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와 재림문제
볼프는 재림이 박두하였다는 사실을 믿었다. 예언적 기간에 대한 그의 해석에 의하면, 그 위대한 소원이 성취되는 날은 밀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불과 몇 년밖에 안 남았다.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라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재림의 임박성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볼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과연 그날과 그 때를 결코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가? 주님께서는 마치 무화과나무의 잎사귀가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는 (마 24:32) 것처럼 우리에게 재림의 절박함을 알려 주기 위하여 때의 징조들을 주시지 아니하셨는가?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다니엘서를 읽고 그것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그 기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인가? 그리고 다니엘서에서는 ‘마지막 때까지…이 글을 봉함하라’ (그것은 그의 시대를 가리킴) 고 하였고, 그 때에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시대를 관찰하고 생각하게 하는 히브리어의 한 표현 방법) ‘지식이 (시대에 관한) 더하리라’ (단 12:4) 고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결코 때가 가까움을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고 다만 정확한 ‘그날과 그때를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한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재림을 준비하도록 때의 징조를 알 수 있게 하시고자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Wolff, Researches and Mis-sionary Labor, pp.404, 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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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한 통속적인 해석방법과 잘못 해석하는 폐단에 대하여 볼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대부분은 성경의 분명한 의미에서 벗어나서 불교도들의 환영적 (幻影的) 인 체계로 돌아섰다. 불교도들은 인류의 미래의 행복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말을 읽으면 이방인을 이해해야 하고,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교회로 해석한다. 또 지상 (地上) 이라고 하면 공중 (空中) 으로 알고 주님의 재림이라고 하면 각 전도 사업 단체의 발전으로 알고, 여호와의 집, 산에 오른다고 하면 감리교인들의 큰 총회처럼 해석한다” (Journal of the Rev.Joseph Wolff, p.96).
볼프의 모험적 선교 활동
1821년부터 1845년까지 24년간 볼프는 넓은 범위에 걸쳐 여행하였다. 그는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아비시니아, 아시아의 팔레스틴, 시리아, 페르샤, 보카라, 인도 등의 여러 나라를 순력 (巡歷)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북미 합중국도 방문하였는데, 지나는 길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전도하였다. 그는 1837년 8월에 뉴욕 시에 도착하여 그 도시에서 설교하였다. 그 후에 다시 필라델피아 시와 볼티모어 시에서 설교하고, 마지막으로 워싱턴 시에까지 갔다. 거기서 그는 말하였다. “한 의회에서 전 대통령 존 퀸시 애덤즈 씨가 제의한 동의에 의하여 내가 국회 의사당에서 강연을 하도록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 토요일에 전체 의원과 버지니아의 감독과 성직자들과 워싱턴 시민들이 참석한 데서 강연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와 같은 영광은 뉴저지 주와 펜실베이니아 주에서도 나에게 주어졌는데, 거기서 나는 아시아에서 한 나의 연구에 대하여 이야기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 통치에 대하여 말하였다” (Journal of the Rev.Joseph Wolff, pp.398,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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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박사는 유럽의 어떤 권위의 보호도 받지 않고 많은 고난과 온갖 위험을 당하면서 대부분의 야만 나라들을 두루 다녔다. 그는 매를 맞기도 하고, 주리기도 하고, 노예로 팔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 번이나 사형 선고를 받았다. 도적들에게 포위당한 일도 있었고, 기갈로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또 한 번은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을 모두 빼앗기고, 걸어서 산을 넘어 수백 마일을 갈 수밖에 없었는데, 얼굴에 눈을 맞으면서 얼음으로 덮인 땅을 맨발로 걸었기 때문에 발이 감각을 잃게 된 일도 있었다.
야만인과 호전적인 종족들에게 무장을 하지 않고 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게 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무장하였다. 기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과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신뢰로써 무장하였다.” 그는 “나는 또한 마음에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손에는 성경을 가지고 있다” (W.H.D.Adams, In Perils Oft, p.192) 고 말하였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히브리어와 영어 성경을 가지고 갔다. 그 후에 그가 여행한 한 가지 경험에 대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경을 펴 들었는데, 책 속에 힘이 있어서 그것이 나를 붙들어 주는 것 같았다” (W.H.D.Adams, In Perils Oft, p.201).
이와 같이 그는 심판의 기별이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상의 대부분에 전파되기까지 그의 활동을 중지하지 않았다. 유대인, 터키인 배화교도 (拜火敎徒), 힌두교도, 그 밖의 여러 종족과 민족 사이에서 그는 그 지방들의 언어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오래지 아니하여 메시야의 왕국이 건설될 것을 전파하였다.
서부 아시아 지역의 편력
그는 보카라를 여행하던 중에 어떤 유벽 (幽僻) 한 지방에 사는 한 부락민이 재림의 교리를 믿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예멘에 있는 아라비아 인들은 세에라 (Seera) 라고 하는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께서 영광중에 통치하실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1840년에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기하고 있었다” (Journal of the Rev.Joseph Wolff, p.377). “나는 예멘에서 레갑의 후손들과 함께 6일간을 지냈다. 그들은 술도 마시지 않고 포도원도 재배하지 않고 곡식도 심지 않았다. 그들은 천막에 살며, 레갑의 아들 선한 여호나답을 기억한다. 나는 또한 이 족속 중에 메시야께서 속히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기를 레갑의 자손과 함께 고대하고 있는 단 족속인 이스라엘인의 후손이 있음을 보았다” (Journal of the Rev.Joseph Wolff,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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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다른 선교사는 그와 비슷한 신앙을 가진 자가 타타르 (Tatary) 지방에도 있음을 발견하였다. 타타르의 한 승려는 그 선교사에게 그리스도께서 어느 때쯤 재림하실 것이냐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그 일에 대하여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하였더니 그 승려는 성경을 가르치노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그 사건을 모른다는 것에 대하여 크게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는 예언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1844년경에 재림하시리라는 자신의 소신을 말하였다.
영국에서의 재림운동
일찍이 영국에서는 1826년에 재림기별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곳의 운동은 미국과 같이 그렇게 분명한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재림의 정확한 시일은 일반적으로 그처럼 가르쳐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미구에 임하신다는 큰 진리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 진리는 다만 비국교도 (非國敎徒) 사이에서만 전파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저술가 무란트 브로크는 약 700명의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도 이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연합하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1844년을 재림의 때라고 알려 주는 기별도 대영 제국에서 전파되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재림에 대한 간행물들이 널리 배포되었으며, 영국에서도 많은 서적과 잡지들을 재발행하였다. 그리고 1842년에는 미국에서 재림 신앙을 받아들인 로버트 윈터라는 영국인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주님의 재림을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업에 연합하였으며, 심판에 관한 기별이 영국 각처에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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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미개한 채 로마교의 정략 (政略) 에 사로잡혀 있던 남미주에도 한 스페인인이며 예수회 회원인 라쿤자라는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경고를 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사명감을 느꼈으나 로마교의 견책이 두려워서 자기의 이름을 랍비벤 에스라라고 고쳐서 마치 개종한 유대인인 것처럼 꾸며 가지고 자기의 견해를 출판하였다. 라쿤자는 18세기의 사람이었으나 그의 저서가 런던으로 가서 영어로 번역되기는 1825년경의 일이었다. 이 책의 발행은 영국에 있어서 이미 재림문제에 눈을 뜬 사람들의 관심을 깊게 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독일에서의 벵겔의 활동
독일에서는 18세기에 루터 교회의 한 목사요 성경학자요 평론가로 유명한 벵겔이라는 사람이 이 교리를 가르쳤다. 벵겔은 학업을 마치고 신학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그가 받은 초기의 교육과 훈련은 그의 마음에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엄숙한 생각과 종교적 기질을 깊게 하고 강하게 하였다. 그도 역시 고금을 막론하고 사고력 (思考力) 이 많은 다른 청년들처럼 종교적 의문과 어려운 문제들로 인하여 번민하였는데, 그는 감개무량한 가운데 “자기의 가련한 마음을 꿰뚫고 그 젊은 감정을 못 견디게 만들었던 허다한 화살들에 대하여 말하였다.” 비텐베르크의 종교 법원 (宗敎法院) 의 일원이 되자 그는 종교 자유를 부르짖었다. “그는 교회의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는 한편, 양심을 위하여 교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누릴 온갖 자유를 위하는 옹호자가 되었다” (Encyclo-pedia Britannica, 9th ed., art.“Bengel”). 그와 같은 방침에서 나온 훌륭한 결과가 오늘날에도 그의 고향에 남아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진리가 벵겔의 마음에 확신을 준 것은 그가 강림절 (降臨節) 의 일요일에 사용할 설교의 준비를 위하여 요한계시록 21장을 연구하던 때이었다. 그는 이때에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을 과거 어느 때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그 예언에 나타난 광경이 너무도 중대하고 영광스럽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한동안 그 문제에 대한 명상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게 되자 그 생각은 다시 생생하게, 또한 능력 있게 그에게 나타났다. 그때부터 그는 예언서, 특히 요한계시록의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오래지 아니하여 그 예언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라고 확정한 연대는 그 후에 밀러가 주장한 연대와 비교하면 매우 근소한 차이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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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겔의 저서는 그리스도교국에 널리 전하여졌다. 예언에 관한 그의 견해는 그의 고향인 비텐베르크에서 일반적으로 잘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독일의 다른 지방에도 전해졌다. 그리하여 그 운동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재림기별은 독일에서도 다른 나라들과 같은 시기에 전파되었다. 또한 초기의 신자들 중의 몇 사람이 러시아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이민단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그 나라의 독일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신앙을 존속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