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55일

예언서 연구의 필요성 

예언적 기간에 관하여는 도저히 반박할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된 반대자들은 예언이 인봉된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그 문제를 연구하는 것조차 못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개신교는 로마교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었다. 법왕 교회가 사람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고 있는 한편 (부록 29 참조) 개신교는 성경의 중요한 부분, 곧 우리의 시대를 위한 특별히 중요한 부분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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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들과 일반 신도들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시대에 성취될 사건에 관하여 선지자 다니엘의 말을 지적하시면서 이를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마 24:15) 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고 하는 주장은 계시록이라는 그 책의 제호와 반대되는 주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지시하신 것이라…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 1:1~3). 

선지자는 “읽는…자들이 복이 있나니”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그 말씀을 읽지 않는 자도 있을 것을 의미함이며 그런 사람들은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듣는 자들과”라고 말씀하였는데, 예언에 관하여 일체 듣기를 거절하는 자들은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에 있는 경고와 교훈에 주의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들은 여기 허락된 축복을 받을 수 없다. 예언의 문제들을 멸시하고, 엄숙하게 주어진 그 표상들을 냉소하고, 그들의 생애를 개혁하지 아니하고 인자의 오심을 위하여 준비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도저히 축복을 받을 수 없다.  

영감의 증언에 비추어볼 때, 사람이 어찌 감히 요한계시록을 한낱 신비한 것이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계시된 신비요, 공개된 글이다. 요한계시록의 연구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니엘서의 여러 가지 예언으로 이끌리게 한다. 그러므로 이 두 책은 다 같이 세상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여러 가지 사건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교훈을 나타내준다.  

미래의 사건을 보여 주는 예언 

요한에게는 장차 교회가 경험할 심오하고 흥미로운 여러 가지 장면들이 전개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위치, 위험, 투쟁, 최후의 구원 등을 보았다. 그는 또한 하늘 창고에 들어가기 위하여 묶이든지, 멸망의 불에 태워지기 위하여 묶이든지 간에 세상의 추수를 위한 마지막 기별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들, 특히 마지막 교회에 있어서 그릇된 길에서 진리의 길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겪을 투쟁과 위험에 관한 교훈들이 그에게 보여졌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장차 세상에 일어날 일들에 관하여 무지한 가운데 묻혀 있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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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경의 중요한 부분에 관한 무지가 그처럼 편만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의 가르침을 연구하는 일을 일반적으로 그처럼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야말로 암흑의 왕이 자기의 거짓이 사람들에게 폭로되지 않도록 가리우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노력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요한계시록의 연구를 반대하기 위한 투쟁과 싸움이 있을 것을 미리 보시고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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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장 — 암흑을 뚫고 비치는 빛 

섭리의 움직임  

각 시대를 통하여 세상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업은 그것이 개혁 사업이거나 종교 운동이거나를 막론하고 뚜렷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인류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은 언제나 동일하다. 오늘날 행하여지고 있는 중요한 운동들은 과거의 운동에서 비교해 볼 수 있으므로 지난날에 있었던 교회의 경험은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에 있어서 크게 가치 있는 교훈이 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세상에 있는 당신의 종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구원의 사업을 이루시는 큰 운동을 하신다는 사실이 어떤 다른 진리보다 더욱 명백히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친히 쓰시는 그분의 손에 쥐어져 있는 도구들이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가 담당해야 할 몫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처한 시대에 필요한 빛을 주셔서 당신께서 맡기신 사업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하늘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위대한 구원의 경륜을 완전히 깨달았다거나 자기가 사는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완전히 인식했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사업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바가 무엇인지 완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기별이 가져올 결실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욥 11:7; 사 55:8, 9, 46: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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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선지자들까지라도 그들에게 주어진 계시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계시의 깊은 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러 세대를 지나가는 동안 그 가운데 있는 교훈을 받아야 할 적당한 시기에 이르러 공개될 것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복음을 통하여 밝혀 드러난 구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 (벧전 1:10~12)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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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넓은 하나님의 경륜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계시된 것들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모든 빛을 얻고자 열렬히 노력했다. 그들은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그리스도의 영이…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였다.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예언들이 그분의 종들에게 주어졌던, 신약 시대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교훈인가!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다. 그럴지라도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아니한 후세의 사람들을 위하여 주어진 그 계시들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을 보라. 그리고 그들의 거룩한 열성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으면서도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을 냉대하는 후세의 사람들의 끝없는 무관심과 대조해 보라. 그 성도들의 태도는 예언을 이해한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안일을 좋아하고 세속을 사랑하는 자들의 무관심에 대한 얼마나 힘 있는 견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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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유한한 사람의 지력 (知力) 을 가지고 무한하신 분의 계획을 이해한다든가 그분의 목적의 성취되는 과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그토록 우둔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나 게으름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종들까지도 사람들의 견해와 유전과 거짓 교훈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밝혀주신 큰 사건들을 부분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구주께서 세상에 계실 당시의 제자들까지라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메시야께서 이 세상의 임금으로 오시면 이스라엘 나라가 온 세계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일반 사람들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주심께서 받으실 고난과 죽음을 예언한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 는 기별을 주어서 제자들을 내보내셨다. 그 기별은 다니엘서 9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천사는 69주일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리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원대한 희망과 즐거운 기대를 가지고 메시야의 왕국이 예루살렘에 건설되어 온 세계를 지배할 날이 오기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기별을 전파하였지만 그들 자신이 그 기별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니엘서 9장 25절을 근거로 기별을 전하였지마는 그 다음절에 기록된 기름부음을 받는 자가 끊어지리라는 말씀은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세상에 나면서부터 그 마음이 세상 나라의 영광에 고착되어 있었으므로 예언의 자세한 내용과 그리스도의 말씀까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유대 백성들에게 자비의 초청을 함으로 그들의 의무를 이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서 다윗의 보좌에 오르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을 그 때에, 주님께서는 뜻밖에도 죄인으로 체포되어 매를 맞으시고, 조롱을 받으시고, 정죄의 선고를 받아 갈바리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그들은 목격하였다. 주님께서 무덤에서 쉬고 계시는 동안, 제자들의 믿음은 얼마나 큰 실망과 번민으로 충격을 받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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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의 고난과 제자들의 슬픔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의 글에 예언된 바로 그 시기에, 또한 그대로의 모양으로 오셨다. 성경의 증언은 그분의 봉사를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말했다. 그분께서는 구원의 기별을 전파하였으며 그분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음이러라.” 그분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기별이 하늘에서 온 기별임을 목격하였다. 그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사명을 입증하였다.  

제자들도 그들의 사랑하는 주님에 대하여 여전히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마음은 불안과 의혹에 둘려 있었다. 그들은 번민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으심에 관하여 미리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지 못하였다. 나사렛 예수님께서 참으로 메시야이셨더라면 그들이 그처럼 비애와 실망에 빠질 수 있었겠는가? 그와 같은 의문이 그 절망적인 안식일, 곧 구주께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기까지 무덤속에 누워 계시는 동안, 그들의 마음을 몹시 괴롭혔다.  

그러나 비록 슬픔의 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어둠으로 둘러쌌을지라도 그들은 버린 바 되지 아니하였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미 7:8, 9; 시 139:12, 112:4; 사 42:16).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전한 것은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것이었고 거기서 말한 사건들은 그 당시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 그들의 기별이었다. “때가” 차게 되자, 곧 다니엘서 9장의 69주일이 끝나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가 올 기약이 찼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웠다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건설되었다. 그 나라는 그분의 제자들이 믿고 가르쳤던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되고,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 (단 7:27) 할 영원한 나라, 곧 장차 세워질 불멸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을 다 같이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은혜의 왕국은 바울이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자비하신 중보자이심을 지적한 다음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5, 16) 고 말하였다. 은혜의 보좌는 곧 은혜의 나라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보좌가 있다는 것은 나라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에서 “천국”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사람의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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