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87일

사단의 마수 (魔手)  

인류의 타락 후 사단은 그의 사자들에게 사람의 선천적 불멸성에 대한 신조를 가르치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이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미혹당한 사람들이 죄인은 영원한 불행 중에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인도하였다. 대리자들을 통하여 활동하고 있는 암흑의 왕은 하나님을 보복심이 많은 폭군처럼 나타내되, 그분께서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지옥에 던져 넣고 그들에게 언제나 그분의 분노를 느끼게 해주고 그들이 영원한 불꽃 속에서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당하고 괴로워 몸부림치는 동안 그들의 창조주는 만족한 마음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신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사단은 자기의 특성을 인류의 창조주시며 은인이신 하나님께 돌린다. 잔인성은 사단의 본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그분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최초의 큰 반역으로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순결하고 거룩하고 사랑스러웠다. 사단 자신은 인류를 범죄하도록 유혹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사람을 멸망시키는 원수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자기의 희생물로 확실하게 장악한 다음에 자기가 초래케 한 그 파멸을 보고 기뻐 날뛰고 있다.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온 인류를 자신의 그물 안으로 쓸어 넣으려고 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아담의 자손은 하나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도 사단은 옛날 우리의 첫 조상들을 정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창조주께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고 하나님의 정부의 지혜와 그분의 율법의 공의로움을 의심하게 함으로써 오늘날 사람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사단과 그의 사자들은 자기들의 극악성과 반역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을 그들 자신들보다 더욱 나쁘게 나타낸다. 큰 기만자는 자기 자신의 성격에 있는 무서운 잔인성을 하나님 아버지께 전가시키고 자기가 그런 불공평한 통치자에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하늘에서 추방되어 매우 그릇된 대우를 받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자 애쓰고 있다. 그는 여호와의 가혹한 명령에 속박되는 것보다 자기의 관대한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자유라고 세상에 선전한다. 이와 같이 그는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여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버리게 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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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이 만든 영원 지옥설 

죽은 악인들이 영원히 불타고 있는 지옥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것과 사람이 짧은 일생에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내내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교리는 사랑과 자비의 감정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심지어 공의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에도 얼마나 모순되는가. 그러나 이 교리는 널리 유포되어 있고 그것이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교의 신경 (信經) 이 되고 있다. 어떤 유명한 신학 박사는 말했다.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광경은 성도들의 행복을 영원히 증진시켜 줄 것이다. 같은 성정을 가지고 같은 환경에서 태어난 다른 사람들이 그처럼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과 그들과 전혀 구별되어 있는 자신을 볼 때 그들의 행복감은 한층 더 커질 것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진노를 받는 자들 위에 영원한 형벌이 집행되고 그 고난의 연기가 자비를 받은 자들의 눈앞에서 피어오를 때 비참한 자들의 운명을 면한 그들은 아멘 할렐루야! 주님을 찬송할지어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어느 페이지에서 이런 말을 찾을 수 있는가? 구속을 받아 하늘에 있는 자들이 자비와 동정의 감정,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 있는 정서마저도 모두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냉정해지고 야만인처럼 잔인하게 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책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이미 인용한 것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학식 있고 또한 정직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단의 궤변에 속임을 당하고 있다. 사단은 그들에게 성경의 강한 표현들을 곡해하게 하고 창조주께 속하지 않고 자기에게 속한 악의와 원한의 뜻을 성경 구절에 붙인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겔 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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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끊임없는 고통을 목격하고 기뻐하시고 그분께서 지옥의 불속에 던진 자들의 고통과 괴로움과 저주의 소리를 듣기를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고 해도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될 것인가? 그 처참한 부르짖음이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의 귀에 음악으로 들릴 수 있을까? 사람들은 악인들에게 과해지는 끝없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우주의 질서와 평화를 파괴한 악으로서의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모독인가! 마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가 그 고통을 영원히 지속시키시는 이유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 불쌍한 희생자들은 자비의 희망 없이 끊임없는 고통으로 미친 것처럼 되어 저주와 참람된 말로 분노를 쏟아 놓으므로 그들의 죄의 무게를 영원히 더하고 있다.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죄가 계속하여 증가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높여지는 것은 아니다. 

영원 지옥설로 말미암아 초래되어온 악은 사람의 마음으로 능히 헤아릴 수 없다.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고 동정이 넘치는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으로 어두워지고 공포로 가리워졌다. 사단이 하나님의 품성에 물들여 놓은 거짓된 색깔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우리의 자비로운 창조주를 두려워하고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심지어 증오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인가? 강단에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온 세계에 퍼져 있는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무서운 견해는 수천, 아니 수백만의 회의론자와 무신론자들을 만들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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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독주 

영원 지옥설은 바벨론이 모든 나라에 마시우고 있는 “진노의 포도주”라는 거짓 교리 중 하나이다 (계 14:8, 17:2 참조). 그런데 그리스도의 종들이 이런 이단설을 받아들이고 거룩한 단에서 그것을 전한다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마치 거짓 안식일을 로마교에서 받은 것처럼 그것도 로마교로부터 받았다. 위대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그것을 가르쳐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그들이 받은 빛은 우리가 받은 빛과 같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시대에 주어진 빛에 대하여만 책임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비치는 빛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버리고 우리의 선조들이 가르쳤다는 이유로 거짓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바벨론에 선고된 정죄를 받게 된다. 우리는 바벨론의 가증한 독주를 마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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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영원 지옥설을 반대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은 그것과 반대되는 오류에 빠져 있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므로 그분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영원한 지옥 불에 던지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이 근본적으로 불멸이라고 믿고 있으므로 인류는 최종적으로 모두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두려운 경고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순종하게 하고자 위협하는 것이며 글자 그대로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죄인이 비록 이기적 쾌락을 계속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할지라도 최후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교리는 하나님의 자비만 생각하고 그분의 공의를 무시하기 때문에 육신적 마음을 즐겁게 하고 악인들로 하여금 죄악을 범하기에 담대하게 해준다.  

보편 구제설을 믿는 자들이 그들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교리를 지지하기 위하여 어떻게 성경을 곡해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데는 그들 자신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갑작스런 사고로 즉사한 믿지 않는 청년의 장례식에서 보편 구제설을 믿는 한 목사는 다윗에 관하여 쓴 성경절, 곧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삼하 13:39) 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그 설교자는 말하였다. “나는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을 떠난 자, 혹 술취한 상태에서 죽은 자, 범죄로 새빨갛게 물든 그들의 두루마기를 씻지 못한 채 죽은 자, 이 청년처럼 아직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고 믿음의 경험을 갖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우리는 성경에서 만족을 얻는다. 성경이 이 두려운 문제에 관하여 답을 해주기 때문이다. 암논은 참으로 죄를 많이 지었고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술주정뱅이로 술에 취한 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는 암논이 내세에서 좋은 일을 당할 것인지 나쁜 일을 당할 것인지 길흉을 알았음에 틀림없다. 다윗은 그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였는가?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삼하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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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서 어떤 결론을 추리할 수 있는가? 영원한 고통이란 다윗의 신앙에서 찾아볼 수 없지 않는가? 우리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보편적인 순결과 평안에 관한 더욱 기쁘고 더욱 광명하고 더욱 박애적인 가설 (假說) 을 지지하는 당당한 논증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 그러면 왜 그러했던가? 그는 예언적 안목으로 영광스러운 미래를 내다보고 그 아들이 온갖 시험에서 벗어나고 속박에서 해방되어 죄악적 부패에서 순화되고 완전히 거룩하고 지혜롭게 된 후, 이미 승천하여 즐거움을 누리는 영혼들의 무리에 가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죄와 괴로움의 현 상태에서 놓여나서 성령의 거룩한 입김이 그의 어두워진 영혼에 내어 뿜겨질 곳으로 가서 그의 영혼이 하늘의 지혜와 영원한 사랑의 즐거움으로 일깨움을 받고 품성의 성화를 얻어 하늘 거민들의 안식과 교제를 같이 나누는 데 있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늘의 구원이 우리가 이생에서 행한 일에 전혀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현재의 심적 변화나 신앙이나 신앙 고백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곡해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에덴에서 뱀이 말한 거짓말, 곧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는 가장 비열한 죄인, 곧 살인자와 도둑과 간음한 자들도 죽은 후에는 영원한 복지에 들어갈 준비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처럼 성경을 곡해하는 자는 어디에서 자신의 결론을 끌어오는가? 그는 다윗이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마음을 나타낸 단 하나의 문장에서 그 결론을 취한다.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그의 슬픔의 강도 (强度) 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해져서 그의 마음은 죽은 자에게서 산 아들, 곧 죄의 형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도망간 아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구절이 근친상간 (近親相姦) 의 죄를 범한 술주정뱅이 암논이 죽은 즉시 복된 곳으로 가서 거기서 순결해지고 죄 없는 천사들과 교제할 자격을 얻게 된 증거가 된다고 한다. 그것은 육신적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참으로 적절하게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이것은 사단 자신이 만든 것으로써 그의 일을 효과적으로 해주는 교리이다. 이런 교리로 말미암아 죄악이 편만해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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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거짓 교사가 따르는 노선은 다른 많은 거짓 교사들이 따르는 노선을 예시해 준다. 성경의 몇 구절들을 그 문맥과 상관없이 끊어 내어 그 본래의 의미와 전혀 반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그처럼 조리가 서지 않는 구절들을 왜곡시켜 성경상에 아무 근거도 없는 교리를 증명하는데 사용한다. 술주정뱅이 암논이 하늘에 있다는 증거로 인용한 증언은 술취한 자가 하늘나라를 얻지 못하리라고 한 분명하고 솔직한 성경 말씀에 완전히 반대되는 하나의 추론에 불과하다. 이런 모양으로 의심하는 자, 믿지 않는 자, 회의론자들은 진리를 거짓말로 바꾼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궤변에 속아서 육적 안정이라는 요람에서 잠을 자고 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죽는 시간에 하늘로 직접 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신조에 의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게 되었다. 곤란과 번민과 실망으로 마음이 눌릴 때 자기의 가냘픈 생명의 줄을 끊어 버리고 영원한 세계의 복락을 향하여 날아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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