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34일

이채를 드러낸 베르캥 

고난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들은 비천하고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왕궁과 훌륭한 저택 가운데도 재물과 지위와 심지어는 생명까지라도 진리에 비하면 경하다고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 감독의 예복을 입고 감독의 관을 쓴 자보다도 왕의 갑옷을 입은 자들이 한층 더 고상하고 고결하고 확고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루이 드 베르캥 (Louis de Berquin) 은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용감하고 예의바른 기사였고, 학구열이 투철하고, 세련된 행동과 흠이 없는 도덕적 표준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법왕 제도의 신봉자요 미사에 참석하고 설교를 열심으로 듣는 자였으며,…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루터파를 미워하는 생각이 더욱 많았다”고 한 저자는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도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로마교의 교리가 아니라 루터의 교리인 것을 깨닫고” (Wylie, b.13, ch.9) 놀랐다. 그는 그 뒤로부터 온전히 복음 사업에 헌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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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귀족 가운데서 최대의 학자”인 그는 그의 천품 (天稟) 과 웅변적 재능, 백절불굴의 용기와 열심, 임금에게 총애를 받는 사람으로서 궁전에서의 영향력 등으로 보아서 천성적으로 프랑스 개혁자로 태어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베자 (Beza) 는 “만일 프란시스 1세가 제2의 선후 (選侯) 였었더라면 베르캥은 분명히 제2의 루터가 되었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법왕교도들은 그를 “루터보다 더욱 나쁜 사람이다” (Wylie, b.13, ch.9) 고 부르짖었다. 그는 프랑스의 로마교도들에게는 정말로 루터보다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그를 이단자로 투옥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 왕은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투쟁이 계속되었다. 로마교와 개혁파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프란시스 왕은 승려 측의 가혹한 열성을 묵인하는 듯하다가도 때로는 그것을 견제하였다. 베르캥은 법왕교의 당국자들에 의하여 세 번이나 투옥당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천재적 재질과 고결한 인격을 찬탄해 오던 왕은 그를 교권의 술책에 희생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때마다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베르캥은 프랑스에서 그를 위협하는 위험에 대해서 여러 번 경고를 받고, 또는 자진해서 망명하므로 안전하게 된 사람들의 본을 따르라는 권고를 자주 들었다. 모든 학문의 높은 경지에 이르고서도 진리를 위하여 생명과 명예를 버릴 기백이 없는 비겁한 기회주의자인 에라스무스 (Erasmus) 는 베르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어떤 외국의 대사로 파견되기를 요청하여 독일로 가도록 하십시오. 그대는 베다 (Beda) 를 알 것입니다. 그는 널리 사방으로 독소 (毒素) 를 퍼뜨리는 수천의 머리를 가진 괴물입니다. 그대의 원수는 참으로 많소이다. 그대의 사업이 그리스도의 사업보다 더욱 훌륭할지라도 그들은 그대를 잔혹한 죽음에 처하기 전에는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왕의 보호에 지나치게 의뢰하지 마십시오. 하여간 신학부의 교사들과 나에게 누가 미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Wylie, b.13, ch.9).  

그러나 위험이 증가될수록 베르캥의 열심은 더욱 더 강해졌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정책적이요, 기회주의적인 권고에 복종하기는커녕 도리어 한층 더 대담한 수단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진리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오류를 공격할 것이었다. 그는 로마교가 자기에게 씌우고자 하는 이단이라는 비난을 도리어 그들에게 돌려주고자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적극적이요, 무서운 반대자는 파리 시와 불란서 전국을 통하여 종교상 최고의 권위로 인정받고 있는 파리 대학 신학부의 박사들과 승려들이었다. 그런데 베르캥은 그 박사들의 저서 중에서 12개의 조목을 뽑아서 “성경에 위배되고 이단적인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왕에게 그 논쟁의 심판자가 되어 주기를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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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한 베르캥의 순교 

왕은 서로 반대되는 투사들 간에 힘과 지혜를 대조적으로 나타낼 기회를 회피하지 않고, 거만한 승려들의 자고심을 꺾어 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로마 교도들에게 대하여 성경으로 그들의 주장을 옹호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별반 유익이 없을 것을 알았다. 그들은 투옥, 고문, 화형과 같은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 형세가 역전되어 베르캥을 빠뜨리기 위하여 판 함정에 그들이 빠진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놀라서 다른 방면으로 피할 길을 찾고자 하였다.  

“마침 당시에 어느 길거리에 세운 성모 마리아의 상이 파손되었다.” 시중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 곳에 모여서 슬픔과 분노의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왕의 마음도 심히 흔들렸다. 승려들은 그들에게 유리한 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용하였다. 승려들은 “그것이 베르캥의 가르침의 결과이며, 그 루터당은 모든 것, 곧 종교와 법률과 왕위 자체까지 전복시키고자 하고 있다” (Wylie, b.13, ch.9) 고 부르짖었다.  

베르캥은 다시 체포되었다. 그러나 왕은 파리를 떠나 부재중이었으므로 승려들은 저희들 마음대로 그를 처치하게 되었다. 개혁자 베르캥은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프란시스 왕이 그를 구원해 낼 수 없도록 하고자 그 선고는 언도를 받은 그날로 집행되었다. 정오에 베르캥은 사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목격하기 위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악과 의혹으로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용감하고 고귀한 귀족 출신의 그 희생자를 주목하였다. 경악, 의분, 조소, 강한 증오심이 그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어둡게 하였으나 오직 한 사람의 얼굴에는 아무런 그늘도 없었다. 그 순교자의 생각은 이 소동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그는 자기의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심을 의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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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태운 보잘것없는 작은 수레, 박해자들의 험상궂은 얼굴, 곧 그가 당해야 할 무서운 죽음, 그 모든 것들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곁에 계셨다. 베르캥의 용모는 하늘의 빛과 화평으로 빛나고 있었다. 베르캥의 복장은 훌륭하였다. 그는 “우단 외투와 교직 조끼를 입고 금빛 양말” (D’Aubigne.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the Time of Calvin, b.2, ch.16) 을 신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만왕의 왕과 온 우주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의 믿음에 대하여 증거할 것이었다. 그의 얼굴의 어떤 슬픈 흔적도 그의 기쁨을 어그러지게 하지 못했다.  

행렬이, 군중으로 들끓는 거리를 천천히 지나갈 때 사람들은 그의 풍채와 태도와 티끌만큼도 흐린 점이 없는 화평과 승리의 기쁨을 보고 놀랐다. “이 사람은 성전 안에 앉아서 거룩한 사물을 조용히 명상하는 사람과 같다” (Wylie, b.13, ch.9) 고 그들은 말하였다.  

베르캥은 화형대에서 사람들을 향하여 약간의 말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두려워한 승려들의 부르짖음과 군인들이 무기를 부딪치는 소리와 떠드는 소리로 인하여 순교자의 음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1529년에 개화된 파리에서 학문과 신학의 최고 권위자들이 “사형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말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으로 1793년의 혁명 시대의 민중에게 가장 악한 모본을 남겼다” (Wylie, b.13, ch.9).  

베르캥은 교수형을 당하였고, 그의 시체는 불태워졌다. 그의 죽음의 소식은 프랑스 전국의 개혁파의 동지들을 슬프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모본은 허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들도 장차 받을 미래의 생명을 바라보면서 기쁜 마음으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D’Aubigne.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the Time of Calvin, b.2, ch.16) 고 진리의 증인들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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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의 증가와 복음의 전파 

모오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개혁파의 교사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박탈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지방을 향하여 떠나갔다. 러페브르는 얼마 후에 독일로 갔고, 파렐은 동프랑스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고향에서 빛을 전하였다. 사람들은 이미 모오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소식을 들었으므로 그가 두려움 없이 열심으로 진리를 설명할 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곧 그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일어나서 그를 읍에서 추방시켰다. 비록 그는 공공연하게 전도할 수 없었으나 촌락을 두루 다니면서 민가 (民家) 와, 격리된 목장에서 교리를 설명하고 숲 속과 소년 시절에 자주 다니던 바위로 된 동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환난을 위하여 그를 준비시켰다. 그는 말하였다. “내가 미리 경고를 받은 십자가와 박해와 사단의 음모 등은 내 힘에 만만치 않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힘으로 견디기에는 너무 심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아버지시다. 그분께서는 내가 필요한 힘을 지금까지 주셨고, 장래에도 언제나 주실 것이다” (D’Aubigne.b.12, ch.9).  

사도 시대와 마찬가지로 박해는 “도리어 복음의 진보” (빌 1:12) 를 가져왔다. 파리와 모오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 (행 8:4) 하였다. 그리하여 빛은 프랑스의 궁벽한 먼 지방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칼빈의 심적 고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여전히 일꾼들을 준비시키고 계셨다. 파리의 어느 학교에 사려 깊고 침착한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이미 강력하고 예민한 정신력을 소유한 증거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적 열성과 신앙적 헌신뿐만 아니라 고결한 생애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천재적 지능과 근면은 곧 그 대학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존 칼빈은 교회의 가장 유력하고 존경할 만한 옹호자가 될 것이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하늘의 빛이, 칼빈을 둘러싸고 있던 스콜라 철학과 미신의 장벽을 뚫고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 새로운 교리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교리를 선포하는 이단자들이 화형을 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전혀 예기치 않게 그 이단설과 접하게 되었으므로 개혁파의 교리를 대항하기 위하여서는 로마교의 신학의 능력을 시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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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에 가담한 칼빈의 사촌 한 사람이 파리에 살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때때로 만나서 당시 그리스도교국을 혼란케 하고 있는 문제들을 함께 토론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인 올리베탄 (Olivetan) 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교밖에 없다. 그 중의 한 가지 종교는 사람이 고안해 낸 것으로서, 그것은 의식 (儀式) 과 선한 행실을 통하여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종교는 성경에 밝히 계시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통하여서만이 주어지는 구원을 바라보도록 사람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나는 그대의 새 교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대는 내가 지금까지 오류 가운데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가” (Wylie, b.13, ch.7) 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칼빈의 심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자기의 의지로는 도저히 그것들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는 홀로 자기의 방에서 사촌의 말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죄의 자각이 그에게 떠나지 않았다. 그는 중보자 없이 성결하고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 성도의 중보, 선행, 교회의 의식, 그 모든 것들이 죄를 속하는 데는 무력하였다. 앞길은 암담하여 오직 영원한 절망이 있을 뿐이었다. 교회의 학자들은 그의 근심을 해결해 주고자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고해 성사와 고행도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것들은 심령을 하나님과 화목시켜 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무익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을 동안, 칼빈은 어느 날 우연히 큰 광장에 나가서 소위 이단자를 화형시키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순교자의 얼굴에 화평의 빛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무서운 죽음의 고통 속에서, 그보다 더욱 무서운 교회의 정죄의 선고를 받고서도 순교자는 믿음과 용기를 나타내었다. 그 때에 청년 칼빈은 그러한 믿음과 용기를 가진 순교자와, 가장 엄격하게 교회에 순종하는 생애를 하면서도 오히려 절망과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기 자신을 괴로운 마음으로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단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성경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여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기쁨의 비밀을 찾아내고자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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