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42일

웨슬리의 율법과 복음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의문의 율법과 함께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웨슬리는 말하였다. “십계명이 포함되어 있고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견고하여진 도덕적 율법은 주님께서 결코 폐지하지 아니하셨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 그 율법의 어떤 부분을 삭제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이 율법은 결코 폐할 수 없는 것이며, ‘충실한 증거자로서 하늘에 굳게 설 것’이다. …그 율법은 태초부터 있었는데, 그것은 ‘석판에 새기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인류의 자녀들이 창조자의 손에서 나올 때 그들의 마음에 모두 새겨졌다. 그리고 한 때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문자로 기록되기까지 하였지마는 오늘날에는 죄로 말미암아 그것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선악에 대한 의식이 다소나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 그 율법은 완전히 폐지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율법의 모든 부분은 각 시대의 온 인류가 지켜야 할 의무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와 환경에 따라 좌우될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 그리고 그 상호간의 변경될 수 없는 관계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다.’ 그 말의 뜻은 의심할 여지없이 다음과 같다. 나는 사람의 온갖 곡해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것을 완전케 하러 왔다. 그 속에 있는 모든 애매하고 분명치 않은 점들을 완전히 천명하러 왔다. 그 모든 부분의 진정하고 완전한 의미를 선포하고,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각 조목의 범위, 곧 그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각 항목에 들어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순결과 영적 성질 등을 나타내기 위하여 왔다” (Wes-ley’s Sermon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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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는 율법과 복음의 완전한 조화를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율법은 끊임없이 복음을 위한 길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로 가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복음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여 율법을 더욱 정확히 성취시키도록 한다. 예컨대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성결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든 요구에 대하여 부족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지마는 이처럼 사랑을 주고, 겸손하고 성결케 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게 된다. 우리는 복음, 곧 기쁜 소식을 붙들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곧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또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장 큰 원수 가운데는 ‘율법을 기탄없이 공격하고’, ‘율법을 악한 것으로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깨뜨리도록 (율법에 대한 의무를 폐기하는 것) 가르치되, 율법의 가장 큰 조항이나 가장 작은 조항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온전히 깨뜨리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허망한 일 가운데도 가장 놀라운 일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율법을 전복하면서도 그것을 높이는 줄로 믿고, 그분의 교훈을 폐하여 버리면서도 그분의 사업을 확장시키고 있는 줄로 여기는 일이다. ‘주여 평안하니이까’라고 말하면서 입을 맞춘 유다와 같이 행동한 그들이 예수님을 과연 높이고 있는가.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네가 입맞춤으로써 인자를 파느냐’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의 보혈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분의 면류관을 벗기는 일과 그분의 복음 사업을 발전시키는 체 하면서 그분의 율법의 어느 부분을 삭제해 버리는 일은 입맞춤으로 그분을 배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믿음을 전하는 자로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순종하여야 할 어떤 적은 부분이라도 제해 버리려는 태도를 취하거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을 조금이라도 약하게 하거나 무효로 만드는 자는 유다에게 한 정죄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 (Wesley’s Sermon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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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면 율법의 모든 목적을 다하는 것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전연 부인한다. 복음은 소위 율법의 첫째 목적, 곧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아직도 음부의 구덩이에서 그냥 잠자고 있는 자들을 깨우는 일을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죄를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속량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진정으로 느끼지 아니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건강한 자, 혹은 스스로 건강한 줄로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의원을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대들은 먼저 그들에게 그들이 병든 사람인 것을 깨닫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그대들의 수고에 대하여 그들은 감사히 여기지 아니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가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아직 그 마음을 깨뜨리지 아니한 자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Wesley’s Sermon 35). 

웨슬리의 위대한 공적 

웨슬리는 그의 주님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한편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업을 충실히 감당하였으므로 영광스러운 결과를 보게 되었다. 그는 나이 80세가 넘은 만년에 가서, 곧 반세기 이상의 봉사의 생애를 통하여 50만명 이상의 영혼들을 신자로 얻었다. 그리고 그의 봉사를 통하여 타락과 멸망의 구덩이에서 고상하고 순결한 생애로 들어간 무리들과 그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더욱 깊고 풍부한 체험을 얻은 사람들의 수는 구속받은 가족이 하나님의 나라에 모일 그 때에 가서야 비로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의 생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교훈을 준다.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종의 신앙과 겸손, 불굴의 열성, 극기, 헌신은 오늘날의 교회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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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장 — 성경과 프랑스 혁명 

성경에 대한 로마교의 방침 

16세기에 이르러 종교 개혁자들은 열린 성경을 백성들에게 공개하며 이를 유럽 각국에 보급시키기를 희망하였다. 어떤 나라들은 그것을 하늘에서 온 사자로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어떤 나라들에서는 로마교가 성경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일에 큰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성경의 지식에 속한 빛과 그 고귀한 감화를 거의 받지 못하였다. 한 나라에는 빛이 들어왔지만 암흑으로 인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세기에 걸쳐 진리와 오류가 서로 지배권을 갖고자 다투었다. 마침내 악이 승리를 얻고, 하늘의 진리는 물러나게 되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그러므로 그 나라는 자신이 택한 행위의 결과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악을 제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멸시한 백성들로부터 떠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악은 성숙해지기까지 방임되었다. 드디어 온 세계는 고의적으로 빛을 거절한 결과가 어떠함을 보게 되었다. 

여러 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계속하여 온 성경에 대한 투쟁은 프랑스 혁명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처럼 무서운 혁명이 일어난 것은 로마교가 성경을 억압함으로 초래된 당연한 결과에 불과했다 (부록 19 참조). 그 혁명은 법왕권의 시책이 실천된 결과를 보여 주는 가장 현저한 실례이며, 일천여 년 이상 로마교의 교훈의 경향이 무엇이었음을 보여 주는 예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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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왕이 최상권을 쥐고 있는 동안에 성경이 금지될 것에 관하여 선지자들은 이미 예언하였다.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죄악의 사람”의 통치로 말미암아 특히 프랑스에서 일어날 무서운 결과를 또한 지적하고 있다. 

주님의 천사는 말하였다.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곳이니라…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계 11:2~11).  

여기에 기록된 “마흔두 달 동안” 혹은 “일천이백육십일”이란 말은 같은 기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로마교의 압박을 받을 기간을 나타낸다. 법왕권이 최상권을 쥐게 된 일천이백육십 년은 서기 538년에 시작되어 1798년 마치게 된다. 그 때에 프랑스 군대가 로마에 침입하여 법왕을 사로잡았는데, 그는 유배중에 죽었다. 얼마 후에 새 법왕이 선출되었으나 로마의 교권 (敎權) 은 전과 같은 세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예언된 로마교의 활동 기간 

교회의 박해는 일천이백육십 년의 전 기간 계속되지는 않았다.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극렬한 시련의 시기를 단축시키셨다. 구주께서는 교회에 임할 “큰 환난”에 대하여 예언하시면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리라” (마 24:22) 고 말씀하셨다. 사실상 박해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1798년이 이르기 전에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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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는 두 증인에 대하여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계 11:4) 라고 하였다. 또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구약과 신약 성경을 대표한다. 구약과 신약은 다 같이 하나님의 율법의 기원과 영속성 (永續性) 을 알려 주는 중요한 증인들이다. 그 두 성경은 또한 구원의 계획을 증거해 준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표상과 희생 제도와 예언들은 모두 장차 올 구주를 지적해 준다. 그리고 신약의 사복음서와 편지서는 표상과 예언을 통하여 미리 알려 준 그대로 조금도 틀림없이 강림하신 구주를 증언하고 있다.  

“저희가 일천이백육십일을 베옷을 입고 예언하리라.” 그 기간의 대부분에 하나님의 증인은 모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법왕권은 진리의 말씀을 백성들로부터 숨기고 그들 앞에 그 증언과 배치되는 거짓 증인을 세우고자 애를 썼다 (부록 20 참조). 성경이 종교와 세속의 권세에 의하여 추방되었을 때, 성경의 증거가 곡해되고, 사람들과 악마들이 성경으로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자 온갖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성경의 거룩한 진리를 대담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수색당하고, 배신당하고,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하거나 깊은 산속과 땅속의 동굴에 도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 충성된 증인들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일천이백육십 년의 전 기간을 통하여 증거하였다. 그들은 그처럼 가장 어두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열성을 다한 충성된 사람들이다. 충성된 그 종들에게는 그 전 기간에 하나님의 진리를 선언할 지혜와 능력과 권위가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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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수난 시대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계 11:5).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는 자들은 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두려운 선고의 의미는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밝혀져 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8, 19).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셨거나 명령하신 것은 어떠한 식으로든지 변경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시고자 사람들에게 주신 경고이다. 그 엄숙한 선언은 하나님의 율법을 경시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고 경박하게 말하는 자들은 그 선고 앞에 떨고 두려워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보다도 자기 자신의 의견을 높이는 모든 자들, 자기의 편의를 도모하거나 세속과 타협하기 위하여 성경의 분명한 의미를 변개코자 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는 자들이다. 기록된 말씀, 곧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인류의 품성을 저울질하고 그 그릇됨이 없는 시험에 의하여 부족함이 드러나는 모든 자들에게 정죄의 선고를 내리게 될 것이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 곧 두 증인이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해야 할 시기는 1798년에 마쳤다. 그 두 증인이 비밀리에 그들의 사업을 마쳐 갈 때에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으로 표상된 세력이 그들을 향하여 싸움을 하게 될 것이었다. 여러 세기 동안에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교회와 국가를 지배한 세력들은 법왕권을 매개체로 사용한 사단에 의하여 통제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단의 세력이 새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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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는 성경을 존중하노라고 공언하면서 일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그것을 가두어 버리고 숨겨버리는 일을 그들의 방침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로마교의 지배 아래 그 증인들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이제 또 하나의 다른 세력, 곧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여 공공연하게 싸우고자 일어났다.  

그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여 그 시체가 거리에 놓여 있는 그 큰 성은 “영적으로” 애굽이었다. 성경의 역사에 기록된 모든 나라 가운데서 애굽처럼 대담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고 그분의 명령을 거역한 나라는 없다. 또한 애굽의 왕처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노골적이고도 오만한 태도로 반항한 임금은 없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바로에게 기별을 보냈을 때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 5:2) 고 오만하게 말하였다. 그것은 무신론이다. 그러므로 애굽으로 표상된 나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명령을 부정하는 일에 애굽과 유사한 말을 하고, 애굽과 마찬가지의 불신과 반역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또 “그 큰 성”은 “영적으로” 소돔에 비유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데 있어서의 소돔의 부패는 특별히 음란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이 성경의 기록을 성취시킬 나라의 뚜렷한 특성은 또한 소돔과 똑같은 죄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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