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1 459-468 (46일)

여자들은 건강과 안락을 위하여 그들의 사지를 옷으로 입혀야 한다. 그들의 다리와 팔은 남자들의 사지처럼 따뜻하게 입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유행적인 긴 의복은 몇 가지 이유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

1. 보도와 거리를 쓸 만한 긴 길이로 된 의복을 입는 것은 낭비이며 불필요한 것이다.

2. 그처럼 긴 의복은 풀에서 이슬을, 거리에서 진흙을 모으게 되어 불결해진다.

3. 의복이 질질 끌리는 상태로는 충분히 보호를 받지 못한 민감한 발목에 의복이 닿기 때문에, 발목을 신속히 차가워지게 해서 건강과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이것이 코감기와 연주창 종기의 가장 큰 원인이다.

4. 불필요한 길이는 허리와 내장에 무게를 더해 준다.

5. 그것은 걷는데 지장이 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길에도 방해가 된다.

소위 의복 개혁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또 하나의 다른 형태의 의복이 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이성 (異性) 을 본받는다. 그들은 챙 없는 모자, 바지, 조끼, 외투, 장화 등을 사용하는데, 그 중 마지막 것은 그 복장의 가장 민감한 부분에 해당한다. 이런 스타일의 의복을 착용하고 옹호하는 자들은 소위 의복의 개혁을 매우 반대할 만한 지경까지 이끌고 간다. 결과적으로,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 이런 의복을 입는 어떤 사람들의 건강 문제에 관한 그들의 일반적 견해는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복 문제에 있어서 그처럼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았을 것 같으면, 그들은 훨씬 더 좋은 일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스타일의 의복은 하나님의 질서를 뒤바꾸고 그분의 특별한 지시를 무시하게 된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신 22: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스타일의 의복을 입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것은 점잖은 의복이 아니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 공언하는 정숙하고 겸손한 여인들에게 전혀 합당하지 않다. 남녀간의 의복의 구분을 없애 버리고자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 의하여 하나님의 금령 (禁令) 이 경솔히 취급되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어떤 의복 개혁자들이 취하는 극단적 태도 때문에, 그들의 감화는 훼손된다.

-460-

하나님께서는 남녀간의 의복을 분명히 구별되도록 계획하시고, 그것에 관하여 분명한 지시를 해야 할 만큼 그 문제가 중요함을 보셨다. 남녀가 한가지로 동일한 의복을 입으면 혼란이 생기고 범죄가 크게 증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도 바울이 살아나서, 경건하다고 공언하는 여자들이 이런 스타일의 의복을 입는 것을 본다면, 그는 책망을 할 것이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딤전 2:9, 10).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도의 교훈을 완전히 무시하고 금과 진주와 값진 것으로 단장한다.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들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므로, 그들의 감화가 귀중하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심히 긴 의복을 심히 짧은 의복으로 바꾼다면, 그들의 감화를 크게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그들이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로 이끌 의무가 있는 불신자들은 염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건강에 적합한 여인들의 의복에 있어서, 보는 자들이 싫어할 만한 큰 변화를 주지 않고서도 많은 개선을 할 수 있다.

코르셋과 고래 수염 제품 등으로 몸이 조금이라도 압박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의복은 폐와 심장이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완전히 편안해야 한다. 의복은 장화 맨 위 가장자리보다 어느 정도 내려오는 길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손으로 걷어 올리지 않을지라도 보도와 거리의 더러운 것에서 청결하게 보존되기에 충분할 만큼 짧아야 한다. 이보다 좀더 짧으면 더욱 적합하고 편리할 것이며, 집안의 일을 하는 여인들과, 특별히 옥외에서 어느 정도의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여인들에게 건전한 의복이 될 것이다. 이 같은 스타일의 의복에는 하나나 많아도 두 개의 가벼운 스커트가 필요한 것의 전부이며, 이것은 허리에 단추를 달거나 가죽 끈으로 매달아야 한다. 엉덩이는 무거운 부담을 감당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엉덩이까지 흘러 내려오도록 입은 무거운 스커트는 쉽사리 치료되지 않는 여러 가지 질병의 원인이 되어 왔다. 고통당하는 자들은 그들의 고통의 원인을 모르는 것 같으며, 허리를 동이고 무거운 스커트를 입음으로써 그들의 육체의 법칙을 계속해서 범하여 마침내 평생 동안 병자가 된다. 그들의 잘못을 알려 주면,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면, 그런 스타일의 의복은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이 될 텐데요’라고 부르짖는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나는 우리가 많은 점에서 유행에 뒤떨어지기를 바란다. 지나간 세대의 유행에 뒤떨어진 여인들을 특징 지었던 구식적인, 강한 체력을 가질 수만 있다면 매우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여인들의 식욕의 방종을 포함한 옷 입는 방법이 그들의 연약하고 병든 현상태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경솔한 일이 아니다. 마땅할 만큼 자신의 팔다리를 옷 입히는 여인은 일천 명 가운데 한명에 불과하다. 의복의 길이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들의 사지는 남자들의 사지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입혀져야 한다. 안을 댄 바지를 입되, 발목 부분을 띠로 단단히 묶든지, 혹은 바지 끝부분을 가늘게 만듦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신발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길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입혀진 사지와 발목은 기류 (氣流) 에서 보호를 받게 된다. 팔과 다리가 따뜻한 의복으로 편안하게 보호를 받으면, 혈액은 균일해지고, 피는 깨끗하고 건강해질 것이다. 혈액이 차가워지지 않고 조직을 통하여 정상적으로 순환하는데 장애를 받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62-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주된 어려움은 의복의 길이에 대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장화의 맨 윗부분” 이 거의 무릎까지 닿는, 보통 남자들이 신는 장화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 같은 장화를 신는 것이 여인들의 습관으로 되어 있다면, 이 사람들이 그 문제를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공언하는데 대하여 그들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인들이 그런 장화를 신지 않으므로, 이 사람들은 나의 말을 이해하는 체했지만 실은 조금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내가 말하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 알려 주고,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증언들이 일치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나는 약 2년 전에 기록한 원고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자 한다.

“의복에 관한 기사가 ‘생활의 방법’ 지에 게재된 이래, 어떤 사람들에 의해 내가 전하고자 한 사상이 오해되어 왔다. 그들은 내가 의복의 길이에 관하여 기록한 것에 대하여 극단적 의미를 취하고, 분명히 그 문제에 관하여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문제에 관해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그들은 의복을 짧게 하는 문제를 토론하기를, 그들의 영적 시력이 너무 혼란해져서 사람들을 다만 나무들이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생활의 방법’ 지에 최근에 게재된 의복에 관한 나의 기사와, 동일한 제목으로 교회증언 10호에 게재된 기사에서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상을 통하여 내 앞에 제시된 것을 가장 잘 판단할 사람임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도 내가 생활로써 나의 증언을 부인할까 염려하거나, 내게 주어진 이상에서 정말로 내가 어떤 모순을 알아내지 못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생활의 방법’지에 게재한 기사에서 나는, 그리스도인 여인들이 택하기만 하면 입을 수 있는 건전하고 편리하고 경제적이면서도 정숙하고 적당한 의복의 스타일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나는 아마도 불완전하게 묘사된 것 같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의복을 묘사하고자 노력했다. ‘의복은 장화 맨 위 가장자리보다 어느 정도 내려오는 길이여야 하되, 손으로 걷어 올리지 않을지라도 보도와 거리의 더러운 것에서 청결하게 보존되기에 충분할 만큼 짧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장화의 맨위 가장자리를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신는 그런 장화의 맨 위 가장자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장화의 맨 위 가장자리’라는 말을 장화 혹은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신는 긴 장화의 맨 위 가장자리를 알려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다. 오해를 받을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으면, 나는 더욱 분명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만일, 여자들이 남자들처럼 긴 구두를 신는 습관이 있었을 것 같으면, 나는 이 오해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우리가 읽어 본 바와같이 그 언어가 매우 분명하므로 아무도 혼란에 빠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의복은 장화 맨 위 가장자리보다 어느 정도 내려오는 길이가 되어야 한다.’ 이제 그 조건을 살펴보자. ‘그러나, 손으로 걷어 올리지 않을지라도 보도와 거리의 더러운 것에서 청결하게 보존되기에 충분할 만큼 짧아야 한다. 이보다 좀더 짧으면 더욱 적합하고 편리할 것이며, 집안의 일을 하는 여인들과, 특별히 옥외에서 어느 정도의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여인들에게 건전한 의복이 될 것이다.’

-463-

나는 분별 있는 사람들이 내가 말한 뜻을 오해하고 왜곡시키는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 없다. 의복의 길이에 관하여 말하면서 내가 만일 거의 무릎에까지 도달하는 긴 장화에 관하여 말했을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그러나 손으로 걷어 올리지 않을지라도 보도와 거리의 더러운 것에서 청결하게 보존되기에 충분할 만큼 짧아야 한다’는 말을 덧붙여야 했겠는가? 만일, 긴 장화를 의미했을 것 같으면, 그 의복은 들어 올리지 않을지라도 거리의 더러운 것에서 청결하게 보존되기에 충분하고, 온갖 활동에 불편 없을 정도로 충분히 짧은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화잇 자매가 미국식 의상을 입는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이런 스타일의 의복은 배틀크릭에 있는 자매들이 일반적으로 택해서 입고 있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사실 이 신발을 신고 있는 동안 거짓말은 온 세계를 돌아다닐 것이다’라는 격언을 상기하게 되었다. 한 자매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매들이 미국식 의상을 입어야 한다는 사상을 받아들였노라고 나에게 심각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스타일의 의복이 강요될 것 같으면, 그 여자는 그렇게 하기로 수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의복을 입을 마음이 결코 내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64-

짧은 의복을 입는데 관하여, 나는 내가 보통 입고 있는 의복보다 손가락 하나의 길이 정도 짧은 의복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짧은 의복을 이따금 입는다. 겨울이면, 나는 일찍 일어나서, 눈에 끌리지 않도록 손으로 치켜들 필요가 없는 짧은 의복을 입고, 아침 식사전에 1내지 2마일씩 활발하게 걸었다. 가벼운 눈길을 걸어야 할 때, 비가 오거나 땅이 질 때, 나는 그 의복을 입고 여러 번 사무실에 갔다. 배틀크릭에 있는 4명 내지 5명의 자매들이 세탁과 집안 청소를 할 때 입기 위하여 짧은 의복을 준비했다. 짧은 의복은 배틀크릭 거리에서 입지 않았으며, 결코 집회에 입고 가지 않았다. 나의 의도는 현재의 유행, 곧 땅에 질질 끌리는 심히 긴 의복을 고쳐 주고, 어떤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이 입고 있는 거의 무릎에까지 오는 심히 짧은 의복 역시 고쳐주자는데 있었다. 나는 우리가 그 두 가지의 극단을 다 같이 피해야 할 것을 보았다. 여자의 긴 구두 위의 가장자리 가까이에 이르는 의복을 입음으로, 우리는 심히 긴 의복의 악을 피할 수 있고, 또한 심히 짧은 의복의 악과 나쁜 평판도 피할 수 있다.

나는 일하는 것을 목적으로 짧은 의복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만듦에 있어서 세련미와 우아함이 나타나게 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그것을 규모 있고 맵시 있게 만들도록 하라. 비록 일할 때 입는 옷일지라도, 그것은 어떤 모형을 따라 재단이 이루어지고, 잘 어울리게 만들어져야 한다. 자매들이 일을 하고자 옷을 입을 때, 곡식밭에서 까마귀를 놀라게 해주는 허수아비와 같은 모양으로 보이도록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맵시있고 잘 어울리는 의복을 입은 것을 보면, 방문객이나 낯선 사람들보다도 그들의 남편과 아이들에게 더 큰 만족을 주게 될 것이다. 어떤 아내들과 어머니들은, 그들이 일을 하고자 할 때와 남편과 자녀들만 볼 수 있을 때에는 그들이 어떤 외양을 하고 있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과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눈을 위하여 세련되게 옷을 입는 일에 매우 세심하다. 남편과 자녀들의 존경과 사랑이 낯선 사람들이나 일반 친구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아내와 어머니에게는 남편과 자녀들의 행복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행복보다 더 신성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자매들은 어느 때에나 호사스럽게 옷을 입어서는 안되지만, 그들의 일이 허락하는 한 항상 산뜻하고 점잖고 건전하게 입어야 한다.”

-465-

위에서 열거한 내용의 옷은 짧은 의복의 개혁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것인 줄로 믿는다. 그것은 서부 건강 개혁원에서, 배틀크릭에 있는 자매들 중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또한 그 문제가 사람들에게 적절히 제시된 다른 지역들에서 이용되고 있다. 이 얌전한 의복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남자들이 입는 의복과 매우 유사한 소위 미국식 의상이다. 그것은 조끼, 바지, 그리고 외투와 비슷하면서 엉덩이에서 무릎 절반쯤 오는 드레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의복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것으로 내게 보여진 의복이 아니므로 나는 반대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얌전하고 편안하고 편리하고 건전한 것으로 추천하였다.

내가 의복 문제에 다시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대하여 변명으로 제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증언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매들이 20명 중 한 사람도 의복의 개혁에 있어서 첫째 계단도 밟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잇 자매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권유하는 것보다 좀더 긴 의복을 공중 앞에서 입는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나는 대답하고자 한다. 그 문제에 대하여 생소하고 편견마저 있는 곳을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말할 때, 나는 그 사람들이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옷을 입음으로 그들의 귀를 막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알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문제를 그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나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한 후에는, 개혁된 의복을 입고 그들 앞에 나타나서 나의 가르침을 예시해 준다.

후프를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의복의 개혁이 완전히 앞서 있다. 개혁 의복은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 크든지 작든지 간에, 후프를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오로지 너무 늦은 형편이다.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입장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하는 말이나, 후프를 사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취해지는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한 개인적 대화를 왜곡시키는 것을 항의함과 동시에, 내가 기록하고 출판한 것을 나의 확정된 입장으로 간주해 주도록 요청하는 바이다.

-466-

84 장 — 우리의 목사들

1865년 12월 25일,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받은 이상에서 나는 가장 엄숙한 사업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사업의 중요함과 위대함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두드러진 무관심을 볼 때, 나는 목사들과 백성들을 걱정하였다. 현대 진리의 사업이 마비된 것처럼 보였고, 하나님의 사업도 정지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목사들과 백성들은 그들이 사는 시대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지 않고, 현대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시대를 위한 준비의 사업을 이해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실정이다. 세속적 야망을 가진 현 상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부족, 자아에 대한 몰두 등의 상태로는, 그들이 늦은비를 받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자신의 허구 (虛構) 로 그들의 믿음의 파선을 일으키며 달콤한 어떤 자아 기만에 단단히 묶이게 하는 사단의 분노를 대항하여 서는데 전혀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모두 그릇됨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생각한다.

목사들과 백성들은 개혁 사업에 있어서 더 크게 발전해야 한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옷 입고 일하는데 있어서의 그릇된 습관을 고치는 일에 지체 없이 착수해야 한다. 나는 꽤 많은 수의 목사들이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각성하고 있지 못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지 않다. 그 결과는 어떤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같이, 활동의 결실이 별반 없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양 떼에게 모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단의 유혹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들은 사단이 사로잡고자 노력하는 바로 그 대상들이다. 만일, 사단이 육신의 안전에 대하여 한 목사를 유혹하는데 성공을 거두고, 그렇게 함으로 그의 마음을 사업에서 떠나게 하거나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참 상태에 관하여 스스로 속일 수만 있으면, 그는 많은 것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467-

나는 하나님의 사업이 발전될 만큼, 또한 마땅히 발전되었어야 할 만큼 되어 있지 못함을 보았다. 목사들은 사업의 중요성이 요구하는 정력과 헌신과 결정적 인내로 그 사업을 추진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지치지 않는 열심과 인내로 싸우고자 깨어 있는 원수가 있다. 목사들과 백성들의 연약한 활동은 그들의 원수 마귀의 활동과 비교할 수 없다. 한편에는, 정의를 위하여 싸우며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목사들이 있다. 그들은 강하고 용감해야 하며, 그들이 하고 있는 사업에 완전히 헌신하고, 관심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을 군사로 택해 주신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사물에 얽혀서는 안 된다.

다른 한편에는 오류와 그릇된 것을 전하기 위하여, 또한 그들의 가증한 것과 결함을 멋진 외투로 가리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며 갖은 계략을 다 쓰고 있는 사단과 그의 사자들과 그의 모든 지상 대리자들이 있다. 사단은 이기심과 위선과 온갖 종류의 기만을 진리와 의처럼 보이는 외투로 씌워서, 그의 간계를 이해하고 있노라고 공언하는 목사들과 백성들에게서까지 성공을 거둔다. 그들은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품성에 있어서 그분을 더욱 닮지 않게 되며, 그들이 생애와 품성에 있어서 그들의 큰 원수의 종들을 더욱 많이 닮게 되고, 마침내 그 원수가 더욱 분명하게 그들을 소유하게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이라고 공언하지만, 그들은 죄의 종들이다. 어떤 목사들은 그들이 받는 급료에 지나치게 마음을 쓴다. 그들은 급료를 위하여 일을 하므로 사업의 신성성과 중요성을 잃어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활동에 있어서 게으르고 나태하다. 그들은 땅 위를 지나가지만, 그들의 활동에 있어서는 연약하고 성공적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은 사업에 있지 않다. 진리의 이론은 분명하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열렬한 연구와 간절한 기도로 이 진리를 탐구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리의 원수들을 대항하여 그들의 위치를 유지하도록 강요받음으로써 그들이 진리의 귀중함과 가치를 알 수 없다. 그들은 사업에 완전히 헌신하는 정신을 간직할 필요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 자신과 사업 사이에서 분리되어 있다.

-468-

나는, 하나님의 사업이 어떤 결정적 발전을 할 수 있기 전에 목사들이 회개해야 할 것을 보았다. 회개하게 되면, 그들은 급료를 별반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수행하도록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중요하고 거룩하고 엄숙한 사업, 곧 그분에게 엄격하게 회개해야 할 자로서 성실하고 훌륭하게 하도록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그 사업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그들의 사업에 대한 모든 성실한 기록은 기록하는 천사들을 통하여 매일 이루어진다. 그들의 모든 행동, 심지어 마음의 동기와 목적까지도 성실하게 드러난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며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의 눈에는 어떤 것도 숨겨지지 않는다. 모든 정력을 하나님의 사업에 바치는 자들, 위험을 무릅쓰고 무엇인가를 투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업이 그들의 일부분임을 느끼고, 단순히 삯을 위하여 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눈가림만 하여 스스로를 즐겁게 하고자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를 헌신하여 이 엄숙한 사업에 모든 관심을 쏟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와 관련된 공적 활동에서 철저하지 못함으로 실수를 범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익과 하나님의 사업의 유익을 위하여 엄격하게 살피고, 그들의 동기를 시험하고, 이기심에서 벗어난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그들이 솔직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동안, 그들이 동일한 그 법을 실천하지 못함으로 사단이 철저한 심령의 준비를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삯을 위하여 일함으로 사업의 중요하고 고상한 성격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사업에 대하여 철저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님 대신에 자아가 다스리게 허용해서는 안 되며, 시온에 있는 죄인에게 하나님이 저주를 선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복이 있으리라고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회증언 1권 pp. 459-468

Posted in

ad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