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1 79-88 (8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빛을 비춰 주셨으므로, 그 문제가 점차적으로 그들의 마음에 펼쳐졌다. 그것은 더 많은 연구와, 하나하나 사슬을 지어서 탐구해 내기 위한 열렬한 노력을 요구했다. 주의와 열성과 부단의 노력으로 그 작업이 진척되어, 마침내 우리의 기별에 속한 위대한 진리들이, 하나의 분명하고 상호 연결이 이루어진 완전한 체계가 형성되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나는 베이츠 장로와 잘 아는 사이였음을 이미 말했다. 나는 그가 예의바르고 친절한 참 그리스도인 신사임을 알았다. 그는 내가 마치 그의 자식인 것처럼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 그는 내가 이야기하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깊은 흥미를 나타냈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그는 일어서서 말했다. “나는 의심 많은 도마와 같습니다. 나는 이상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에 이 자매가 한 증언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믿을 수만 있으면, 나는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에 해당될 것입니다. 나의 마음은 크게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이야기하는 자가 진실하다고 믿습니다만, 그가 우리에게 말한 놀라운 것들을 본 것에 관하여 설명할 수 없는 줄 믿습니다.”

결혼한 지 몇 개월 후에, 나는 남편과 함께 메인 주 톱샴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는데, 베이츠 장로도 그 곳에 같이 참석했다. 그 당시에 그는 나의 이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 집회는 매우 흥미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였고, 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이상으로 둘러싸였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다른 혹성에 대한 이상을 보았다. 이상에서 깨어난 후, 나는 내가 본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베이츠 장로는 천문학을 연구한 적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천문학을 한 번도 연구한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이 이상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가 그처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하늘의 빛으로 빛났으며, 그는 힘있게 교회에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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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회에서, 남편과 함께 부모가 살고 있는 골햄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나는 심한 병에 걸려서 무서운 고통을 당했다. 나의 부모와 남편과 자매들은 나를 위하여 합심해서 기도했다. 그러나, 나는 3주일동안 어려움을 당했다. 나는 때때로 죽은 사람처럼 기진 맥진해졌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나는 다시 살아났다. 나는 고통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간청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가 나의 고통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웃 사람들은 내가 죽을 것으로 포기해 버렸다. 한동안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를 원하셨다. 마침내, 친구들은 나를 위한 기도에 다시 연합하였다. 거기에 참석한 한 형제는 너무 큰 책임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일어서서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손을 나의 머리 위에 얹고, “엘렌 자매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고쳐 주신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뒤로 물러가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엎드러졌다. 나는 그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었다. 그러자, 고통이 내게서 떠나갔다. 나의 심령은 감사와 평안으로 넘쳤다.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이러했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에게 도움이 없다. 오직 그분 안에서 안식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릴 때에만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 다음날은 무서운 폭풍우가 있었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아무도 우리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거실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나의 방 창문이 열린 것을 보고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위대한 의사께서 자비롭게도 그 거처에 들어오셔서 질병을 꾸짖으시고 나를 병에서 놓여 나게 해 주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이튿날, 우리는 톱샴까지 38마일의 거리를 마차로 타고 갔다. 나의 아버지는 언제 장례식이 있을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버지는 “무슨 장례식이냐” 고 물었다. “딸 장례식” 이라는 대답이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그는 믿음의 기도로 고침을 받았소. 이제 그는 톱샴으로 가는 중에 있소.”

이 일이 있은 지 몇 주일 후에, 우리는 보스턴으로 가는 도중에 포틀랜드에서 기선을 탔다. 맹렬한 폭풍이 밀려와서, 우리는 큰 위험에 빠졌다. 배가 무섭게 흔들리고, 물결이 선실 창문을 때렸다. 숙녀용 선실에 있는 사람들은 큰 공포에 사로잡혔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었다. 어떤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에게 그들을 보호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상륙하게 되면 생애를 하나님의 사업에 바치겠다고 하나님께 엄숙하게 맹세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와 혼란의 장면이었다. 배가 흔들릴 때, 어떤 부인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무섭지 않습니까? 나는 우리가 결코 상륙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았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만일 나의 사업이 완성되었을 것 같으면, 나는 어떤 다른 장소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다 밑바닥에 누워도 괜찮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 같으면, 대양의 모든 물도 나를 빠뜨리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될 것 같으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안전하게 육지까지 데려다 주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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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나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높이 평가하였다. 내 앞에 펼쳐진 장면은,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이 가련한 죄인을 엄습할 때,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의 날을 나의 마음에 생생하게 알려 주었다. 그 때에, 심한 절규와 눈물과 죄의 고백과 자비를 위한 탄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잠 1:24-26).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는 모두 무사히 상륙하였다. 그러나, 폭풍을 만났을 때 많은 공포감을 나타낸 승객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관하여 말하지 않고, 그들의 두려움을 경멸할 뿐이었다. 보호함을 받아 육지를 볼 수만 있을 것 같으면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엄숙하게 약속한 한 사람은 배를 떠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나는 육지를 다시 밟게되어 기쁘다” 라고 조롱하는 태도로 부르짖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몇 시간 전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께 한 맹세를 기억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비웃으면서 나를 떠나갔다.

나는 임종시에 하는 회개를 강하게 상기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를 통하여 내내 자기 자신과 사단을 섬긴다. 그러던 중에 죽음이 그들을 엄습하게 되고 그들 앞에 무서운 불안이 밀려오면, 그들은 죄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슬픔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죽고자 하노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하면, 그들의 친구들은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늘에 가기에 적합하게 되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회복될 것 같으면, 그들은 전과 같이 여전히 반역적인 상태로 바뀌어질 것이다. 나는 잠언 1장 27, 28절을 기억한다.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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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8월 26일, 메인 주 골햄에서 우리의 장남 헨리 니콜즈 화잇이 태어났다. 10월에 톱샴의 하우랜드 형제 자매가 친절하게도 그의 주택의 한 부분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우리는 그의 후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빌린 가구로 살림을 시작했다. 우리는 가난했고, 재정적 어려움을 당했다. 우리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하며,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의 남편은 철로에 돌을 까는 일을 매우 열심히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노동에 상당하는 임금을 받을 수 없었다. 하우랜드 형제 자매는 가능한 한 우리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첫째와 둘째 기별을 온전히 믿었으므로, 그 사업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재산을 관대하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매일의 노동에 의존하게까지 되었다.

나의 남편은 철도 일을 그만두고, 도끼를 가지고 땔감을 자르는 노동일을 찾아갔다. 그의 옆구리에 계속적인 통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루에 약 50센트를 벌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일했다. 그는 심한 통증 때문에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고자 노력했다.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아침에 나는, 밤 동안에 우리를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리고 밤이 되면, 나는 낮 동안에 우리를 지켜 주신 그분께 감사했다. 식량이 다 떨어진 어느 날, 나의 남편은 돈이든지 양식을 얻기 위하여 그의 고용주를 찾아갔다. 그 날은 몹시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그는 우중에 3마일을 걸어갔다가 돌아왔다. 그는 여러 칸으로 묶여진 양식 자루를 메고 집으로 왔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 그는 일찌기 그가 종종 가르친 적이 있는 브룬스위크 마을을 지나왔던 것이다. 그가 크게 지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마음은 침울해졌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런 지경까지 되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셨습니까?” 나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으므로 여러 시간 동안 큰 소리로 울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절해 버렸다. 나를 위하여 기도가 드려졌다. 호흡이 다시 돌아오자, 나는 하나님의 영의 부드러운 감화를 느꼈으며, 내가 낙망 가운데 빠졌던 것을 후회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닮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시련에 둘려서 기운이 빠지고, 그분과 먼 거리에 놓이게 된다. 고난과 시련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가까이 이끌어준다. 용광로는 찌꺼기를 태워 버리고 금을 빛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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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나는 주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시험하고 계시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활동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를 편안하게 정착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보금자리를 흔들고 계심을 보았다. 우리의 사업은 영혼들을 위하여 활동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번영할 것 같으면, 가정이 너무도 행복스럽게 되어, 우리는 그것을 즐겨 떠나고자 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시련들이 우리를 엄습하도록 용납된 것은 여행에서 우리가 당할 한층 더 큰 투쟁을 위하여 준비를 갖추어 주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곧 다른 주들에 있는 형제들이 방문해 달라고 초청하는 편지들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주 밖으로 나갈 돈이 없었다. 우리의 대답은 우리 앞에 길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의존하기를 원치 아니하고 우리의 재정범위 안에서 살고자 조심해 왔다. 우리는 빚을 지기보다는 차라리 고난을 당하고자 결심했다. 나는 매일 내 자신과 어린아이에게 1파운드의 우유를 허용했다. 어느 날 아침, 나의 남편은 일하러 가기 전에 나에게 9센트를 주면서 3일 아침분의 우유를 사라고 했다. 내 자신과 아이를 위한 우유를 사느냐, 아이를 위한 에이프런을 사느냐 하는 것이 하나의 연구 과제가 되었다. 나는 우유를 포기하고, 아이의 발가벗은 팔을 덮어 줄 에이프런을 만들 천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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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헨리는 얼마 후 매우 앓게 되었다. 너무 급속하게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우리는 크게 놀랐다. 그는 혼수 상태로 누워 있었고, 호흡은 마르고 무거웠다. 치료했지만 효력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질병에 경험이 있는 사람을 불렀다. 그 사람은 회복이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를 위하여 기도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우리는 그 아이를 핑계로 여행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활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주님께서 그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실까 두려워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아이의 생명을 건져 달라고 기도하고, 그분께서 어느 곳으로 보내시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앞으로 전진하겠다고 엄숙히 서약했다.

우리의 간구는 열렬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것을 믿었다. 하늘에서 온 빛이 구름을 뚫고 우리에게 비치었다. 우리의 기도는 은혜롭게 응답되었다. 그 시간부터 아이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톱샴에 있는 동안, 우리는 코네티컷의 챔벌레인 형제에게서 편지를 한 장 받았다. 그 내용은 1848년 4월에 그 주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해 달라고 우리를 권유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비용만 구할 수 있으면 가기로 작정했다. 나의 남편은 그의 고용주와 계산을 해본 결과 10불을 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중에서 5불을 가지고, 나는 매우 필요한 의복의 천을 샀다. 그리고, 그 천을 조각조각으로 잘라서 남편의 외투를 기웠는데, 소매는 본래의 천을 알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우리는 매사추세츠 주 돌체스터로 가지고 가기 위하여 5불을 남겼다. 우리의 트렁크에는 세상에서 우리가 소유한 거의 모든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평안과 깨끗한 양심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세상의 안락보다 더 크게 존중했다. 돌체스터에서 우리는 니콜즈 형제의 집을 방문했다. 우리가 떠나올 때 니콜즈 자매는 나의 남편에게 5불을 주었는데 우리는 그것으로 코네티컷 주 미들타운까지 가는 차표를 샀다. 우리는 그 도시에서 낯선 사람이었고, 그 주에 있는 형제들 중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었다. 우리에게는 50센트밖에 남지 않았다. 남편은 마차를 빌리는데 그 돈을 쓰고자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트렁크를, 판자를 쌓아 둔 더미 위에 던져 놓고, 우리는 같은 믿음을 가진 누군가를 찾아서 걸어갔다. 우리는 곧 C 형제를 만났는데, 그가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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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는 로키 힐에서, 벨든 형제 집의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커다란 방에서 열렸다. 형제들은 약 50명이 되기까지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모두 완전히 진리를 믿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집회는 흥미로웠다. 베이츠 형제는 분명한 빛으로 계명들을 설명하고, 그 중요성을 강력한 증거로 마음에 새겨 주었다. 그 말은, 이미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을 굳게 해 주고, 완전히 결심하지 않은 자들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그 다음해 여름에, 뉴욕 주에 있는 형제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열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신자들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우리의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자신 있게 약속할 수 없었다. 우리는 여행할 돈이 없었다. 남편의 건강은 나빴다. 그러나, 마초장에서 일할 길이 열렸으므로, 그는 그 일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 당시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보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는 침상 곁에서 머리를 숙이고 하루 종일 일할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보증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의 남편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써가 아니고 주님의 힘으로 낫질을 하기 위하여 나갔다. 밤에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할 자금을 벌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그분께 간구하곤 했다. 우리는 때때로 크게 축복을 받았다. 1848년 7월에, 하우랜드형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의 남편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하루 종일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나는 그분의 사업에 사용하기 위하여 몇 불의 돈을 벌기를 바란다.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동안 수고와 피곤과 아픔과 배고픔과 추위와 더위를 겪어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더 많은 고난을 겪을 준비를 갖추고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의 안락과 쾌락과 평안이 나의 믿음과 소망의 제단 위에서 하나의 희생 제물이 되고 있음을 오늘날 기뻐한다. 만일, 우리의 행복이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제자는 자기를 소중하게 하기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어린 자녀들의 유익을 위하여 살게 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자신의 안락과 자신의 쾌락과 자신의 평안과 자신의 편의와 자신의 뜻과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희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분의 보좌에서 그분과 함께 결코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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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장에서 번 돈은 우리의 현실적 필요를 채워 주고 또한 서부 뉴욕으로 갔다 오는 비용을 지불하기에 충분했다.

뉴욕에서의 우리의 첫 집회는 볼네이에 있는 어떤 형제의 헛간에서 열렸다. 약 35명이 참석했는데, 그들은 모두 그 주 그 지역에서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 숫자의 사람들 중에서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은 거의 둘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심한 오류를 주장하고 있었으며, 각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견해들을 강요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성경을 따르고 있노라고 역설했다.

이 이상한 견해 차이는 나에게 무거운 부담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무거운 짐에 눌려 탈진 상태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므로, 나는 되살아 났다. 하늘의 빛이 내게 임하였고, 나는 곧 지상의 사물들을 잊어버렸다. 나를 수행하는 천사는 참석한 자들의 오류들 중 얼마를 내 앞에 제시해 주고, 그 오류들과 대조해서 진리도 보여 주었다. 그들이 성경을 따르고 있노라고 주장한 이처럼 불일치한 견해들은 성경에 대한 그들 자신의 견해에 의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오류들을 버리고 세째 천사의 기별에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리는 승리했다. 형제들은 그들의 오류들을 버리고 세째 천사의 기별에 연합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크게 축복하시고 그들의 수를 더해 주셨다.

우리는 에드슨 형제의 헛간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볼네이에서 포트 깁슨으로 갔다. 참석한 자들 중에는, 진리를 사랑했지만 오류에 귀를 기울이고 오류를 간직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집회가 마치기 전에 우리를 위하여 힘있게 역사하셨다. 나는 서부 뉴욕에 있는 형제들이 그들의 의견 차이를 버리고 성경상 진리에 연합하는 중요성에 대한 이상을 다시 보았다.

우리는 서부 지역의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 어린아이를 맡겨 둔 미들타운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의 괴로운 의무가 저절로 주어졌다. 영혼들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는 어린 헨리를 데리고 다니는 일을 희생함으로 사업에 아낌없이 전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건강이 좋지 못했으므로 그가 필연적으로 나의 시간의 상당한 부분을 빼앗았다. 그것은 괴로운 시련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가 나의 의무의 길을 방해하게끔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가 심한 병에 걸렸을 때 주님께서 그를 살려 주셨다는 것을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방해가 되도록 허용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내게서 옮겨 버리실 것이라고 믿었다. 주님 앞에서 홀로, 가장 괴로운 심정과 많은 눈물로, 나는 희생을 치렀다. 그리하여, 당시에 한 살에 불과한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다른 사람이 어머니의 감정을 그에게 나타내고 어머니의 몫을 하도록 주었다. 우리는 가장 신임하는 하우랜드 형제의 가정에 그를 떼어놓았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사업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하고자 기꺼이 그 짐을 지게 되었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돌보는 것보다 헨리를 더 잘 돌볼 수 있을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정된 가정을 갖고 훌륭한 양육을 받는 점에 있어서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내 아이를 두고 떠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를 떠날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난 슬픈 표정은 밤낮 내 앞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으로 나는 마음속에서 그를 쫓아내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활동하고자 노력했다. 하우랜드 형제의 가정에서 5년 동안 헨리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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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장 — 출판과 여행

1849년 6월. 코네티컷 주 로키 힐에서 한동안 살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열렸다. 7월 28일에, 이 곳에서 우리의 둘째 아이 제임스 에드슨이 출생했다.

우리가 이 곳에 살고 있는 동안에, 나의 남편은 현대 진리를 기록하여 출판하는 것이 그의 의무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하기로 작정함으로, 그는 크게 용기를 얻고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돈 한푼 없는 신세였으므로, 다시 의심과 곤궁에 빠지곤 했다. 재정이 넉넉한 형제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보존하는 길을 택했다. 마침내 그는 낙심 상태에 빠져, 마초를 베기 위하여 풀밭을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그가 집을 떠나게 되자 무거운 짐이 나에게 지워졌으므로, 나는 기진해졌다. 나를 위하여 기도가 드려졌다. 그리하여, 나는 축복을 받고, 이상 가운데로 끌려가게 되었다. 나는 주님께서 일 년 전에 남편을 축복하여 튼튼하게 해주셔서 들판에서 일하게 하시고, 그 곳에서 번 돈을 그가 올바르게 사용한 것을 보았다. 그가 또 그의 생애에서 일백 배를 가지게 되고, 만일 성실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풍성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다른 사업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이제는 들판에서 일할 힘을 그에게 주시지 않을 것을 보았다. 그가 믿음으로 행하고 현대 진리를 기록하여 출판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즉시 글 쓰는 일에 착수했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성경절을 대하게 되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 달라고 주님께 부르짖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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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같은 때에, 그는 “현대 진리” 라는 제호로 된 작은 인쇄물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인쇄소는 로키 힐에서 8마일 떨어진 미들타운에 있었다. 비록 그 당시에 그는 다리를 절었지만, 때때로 이 거리를 걸어서 왕복했다. 그가 인쇄소에서 제1호를 가져 왔을 때, 우리는 모두 그 주위에 둘러앉아 머리를 숙이고, 겸손한 마음과 많은 눈물로, 주님의 종의 연약한 활동에 축복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는 그 글을 읽을 것으로 짐작되는 모든 사람의 주소를 겉봉에 쓰고, 융단제 손가방에 넣어 우체국으로 가져갔다. 그 인쇄물의 매호 (每號) 마다 로키 힐에서 미들타운으로 가져 갔다. 그리고, 우체국으로 가져 갈 준비를 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주님 앞에 펴놓고 눈물 섞인 열렬한 기도로, 그분의 축복이 소리 없는 사자에게 임하도록 간구했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인쇄물을 출판할 돈을 보내주는 편지들이 왔다. 그리하여, 많은 영혼들을 위한 기쁜 소식이 진리를 전하게 되었다.

교회증언 1권 pp. 7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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