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43일

무신론 사상의 만연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1798년 조금 전에 어떤 극악한 성격의 세력이 일어나 성경을 대항하여 싸우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두 증인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그 나라에서 바로의 무신론과 소돔의 음란이 나타날 것이었다.  

이 예언은 프랑스의 역사에서 가장 정확하고 현저하게 성취되었다. 1793년 프랑스 혁명 당시에 “문명국에서 출생하여 교육을 받고, 유럽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나라를 통치하는 권리를 가진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에서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인 가장 엄숙한 진리를 이구동성으로 부인하고 만장일치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예배를 부인하는 음성을 세계는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Sir Walter Scott, Life of Napopeon, vol.1, ch.17). “우주의 창조주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반역의 손을 든 국가로서 믿을 만한 기록을 남긴 나라는 세계에서 오직 프랑스뿐이다. 영국, 독일, 스페인,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계속해서 많이 존재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의회의 결의로써 무신론을 선언했고, 수도 (首都) 의 모든 인구와 그 밖의 모든 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남녀를 막론하고 그 결의를 수락하고, 기쁨으로 노래하며 춤을 춘 유일의 국가로서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Blackwood’s Magazine, November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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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특히 소돔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던 특징을 드러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옛날의 평원 (平原) 의 도시들을 멸망시켰던 것과 똑같은 도덕적 타락과 부패가 편만했다. 그리고 역사가는 예언에 기록된 그대로 프랑스의 무신론과 음란한 상태를 기록해 놓았다. “종교에 영향을 끼친 법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결혼의 경시였다. 사람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계약이며 사회의 견고한 기초에 가장 강력한 역할을 하는 결혼 제도가 당사자 두 사람이 마음대로 결합하였다가 다시 헤어질 수 있는 일시적인 성격을 띤 단순한 민간 계약으로 전락해 버렸다. …악마들이 인류의 가정생활에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고, 영구적인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파괴해 버리고, 그들이 목적한 해독을 대대로 영속시키고 성취하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한다면, 결혼 제도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묘한 말을 잘하기로 유명한 여배우 소피 아놀드 (Sophie Arnoult) 는 프랑스의 혁명 시대의 결혼을 ‘간음의 예식 (禮式) ’으로 평하였다” (Scott, vol.1, ch.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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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는 예언은 글자 그대로 프랑스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 대한 적의 (敵意) 가 이 나라에서보다 더욱 현저히 나타난 나라는 없다. 진리를 이 나라에서보다 더욱 맹렬하고 잔혹하게 반대한 나라도 없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 프랑스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프랑스의 위그노 

성도의 피는 여러 세기에 걸쳐 흘렀다. 왈덴스교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피에몽 산에서 그들의 생명을 버렸을 때, 프랑스에서는 그들의 형제인 알비젠스 (Albigens) 들이 진리에 대하여 동일한 증거를 하였다. 종교개혁 당시에 그 교도들은 참혹한 고문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왕과 귀족들과 상류 계급의 부인들과 연약한 처녀들과 그 나라의 교만한 사람들과 무사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용감한 위그노 (Huguenot) 들은 사람의 양심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권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싸움을 계속하고, 많은 치열한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다. 개신교도들은 법률상 보호에서 제외된 자로 인정되어 그들의 머리에는 현상금이 붙게 되었고, 그들은 들짐승들처럼 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도인들 중의 소수의 후예들로서 18세기 당시까지 프랑스의 남방 산중에 숨어서 거주하고 있던 “광야 교회”는 여전히 조상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밤을 틈타서 그들이 산중턱이나 적막한 들에서 몰래 집회를 열고자 할 때, 그들은 갑작스런 용기병 (龍騎兵) 들의 추격으로 붙잡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예나 죄수들이 노를 저어 다니는 갤리선 (galleys) 에서 죽는 날까지 고역을 당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순수하고, 기품 있고, 지성적인 사람들은 강도들과 살인자들 사이에 섞여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쇠사슬에 매여 있게 되었다 (Wylie, b.22, ch.6 참조). 좀 더 자비로운 처분을 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무장도 없이 속절없는 형편에서 기도하고자 무릎을 꿇었을 때 참혹하게 사격을 당하였다. 수백 명의 나이 많은 남자들, 방비 없는 여자들, 천진한 어린이들이 그들의 집회 장소에서 살해되어 그대로 내버려졌다. 그들이 평소에 집회를 하던 산 중턱이나 산림 속을 지나갈 때 시체가 풀밭 사방에 흩어져 있거나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는 일은 별로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나라는 “검과 도끼와 나무 (화형에 쓰는 장작) 로써 황량하여졌고, 하나의 쓸쓸하고 큰 광야로 바뀌고 말았다.” “이처럼 흉악한 사건은…암흑시대에 행하여진 것이 아니라 루이 14세의 찬란한 시대에 자행되었다. 그 당시에 과학은 발달되고 문예가 부흥되고, 궁궐과 수도에 사는 성직자들은 유식하고 말 잘하는 변사들이며, 겸손과 자비의 미덕을 사랑하는 자들로 인정받고 있었다” (Wylie, b.22, ch.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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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의 참혹한 목록 가운데서 가장 암흑한 것, 곧 각 세기를 통하여 자행된 잔인무도한 일 중에서 가장 끔찍스런 만행은 성 바돌로매 제일 (祭日) 대학살이다. 세상은 오늘날도 여전히 그 잔인하고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습격의 광경을 공포와 전율로써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왕은 로마교의 승려와 주교들의 강요로 그 흉악한 행위를 묵인하였다. 그리하여 사방이 고요한 한밤중의 적막을 깨뜨리고 울려 퍼진 왕궁의 큰 종소리는 학살에 대한 신호가 되었다. 수천 명의 개신교도들은 왕의 명예를 건 약속만을 신뢰하고 각자의 집에서 평안히 자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끌려 나가 무참하게 살육을 당하였다.  

성 바돌로매 제일 (祭日) 의 대학살 

애굽의 속박에서 백성들을 구원해 내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지도자가 되셨던 것처럼 사단은 무수한 순교자를 내는 무서운 일에 있어서 그의 부하들을 지휘하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학살은 파리에서 7일간 계속되었는데, 최초의 3일간은 특히 광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그리고 그 일은 왕의 특명에 의하여 파리 시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신교도들이 거주하는 모든 도시와 촌락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 일은 연령과 성별을 구별하지 않았다. 천진한 어린아이들과 백발노인도 가리지 않았다. 귀족과 농부, 노인과 청년, 어머니와 아이, 그 모든 사람들을 함께 살육하였다. 프랑스 전국에서 학살이 2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국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7만 명이나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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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보도가 로마에 이르자 성직자들의 기쁨은 한이 없었다. 로렌의 추기경은 그 사자에게 1천 크라운을 상급으로 주었고, 성 안젤로에서는 축포를 쏘았고, 모든 교회의 첨탑에서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축화 (祝火) 는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법왕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추기경과 중요한 승려들을 데리고 큰 행렬을 지어 성 루이의 교당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 로렌의 추기경이 테 데움 (Te Deum) 을 낭송했다. …또 이 학살을 기념하는 메달이 주조되었고, 바티칸 궁전에서는 바사리 (Vasari) 의 솜씨로 석 장의 벽화, 곧 제독 (提督) 을 습격하는 장면, 학살을 음모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왕, 실제로 학살을 하고 있는 장면들이 그려졌다. 그레고리우스 법왕은 카알 황제에게 황금 장미를 보냈으며,…그 학살 4개월 후에…그는 한 프랑스 신부의 설교를 만족한 마음으로 들었다. …그 신부는 그 학살의 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날에 가장 거룩한 신부 (神父) 가 무한한 행복과 기쁨으로 보고를 받으며, 그는 위엄을 갖추고 하나님과 성 루이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나아갔다.’” (Henry White, The Massacre of St.Bartholomew, ch.14, Par.34). 

성 바돌로매 대학살을 하도록 충동한 바로 그 정신은 프랑스 혁명에도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기꾼으로 선언하고, 프랑스의 무신론자들은 소리를 높여 “염치 없는 자를 박멸하자”고 부르짖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었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대담한 모독과 가증한 악이 서로 손을 맞잡았으며, 가장 비루한 인물, 잔인하고 사악하기 더할나위 없는 자, 비인도적인 자들이 무한한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사단에게 최고의 존경이 주어졌다. 그와 반면에 진리와 순결과 이타적 사랑으로 특징지어 있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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