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32일

개혁파 제후들의 항의서 

페르디난트 왕이 그들의 양심에서 비롯된 확신을 무시하였으므로, 제후들은 그의 퇴장을 개의치 않고 항의서를 국회에 즉시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엄숙한 선언서를 작성하여 의회에 제출하였다.  

“우리는 유일한 창조주시요 유지 (維持) 자시며 속죄주시요 구주시며 오래지 않아 우리의 심판자가 되실 하나님 앞과 온 인류와 온 피조물 앞에서 항의서를 제출하나이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또는 국민의 대표자로서 장차 반포될 칙령에 있어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우리의 정당한 양심과 우리의 영혼의 구원에 위배되는 점은 절대로 승인할 수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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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우리가 이러한 칙령을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식을 사람에게 계시하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지식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합당치 못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는 교리보다 더욱 확실한 교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금하십니다. …성경 구절은 성경 구절로써 해석하여 밝혀야 합니다. …이 거룩한 책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점에 필요하고 이해하기 쉽고 어둠을 물리치기에 적합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전혀 순수한 성경, 곧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고 여기에 위배되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지 더하지 아니할 결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유일한 진리이며 그것은 참으로 모든 교리와 행위의 확실한 표준으로서 결코 실패하거나 우리를 속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초 위에 서는 사람은 어떠한 음부의 세력과 장차 없어질 사람의 영화에 대하여서도 저항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지워진 멍에를 이제 거부하는 바입니다.” “동시에 황제 폐하께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임금처럼 우리를 대우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황제 폐하와 왕공 제위에게 모든 존경과 순종으로써 우리의 당연한 의무를 이행할 것을 언명하는 바입니다” (D’Aubigne, b.13, ch.6).  

의회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의자측의 담대함에 놀라게 되었다. 그들의 미래에는 파란과 불안이 있었다. 분열과 피 흘림과 투쟁이 불가피하게 보였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그들의 길이 정당함을 확신하였으며 전능하신 분의 거룩한 팔을 의지하면서 “늠름한 기상으로 확고부동하게” 나아갔다.  

“프로테스탄트”의 근본정신 

“이 유명한 항의서가 담고 있는 모든 원칙은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의 의미는 ‘항의자’이다 — 역자 주]. 이 항의서는 신앙의 문제에서 사람의 두 가지 악폐에 대하여 항의하였다. 그 하나는 위정자의 강요이며, 또 하나는 교권의 남용이다. 이러한 악폐 대신에 프로테스탄트주의는 정권 위에 양심의 힘을 보이는 지상의 교회 위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놓았다. 첫째로 프로테스탄트주의는 신령한 사물에 있어서 세속적 권세를 거부하고 선지자와 사도들처럼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 5:29) 고 말한다. 그것은 카알 5세의 왕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관을 높이고 있다. 그것은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온갖 교훈이 하나님의 말씀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해 준다” (D’Aubigne, b.13, ch.6). 그뿐 아니라 그 항의자들은 진리라고 확신하는 바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밝혀진 바를 믿고 순종할 뿐 아니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승려나 정권이 이를 간섭할 권한이 없다고 하였다. 스파이얼스의 항의는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는 데 대한 엄숙한 반증 (反證) 인 동시에 온 인류는 자기의 양심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을 경배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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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언은 반포되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졌고, 사람의 힘으로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하늘의 책에도 기록되었다. 독일의 모든 복음 신도들은 그 항의서를 신앙 고백으로 채택하였다. 각 곳에서 사람들은 이 선언에서 더욱 훌륭한 새 시대의 약속을 바라보았다. 제후들 가운데 한 사람은 스파이얼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들로 하여금 이처럼 대담하고, 자유롭고, 씩씩하게 믿음을 고백하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영원까지 그대들을 확고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도록 보존해 주시기를 바라노라” (D’Aubigne, b.13, ch.6).  

만일 개혁 사업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둔 후에 세속적 영광을 얻기 위하여 세상 풍조를 따르는 일에 동의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동시에 개혁 그 자체에도 어긋나는 것이 되어 마침내 자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처럼 고결한 개혁자들의 경험은 그 후 각 시대의 백성들에게 한 가지 교훈을 남겨 주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단의 공격 방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에도 16세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일을 반대하고 있다. 오늘날은 개혁자들의 교훈과 모본에서 멀리 떠나 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았던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원칙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사단은 오늘날도 여전히 신앙의 자유를 파괴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하고 있다. 스파이얼스 항의자들이 배척한 반그리스도교의 세력은 오늘날 새로운 힘으로 잃어버렸던 최상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혁 사업이 위기에 놓였을 때 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집착하는 것, 그것만이 오늘날의 개혁 사업의 유일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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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보호를 받은 “프로테스탄트”파의 용사 

프로테스탄트파에게 위험의 징조가 나타나게 되자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고 당신의 충실한 백성들을 보호하신 증거가 또한 나타났다.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멜란히톤은 아주 황급하게 그의 친구 시몬 그뤼내우스 (Simon Grynaeus) 를 데리고 스파이얼스 시가를 빠져 나와 라인 강가에 이르러 그에게 즉시 강을 건너라고 강권하였다. 그 때에 시몬은 그렇게 조급히 구는 데 대하여 놀랐다. 그러자 멜란히톤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장대하고 위엄있는 풍채를 가진 한 노인이 내게 나타나서 ‘잠시 후에 재판소의 관리가 페르디난트 왕으로부터 파견을 받아 그뤼내우스를 체포하러 올 것이다’고 일러 주었다”라고 말하였다.  

그날 그뤼내우스는 법왕당의 한 지도 계급의 학자 파베르의 설교에 분개하여 마침내 “참으로 가증한 오류”를 변호하는 자라고 항변 (抗辯) 하였다. 파베르는 자기의 분노를 감추기는 했지만 즉시 왕에게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그 끈기 있는 교수에 대한 체포 영장을 내리도록 요청하였다. 멜란히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들 중의 하나를 보내시사 자기에게 미리 경고해 주심으로 그의 친구를 구원해 주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라인 강 언덕에 조용히 서서 그는 그 강물이 그뤼내우스를 그의 핍박자들로부터 구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멜란히톤은 강 건너편 언덕에 그의 친구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서야 마침내 그는 무죄한 사람의 피에 목마른 자들의 잔인한 이빨을 면했다고 부르짖었다. 집에 돌아온 멜란히톤은 관리들이 그뤼내우스를 찾기 위하여 그의 집을 샅샅이 수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D’Aubigne, b.13, ch.6).  

개혁파에게 이른 두 번째 위기 

개혁 사업은 세상의 고관들 앞에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될 것이었다. 복음주의 제후들의 호소가 페르디난트 왕으로 말미암아 과거에는 거부되었지마는 지금은 황제를 비롯하여 국가와 교회의 고관들이 열석한 자리에서 그들의 사업을 진술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제국을 괴롭힌 분쟁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스파이얼스의 항의가 있었던 이듬해에 카알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의회를 소집하였다. 또한 그가 친히 그 의회를 주재할 것이라는 그의 의향도 발표되었다. 거기에 개혁파의 지도자들도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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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위험들이 개혁 사업을 위협하였으나 그 사업의 옹호자들은 그들의 사업을 여전히 하나님께 의탁하고 복음에 대한 저들의 태도를 굳게 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작센의 선후는 그의 고문관들로부터 의회에 나가지 말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그들은 황제가 제후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참석하기를 요구하였다고 말하였다. “강력한 원수의 소굴로 일부러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제후들로 하여금 오로지 용기를 가지고 처신하게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사업은 반드시 구조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므로 우리를 결단코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 (D’Aubigne, b.14, ch.2) 고 루터는 말하였다. 선후는 그의 수행원을 데리고 아우크스부르크로 떠났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침울한 얼굴과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코베르크까지 동행했던 루터는 그 여행에서 지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노래로 그들의 침체되어 가는 믿음에 활기를 북돋아 주었다. 영감적인 그 노랫소리에 장차 다가올 일에 대한 여러 가지 염려는 사라지고,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졌다.  

개혁파의 제후들은 그들의 견해를 성경으로 입증하여 체계적인 진술서를 의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의 작성을 루터와 멜란히톤과 그의 동료들에게 위탁하였다. 개혁파의 사람들은 이 신앙 고백서를 그들의 믿음의 해명서로 수락하였다. 그들은 모여서 그 중요한 서류에 각기 서명하였다. 참으로 그것은 엄숙하고도 신중한 순간이었다. 개혁자들은 그들의 운동이 정치 문제와 혼동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들은 종교개혁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감화 이외에는 어떠한 세력에도 동요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개혁파의 제후들이 이 신앙 고백서에 서명하려고 나오자 멜란히톤은 그 일을 저지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제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들의 권력은 다른 일을 위하여 보류하여 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작센의 요한 후는 그 말에 대답하였다. “내가 거기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는 나의 지위에 상관없이 정당한 일이라면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다. 나도 주 여호와를 믿는 마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선후로서의 나의 지위를 나타내는 모자와 의복은 나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귀중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말을 마치고, 그는 서명하였다. 또 다른 제후 한 사람은 붓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일이라면 나는 나의 재산과 생명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또 계속하여 “나는 이 고백서에 나타나 있는 교리 이외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신분을 포기하고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국토도 버리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조국에서 쫓겨나는 길을 택하겠다” (D’Aubigne, b.14, ch.6) 고 말하였다. 그 당시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믿음과 용기를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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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특기할 기념일 

마침내 황제를 뵙기로 지정된 시간이 왔다. 보좌에 앉은 카알 5세는 각 선후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프로테스탄트”에 속한 개혁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개혁자들의 신앙 고백서가 낭독되었다. 그 엄숙한 집회에서 복음의 진리는 밝혀지고 로마 교회의 오류들은 지적되었다. 이날을 “개혁 사업의 가장 큰 날, 그리스도교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날” (D’Aubigne, b.14, ch.7) 이라고 일컫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비텐베르크의 승려 (루터를 가리키는 말임-역자 주) 가 보름스의 국회 앞에 홀로 섰던 때로부터 불과 몇 년이 지났을 뿐이었다. 지금은 그를 대신하여 그 나라의 가장 귀하고 유력한 제후들이 서 있었다.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출두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말과 기도로써 거기 참석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그처럼 유명한 신앙 고백자들과 영광스러운 집회에서 그리스도께서 공공연하게 높임을 받은 이 시간까지 살아 있는 것을 넘치는 기쁨으로 생각한다” (D’Aubigne, b.14, ch.7). 그리하여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시 119:46) 것이라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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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시대에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지만 그 복음이 로마 제국의 제후들과 귀족들 앞에 제시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황제의 명령으로 강단에서는 설교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었으나 왕궁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종들조차 듣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겨 오던 것을 국가의 군주들과 고관들이 경탄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왕들과 위대한 사람들이 청중이 되고, 권위 있는 제후들이 설교자가 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설교하였다. “사도 시대 이래로 이보다 더 위대한 사업과 이보다 더 훌륭한 신앙 고백이 있었던 적은 없다” (D’Aubigne, b.14, ch.7) 고 어떤 저술가는 기록하였다. 

“루터파에서 말한 것은 모두 옳다. 우리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법왕당의 한 감독은 말하였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에크 박사에게 “선후 (選侯) 와 그의 동료들이 작성한 신앙 고백서에 대하여 건전한 논리를 가지고 반박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글을 가지고는 할 수 없으나 교부 (敎父) 들과 회의의 기록을 가지고는 할 수 있다” (D’Aubigne, b.14, ch.8) 고 대답하였다. 그 질문을 한 사람은 “그러면 당신의 견해에 의하면 루터파는 성경을 중심으로 하고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말인 줄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독일의 제후 중 몇 사람들이 개혁파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황제도 개혁파의 신조들이 진리인 것을 친히 선언하였다. 그 신앙 고백서는 각국의 말로 번역되어 전 구라파에 보급되었다. 그 후 여러 시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들의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홀로 수고하지 않았다. “정사 (政事) 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연합하여 그들을 대항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만일 그들의 눈이 열릴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옛날의 한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분의 도우심의 분명한 증거를 보았을 것이다. 엘리사의 종이 그의 주인에게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적군들과 도망할 모든 기회가 끊어진 것을 지적했을 때 그 선지자는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왕하 6:17) 라고 기도하였다. 그 때에 그 산은 불말과 불병거로 가득 차 있었고 하늘의 군사가 하나님의 사람을 둘러 진 쳐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천사들은 개혁 사업에 종사하는 역군들을 지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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