 아니다.” 나는 피곤함을 심하게 느꼈지만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섰다. 내 앞에는 빛나는 새 가위가 놓여 있었고 나는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즉시 나의 피곤과 실망의 기분이 사라졌다. 그 가위는 내가 거의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잘 드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비교적 쉽게 옷감들을 끊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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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꿈으로 격려를 받아서 나는 내 남편과 앤드류스 형제와 함께 그라티옷, 사기나우, 투스콜라로 가기로 결심하고, 내게 일할 힘을 달라고 주님께 의뢰하였다. 그래서 2월 7일에 우리는 집을 떠나 55마일을 달려가서 약속한 알마에 이르렀다. 여기서 여전히 일하였고, 자유롭게 그리고 힘차게 일하였다. 그라티옷에 있는 친구들은 관심을 가지고 경청하였으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건강 개혁과 일반적인 준비의 일에 뒤져 있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는 이 기별의 사업과 정신의 번영에 필요한 질서나 효과가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앤드류스 형제가 3주일 후에 그들을 방문하여 그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 자화 자찬할 생각은 없으나 내가 어떤 가족에게 예리한 증언을 써 주었는데 그들이 그것을 받고 유익을 얻었다. 우리는 아직도 그 가족에게 깊은 관심을 쏟으며 그들이 주 안에서 번창하기를 원하고 있다. 비록 그라티옷의 사업에 관해서는 실망의 빛이 보이긴 하지만 그들이 도움이 필요한 것을 깨닫고 바라게 될 때에 우리는 그 형제들을 돕게 되길 바란다. 알마의 회집에 사기나우 세인트 찰스와 티타바와 시에서 참여한 형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강권하여 초청하였다. 우리는 당장 그 곳에 갈 계획이 없었고 길이 열리면 투스콜라를 방문하고자 했다. 투스콜라에서 소식이 없자 우리는 티타바와 시로 결정하고, 투스콜라에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편지를 띄웠다. 티타바와 시에서 우리는 상상외로 새로 지은 큰 예배당에 안식일 준수자들이 꽉 찬 것을 보게 되어 기뻤다. 형제들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고 우리는 자유를 누렸다. A 형제의 충성된 노력으로 이 곳에서 좋은 일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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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반대와 핍박이 따랐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들으러 오면서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우리의 수고는 모두에게 호감을 얻은 것 같았다. 나는 이 곳에서 한 주일간 열한 번의 집회에 참석하여 한두 시간씩 여러 차례 설교하였고 또 다른 집회들에도 나갔다. 어떤 집회에서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어떤 이들을 권유하여 한 발 더 전진하여 십자가를 지도록 하는 노력을 했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침례를 받아야 했다. 최근의 이상 가운데서 진리를 선포하고 교회가 생겨서 우리가 방문하게 될 교회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이 곳이 그 중 하나였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회중 가운데 어떤 사람의 형편이 내 앞에 펼쳐졌고, 그들을 위해 노력해야 겠다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거의 세 시간이나 그들을 위해서 애썼다. 그 시간동안 나는 간절한 심정으로 그들에게 호소하였다. 모두가 그 때에 십자가를 졌고 기도하기 위해 나왔으며, 거의 모두가 간증하였다. 이튿날 십오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 백성들을 방문하게 되면 A 형제가 이 사업을 위해 충성되어 애쓴 결과에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사업은 진리가 선포되지 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 백성들이 그가 하는 특별한 일에서 물러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는 주님의 팔에 의지하여 전진하며 흑암의 세력에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계속된 집회가 끝날 무렵 투스콜라의 스푼너 형제가 그 곳을 방문해 달라고 우리를 찾아왔다. 그가 월요일에 떠날 때에 그 편에 약속을 보내었고 우리는 침례를 베푼 후 화요일에 그 뒤를 따랐다. 우리는 바사르에서 안식일과 일요일 집회를 연합회 교사 (校舍) 에서 가졌다. 우리는 부담 없이 설교할 수 있었고 노력의 결과를 볼 수 있었다. 일요일 오후 아직껏 신앙 고백을 하지 않은 서른 명의 낙심자들과 아이들이 앞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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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매우 흥미 있고 유익한 집회였다. 어떤 이들은 진리에서 떠났는데 우리는 그들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에,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떠나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우리의 약속은 멀리 세인트 찰스와 알마까지 가야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월요일에 바사르에서 하던 일을 끝내야 했다. 그날 밤 투스콜라의 어떤 사람들에 관하여 본 이상이 꿈 속에서 되살아났다. 나는 그 백성들을 위한 나의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떠날 수밖에 없었다. 화요일에 우리는 32마일을 여행하여 세인트 찰스에 갔고 그릭스 형제 집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여기서 증언을 15페이지나 기록하였고 저녁에는 집회에 참석하였다. 수요일 아침 앤드류스 형제가 알마의 약속을 이행할 수 있도록 우리는 투스콜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 뜻에 동의하였다. 그 아침 나는 15페이지를 더 썼고 집회에 참석하여 한 시간 설교했으며 그릭스 부처와 함께 투스콜라의 스푼너 형제의 집까지 33마일을 여행하였다. 목요일 아침 우리는 160마일 떨어진 와트루즈빌까지 갔다. 나는 16페이지를 썼고 저녁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그 때에 참석한 어떤 사람에게 예리한 증언을 하였다. 이튿날 조반 전에12페이지를 기록하였고 투스콜라로 돌아와서 8페이지를 더 썼다. 안식일 오전에 남편이 설교했고 나는 점심을 들기 전 두 시간 동안 설교하였다. 집회가 잠간 중단되고 음식을 조금씩 들고 난 후에 기도회로 모여 한 시간 설교하고, 참석한 몇 사람에게 명백한 증언들을 던져 주었다. 이 증언들은 주로 겸손과 감사의 태도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증언들이 그렇게 수용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이튿날 우리가 그 날의 일을 위해 예배당으로 가기 전에 내가 증언 중에 분별력과 주의가 부족하고 말과 행동을 잘 제어하지 못한다고 말했던 당사자가 그녀의 남편과 함께 찾아 들어와서 불화와 동요의 감정을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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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말하다가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평도 하다가, 자복도 하다가, 자신을 상당히 합리화시켰다. 그녀는 내가 말한 것을 상당히 오해하였다. 내가 그녀의 실수를 공중석상에서 말했다는 것이 크게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여기에 난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느낄 이유가 무엇인가? 형제 자매들이 이 일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기에 나는 새로운 말을 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 자신에게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자신을 몰랐다. 그리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적절히 판단할 수 없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교회 안에서 충실한 책망이 있어야 했고, 사랑의 신자들 모두에 의해 가꾸어져야만 했던 상황은 막힘없는 증언을 요구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내가 교회에서 그녀의 잘못을 나무란 것에 대해 기분이 나빴던지 화잇 자매가 마태복음 18장 15-17절의 주님의 지시를 따랐다면 상심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나의 남편은 주님의 이 말씀이 개인적인 범죄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이 자매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이해해야 한다고 진술하였다. 그녀는 화잇 자매에게 개인적으로 범죄하지 않았다. 교회와 그 사업의 번창을 위협하는 공적인 잘못을 대중 앞에 나무란 것이었다. 나의 남편은 이 경우에 해당되는 성경절을 하나 말하였다. 디모데전서 5장 20절. “범죄한 자를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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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형제는 그의 잘못을 신자답게 인정하였고, 그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보였다. 안식일 오후 그 집회 이후로 그들이 그 문제를 놀랍게도 확대시켰으며 잘못되게 만들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기록된 증언을 읽어달라는 제안을 하였다. 읽은 후에 책망받은 자매는 질문하였다. “이것이 어제 당신이 내게 말한 내용이었습니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녀는 놀란 듯했고 기록된 증언에 쾌히 화합하는 듯했다. 나는 복사물을 남기지 않고 그것을 그녀에게 주었다. 나는 여기서 실수하였다. 어쨌든 나는 그녀와 그 남편에게 그같은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들의 번영을 위한 나의 열렬한 갈망과 소원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나의 관습을 어겼다. 이미 집회 시간이 지났다. 1.5마일 밖에 회중이 기다리는 곳으로 급히 갔다. 독자들은 그 아침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백성 앞에 서기에 필요할만큼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것을 생각하는가? 어떤 이들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동정을 나타내 보였다. 충동적이며 부주의한 자들이 보통 우리가 강연하기 전에나 혹은 설교 후 진이 빠졌을 때에 그들의 짐과 시련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나의 남편은 혼신의 힘을 다 모아서, 요구한대로 율법과 복음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였다. 나는 최근에 감리교인들이 새로 지은 예배당에서 오후에 설교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이 넓직한 건물이 꽉 찼고, 어떤 이들은 서야 하였다. 나는 한 시간 반 가량이나 우리 주님께서 반복하신 두 큰 계명 중 첫째 계명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그리고는 오전에 감리교 목사가 설교한 주제와 똑같은 것임을 알게 되어 놀랐다. 그와 그의 신자들이 참여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저녁 때에 우리는 스푼너 형제의 집에서 밀러, 해치, 해스켈 형제 등과, 스터지스, 블리스, 하리슨, 말린 자매 등과 함께 귀한 대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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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투스콜라에서의 우리 일이 당분간 마무리된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 귀한 사람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증언을 주었던 그 자매를 사단이 이용해서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나는 그녀가 그 문제를 참으로 잘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녀가 지금까지 해온 것은 교회 안팎에서 그녀의 영향력을 망쳐왔다. 그러나 이제 필요한 책망을 달게 받고 개선하기 위해 겸손히 구한다면 교회는 다시 그녀를 가슴에 품어 줄 것이며 백성들은 그녀의 신앙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사랑하는 구주의 인정하시는 미소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그 증언을 완전히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나의 애타는 의문이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그리고 그 지역 형제들이 그녀 때문에 슬픔을 당하게 될까 두려웠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 나는 그녀에게 증언의 복사물을 보내었다. 4월15일에 1868년 4월 11일 자 덴마크 소인이 찍힌 글을 보내왔다. “화잇자매: 지난 달 23일의 증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요구에 응하지 못해서 안됐습니다.” 나는 이 가족을 위한 다정한 감정을 계속 간직할 터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을 때에 돕게 된다면 좋겠다. 내가 정성을 다한 사람으로부터 그런 취급을 당한 일이 슬픈 그림자를 내게 드리우는 것이었지만 나의 길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일로 인해 나의 의무에서 이탈할 수 없다. 내가 위에 언급된 쪽지를 가지고 좀 우울한 생각으로 우체국에서 돌아온 후에, 나는 기도하여 그 안에서 위로와 뒷받침을 얻을까 하고 성경을 펼쳤다. 나의 시선은 곧 다음과 같은 선지자의 말씀에 집중되었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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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큰 비가 내리기 직전에 이 여행에서 돌아왔는데 이 비는 눈을 몰아내었다. 이 폭우 때문에 다음 안식일 집회가 중지되었다. 그래서 나는 즉시 증언 14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킹 형제를 간호할 특권을 누렸다. 그는 얼굴과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고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우리는 그가 우리 집에 와서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두개골이 심하게 파손된 사람이 회복할 것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여 가벼운 물의 사용과 간략한 식사로 고열의 위험이 지나가고, 밤낮으로 통풍을 잘 시킨 방에서 3주를 보낸 후에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농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약 한 알 먹지 않았다. 그는 다량의 출혈과 빈약한 식사로 인해 상당히 체중이 감소했으나 그가 충분한 식사를 하게 되자 급속히 회복하게 되었다. 이즈음 우리는 그린빌 근처의 형제들과 친구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여러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형제들은 도움이 필요하였다. 안식일을 지키지만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고, 안식일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입장이었다. 우리는 그 불쌍한 영혼들을 도와주어야 할 입장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 대한 그 교회 지도자격인 교인들의 과거 경력이나 현재의 위치로 볼 때에 우리가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실수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어떤 우리의 형제들은 너무 말을 심하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하였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그들의 권고를 거절하고 분리하게 될 때에 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