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62일

붉은 빛 옷을 입은 여자 

요한계시록 17장의 여자 (바벨론) 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선지자는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고 말한다. 또한 바벨론은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계 17:4~6, 18) 고 선포되어 있다. 그리스도교국의 모든 왕들에 대하여 여러 세기 동안 전제적 세력을 휘둘러온 세력은 로마이다. 그 자주빛과 붉은 빛이며, 금과 보석과 진주는 거만한 로마 법왕에 의하여 취해진 존귀와 일반 임금들보다 뛰어난 위세를 여실히 묘사해 준다. 또한 “성도들의…피에 취한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리스도교를 매우 잔혹하게 박해한 로마교 이외에는 그런 세력으로 인정받을 만한 세력이 없다. 바벨론은 또한 “땅의 임금들”로 더불어 불법적 관계를 맺는 데 대하여 비난을 받고 있다. 일찍이 유대교는 주님을 떠나 이교도로 더불어 동맹을 맺음으로 음녀가 되었는데, 로마교도 그와 마찬가지로 세속적 권력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스스로 타락함으로 그와 동일한 죄의 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바벨론은 “음녀들…의 어미”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면 그 음녀의 딸들은 그 음녀의 교리와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그 음녀의 모본을 따라 세상과의 불법적 인연을 맺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께서 인정하시는 바를 희생하는 그러한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선포하는 요한계시록 14장의 기별은 전에는 순결하였으나 그 후에 타락한 종교 단체들에 적용될 수밖에 없다. 그 기별은 심판의 경고 다음에 주어지는 기별이므로 그것은 분명히 말세에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로마교에만 적용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로마교는 이미 여러 세기 동안 무너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한계시록 18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호소를 듣고 있다. 이 성경절에 의하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 가운데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대부분이 어떠한 종교 단체에 속해 있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개신교의 신앙을 가진 여러 종류의 교회에 속하여 있다. 그 교회들이 일어나던 당시에는 그들이 하나님과 진리를 위하여 고상한 기초 위에 서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까지도 복음의 원칙을 받아들임으로 얻는 은혜로운 결과에 대하여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6:14, 15) 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을 저주와 멸망으로 인도한 그 욕망, 곧 불경건한 자들의 습관을 본받고 그들과 사귀고자 한 그 욕망 때문에 무너졌다. 그것에 대하여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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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각 교파의 부패 

많은 개신교회들은 로마교가 “땅의 임금들”과 불의의 관계를 맺은 그 본을 따르고 있는데, 국교들은 나라의 정부와 손을 마주잡고, 그밖에 다른 교파들은 세상의 총애를 받고자 애쓰고 있다. 그리하여 바벨론, 곧 혼잡이라는 말은 그런 모든 단체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교리가 성경에서 나왔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말할 수 없이 많은 수효의 교파로 나뉘고 각각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신조와 이론을 가진 그 여러 단체들에게 작용되기에 꼭 알맞다.  

소위 로마교에서 분리되어 나왔다는 교회들이 오히려 세상으로 더불어 죄악적인 결합을 계속할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로마교의 다른 특성들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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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의 한 저서는 “만일 로마교가 성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였다고 할 것 같으면, 열 개의 교회를 마리아에게 바치고 한 개의 교회를 그리스도께 바친 로마교의 딸, 영국 교회도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 (Richard Chal-loner, The Catholic Christian Instructed, Preface, pp 21, 22) 고 주장한다. 

또한 홉킨즈 박사는 천년기에 대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교만 적그리스도의 정신과 행동을 가지고 있다고 규정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개신교도들도 적그리스도적 요소를 그들 자체 안에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이 부패와 죄악에서…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Samuel Hopkins, Works, vol, 2, p.328).  

장로교가 로마교에서 분리된 데 대하여 거드리 박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300년 전에 우리 교회는 펼쳐진 성경을 군기로 삼고, ‘성경을 탐구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로마교의 문에서부터 행군하여 나왔다.” 그 다음에 그는 “그러나 그들이 바벨론에서부터 완전히 나왔는가?” (Thomas Guthrie, The Gospel in Ezekiel, p, 237) 하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였다.  

스펄전은 말하였다. “영국 교회는 철두철미하게 형식주의에 빠져들어 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비국교파도 그에 못지않게 철학적 불신앙 투성이인 것같이 보인다. 우리가 좋게 생각했던 그들이 계속하여 하나씩 하나씩 신앙의 기초에서 떠나가고 있다. 오늘날 영국의 중심부는 강단에서 설교를 함으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가증한 불신자들의 소굴이 되어있다고 나는 단정하는 바이다.”  

그러면 큰 배교의 발단은 무엇인가? 어떻게 교회가 복음의 순수성에서 떠나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다신교의 습관을 따름으로 이교도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 쉽도록 만든 데 그 원인이 있다. 사도 바울은 벌써 그의 시대에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 (살후 2:7) 다고 말하였다. 물론 사도들이 생존하여 있던 당시의 교회는 비교적 순결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세기의 말엽에 이르러 대다수의 교회들은 새로운 형식을 받아들임으로 초창기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무덤에 들어가 쉬게 되자 그 후손들이 새로 회개하는 사람들로 더불어 교회의 갈 길을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 버리게 되었다” (Robert Robinson, Ecclesiastical Researches, ch.6, par.17, p.51). 새 신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인 신앙의 높은 표준을 낮추어버린 결과로 “이교가 홍수처럼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와 그 풍속, 습관, 우상 등이 반입되었다” (Gavazzi, Lectures, p.278). 그리스도 교회가 세속적 위정자들의 호의와 지지를 획득함으로 표면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외견상으로 그리스도인처럼 보였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은 “사실상 이교도로서 은밀히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는 처지에 머물러 있었다” (Gavazzi, Lectures,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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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타협함 

개신교회라고 자칭하는 거의 모든 교회에서도 똑같은 과정이 반복되고 있지 않는가? 진정한 개혁 정신을 가졌던 개신교의 창설자들이 죽은 후에 그 후계자들이 나와서 “그 사업을 새 형태의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은 선조들의 신조들을 고집하면서도 실상은 개혁자들이 깨달은 진리에서 조금도 진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선조들이 남긴 겸손, 극기, 세상을 포기하는 일에 대한 모본에서는 멀리 떠나 있다. 그리하여 “초기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홍수가 범람하여 “그 습관, 행동, 우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세상과 교제하는 정신이 오늘날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 자칭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가! 그리스도교국의 일반 교회들이 겸손, 극기, 단순, 경건 등에 대한 성경상 표준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가 있는가! 존 웨슬리는 돈을 올바르게 사용할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나치게 값이 비싼 의복이나 쓸데없는 장신구 등으로 단순히 눈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매우 귀중한 달란트의 어떤 부분이라도 낭비하지 말라. 자기의 주택들을 치장하기 위하여 지나치게 값이 비싼 가구를 사들이거나 고가의 서화를 걸거나 도금하는 일 등에 금전의 일부를 낭비하지 말라. …사람의 자부심을 만족시키거나 사람들의 찬탄을 얻기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말 것이다. …‘그대가 자신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할 때 사람들은 좋은 사람으로 말할 것이다.’ ‘홍포와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그대의 취미가 고상하고 그대의 행위가 관대하고 친절하다고 칭찬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값비싼 칭찬을 돈으로 살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으로 만족할 것이다” (Wesley, Works, Sermon 50).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이런 종류의 교훈을 무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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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고백하는 일은 세상에서 인기를 얻는 일로 바뀌어졌다. 위정자, 정치가, 법률가, 학자, 실업가들은 사회의 존경과 신뢰를 얻고 자기의 세속적 사업의 번영을 꾀하는 한 가지 수단으로 교회에 들어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믿는다는 신앙을 고백함으로 그들의 부정한 거래들을 가려 버리고자 노력한다. 소위 세례를 받은 속인들의 부력 (富力) 과 세력의 후원을 받는 여러 종교 단체들은 인기와 후원을 더 많이 얻고자 노력한다. 가장 사치한 방법으로 꾸며진 훌륭한 교회들이 번화한 큰 길거리에 세워진다. 예배자들은 비싸고 유행에 맞는 옷을 입고 모여든다. 사람들을 잘 다루고 이끄는 재간 있는 목사에게는 높은 액수의 봉급이 지불된다. 그의 설교는 보편화된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유행을 따르는 죄인들은 교회명부에 등록되고, 유행을 따라 생기는 죄들은 믿는다는 가면 아래 감추어진다.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의 현실적인 태도에 대하여 한 유력한 잡지는 “교회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대의 정신을 따르게 되고, 그 예배 형식도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게 되었다”고 논평하고 있다. 또한 “교회는 종교를 매력 있게 만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제는 그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뉴욕의 인디펜던트지의 한 기자는 감리교회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를 나누는 경계선은 마치 그림자 속에 들어간 것처럼 애매하며 양편의 열성자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와 향락의 상태에 존재하는 온갖 차이점을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다.” “종교의 일반화는 종교적 의무는 이행하지 아니하고 그 이익만 추구하는 자들의 수효를 더욱 증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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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흥행화 

하워드 크로스비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가 교회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계획을 거의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하는바 이것은 깊이 우려해야 할 문제이다. 마치 옛적 유대인들이 우상숭배자들과 교제함으로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났던 것처럼…오늘날의 예수님의 교회는 믿지 않는 세상과 거짓된 교제를 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생활 방법을 버리고, 그리스도가 없는 사회의 그럴 듯하게 보이면서도 해로운 습관을 따르고, 하나님의 계시와는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은혜 가운데 자라나는 일과는 전혀 반대되는 논증을 사용하고 그런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The Healthy Christian : An Appeal to the Church, pp.141, 142). 

세속적인 것과 향락 추구의 풍조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극기와 자아희생은 거의 완전히 상실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남녀들 중 더러는 어린 시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사업을 하기 위해 희생하여야 할 것을 배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자금이 필요하게 되면 아무도 바치고자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자선시 (慈善市), 연극, 모의재판 (模擬裁判), 골동품 감상회 (骨董品鑑賞會), 무슨 시식회 (試食會) 등과 같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회집을 열게 된다.”  

위스콘신 주의 워시번 지사는 1873년 1월 9일 그의 연두 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노름꾼을 만드는 학교는 폐쇄해야 한다는 어떤 법률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런 일은 도처에 있다. 교회에서도 (모르는 중에 하는 일이겠지만) 때로는 마귀의 일을 하고 있다. 소위 자선 음악회, 자선흥행, 추첨하는 것들이 종교 혹은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개최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복권 (福券) 이라든지 현상 추첨 같은 것들이 쓸데없는 목적을 위하여 행하여진다. 그것들은 아무 유익도 없고 다만 돈을 벌려는 계책에 불과하다. 일하지 아니하고 돈이나 재산을 얻는 것처럼 특히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마비시키는 것은 없다.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 그런 투기적인 사업에 빠져들면서 돈을 좋은 목적에 사용한다는 구실로 그들의 양심을 스스로 달래고 있는 것을 볼 때 미국의 청년들이 너무도 흔히 도박성을 자극하는 습관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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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타협하는 정신이 온 그리스도교계를 통하여 교회들 안으로 침입하고 있다. 로버트 애트킨즈 씨는 런던에서 한 그의 설교에서 영국에 편만한 영적 쇠퇴의 어두운 면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참된 공의는 세상에서 사라졌고, 이를 마음에 간직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 각 교회의 신자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육신의 편안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지마는 비난을 받는 일에는 꽁무니를 빼고 있다…배교, 배교, 배교가 각 교회의 바로 정면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알고 느낀다면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들은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외친다” (Second Advent Library tract No.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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