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민과 이성 (理性) 의 여신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이리라.” 프랑스 혁명과 공포 시대 동안에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던 무신론의 세력은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하여 싸움을 벌였는데, 그것은 세계가 일찍이 목격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국회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리고 성경을 모아다가 될 수 있는 대로 모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공중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하나님의 율법은 유린당하고 성경에 명시된 제도들은 폐지되었다. 매주의 휴일은 경시되어 버렸고 그 대신에 10일마다 휴식하되, 그날은 연락하고 모독적인 일을 하는 데 바쳐졌다. 침례식과 성찬 예식은 금지되었고, 묘지에는 눈에 띄게, 사망은 영원한 잠이라는 표지가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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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과는 전연 다르게 그것을 어리석음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자유와 국가를 예배하는 일 이외에는 모든 예배가 금지되었다. “파리의 한 주교는 국민의 대표들 앞에서 연출한 가장 건전치 못하고 추잡한 연극의 주역 배우로 출연하였다. …그는 맨 앞에 나와서 회중을 향하여 선언하기를 자기가 오늘날까지 여러 해 동안 가르쳐 온 것은 어느 점으로 보든지 한갓 종교적 책략이었고 역사나 거룩한 진리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는 정중하고 명백한 어조로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고,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헌신하여 왔으나 장래에는 자유와 평등과 도의를 숭배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하였다. 그는 자기가 차고 있는 주교의 장식물들을 떼어서 책상 위에 놓고, 그 회를 주최한 회장과 익살스러운 포옹을 하였다. 또 몇 사람의 배교한 신부들이 그 주교의 본을 따랐다” (Scott, vol.1, ch.17).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무신론의 프랑스는 하나님의 두 증인의 책망하는 소리를 침묵시켜 버렸다. 진리의 거룩한 말씀은 시체가 되어 그 길거리에 넘어져 있었고, 하나님의 제재와 요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기뻐 날뛰었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하늘의 왕을 모독하였다. 그들은 옛날의 죄인들처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시 73:11) 고 부르짖었다.
새로운 제도에 의하여 임명된 한 승려는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독적인 언사로 말하였다. “하나님이여, 만일 당신이 참으로 존재하면 당신의 훼손된 이름을 위하여 복수해 보라. 나는 당신께 도전한다. 당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구려. 당신은 감히 격노치 못하는군. 이제 후로 누가 당신의 존재를 믿겠는가?” (Lacretelle, History, vol.11.p.309; in Sir Archivald Alison, History of Europe, vol.1, ch.10). 그것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들으리오 여호와는 나의 알 바 아니라”고 한 바로의 말이 그대로 반향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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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 14: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왜곡시키는 자들에 대하여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딤후 3:9) 고 말씀하신다. 프랑스는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 (사 57:15) 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거절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 소위 이성 (理性) 의 여신이라는 열등한 우상숭배로 전락하였는데, 방탕한 한 여자가 그 여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은 국민의 대표적 집회에서, 행정 및 입법의 최고의 권위에 의하여 결정되었던 것이다.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광란 (狂亂) 의 시대에 행한 의식 (儀式) 중의 하나는 허망한 일과 불경한 일을 혼합시킨 점에서 달리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음악대를 선두에 둔 도시의 관리들은 활짝 열린 의장 (議場) 의 문을 통하여 장중한 행렬을 지어 나와서 자유의 노래를 높이 부르면서 그들이 바야흐로 경배하려는 대상, 곧 그들이 이성의 여신이라고 부르는 면사포를 쓴 한 여자를 수행하였다. 그 행렬이 식장 안에 들어가자 이성의 여신은 면사포를 벗어 이것을 회장 (會長) 의 오른편에 두었다. 그 때에 여자는 오페라단의 한 무희로 밝혀졌다. …프랑스의 국민 의회는 그 여자를 그들이 숭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성이라고 하여 그에게 공적인 경배를 하였다.”
“이 불경건하고 어리석은 의식은 특수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이성의 여신의 제막식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혁명의 모든 세력에 공명한다는 뜻을 표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것을 재연하거나 모방해서 거행하였다” (Scott, vol.1, ch.17).
피에 취한 국민 의회
이성의 예배를 소개한 한 변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입법 의원 여러분, 광신은 이성 앞에 길을 양보했습니다. 그 흐린 눈으로는 빛의 광채를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무수한 군중이 고딕식 둥근 천장 아래 모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진리를 다시 반향 (反響) 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프랑스 국민은 유일의 참 예배, 곧 자유와 이성에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여기서 공화국의 군대의 성공을 위하여 기원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물체 곧 자연의 걸작품인 이성의 여신을 취하기 위하여 생기 없는 우상을 버렸습니다” (M.A.Thiers,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vol.2, pp.370,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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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이 식장에 들어가자마자 변사는 그의 손을 잡고 회중을 향하여 말하였다.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공포심이 만들어낸 무력한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더 이상 떨지 말라.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성 이외는 아무것도 신으로 인정치 말라. 나는 여러분에게 이성의 가장 숭고하고 순결한 상 (像) 을 여기서 보여 준다. 만일 여러분이 반드시 우상을 가져야 한다면 이와 같은 우상에게만 제사를 드려라. 자 이성의 여신의 제막식을 자유의 의회 앞에서 거행한다.”
“여신은 의회장의 포옹을 받은 후 화려한 수레에 태워져, 많은 군중들 사이를 통과하여 노트르담 성당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여 높은 제단 위에 앉아 참석한 모든 자들의 경배를 받았다” (Alison, vol.1, ch.17).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공중 앞에서 성경을 불태워 버리는 일이 있었다. 어떤 회합에서는 박물관 서민 협회의 사람들이 “이성 만세”를 부르면서 시 (市) 의 공회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막대기 끝에다가 반쯤 불타다 남은 몇 권의 책들을 꿰뚫어 메고 갔다. 그 책들 중에는 천주교의 성무일과 (聖務日課), 미사서, 신구약 성경 등이 있었는데, 의장은 그 책들에 대하여 “인류에게 온갖 어리석은 일을 행하게 하였으므로 큰 불로 보응을 받았다” (Journal of Paris, 1973, No.381.Quoted in Buchez-Roux, Collection of Parliamentary History, vol.30, pp.200, 201) 고 말하였다.
그런데 무신론자들이 완성시키고 있었던 일을 시작한 것은 법왕권이었다. 프랑스를 급속히 멸망으로 밀어넣은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모든 상태는 로마교의 정책이 이루어 놓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무서운 상태를 기술한 한 저자는 왕위와 교회가 그 극단적인 행동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부록 21 참조). 엄격히 비판하면 그것들은 모두 교회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법왕교는 종교개혁을 왕위의 적이요,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는 불화의 요소라고 말함으로써 왕들의 마음을 자극하였다. 왕위를 통하여 가장 비참하고 잔인하며 가장 견딜 수 없는 압제와 박해를 행한 것은 그와 같은 모양으로 고취된 로마의 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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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정신은 성경과 병행하였다. 복음을 받아들인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들의 마음이 각성되었다. 그들은 무지와 부도덕과 미신의 노예로 속박되어 온 질곡 (桎梏) 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유인으로 생각하고 행하기 시작하였다. 왕들은 그러한 일들을 보고 저들의 전제 정치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로마는 왕들의 질투적 공포심을 자극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1525년에 법왕은 프랑스의 섭정 (攝政) 에게 말하였다. “이 종교광 (宗敎狂-프로테스탄트를 가리킴) 들은 종교계를 혼란케 하고 파괴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통치권, 귀족 계급, 법률, 질서, 계급 등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G.de F’elice, History of the Protestants of France, b.1, ch.2, Par.8). 불과 몇 년 후에 법왕 사절은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폐하여, 속지 마십시오. 프로테스탄트들은 종교의 질서는 물론이요, 국가의 질서도 모두 전복시킬 것입니다. 왕위는 제단 (祭壇) 과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새 종교가 들어오면 새 정부가 필연적으로 들어설 것입니다” (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Europe in the Time of Calvin, b.2, ch.36). 또한 신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하여 “사람들을 유인하여 신기한 것과 어리석은 일을 하게하며, 왕으로 하여금 신하들의 충성심을 잃어버리게 하여 교회와 나라를 다 같이 파괴시키는 자들이다”고 주장함으로 백성들의 편견에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로마교는 프랑스가 종교개혁 운동을 반대하게 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프랑스에서 박해의 칼을 처음으로 든 것은 왕위를 지탱하고, 귀족을 보호하고, 법률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Wylie, b.13, ch.4).
혁명이 일어난 근본 원인
프랑스 통치자들은 이 치명적인 정책의 결과를 거의 내다보지 못하였다. 성경의 교훈은 공평, 절제, 진리, 평등, 자애의 원칙들을 백성들의 마음에 심어 줄 것이었는데, 그러한 미덕들은 국가를 번영케 하는 유일한 초석이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잠 14:34, 16:12).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32:17).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사람은 국가의 법률도 가장 성실하게 순종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온갖 권위를 행사하는 나라의 왕을 공경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는 불행히도 성경을 금지하였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파문하였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원칙과 신조에 굳센 사람들, 예민한 지력과 도덕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 자기의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진리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과 용기의 사람들, 그들은 갤리선의 노예로 고역을 당하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감옥 속에서 신음하였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은 먼 곳으로 피하여 간신히 안전한 곳으로 갔다. 이와 같은 상태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250년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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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동안에 박해자들의 광적인 분노를 피하여 간 복음의 사도들이 일반적으로 현저히 뛰어난 지능, 미술, 공업, 질서 있는 생활 등을 통하여 그들이 피난 온 그 지방을 부요하게 한 사실들을 프랑스 사람들은 보지 못한 세대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와 같이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이주하여 가는 일과 비례하여 그들의 나라에는 그런 재간 있는 사람들이 차츰 줄어 갔다. 만일 이미 가 버린 그 사람들이 모두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면, 만일 그 3백 년 동안에 추방된 그 사람들의 공업 기술로써 프랑스 국토를 발전시켰다면, 또한 그들의 예술적 소질로써 창작에 힘썼을 것 같으면, 만일 그들의 천재적인 창작력과 분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그 문학을 발달시키고 과학을 육성시켰을 것 같으면, 만약 그들의 지혜로써 의회를 지도하고 그들의 용맹으로 싸우고, 그들의 공의로 나라의 법률을 제정하고, 성경의 종교로 백성들의 지능을 계발시키고, 양심을 다스리게 하였더라면, 오늘날 얼마나 찬란한 영광이 프랑스를 두르고 있을 것인가? 프랑스는 얼마나 위대하고, 번영되고 행복된 나라가 되었을까? 그 나라는 많은 나라들의 모본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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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맹목적이요,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프랑스는 모든 덕망 있는 교사들과 질서를 잘 지키는 우수한 사람들과 왕위를 충성스럽게 옹호해 주는 사람들을 나라 밖으로 몰아냈다. 그들의 나라를 세상에서 명성 있고 영광스러운 나라로 만들어 줄 사람들에게 화형이 아니면 추방을 택하라고 강요하였다. 드디어 국가의 쇠퇴는 극도에 달하여, 추방될 만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남지 아니하였고, 화형주로 끌려갈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없어졌고, 나라 밖으로 추방할 만한 애국자들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Wylie, b.13, ch.20). 그리하여 마침내 무서운 혁명이 일어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혁명 전의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의 도피와 함께 일반적인 쇠퇴가 프랑스를 엄습하였다. 번화하던 생산 도시는 타락한 도시로 전락되고, 비옥하던 지방은 원시적인 황무지로 바뀌고, 이상한 진보를 보인 기간 후로 지적 부진과 도덕적 퇴폐가 계속되었다. 파리는 하나의 거대한 구빈원 (救貧院) 이 되었으며, 혁명이 일어나던 당시에 약 20만 명의 거지들이 왕의 손으로 구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제수이트 당원들만은 쇠퇴하여 가는 나라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교회와 학교와 감옥과 노예들이 노를 젓는 갤리선에서 무서운 독재를 행사하였다.
프랑스의 성직자들, 왕, 입법자들의 수완으로도 어쩔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온 나라가 무정부 상태와 파멸로 들어가게 만든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은 복음이 가져다 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백성들은 구주께서 가르쳐 주신 자아 희생과 무아 (無我) 의 사랑의 귀한 교훈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극기를 실행하지 않게 되었다.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여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았고,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고역과 압박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부요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이기심은 더욱 극심하고 억압적으로 나타났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나타난 귀족들의 탐욕과 방탕은 농민들을 약탈하고 착취하기에 이르렀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미워했다.
많은 지방에서 토지들은 귀족들이 차지하였고, 노동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소작을 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주의 자비에 의존되었고, 그들의 지나친 요구에도 복종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다. 교회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부담은 중류와 하류 계급에서 부담하였으므로, 그들에게는 집권자와 성직자들로부터 많은 세가 부과되었다. “귀족들은 쾌락을 제일로 생각하였고, 농부들이 굶어 죽는 것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다. …백성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주의 전적인 이익을 도모하여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농부들의 생활은 실로 끊임없는 수고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들이 불평을 말하면 그것은 오만한 모욕으로 취급되었다. 법정에서는 언제나 농민들의 호소보다는 귀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일반 사회의 제도가 부패됨으로 말미암아 귀족들의 변덕스러운 주장이 법률과 같은 힘을 갖게 되었다. 평민들은 한편으로 세속적 권력자에게, 다른 한편으로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바치게 되었는데, 그 세금의 절반도 왕실이나 교회의 금고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그 돈의 나머지 부분은 방탕한 자아 방종에 낭비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자기들의 동족들을 궁핍하게 만드는 그 사람들은 오히려 납세를 면제받고, 국가의 법률과 관례에 따라 여러 가지 중직에서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와 같은 특권계급의 사람들은 약 15만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절망적이며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록 2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