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28일

복음주의의 승리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면죄부의 판매인을 반대하여 열렬하게 설교하였다. 삼손이 읍 가까운 곳까지 왔을 때에 의회에서 한 사자를 보내어 그가 물러가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략을 써서 마침내 그 곳에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한 장의 면죄부도 팔지 못하고 퇴거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곧 스위스를 떠나갔다.  

1519년에 스위스의 전국을 휩쓴 큰 역병은 개혁 사업을 촉진 (促進) 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이러한 두려운 질병에 직면하게 되자, 그들은 얼마 전에 저들이 사 둔 면죄부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실제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확실한 신앙의 토대를 갈망하게 되었다. 취리히에서 츠빙글리는 병에 걸려 거의 회복될 가망이 없을 만큼 위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가 죽었다는 소문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츠빙글리는 희망과 용기를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믿음으로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으며, 죄의 값을 완전히 갚아 주실 것을 신뢰하였다. 사경 (死境) 에서 회복되자 그는 전에 없던 열성으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의 말에는 비상한 능력이 있었다. 존경하는 목자가 거의 죽을 뻔하였다가 회복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기쁨으로 맞이하였다. 그들은 병자들을 간호하거나 죽은 자들의 곁에 서 있기도 하였으므로, 이전보다 복음의 가치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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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츠빙글리는 복음의 진리를 한층 더 분명히 이해하고, 새롭게 하여 주시는 그 능력을 스스로 완전히 체험하였다. 그리하여 인류의 타락과 구속의 계획은 그가 몰두하여 연구하는 제목이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두 죽었고, 타락과 정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Wylie, b.8, ch.9).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원한 속량으로 우리를 사셨다. …그분의 수난은…영원한 희생이요…또한 우리를 고쳐 주시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굳게 서서 움직이지 않는 믿음으로 그분을 의뢰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영원히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를 계속적으로 범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 가르쳤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신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는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하도록 강권하고 강요하는 열심이 있다” (D’Aubigne, b.8, ch.9).  

츠빙글리의 설교는 매우 흥미로웠으므로 그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무리들로 그 큰 성당은 언제나 가득하였다. 그는 청중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조금씩 조금씩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을 놀라게 하거나 편견을 일으킬 점을 가르치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였다. 그의 일은 그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로 이끌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저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고, 그리스도의 모본을 저들 앞에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복음의 원칙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가졌던 미신적인 신앙을 자연히 내어 버리도록 해주는 일이었다.  

교활한 법왕당의 음모 

한 걸음 한 걸음 개혁 사업은 취리히에서 발전되었다. 원수들은 놀라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일 년 전에 비텐베르크의 한 승려는 보름스에서 황제와 법왕에게 “아니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제 취리히에서도 모든 일에 있어서 법왕의 주장에 반대하는 듯한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츠빙글리를 향하여 공격이 거듭되었다. 법왕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지방에서는 때때로 복음의 사도가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이단의 교사를 침묵시켜야만 했다. 마침 그 때에 콘스탄스의 감독은 세 사람의 사절을 취리히의 의회에 파견시켜 츠빙글리가 교회의 법규를 범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침으로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고소하였다. 그는 만일 교회의 권위가 무시되면, 무정부 상태가 초래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그가 과거 4년간 취리히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취리히는 그 연합국 안의 어떤 다른 도시보다 조용하고 평안하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일반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가장 잘 보존해 주지 않느냐” (Wylie, b.8, ch.11) 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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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절들은 취리히의 의원들에게 교회에 머물러 있도록 권고하고,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츠빙글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대들은 이러한 고소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를 충실히 증거한 베드로에게 이름을 주신 바로 그 반석되신 그리스도이시다. 어떠한 나라에서든지 참 마음으로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납해 주신다. 진실로 여기에 교회가 있으니, 이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D’Aubigne, London ed., b.8, ch.11). 그 회의의 결과로 감독의 사절들 중의 한 사람이 개혁파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회의는 츠빙글리에 대한 조처를 취하기를 거절하였으므로 로마는 새로운 공격을 하고자 준비하였다. 그 개혁자는 원수들의 음모를 깨닫고 부르짖었다. “쳐들어오려면 오너라. 마치 파도가 끊임없이 절벽 아래로 밀려올지라도 그 절벽은 우뚝 솟아있는 것처럼 나는 그들로 인하여 요동하지 아니할 것이다” (Wylie, b.8, ch.11). 그리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의 노력은 오히려 그들이 박멸하고자 하는 복음 사업을 도리어 발전시키는 결과를 내었다. 진리는 계속적으로 확장되었다. 독일에서 개혁 사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루터의 행방불명으로 한 때 낙담하였으나, 스위스에서 복음 사업이 발전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다시 기운을 회복하게 되었다.  

취리히에서 개혁 사업이 확립됨에 따라서 범죄 행위는 자취를 감추게 되고 질서와 조화가 촉진되므로 개혁 사업의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츠빙글리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실로 우리 도시는 평안하다. 다툼도 없고, 위선도 없고, 시기도 없고, 투쟁도 없다. 무엇이 이와 같은 연합을 가져올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화평과 경건으로 가득 채워 주는 우리 주님과 우리의 교회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Wylie, b.8, ch.15).  

개혁 사업이 점점 승리를 얻어 감에 따라 법왕당은 이를 박멸하려고 더욱 결심을 굳게 하였다. 박해가 독일에서 진행되는 루터의 운동을 진압하는 데 별반 효과가 없는 것을 보았으므로 그들은 개혁파의 무기를 가지고 개혁파를 대항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츠빙글리와 토론을 하기로 작정하고, 그 일을 주선함에 있어서도 토론할 장소뿐만 아니라 토론자들을 판정할 심판자들까지도 자기들 스스로 선택함으로 분명히 승리를 확증하고자 했다. 그들은 츠빙글리가 일단 그들의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기어이 놓치지 않겠다고 여러 가지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도자만 침묵시키면, 그 운동이 곧 탄압될 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목적은 조심스럽게 감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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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왕당의 계책으로 열린 회의 

토론은 바덴 (Baden) 에서 하도록 결정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거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취리히의 의회는 법왕당의 계획을 의심하게 되었고, 또한 믿노라고 고백한 사람들에 대하여 법왕의 교구에서 화형에 처한다는 경고를 받았으므로 그들의 목사를 이와 같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금하였다. 취리히에서는 로마에서 파견된 아무리 당파심이 강한 사람과도 만날 준비가 그에게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하여 흘린 순교자의 피가 아직도 마르지 아니한 바덴으로 가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침내 에콜람파디우스 (Ecolampadius) 와 할러 (Haller) 가 개혁파를 대표하여 출석하게 되었고, 한편으로 많은 유식한 박사들과 주교들의 지지를 받는 에크 (Eck) 박사가 로마측의 대표로 서게 되었다.  

비록 츠빙글리가 그 곳에 출석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위력은 회의석까지 미쳤다. 서기는 전부 법왕당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그 이외의 사람은 필기를 못하도록 금지되어서 이를 범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기로 되었다. 그럴지라도 츠빙글리는 매일 바덴에서 어떠한 것이 토론되었는지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받았다. 토론장에 출석한 한 학생은 매일 저녁 그날에 있었던 토론에 관한 기록을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다시 다른 두 학생으로 말미암아 에콜람파디우스의 편지와 함께 날마다 취리히에 있는 츠빙글리에게 전달되었다. 동시에 츠빙글리는 거기에 대한 회답으로 적당한 조언 (助言) 과 권고를 보내었다. 그의 글은 밤에 기록되었는데, 연락하는 학생들은 그것을 가지고 이튿날 아침 바덴으로 돌아왔다. 도시의 문을 지키는 파수꾼을 피하기 위하여 그 심부름꾼들은 가금 (家禽) 을 넣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들어갔으므로 아무런 지장이 없이 잘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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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교활한 대적과 싸울 수 있었다. 뮈코니우스 (Myconius) 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명상과 철야와 바덴으로 보낸 조언 (助言) 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직접 원수들의 진중에서 토론한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일을 하였다” (D’Aubigne, b.11, ch.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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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기적 사건이 된 대토론 

법왕당의 사람들은 예상된 승리에 들떠서 찬란한 보석과 주옥 (珠玉) 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의기양양하게 바덴으로 왔다. 그들의 식탁 위에는 극히 값진 술과 온갖 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주연과 환락으로 성직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경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개혁파들은 사람들에게 걸인의 무리와도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보였으며, 그 식사도 너무나 보잘것없었으므로 식탁에 오래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에콜람파디우스의 여관집 주인은 언제 보든지 그가 자기 방에서 연구를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기도하는 것을 발견하고, 참으로 이상하게 여겼으며, 무의식중에 그 이단자는 매우 “근엄하고 경건하다”고 말하게 되었다.  

회의장에서 “에크는 거만하게 강단으로 올라갔으나, 겸손한 에콜람파디우스는 검소한 의복을 입고 에크의 앞에 있는 변변치 않은 걸상에 앉았다.” (D’Aubigne, b.11, ch.13). 에크는 소리를 지르면서 오만 불손한 태도를 계속하였다. 에크는 로마의 신앙을 옹호하는 데 성공하면 막대한 상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열성은 그 명예욕과 금전욕에 자극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토론에 실패하게 되면, 그는 조롱과 모멸 (侮蔑) 을 퍼붓고 저주까지 하였다.  

에콜람파디우스는 신중한 태도로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논쟁을 피하였다. 그리고 그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어떠한 심판의 표준도 시인할 수 없다” (D’Aubigne, b.11, ch.13) 는 엄숙한 말로 토론에 들어갔다. 비록 에콜람파디우스는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를 가졌지만, 그는 유능하고 굴하지 않는다는 것이 스스로 입증되었다. 로마 교도들은 그들의 상투 수단으로 교회의 권위와 관련에 의하여 호소하였으나 개혁자는 성경을 굳게 고수하였다. “우리 스위스에서는 헌법에 일치되지 않는 한 관습은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는 성경이 우리의 헌법이다” (D’Aubigne, b.11, ch.13) 라고 그는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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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토론자의 대조적인 모습은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신중하고 온유한 태도로 순순히 말하는 개혁자의 분명하고 조용한 논조는 에크의 거만하고 시끄러운 억설에 혐오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었다. 

그 토론은 18 일간 계속되었다. 그 토론이 마칠 때 법왕당은 그들이 승리한 것으로 확신하고 그 사실을 주장했다. 토론자들의 대부분은 로마 편이었다. 의회는 개혁파의 패배를 선언함과 동시에 개혁파의 무리는 그들의 지도자 츠빙글리와 함께 교회에서 끊어졌다고 포고하였다. 그러나 회의의 결과는 어느 편이 유리하였는지 보여 주었다. 그 토론의 결과로 개신교의 사업이 더욱 강해져서 미구에 베른과 바젤 두 주요한 도시가 개혁 사업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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