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투사로 나섬
그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르짖었다. “오, 아버지! 그분의 희생은 당신의 진노를 그치게 하였고, 그분의 피는 나의 많은 허물을 씻어 버렸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나의 저주를 대신 졌고, 그분의 죽음은 나를 속량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아무 소용없는 어리석은 것들을 많이 고안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말씀을 횃불처럼 내 앞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의 마음을 감동하사, 나로 하여금 예수님의 공로 이외에는 아무것이나 다 싫어하게끔 하셨습니다” (Martyn, vol.3, ch.13).
칼빈은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교육을 받아 왔다. 그는 겨우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어떤 작은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머리는 교회의 규정에 따라 감독의 손으로 짧게 깎여 있었다. 그는 아직 안수를 받지 않았고, 신부로서의 직무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의 직분에 대한 칭호를 가지고 있었고, 그 직무에 대한 보수도 받고 있었다.
이제 그는 신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얼마 동안 법률 공부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이 목적도 버리고 자기의 생애를 복음을 위하여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공연하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일을 주저하였다. 선천적으로 수줍음이 많은 그는 그 지위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여전히 연구에 전념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친구들의 끈덕진 권유는 마침내 그의 동의를 얻었다. “이처럼 미천한 출신의 사람이 그렇게 훌륭한 직분을 받아 높임을 받게 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Wylie, b.13, ch.9) 고 그는 말하였다.
칼빈은 그의 사업을 조용히 착수하였다. 그의 말은 마치 땅을 적시는 이슬과 같았다. 그는 파리를 떠나서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의 역군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있던 마가레트 여왕의 보호 아래 있는 지방의 한 작은 도시에 이제 거하게 되었다. 칼빈은 여전히 온유하고 자긍할 줄 모르는 청년이었다. 그의 사업은 가정에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읽고, 구원의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복음의 기별을 들은 사람들은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었으므로 그는 오래지 않아 그 곳을 떠나 멀리 있는 촌락과 도시를 찾아갔다. 그는 귀족들의 큰 집과 가난한 사람의 오막살이를 가리지 않고 들어가서 용감한 진리의 증인들을 만들어 낼 교회의 기초를 놓으면서 전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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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후에 그는 다시 파리에 왔다. 파리에는 흔히 볼 수 없는 동요가 유식한 부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고대의 언어를 연구함으로 사람들은 성경을 주목하게 되었고, 성경의 진리로 마음이 아직 사로잡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열렬히 토론하고, 로마교의 지지자들을 대항하여 투쟁까지 전개하고 있었다. 칼빈은 비록 신학적 논쟁에서는 유능한 투사였지마는, 그 학자들과 소란스런 논쟁을 하는 것 이상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흥분 상태에 놓여 있었고, 이제는 그들의 마음에 진리를 보여 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대학의 강당이 신학적인 논쟁으로 시끄러울 동안, 칼빈은 집집을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 주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투쟁의 와중에 들어간 파리
하나님의 섭리로, 파리는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또 다른 초청을 받게 될 것이었다. 러페브르와 파렐의 호소는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다시 그 기별은 이 큰 도시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었다. 프란시스 왕은 정치적 영향 때문에 아직 개혁주의를 대항하여 로마의 편에 완전히 가담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누이 마가레트는 개혁주의가 프랑스에서 승리를 얻어야 한다는 희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개혁주의를 파리에 선포하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왕의 부재시에, 그는 개혁파의 한 목사에게 파리의 여러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법왕의 당국자들에 의하여 금지되어 있는 것을 알고 그는 왕궁을 공개하였다. 그는 그 일부를 개조 (改造) 하여 강당을 만들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설교를 하도록 하고, 계급과 지위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참석하도록 광고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예배에 참석했다. 강당뿐 아니라 그 근방의 방들까지도 사람들로 꽉 찼다. 매일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거기에는 귀족, 정치가, 법률가, 상인, 직공들까지도 있었다. 왕은 이와 같은 집회를 금지하는 대신에 파리 시내의 두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집회를 열도록 명령하였다. 시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일찍이 받아보지 못한 감동을 받았다. 하늘에서 온 생명의 기운이 사람들에게 들어간 것 같았다. 술 취함과 방탕함과 투쟁과 게으름이 절제와 순결과 질서와 근면으로 바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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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직자 계급에서는 가만있지 않았다. 왕은 여전히 복음 전도를 중단시키는 일에 간섭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중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무지하고 미신적인 많은 무리에게 공포와 편견과 광신을 일으키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고 사용하였다. 거짓 교사들에게 맹종한 파리는 옛날의 예루살렘과 같이 그들의 심판의 날도 알지 못하였고, 평강에 속한 일도 알지 못하였다. 2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파리에서 전파되었다. 그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백성들 중의 대다수는 거절하였다. 프란시스 왕은 단순히 자기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개혁주의를 허용하였으므로, 법왕측이 다시 권세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다시 폐쇄되고, 화형주가 세워졌다.
칼빈의 초기 활동
칼빈은 여전히 파리에서 연구와 명상과 기도로써 장래의 사업을 위한 준비를 갖추는 한편 진리를 계속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당국자들은 그를 화형에 처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안전하게 숨어 있었으므로 그의 신변이 그처럼 위험한 줄은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친구들이 그에게로 급히 달려와서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관리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바로 그 때에 대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각도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친구들 중의 몇 사람이 문에 서서 관리들을 지체시키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급히 그 개혁자를 창문으로 달아 내렸다. 그는 재빨리 시가를 빠져나갔다. 그는 개혁주의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한 노동자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집 주인의 의복을 얻어 입고, 괭이를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났다. 그는 남쪽으로 가서 마가레트 영 (領) 에서 다시금 피난처를 찾았다 (D’Aubigne, b.2, ch.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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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한 친구들의 보호 아래 거기서 몇 개월 동안 안전하게 체류하면서 그는 여전히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프랑스의 복음화에 있었으므로, 그는 오랫동안 하는 일없이 지낼 수 없었다. 박해의 폭풍이 잔잔해지자마자 그는 포티어 (Poitiers) 에서 새로운 일터를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대학도 있었고, 복음주의가 호평을 받고 있었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공적인 설교는 하지 못하였지마는 칼빈은 고관의 집에서나 그의 숙소에서나 때로는 공원에서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얼마 후에 청중이 늘어감에 따라 도시의 밖에서 모이는 것이 더욱 안전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깊고 좁은 산골짜기에 있는 동굴을 집회소로 택하였는데, 그 곳은 수목과 암석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더욱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 적은 무리들을 이루어 각각 다른 길로 시가를 벗어나 이곳으로 모였다. 그는 그 격리된 장소에서 성경을 읽고 설명하였다. 프랑스의 개신교도가 처음으로 성만찬 예식을 한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이 작은 교회에서 몇 사람의 충실한 복음 전도자들이 외부로 파견되었다.
칼빈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한 국가로서의 프랑스가 종교개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희망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의 문호가 거의 닫히게 된 것을 알았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화형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독일로 가고자 작정하였다. 그가 프랑스에서 몰래 탈출하자마자 심한 폭풍우가 그 나라의 개혁파에게 엄습하였다. 그가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는 분명히 죽음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포 시대의 엄습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독일이나 스위스와 보조를 맞추어 나가는 것을 보고자 열망한 나머지 온 국민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로마교의 미신을 공격하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미사를 공격하는 격문을 하룻밤 사이에 전국에 붙였다. 그러나 분별없이 열성만으로 행한 그 일은 개혁 사업을 전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 선동자들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의 개혁 신앙의 동지들에게까지 파멸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 일은 로마교도들이 오랫동안 소원하던 것, 곧 이단자들을 국가의 안녕 (安寧) 과 왕위의 확립을 위태롭게 하는 선동자들로 몰아 그들의 완전한 박멸을 요구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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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혹 분별력 없는 동지가 한 일인지, 교활한 원수가 한 일인지 전혀 분명치 않았으나, 한 장의 격문이 왕의 거실 (居室) 의 출입문에 붙어 있었다. 왕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한 장의 종이 가운데는 다년간 존경을 받아 오던 미신을 무참하게 공격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처럼 기탄없는 놀라운 문구가 왕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의 격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너무도 놀란 왕은 얼마 동안 말없이 떨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분노에 사로잡힌 채 무서운 말을 터뜨렸다. “루터당이라고 의심되는 자는 차별 없이 체포하라. 나는 그들을 모두 박멸할 것이다” (D’Aubigne, b.4, ch.10).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왕은 로마의 편에 완전히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파리 시에서도 루터 파를 모두 체포하는 조치가 즉시 취해졌다. 개혁파의 한 사람으로서 비밀 집회에 신자들을 모으는 일에 능숙했던 빈곤한 한 직공이 체포되었다. 그는 즉시 화형에 처한다는 위협 하에, 법왕측의 사자들을 시내에 있는 모든 개신교도들의 집으로 인도해 주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는 전율하면서 그런 비열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회피하였지만 마침내 타오르는 화염을 보고 공포를 느낀 나머지 형제들을 배반하였다. 성병 (聖餠) 을 가진 자가 선두에 서고, 많은 신부들, 향로를 든 자들, 승려들, 군인들이 그를 에워싸고 나갔는데 왕실의 비밀 탐정인 모린 (Morin) 이 그 배반자를 데리고 가만가만히 시가를 빠져나갔다. 이 행렬은 미사를 더럽힌 개혁 교도들을 위하여 죄의 용서를 받게 하는 것이라고 함이 표면상 이유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 이면에는 무서운 목적이 감추어져 있었다. 어떤 루터교도의 집 맞은편에 이르자 그 배반자는 소리 내지 않고 어떤 암호를 하였다. 그러자 행렬은 정지되고 사람들이 그 집으로 달려 들어가 가족을 끌어내어 포박하고 다시 새로운 포획물을 찾아서 그 무서운 행렬은 움직였다. 그들은 “큰 집이나 작은 집을 막론하고 어떤 집이든지 그냥 지나지 않았다. 파리 대학과 같은 교육 기관까지도 엄습하였다. 그리하여 탐정 모린은 전 시중을 전율시켰다. …그것은 공포 시대였다” (D’Aubigne, b.4, ch.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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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는 설교단이 된 화형주
그 희생자들은 잔인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였는데, 화형을 집행할 때 그들의 고통을 더욱 연장시키기 위하여 그 화력을 약하게 하라는 특별한 지시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승리자들처럼 죽었다. 그들의 지조는 변함이 없었고, 그들의 평화에는 그늘이 없었다. 박해자들은 그들의 확고부동한 태도에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자신들이 패배한 것을 느끼었다. “단두대는 파리의 모든 거리에 세워지고 화형은 날마다 계속 집행되었는데, 이렇게 사형의 집행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 이단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복음이 최후의 승리를 얻었다. 파리의 모든 시민들은 이 새로운 주의가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순교자를 화형시키기 위하여 쌓아올린 장작더미처럼 좋은 설교단은 다시없었다.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갈 때, 그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난 조용한 기쁨, 심한 불길 속에 서 있는 그들의 영웅적 태도, 모욕에 대한 그들의 온유하고 관대한 용서 등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동정으로,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어 주었고, 저항할 수 없는 웅변으로 복음을 옹호하는 방편이 되었다” (Wylie, b.13, ch.20).
신부들은 대중의 분노를 절정에 이르게 하고자 노력하였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하여 극도의 무서운 비난을 퍼부었다. 그들은 가톨릭교도를 학살하려고 음모하고,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하고, 왕의 암살을 도모하였다는 등의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들은 전혀 근거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처럼 무서운 무고는 하나의 예언으로 성취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프로테스탄트로 말미암아서가 아니고 전혀 다른 입장과 환경에 있는 자로 말미암아 전연 다른 원인에서 감행될 것이었다. 가톨릭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프로테스탄트에게 가해진 만행은 그 보응의 무게를 더하였다. 그리고 후세에 이르러 이때에 그들이 왕에게 대하여, 정부에 대하여, 신하들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 일은 무신론자들로 말미암아, 그리고 법왕교도 자신들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3백년 후에 프랑스에 그처럼 비참한 재난이 초래된 것은 개혁주의의 수립 때문에 된 것이 아니고 가톨릭측이 개혁주의를 핍박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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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의심과 불신과 공포가 사회의 모든 계층에 편만해졌다. 이러한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교양 있고, 세력 있고, 품성이 고결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루터파의 교리가 얼마나 깊이 스며들고 있었는지 나타났다. 신임과 명예를 받고 있던 자리들이 갑자기 비게 되었다. 직공, 인쇄인, 학자, 대학 교수, 저술가, 심지어 왕궁에서 시종 드는 사람들까지도 모습을 감추었다. 이리하여 허다한 사람이 파리를 버리고, 국외로 피신하여 감으로써 복음파의 신앙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있었음을 처음으로 나타내었다. 법왕교도들은 그들과 같이 지내면서 의심을 받지 않고 지내온 이단자들을 생각하고 새삼스럽게 경이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분노는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보다 비천한 다수의 복음 교도들에게 쏟아졌다. 감옥은 차고 넘쳤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징벌하는 화형의 연기로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