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21일

루터의 후원자 프리드리히 후 (侯)  

루터가 통행권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법왕당들은 그를 체포하여 투옥시킬 음모를 꾸몄다. 루터의 친구들은 그가 더 이상 체류하는 것이 무익한 일임을 알고 그에게 즉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과 그 계획에 대하여 비밀을 철저히 지키므로 남에게 눈치 채이지 않게 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지방 장관이 보내준 한 사람의 안내자를 따라 새벽에 말을 타고 아우크스부르크를 떠났다. 앞길에 가로놓인 여러 가지 어려움을 예상하면서, 고요하고 어두운 시가지를 몰래 빠져나왔다. 잔인한 원수들은 방심하지 않고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를 잡으려고 펴 놓은 함정을 그가 피해나갈 수 있을까? 진실로 이 때야말로 매우 염려되는 때요, 열렬한 기도가 필요한 때이었다. 그 도시의 성벽 (城壁) 에 있는 작은 문에 당도하였다. 문은 그에게 열리어지고, 그는 아무런 장애 없이 안내자와 함께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일단 문밖으로 무사히 빠져 나오자 그들은 길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법왕의 사절이 그의 탈출을 알기 전에 박해자의 손이 미치지 못할 곳까지 가버렸다. 사단과 그의 부하들은 패배하였다. 그들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줄로 생각했던 그 사람은 마치 한 마리의 새가 새 사냥꾼의 그물을 벗어나듯이 그들의 수중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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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도망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법왕의 사절은 매우 놀라고 분개하였다. 그는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를 처단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지혜와 단호한 결단력을 나타내므로 큰 명예를 얻을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데, 이제 그 희망이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작센 (Saxony) 의 선후 (選侯) 프리드리히 (Frederick) 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타냈다. 그는 그 편지에서 루터를 신랄히 비난하고 프리드리히로 하여금 그를 로마로 보내든가 작센에서 추방하든가 해주기를 요구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면서 법왕이나 법왕의 사절에게 성경상으로 자기의 오류 (誤謬) 를 지적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준다면 단연히 자기의 주장을 취소하겠노라고 가장 엄숙한 태도로 맹세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이처럼 거룩한 사업을 위하여 고난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헤아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 당시 선후 (選侯) 는 아직 개혁설에 대하여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루터의 공정하고, 분명하고, 힘 있는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개혁자의 오류가 입증되지 않는 한, 프리드리히는 그의 옹호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법왕의 사절에게 보내는 회답에서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귀하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마틴 박사와 회견하였으므로 만족하였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귀하가 그의 오류를 확신시켜 주지 않고 신앙을 취소하게 하고자 노력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마틴 박사의 교리가 불경하고, 비그리스도인적이며, 이단적이라고 말해 주는 이 나라의 학자들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선후는 루터를 로마로 보내거나 자기 나라에서 추방하기를 거절하였다” (D’Aubigne, b.4, ch.10).  

선후 (選侯) 는 사회의 도덕적 억제력이 전체적으로 무너져 있는 것을 알았다. 위대한 개혁 사업이 필요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와 계발된 양심의 명령을 인정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범죄를 억제하고 처벌하기 위하여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그는 루터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있음을 알고, 그 사업이 교회 안에 좋은 감화를 끼치고 있는 것을 은근히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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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적인 협박과 누명 

그는 또 루터가 대학 교수로서 놀랄 만한 공적을 남긴 사실을 알았다. 개혁자가 교회의 문에 그의 논제를 제시한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아니하였지만 제성제 (諸聖祭) 축제 때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는 현저히 감소되었다. 로마의 예배자들과 연금 액수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리는 비텐베르크를 찾아온 다른 계급의 사람들로 채워졌는데, 그들은 유물 예배 (遺物禮拜) 를 위하여 온 순례자들이 아니고, 대학의 교실을 채우는 학생들이었다. 루터의 저서는 각처에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일으켜 주었으므로 독일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까지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왔다. 비텐베르크를 처음으로 바라보는 청년들은 “손을 들고 마치 옛날에 시온에서 했던 것처럼 이 성에서 진리의 빛이 비치게 하시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까지 그 빛을 전하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D’Aubigne, b.4, ch.10). 

루터는 아직도 로마의 오류에서 부분적으로 돌아선 데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성경을 법왕의 교서와 법전 (法典) 에 비교해 볼 때 그의 마음은 놀라움으로 충만해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법왕의 교서를 읽고 있다. 그러나…나는 법왕이 적그리스도인지 그분의 사도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교서에서 그리스도를 너무도 잘못 나타내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 (D’Aubigne, b.5, ch.1). 그 당시에 루터는 여전히 로마교의 지지자였으며, 교회와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아니하였다.  

루터의 저서와 교리는 모든 그리스도교국으로 퍼져갔다. 개혁의 사업은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도 일어났다. 그의 저서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에도 전해졌다. 영국에서는 그의 교훈이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 벨기에와 이탈리아에도 진리가 전파되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은 듯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신앙생활의 희망과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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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공격으로 로마는 더욱더 격노하게 되었으며, 그를 반대하는 광신적인 어떤 사람들, 심지어 가톨릭 대학교의 박사들까지도 그 반역적인 승려를 죽이는 자는 범죄하는 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루는 어떤 수상한 자가 권총을 외투 속에 감추고 그 개혁자에게 가까이 와서, 어찌하여 그대는 혼자 다니느냐고 물었다. 루터는 “나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 그분은 나의 힘이요 방패시다. 사람이 내게 어찌하겠느냐”고 대답하였다 (D’Au-bigne, b.6, ch.2). 이 말을 듣고 그 수상한 자는 얼굴빛이 창백하게 되었으며 하늘의 천사들 앞에서 피하듯이 도망하여 버렸다. 

로마는 루터를 없애 버리기 위하여 애를 썼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방패가 되셨다. 그의 교리는 “민가와 수도원과…귀족의 저택과 대학과 왕의 궁전 등으로 전하여져서 도처로 퍼졌다” (D’Au-bigne, b.6, ch.2). 귀족들은 그의 운동을 원조하기 위하여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그 즈음 루터는 후스의 저서를 읽고, 자신이 주장하고 가르치고자 하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큰 진리가 벌써 보헤미아의 개혁자로 말미암아 주장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루터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나 자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모두 후스의 신봉자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 계속해서 “일세기 전에 전파된 진리를 불태워 버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히 받고야 말 것이다” (Wylie, b.6, ch.1) 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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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운동의 위기 

루터는 그리스도교의 개혁을 위하여 독일의 황제와 귀족들에게 보내는 호소의 편지에서 법왕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어떠한 황제도 미치지 못할 만큼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은 놀랄 만한 일입니다. 과연 그것이 가난한 예수님과 비천한 베드로의 생활과 유사하겠습니까? 그를 가리켜 세계의 주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법왕이 그분의 대리자 됨을 자랑하는 그리스도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분의 대리자의 영토가 자기 주인의 것보다 더 커서야 되겠습니까?” (D’Aubigne, b.6, ch.3).  

또 그는 각 대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각 대학이 만일 열렬히 성경을 설명하고, 그것을 청년들의 마음 가운데 인상시켜 주지 못한다면, 지옥의 문이 될까 두려워하는 바이다. 나는 누구든지 성경을 으뜸으로 삼지 않는 학교에 자녀를 보내지 말도록 권면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없는 교육 기관은 모두 틀림없이 타락하고야 만다” (D’Aubigne, b.6, c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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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소는 독일 전국에 신속히 전달되어 각 사람들에게 강력한 감화를 끼쳤다. 온 나라는 분발하고, 군중들은 궐기하여 개혁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루터를 반대하는 자들은 보복할 생각이 불 일듯 일어나서, 그에게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해 주기를 법왕에게 간청하였다. 그의 교리들은 즉시 정죄의 선고를 받아야 한다고 공고되었다. 그 개혁자와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60 일간의 유예 기간이 허락되었으며, 그 기간 안에 신앙을 취소하지 않으면 모두 파문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종교개혁에 있어서 무서운 위기였다. 지나간 수세기 동안 로마의 파문은 강력한 황제들에게 공포감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막강한 제국 (帝國) 에 불행과 황폐를 가져다주었다. 일단 파문의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일반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동료들과의 교제도 끊어지고,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수색당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루터는 자기에게 엄습해 오고 있는 폭풍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굳게 서서 자기를 지탱해 주고 방패의 역할을 해주실 그리스도를 신뢰하였다. 순교자의 믿음과 용기로써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제 어떠한 일이 일어날는지 나는 알지 못하며 구태여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강풍이 몰아치려면 쳐보라.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의 나뭇잎도 우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그분의 종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을 것인가? 육신으로 나타나셨던 말씀도 돌아가셨거든 그 말씀을 위하여 죽는 것은 별로 중대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감으로 우리는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D’Aubigne, (3rd London ed., Walth-er, 1840) b.6, ch.9].  

마침내 법왕의 교서가 루터에게 전달되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것을 불경하고 거짓된 것으로 멸시하고 배격한다. …그것으로 정죄받으신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 사업을 위하여 이와 같이 고생당하는 것을 나는 기뻐한다.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더욱 큰 자유를 느끼고 있다. 나는 법왕이 적그리스도이며, 그의 보좌는 곧 사단의 위 (位) 인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D’Aubigne, b.6, ch.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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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에서 최종적으로 분리됨 

그러나 로마의 교서가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감옥, 고문, 검 (劒) 등은 복종을 강요하는 힘있는 무기들이었다. 연약하고 미신적인 사람은 법왕의 명령 앞에서 떨었다. 루터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동정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개혁 사업 때문에 생명을 버리는 것이 너무도 큰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점으로 보아서 개혁자의 사업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루터는 여전히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로마는 그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가 죽임을 당하든지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능력으로 정죄의 선고를 로마로 돌려보내고 로마교에서 영원히 떠나겠다는 결심을 공중 앞에서 표명하였다. 학생들, 박사들, 각 계급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군중 앞에서 루터는 교회의 법규들과 훈령들과 법왕권을 지지하는 특별한 저서들과 함께 법왕의 교서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원수들은 나의 저서들을 불태움으로 일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진리의 사업을 손상시키고, 그들의 영혼을 파멸시켰다. 그러므로 나는 거기에 따라 그들의 책들을 불태웠다. 바야흐로 엄숙한 투쟁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법왕으로 더불어 경기 (競技) 를 한 데 불과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사업을 착수하였다. 그러므로 그 사업은 내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쳐질 것이다” (D’Aubigne, b.6, ch.10).  

루터는 그의 사업이 미약하다고 조소하는 원수들의 비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누가 알며, 그들이 나를 멸시하므로 하나님 자신을 멸시하는 일이 될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에 홀로 있었다. 엘리야도 아합의 통치 때에 홀로 있었다. 이사야도 예루살렘에 홀로 있었고, 에스겔도 바벨론에 홀로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이나 어떤 위대한 사람을 선지자로 택하지 않으시고, 일반적으로 지위가 낮고 멸시받는 사람들 중에서 택하셨다. 그분께서는 목자 아모스를 선지자로 택하신 적도 있었다. 각 시대를 통하여 성도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위대한 사람들과 왕들과 제후들과 제사장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을 책망하였다. …나는 내 자신을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홀로 있고 그들은 다수이기 때문에 그들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고 나는 말하는 바이다. 나는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D’Aubigne, b.6, ch.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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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지라도 루터가 교회에서 마지막으로 떠나고자 결심하기까지는 무서운 갈등이 없지 않았다. 그 즈음에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사람이 유년 시대에 받아들인 것을 내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날마다 더욱더 느끼고 있다. 비록 나는 나를 지지해 주는 성경을 가지고 나 혼자서 법왕을 대항하고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언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내 자신으로는 수긍했을지라도,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내 마음속의 번민은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법왕교도들의 입술에서 그처럼 자주 반복된 다음의 질문에 대하여 괴로운 마음으로 얼마나 여러 번 내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던가? ‘너 혼자만 현명한가? 너 외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틀렸는가? 만일 네 자신이 틀렸고, 많은 사람들이 너의 오류를 받아들인 결과로 영원히 멸망 받게 된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흠없는 말씀으로 이와 같은 의혹을 대항하게끔 나의 마음을 강화시켜 주기까지 내 자신과 사단으로 더불어 싸웠다” (Martyn, pp.372,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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