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에 있어서의 종교적 수양
베른에 있는 도미니크회 승려들은 이 재간 많은 젊은 학생을 소유할 수만 있으면 그들에게 큰 명예와 이익이 있을 줄로 생각했다. 아직 나이가 어릴지라도, 말과 문필에 재간이 특출할 뿐 아니라 음악이나 시에 있어서도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는 그는 그들이 외관상으로 나타내는 화려한 모든 시위보다는 사람들을 그들의 예배에 이끌어 들여 그들의 수입을 증가시키는 일에 더욱 효과적인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만과 아첨으로 츠빙글리를 그들의 승원으로 이끌어 들이고자 애를 썼다. 루터는 학생 시대에 수도원의 방에 파묻혀 있었는데,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해방시켜 주지 않았다면, 그는 세상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츠빙글리에게 그와 똑같은 위험을 당하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그의 아버지는 그 탁발승들의 계획을 먼저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아들이 게으르고 무가치한 승려의 생활을 살도록 허락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아들의 전도유망한 장래가 위태로운 것을 알고, 지체 말고 집으로 돌아오도록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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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친의 명령을 순종하였으나, 나이 어린 그에게 고향의 산골은 만족을 줄 수 없었다. 오래지 아니하여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바젤 (Basel) 로 갔다. 츠빙글리는 거기에서 비로소 값없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게 되었다. 고어학 (古語學) 의 교사이던 비템바하 (Wittembach) 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던 중 성경을 깨닫게 되고, 그의 문하에서 연구에 종사하는 학생들의 심중에까지도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비추어 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학자와 철학자가 가르친 이론보다 더욱 오래되고 무한히 위대한 가치를 가진 진리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 오랜 진리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인의 유일한 구속 (救贖) 이 된다는 진리였다. 이 진리는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밝아오는 새벽의 첫 광선과 같았다.
얼마 후에 츠빙글리는 바젤에서 떠나 필생 (畢生) 의 사업을 착수하게 되었다. 맨 처음의 일터는 고향의 산골에서 과히 멀지 아니한 알프스의 교구였다. 그는 신부로 서품을 받고, “그의 온 마음을 다하여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전념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맡은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치는 데는 성경을 밝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Wylie, b.8, ch.1) 고 동료 개혁자의 한 사람은 말하였다. 성경을 탐구하면 할수록 성경은 진리라는 것과, 로마교는 이단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났다. 마침내 그는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단 하나의 완전하고 오류 없는 표준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써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자기의 선입견이 되어 있는 이론이나 교리를 지지하는 설명의 도구로 삼지 아니하고 성경 자체의 직접적이고 분명한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배울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경의 의미를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성령의 도움을 간구하였다. 그는 성령께서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참뜻을 드러내 주신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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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와 루터
츠빙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착오가 없다. 그것은 진실로 광명한 것이며, 교훈 자체이며, 계시 자체이다. 그것은 구원과 은혜로써 사람의 마음을 비추어주며,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겸손하게 하며, 마침내 온전히 자기를 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말의 참뜻을 츠빙글리 자신은 실제로 체험하였다. 그는 그 당시의 체험을 후일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가 온전히 내 자신을 성경 말씀에 바치고자 했을 때 철학과 신학 (스콜라 철학적인) 에서 오는 연상 (聯想) 이 나에게 갈등을 일으켜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너는 이러한 모든 거짓 것들을 내어버리고,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에 나타난 참뜻을 배워야 한다.’ 그 후에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분의 빛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나는 더욱 쉽게 성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Wylie, b.8, ch.6).
츠빙글리가 전한 교리는 루터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그 스위스의 개혁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루터가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면, 그는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가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사람들은 내가 인도한 사람보다 그 수효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 어떠한 이름도 증거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분의 군사이며 오직 그분만이 나의 대장이시다. 나는 단 한 구절도 루터에게 써 보낸 일이 없었고, 루터 역시 나에게 그러하였다. 그렇다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우리 두 사람이 한 번도 같이 의논한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교리를 그처럼 일률적으로 말하게 된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닌가? 이 사실 자체는 성령의 조화가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D’Aubigne, b.8, ch.9).
순복음의 천명 (闡明)
츠빙글리는 1516년에 아인지델른 (Einsideln) 수도원의 설교자로 초청을 받았다. 그는 그 곳에서 로마의 부패를 더욱 잘 볼 수 있었고, 개혁자로서의 감화를 고향 알프스 지역을 넘어 멀리까지 발휘하게 되었다. 아인지델른의 명물은 동정녀 마리아의 상 (像) 이었는데, 그것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 있었다. 수도원 입구에는 “이 곳에서 완전한 속죄를 얻을 수 있다” (D’Aubigne, b.8, ch.5) 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 마리아 상이 안치되어 있는 전각에는 언제나 순례자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연중의 대절기의 기간이 되면 스위스의 국내에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프랑스와 독일에서까지 많은 군중이 모여 왔다. 츠빙글리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매우 고통스럽게 느꼈으나,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미신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말미암은 자유를 전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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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하였다. “다른 아무 곳보다도 이 성전에 특별히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대들이 거주하는 나라가 어디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의 주위에 계시며, 그대들의 소원에 귀를 기울여 주신다. …그대들은 고행 (苦行), 먼 길의 순례, 헌물, 성상 (聖像), 동정녀 마리아와 성도들의 기도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긴 기도에 어떤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번쩍번쩍하는 두건 (頭巾), 반반하게 민 머리, 치렁치렁 끌리는 옷, 금박으로 아로새긴 덧신, 그 모든 것들이 무슨 유익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그분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의 죄를 영원히 보상하신 희생 제물이 되신다” (D’Au-bigne, b.8, ch.5).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설교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괴로운 여행이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말을 듣고 크게 실망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값없이 제공된 죄의 사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로마교가 지시해준 그대로 천국에 가는 옛길을 따라가는 일을 만족하게 여기었다. 그들은 그보다 더 좋은 길을 찾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고 싫어하였다. 마음의 정결을 구하는 것보다 법왕과 신부에게 그들의 구원을 의탁하는 것이 더욱 쉬웠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을 얻는다는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로마교의 의식들을 지킴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믿음으로 구주의 피를 그들의 죄를 사유하기 위하여 흘리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받은 귀중한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진리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퍼졌으며, 그 결과 마리아의 전당 (殿堂) 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의 수는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따라서 예물의 액수도 감소되었으며 거기서 지출되는 츠빙글리의 봉급도 감소되었다. 그러나 광신 (狂信) 과 미신의 세력이 깨어지는 것을 볼 때, 그것은 그에게 기쁨을 가져다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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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의 압박
교회의 당국자들은 츠빙글리가 하고 있는 일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은 간섭하기를 피했다. 그들은 그를 그들의 편에 머물러 두기를 원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아첨하는 말로써 그의 마음을 사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진리는 더욱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아인지델른에서의 츠빙글리의 활동은 넓은 분야의 사업을 위하여 그를 준비시켜 주었다. 오래지 않아서 그는 그 일에 착수할 것이었다. 3년 후에 그는 취리히 (Zurich) 대성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취리히는 그 당시 스위스 연방 (聯邦) 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므로 여기에서 나타내는 영향력은 멀리까지 미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를 취리히로 초대한 교직 (敎職) 들은 혁신적인 교리가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츠빙글리의 의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였다.
“그대는 가장 적은 액수의 연금이라도 이를 등한히 여기지 말고 교회의 수입으로 삼는 일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대는 강단에서나 참회소에서나 신도들에게 그들의 십일조와 그밖의 회비를 드리도록 장려함으로 연금으로써 그들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도록 하라. 그대는 병자들이 드리는 연금이나 미사와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할 때에 드리는 모든 연금으로써 수입을 증가시키는 일에 열심을 다하라. 의식을 행하는 것과 설교를 하는 것, 교인들을 돌보는 것 등은 목사의 직무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그 일을 전담한 목사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런 일들은 그에게 맡기되, 특히 설교 같은 것은 대리자에게 위탁하는 것이 좋다. 그대는 다만 지위와 명망이 있는 자들에게만 의식을 집행하되, 의뢰할 때에만 이를 행하고 아무에게나 차별 없이 해서는 안 된다” (D’Aubigne, b.8, ch.6).
츠빙글리는 잠잠히 자기의 책무에 대하여 들은 후에, 먼저 이러한 중요한 위치에 부름을 받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뜻으로 감사의 말을 하고, 다음에 그가 취할 방침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매우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감추어졌다. 그러므로 나는 마태복음을 전부 설교의 재료로 삼되…거룩한 말씀의 샘에서 온전히 이를 길어내고, 그 깊이를 측정하면서 절들을 서로 비교하여 이해하기 위하여 항상 열심으로 기도할 생각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독생자를 찬양하고, 영혼들의 참된 구원을 위하여 일하고, 저들의 참 신앙 안에 굳게 서도록 해주기 위하여 나는 성직에 헌신할 것이다” (D’Aubigne, b.8, ch.6). 비록 성직자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고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강권하였지만, 츠빙글리는 단호하게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어떤 새로운 방침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고 보다 순결하던 초창기의 교회에서 이미 실천했던 옛 방침을 따르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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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그가 가르친 진리에 대한 흥미가 생겼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왔다. 청중들 가운데는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하지 않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복음서를 펴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과 죽음에 대한 영감적인 이야기를 읽어 주고 설명해 주는 것으로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아인지델른에서 한 것과 같이 여기에서도 성경 말씀만이 그릇됨이 없는 유일한 권위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완전한 희생이라고 강조하였다. “나는 그대들을 참된 구원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로, 그리스도께로만 인도하는 일을 원한다” (D’Aubigne, b.8, ch.6) 고 그는 말하였다. 그 설교자의 주위에는 정치가들과 학자들로부터 기술자와 농부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계급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깊은 흥미를 가지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값없이 받을 수 있는 구원을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죄악과 부패에 대하여 기탄없이 견책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성당에서 돌아갔다. 그들은 “그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애굽의 암흑에서 인도해 낼 우리의 모세가 될 것이다” (D’Aubigne, b.8, ch.6) 고 말하였다.
복음주의와 교권주의
처음에는 그의 활동이 크게 환영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는 반대가 일어났다. 승려들은 그의 사업을 방해하고 그의 교훈을 정죄하기로 작정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조소와 비난으로 그를 공격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무례한 말과 협박으로 그를 대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모든 일을 인내하면서 “우리가 악한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면 여러 가지 일에 눈을 감지 않으면 안 된다” (D’Aubigne, b.8, ch.6) 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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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에 개혁 사업의 발전을 위하여 한 사람이 들어 왔다. 바젤에 있는 개혁 신앙을 가진 한 친구에 의하여 루시안 (Lucian) 의 한 사람이 루터의 저서 몇 권을 가지고 취리히로 파송되었다. 그를 보낸 친구는 그 책들을 파는 것이 복음의 빛을 전하는 데 유력한 방편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츠빙글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이 사람의 신중하고 슬기로운 마음에 대하여는 제가 보증합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견해가 저와 같다면 그로 하여금 루터의 저서를 가지고 온 스위스 나라의 도시와 읍과 촌락을 방문하되, 집집마다 빠짐없이 방문하게 하고, 책은 특별히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저술한 ‘주의 기도문의 주해’가 적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더 많이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그들은 더욱 많이 사게 될 것입니다” (D’Aubigne, b.8, ch.6).
하나님께서 무지와 미신의 속박을 깨뜨리고자 준비하고 계시는 바로 그 때에, 사단은 사람들을 암흑 가운데 묻어 두고, 그들의 속박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하여 더욱 큰 힘으로 일하였다. 사람들이 여러 같지 아니한 곳에서 일어나서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사유와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을 때 로마교는 모든 그리스도교국에서 새로운 능력으로 거래소를 열고, 면죄부를 팔기 시작하였다.
모든 죄는 그 값이 정해져 있었으며, 교회의 금고만 채워진다면 사람들은 자유롭게 범죄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두 가지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나는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하여 준다는 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해 준다는 운동이었다. 로마교는 죄를 인허해 줌으로 자기들의 재원 (財源) 이 늘어났고, 개혁자들은 죄를 견책함으로 그리스도를 속죄주와 구주로 지적하였다.
독일에서는 면죄부의 판매가 도미니크회 승려들에게 위탁되어 테첼 (Tetzel) 이라는 평판 나쁜 사람으로 말미암아 행해졌다. 그러나 스위스에서는 그 일을 이탈리아의 승려 삼손 (Samson) 이라는 자의 지휘 아래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주관하였다. 삼손은 독일과 스위스에서 막대한 금품을 모집하여 법왕의 금고를 채워 줌으로써 교회를 위하여 이미 큰 공적을 나타낸 사람이었다. 그는 스위스를 순회하면서 많은 군중을 모았는데, 빈궁한 농민들로부터는 애써 벌어놓은 적은 돈을 빼앗았고, 부요한 계급의 사람들로부터는 거액의 금전을 착취하였다. 비록 종교 개혁의 영향이 이러한 부당한 매매를 정지시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벌써 그 수입을 적지 않게 감소시켰다. 츠빙글리가 아직 아인지델른에 있을 때에 삼손은 스위스로 들어왔으며, 그는 곧 면죄부를 가지고 이웃 고을까지 접근해 왔다. 그 소문을 듣고, 개혁자는 그 일을 반대하기 위하여 곧 떠났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만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승려의 거짓을 폭로하여 그로 하여금 다른 지방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 츠빙글리는 성공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