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56일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 

그와 마찬가지로 영광의 보좌란 영광의 왕국을 나타내는 것인데, 그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마 25:31, 32) 모으리라. 그 나라는 아직 장래에 속한 나라이다. 그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비로소 건설될 것이다.  

은혜의 왕국은 사람이 타락한 이후, 범죄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계획이 세워진 직후에 건설되었다. 그 후로 그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허락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에 비로소 확립되었다. 구주께서는 당신의 지상생애를 시작하신 후일지라도 사람들의 고집스럽고 무정한 데 염증이 나서 갈바리의 희생을 철회할 수도 있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저주의 잔은 그분의 손에서 떨고 있었다. 그 때에라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땀을 씻어 버리고 타락한 인류를 그들의 죄 가운데서 멸망하도록 버려둘 수도 있었다. 그분께서 만일 그렇게 하셨더라면, 타락한 인류를 구속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버리시고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면서 운명하심으로 구속의 경륜을 완전히 성취하셨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부부에게 허락된 구속의 약속은 이제 확증되었다. 하나님의 허락으로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 은혜의 왕국이 그때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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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 곧 제자들이 저들의 희망의 최종적 파멸로 생각했던 바로 그 사건은 도리어 저희의 희망을 영원히 확증해 주었다. 그 사건은 한편으로 그들을 비참한 실망 가운데 빠뜨렸으나 그것은 또한 그들의 믿음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최고의 사건이었다. 그들에게 비탄과 실망을 가득 안겨준 그 사건은 아담의 후손에게 희망의 문을 열어주었고,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들에게 미래의 생애와 영원한 행복의 중심이 되었다.  

심지어 제자들의 실망을 통하여서까지라도 무한한 자비의 목적은 성취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람의 말한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한 사람도 없었나이다”라고 사람들이 말한 그분의 교훈의 능력을 통하여 정복되어 가면서도 예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의 순금에는 세속적 자랑과 이기적 야심으로 된 비천한 합금이 섞이게 되었다. 그들의 주님께서 겟세마네의 죽음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시려고 하는 엄숙한 순간이었던 유월절의 다락방에서까지도 저들은 “누가 크냐” (눅 22:24) 하는 다툼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침묵과 겟세마네 동산의 고민과 심판정과 갈바리의 십자가가 그들의 목전에 절박해 있을 그 때에도 그들의 눈은 보좌와 면류관과 영광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로 하여금 당시의 거짓 교훈을 고수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참 성격을 나타내 주고 당신의 고민과 죽음을 미리 가르쳐주는 구주의 말씀에 유의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은 그들의 마음의 교만과 세속적 영화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와 같은 잘못은 시련, 곧 가혹하기는 하나 요긴한 시련을 가져다주었으며, 그것은 그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허락된 것이었다. 비록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기별의 의미를 오해하고, 그들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경고를 전파하였으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상해 주시고 그들의 순종을 귀히 여기셨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구주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모든 나라에 전하는 일이 그들에게 위탁되었다. 그들에게 그처럼 고통스럽게 보였던 경험을 그들이 당하게 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 사업을 위하여 미리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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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기쁨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고 있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 (눅 24:27) 었다. 제자들의 마음은 흥분되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불타올랐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친히 나타나시기 전부터 이미 “거듭나”서 “산 소망이 있”었다. 그들의 이해력을 밝혀 주시고, 그들의 믿음을 “확실한 예언” 위에 세우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다.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말씀하신 증거에서뿐만 아니라, 표상적인 율법이 가리키는 상징들과 그림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구약의 예언들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진리가 굳게 확립되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서도 명철한 신앙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런 지식을 주시는 첫째 단계로서 제자들의 생각을 “모세와…선지자”들에게로 향하게 하셨다. 부활하신 구주께서 구약 성경의 가치와 중요성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였다.  

다시 한 번 구주의 온유하신 얼굴을 대할 때에 그 제자들의 마음에는 과연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던가! (눅 24:32 참조). 그들은 전에 없이 더욱 완전한 의미에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불안, 고통, 실망은 완전한 보증, 구름 한 점 없는 믿음으로 바뀌어졌다. 구주께서 승천하신 후에 그들이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구주의 치욕적인 죽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 제자들의 얼굴에서 슬픔과 낭패와 실망의 표정이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기쁨과 승리의 표정을 보게 되었다. 그 제자들은 그들의 앞에 있는 일을 위하여 얼마나 훌륭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가! 그들은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시련을 겪었으며,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의기양양하게 성취되었는지를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엇이 능히 그들의 믿음을 꺾어 버릴 수 있으며, 그들의 불타는 사랑을 꺼버릴 수 있겠는가? 극심한 슬픔 중에서도 그들은 “큰 안위”를 얻었고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 (히 6:18, 19) 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눈으로 보았으므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말하였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38, 39).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벧전 1:25).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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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욜 2:26),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5) 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제자들이 그들의 구주를 만나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그들을 위하여 상처를 입으신 그분의 머리와 손과 발들을 보았을 때, 승천하시기 전에 그분께서 그들을 베다니로 데리고 가서 축복의 손을 펴고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막 16:15; 마 28:20) 고 말씀하셨을 때, 오순절 날에 허락하신 보혜사가 임하사 하늘로부터 능력을 베푸시고 믿는 사람들이 승천하신 주님의 임재를 깨닫고 마음이 감동되었을 때, 그들은 비록 그들의 갈 길이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과 같이 희생과 순교의 길인 줄 알았을지라도, 그들이 제자가 되던 당시에 희망하였던 그대로 세상에 속한 영광을 버리고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위한 봉사의 대가로 그분께서 오실 때에 받을 의의 면류관을 받고자 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주님께서는 저들로 당신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고 그분의 기쁨, 곧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기쁨,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말할 수 없는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하신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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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문제와 밀러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셨을 때 “천국복음”을 전파한 제자들의 경험은 그분의 재림의 기별을 전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훌륭한 비교가 된다. 마치 제자들이 나가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전파했던 것처럼 밀러와 그의 동역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길고 최종적인 예언적 기간이 바야흐로 끝나려고 한다는 것과,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과 영원한 나라가 세워지려 한다는 것을 전파하였다. 제자들이 증거한 “때”는 그 근거를 다니엘서 9장의 70주일에 두었다. 그런데 밀러와 그의 동역자들이 전한 기별은 70주일이 그 일부분에 해당하는 다니엘서 8장 14절의 2300일의 끝에 관한 기별이었다. 그러므로 그 두 기별은 한 개의 큰 예언적 기간에 포함된 제각기 다른 부분들의 성취에 근거를 둔 기별들이었다.  

초대의 제자들처럼 윌리엄 밀러와 그의 동역자들은 그들 자신이 전하는 그 기별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교회 안에 형성된 오류들 때문에 그들은 예언 가운데 있는 중요한 점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전하라고 그들에게 맡기신 기별을 전하기는 하였지만 그 의미를 오해함으로 스스로 실망을 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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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는 다니엘서 8장 14절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고 한 말씀을 해석할 때, 당시에 일반적으로 성소를 이 세상이라고 생각하던 견해를 채택하였다. 그러므로 성소가 정결하여진다는 말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불로써 이 세상이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2300주야의 끝이 분명히 예언된 것을 볼 때에 그것은 재림의 때를 알려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와 같이 그의 잘못은 그가 성소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를 받아들인 데 기인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제사장 직분을 표상하는 구약 시대의 상징적 의식에 있어서 성소를 정결케 하는 일은 제사장이 하는 연중 봉사 중의 맨 마지막 것이었다. 그것은 속죄의 사업을 완성하는 일이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도말하고 제거해 버리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늘의 기록책에 적혀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도말하고 제거하시는 하늘의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최후의 봉사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 봉사는 조사하는 일, 곧 심판하는 일로써 그리스도께서 권세와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기 전에 있을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건이 결정된 후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2) 고 말씀하셨다. 또한 요한계시록 14장 7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라”고 한 첫째 천사의 기별은 재림 직전에 있을 이 심판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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