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에 대한 루터의 태도
루터가 굳게 고수해 온 원칙들 중의 하나는 개혁 사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세속적 권력에 호소하거나 그 사업을 옹호하기 위하여 무력에 호소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내의 귀족들이 복음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 옹호 연맹과 같은 것을 조직하고자 제안하자 그는 분명히 말하였다. “복음의 교리는 하나님 한 분을 통하여서만 옹호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거룩한 사업에 적게 간섭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더욱 많이 그 사업에 관여하시는 것이다. 어떠한 정책적인 묘안을 사용할지라도 그것은 쓸데없는 공포와 죄악적 불신을 조장할 뿐이다” (D’Aubigne, b.10, ch.14).
강력한 원수들이 온 힘을 합하여 개혁파의 신앙을 뒤집어엎으려 하고, 무수한 칼이 칼집에서 뽑혀지려 할 때에 루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단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승려들은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전쟁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사람들을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금 사단의 칼날 아래 있다는 것과 사단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기도하게 할 것이다” (D’Aubigne, b.10, ch.14).
그 후에 개혁파의 선후들이 연맹을 조직하려 하였을 때에 다시 루터는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뿐이라고 밝히 말하였다. 그는 작센의 선후에게 편지하였다. “우리는 양심상으로 연맹에 대한 제안에 찬동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복음 때문에 한 방울의 피라도 흘려야 하는 일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열 번이라도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일은 사지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선후 전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기도로써, 우리의 원수들이 자랑하는 것보다 더욱 큰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의 피로써 전하의 손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만일 황제께서 우리를 그의 법정에 넘겨주도록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출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전하가 우리의 믿음을 지켜 줄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위기를 당하면 자기의 믿음은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D’Aubigne, b.14, c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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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기도의 정신
온 세계를 동요시킨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 (密室) 의 기도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종들은 은밀한 곳에서 그분의 언약의 반석 위에 튼튼히 섰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투쟁의 때에도 루터는 “적어도 하루 세 시간 기도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하였다.” 은밀한 그의 방에서 “존경 (尊敬) 과 두려움과 희망에 넘치는 말로써 마치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토로하는 음성을 사람들은 듣게 되었다. “당신은 우리 아버지시요, 우리 하나님이시므로 당신의 자녀의 핍박자들을 흩어버리실 줄을 이 종은 알고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도 우리와 함께 어려움을 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은 아버지의 사업입니다. 우리는 다만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그 사업에 일하게 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여, 우리를 보호해 주옵소서” (D’Aubigne, b.14, ch.6).
멜란히톤이 번민과 공포의 짐에 눌려 있을 때에 루터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평강,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평강이 그대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나는 그대가 당하고 있는 심한 염려를 몹시 싫어합니다. 만일 이 사업이 정당하지 못하거든 그것을 버리십시오. 만일 그 사업이 정당하다면 어찌하여 우리에게 염려 말고 자라고 명령하신 주님의 허락을 믿지 않습니까?…그리스도께서는 공의와 진리의 사업에 궁핍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살아나시고, 그분께서는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해야 합니까?” (D’Aubigne, b.14, ch.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그분께서는 귀족들과 목사들에게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대항하여 진리를 지탱할 은혜와 용기를 주셨다.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벧전 2:6) 고 말씀하셨다.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위에 견고히 섰다.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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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장 — 프랑스에서의 종교개혁
독일과 스위스에서 진행된 종교개혁
독일의 종교개혁의 승리를 나타냈던 스파이얼스의 항의와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앙 고백에 뒤이어 여러 해 동안 투쟁과 암흑이 계속되었다. 내부의 분열로 말미암아 약하여졌을 뿐 아니라 강력한 적의 끈질긴 공격에 시달린 프로테스탄트주의는 완전히 넘어질 운명에 처한 듯이 보였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피로써 그들의 증거를 인쳤다. 내란이 일어나고, 개혁 운동은 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배반을 당하였다. 개혁파측의 가장 존귀한 제후들이 황제의 손에 넘어가서 포로로서 이 성에서 저 성으로 끌려 다녔다. 그러나 승리한 듯이 보였던 그 순간에 황제는 패배를 당하였다. 그는 사로잡아 놓은 포로들이 그의 손에서 빠져 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가 일생의 욕망으로 삼고 멸절시키고자 한 그 교리를 마침내 묵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른바 이단을 박멸하기 위하여 자기의 나라, 재산, 생명까지도 걸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군인들은 전쟁으로 피로해졌고 국고는 바닥이 났고, 국내 각처는 반란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반면, 그가 진압하고자 헛되이 노력하고 있던 개혁주의는 각처에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카알 5세는 절대자의 권능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암흑을 깨뜨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하였다. 여러 해 동안의 전쟁으로 피로해진 조로 (早老) 한 황제는 퇴위하여 수도원에 묻혀 살게 되었다.
스위스에도 독일에서와 같이 종교개혁에 암흑 시대가 왔다. 많은 주 (州) 들은 개혁주의를 받아들였으나, 그렇지 아니한 주들은 맹목적으로 로마교의 신조를 고수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갈망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으로 드디어 내란이 일어났다. 츠빙글리 (Zwingli) 와 종교개혁에 그와 함께 연합했던 많은 동지들이 카펠 (Cappel) 의 혈전에서 전사하였다. 이 두려운 재난에 압도당한 에콜람파디우스 (Ecolampadius) 도 얼마 후에 죽었다. 로마는 승리자가 되었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일찍이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원 전부터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과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손을 드셨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에서 개혁 사업을 추진할 일꾼들을 일으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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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의 개혁 운동의 선구자
루터가 개혁자로서 일반에게 알려지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이미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빛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은 파리 대학의 박식한 교수 러페브르 (Lefevre) 였는데, 그는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 열성이 있고 진실한 법왕교도였다. 그는 고대 문학을 연구하는 중에 성경에 마음이 끌렸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소개하였다.
러페브르는 열심 있는 성도 숭배자였으며, 그는 성도와 순교자들의 역사를 편집해서 교회의 성도전 (聖徒傳) 을 만들고자 계획하였다. 그 일은 엄청난 노력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상당히 진척되었을 때에, 성경에서 유력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서 그는 그런 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성경에서 많은 성도들을 찾아볼 수 있었으나 물론 로마교의 성도의 목록에 기록된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늘의 빛은 홍수처럼 그의 마음에 넘쳐흘렀다. 그는 놀람과 혐오감에 사로잡혀서 종래에 하던 일을 내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는 거기서 찾은 귀중한 진리를 즉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512년, 아직도 루터나 츠빙글리가 개혁 사업에 손을 대기 전에 러페브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는 의, 곧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의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Wylie, b.13, ch.1) 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또 구원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아아, 이 얼마나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교환이냐? 무죄한 분이 죄인으로 선고를 받고, 죄인이 자유의 몸을 얻게 된다. 축복받은 분이 저주를 받고, 저주를 받은 자가 축복을 받는다. 생명의 임금이 죽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영광의 주께서 암흑 속에 잠기시고 허물과 치욕밖에 알지 못하는 자가 그 얼굴에 영광을 나타내게 된다” (D’Aubigne, Lundon ed., b.12, c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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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영광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한편 그는 또한 순종의 의무가 사람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교인이라면, 그대는 그분의 몸의 한 지체이다. 만일 그대가 그분의 몸의 지체라면 그대는 하나님의 품성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아, 사람들이 만일 이 특권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들은 얼마나 깨끗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게 살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속에 있는 영광, 곧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광에 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은 참으로 하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D’Aubigne, b.12, c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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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페브르와 프랑스어 신약 성경 출판
러페브르의 문하생들 가운데는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약간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러페브르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진리를 계속해서 전할 것이었다. 윌리암 파렐 (William Farel) 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한 부모의 아들로서 교회의 가르침을 전심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을 받아 왔다.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자기를 가리켜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 (행 26:5) 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열렬한 로마교도로서 교리를 반대하는 자는 모두 멸절시켜 버려야 한다는 열성으로 불타 있었다. 그는 후년에 당시의 자기의 생애에 대하여 “법왕을 반대하는 말을 들을 때에 나는 마치 사나운 이리처럼 이를 갈았다” (Wylie, b.13, ch.2) 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성도를 숭배하는 일에 매우 열렬하였으므로 러페브르와 함께 파리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각 교회의 제단에서 예배하고, 예물을 드려 성당들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위가 그의 마음에 화평을 줄 수 없었다. 그에게 붙어다니는 죄 의식 (意識) 은 그가 실천한 고행으로 제거해 버릴 수 없었다. 그 때 개혁자의 다음과 같은 말들은 그에게 하늘에서 오는 음성처럼 들렸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다.” “무죄한 분은 정죄를 받고, 죄인은 놓임을 받는다.” “하늘의 문을 열어 주고, 음부의 문을 닫아 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Wylie, b.13, c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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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렐은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였다. 바울의 회개처럼 회개함으로, 그는 유전의 멍에를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유에 들어갔다. 그는 “법왕에게서 온전히 마음을 돌이켜서 그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침으로 부르짖는 이리와 같이 살기등등한 마음은 사라지고 흠 없고 유순한 어린양과 같이 되었다” (D’Aubigne, b.12, ch.3) 라고 말하였다.
러페브르는 그의 제자들에게만 빛을 전하였지마는 파렐은 법왕의 사업에 열렬했던 것과 똑같은 열성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업에 열성을 다하였고, 그는 나아가 진리를 공중에게 전파하였다. 얼마 후에 교회의 한 고위 성직자인 모오 (Meaux) 의 감독이 그들과 연합하였다. 재간과 학식으로 높임을 받고 있는 교수들도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궁전에서부터 아래로는 노동자와 농부의 가정에 이르기까지 각 계급의 사람들이 복음의 옹호자가 되었다. 당시에 왕으로 통치하고 있던 프란시스 1세의 누이까지도 개혁 신앙을 받아들였다. 또한 왕 자신도 모후 (母后) 와 함께 한 때는 거기에 호의를 보였으므로 개혁자들은 큰 희망을 가지고 프랑스가 복음화 (福音化) 될 때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시련과 박해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롭게도 그들의 눈에 숨기어져 있었다. 폭풍에 대응할 만한 힘을 그들에게 육성시켜 주기 위하여 평화로운 한 때가 허락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에 개혁 사업은 신속히 발전하였다. 모오의 감독은 성직자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자기의 교구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 결과로 무지하고 부도덕한 승려들은 제거되고, 지식이 있고 경건한 사람들로 대치되었다. 그 감독은 사람들이 자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그 일이 곧 성취되었다. 러페브르는 신약 성경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비텐베르크에서 발견되던 바로 그 때에 프랑스어 신약 성경도 모오에서 출판되었다. 그 감독은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고 자기의 교구 (敎區) 안에 그 성경을 보급시켰으므로 드디어 모오의 농부들까지도 성경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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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갈증으로 죽어 가는 나그네가 생명의 샘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영혼들은 하늘의 기별을 받아들였다. 들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작업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진리를 이야기함으로 날마다 즐거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밤이면 술집에 가는 대신에 이웃끼리 한 집에 모여서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고 찬미를 불렀다. 곧 그들의 지역 사회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비록 비천한 계급에 속하는 무식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농부들이었지만 그들의 생활에는 개혁과 향상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능력이 나타났다. 그들은 겸손, 성결, 사랑의 증거자로서 복음을 충심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것이 어떠한 일을 이루어 주는지를 입증해 주었다.
모오에서 밝혀진 빛은 멀리까지 비치었다. 회개하는 사람의 수는 매일 증가되어 갔다. 승려들의 완고한 고집을 싫어한 왕 때문에 성직자단의 분노 (忿怒) 는 한 때 견제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법왕측의 지도자들이 세력을 얻었다. 이제 화형주가 세워졌다. 모오의 감독은 화형을 받든지 신앙을 취소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다. 그는 보다 안락한 길을 택하였다. 이와 같이 지도자가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확고하게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이 화형주의 불꽃 가운데서 진리를 증거하였다. 이러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화형주에서까지 충성과 용기를 잃지 않으므로 평안할 때에 그들의 증거를 결코 들어보지 못했던 무수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