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들 앞에서 행한 제롬의 신앙 고백
그는 자기가 진리를 부인한 사실에 자책감을 느끼면서 계속해서 말하였다. “청년 시대 이후로 내가 범한 모든 죄악 중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내가 이 흉악한 장소에서 범한 죄이다. 이곳에서 나는 나의 스승이요 친구인 거룩한 순교자 얀 후스와 위클리프에 대하여 내린 간악한 선고를 시인하였다. 그러나 나는 충심으로 그 일을 참회한다. 나는 불명예스럽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두 사람의 교리를 부인한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여러 가지 죄를 용서해 주시되, 가증한 이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원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는 재판관들을 가리키면서 엄숙하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위클리프와 얀 후스에게 정죄의 선고를 내렸는데, 그들이 교회의 교리를 침해한 연고에서가 아니고, 그들이 성직자들의 비행과 추문, 곧 그들의 허식과 교만, 주교와 신부들의 온갖 죄악들을 적발하여 공격하였기 때문이었다. 위클리프와 후스가 말한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나 역시 너희들을 규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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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은 저지되었다. 주교들은 격분하여 떨면서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한가?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가장 완고한 이단자를 직접 목격하고 있다”고 부르짖었다.
제롬은 소란한 중에서도 확고한 태도로 말하였다. “너희들은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줄로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과거 1년 동안 죽음보다 더욱 참혹하고 무서운 감옥 속에 나를 가두었다. 너희들은 나를 터키 사람들과 유대인들과 이교도들보다 더욱 잔혹하게 취급하였으므로 나의 살이 사실상 썩어서 나의 뼈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나는 불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탄식은 마음과 정신을 병약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그처럼 심한 만행 (蠻行) 을 감행하는 데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Bonnechose, vol.2, p.151~153).
다시 소동이 일어났으므로 제롬은 급히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그 때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는 그의 말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생명을 구원하려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제롬은 교회의 권력자들의 방문을 받고, 대회의의 결정에 복종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로마교에 대한 반대를 취소한다면, 그 보상으로 그의 앞에 가장 밝은 전망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영화가 주어지자 제롬은 그의 주님처럼 그것을 확고하게 물리쳤다.
“성경으로 나의 오류를 지적해 준다면, 나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버리겠다”고 그는 단언하였다. “성경이라고? 그렇다면 만사를 다 그것으로만 판단해야 된단 말이냐?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지 아니하면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고 그를 유혹하는 자들 중의 한 사람은 부르짖었다. 이에 대하여 제롬은 대답하였다. “우리 구주의 복음보다도 사람의 유전이 신앙상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느냐? 바울은 자기의 편지를 받을 사람들에게 사람의 유전을 들으라고 권하지 않고, 도리어 ‘성경을 상고하라’고 말하였다.”
“이단이다”라는 부르짖음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너를 위하여 그처럼 오랫동안 애원한 것을 나는 후회한다. 네가 악마의 충동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Wylie, b.3, ch.10).
드디어 그는 정죄의 선고를 받았다. 그는 후스가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장소로 끌려 나갔다.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나갔는데, 그의 얼굴은 평화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죽음의 두려움이 없었다. 사형 집행자가 불을 붙이려고 그의 뒤로 돌아가자, 그 순교자는 “꺼릴 것 없이 앞으로 나와서 나의 눈앞에서 불을 붙여라. 내가 두려워했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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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이 그를 둘러싸자 그는 최후의 기도를 드렸다. “주여, 전능하신 아버지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언제나 당신의 진리를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Bon-nechose, vol.2, p.168) 고 그는 외쳤다. 마침내 그의 소리는 그쳤으나 기도하는 그의 입술은 그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불길이 그치자 그 순교자의 재는 거기에 남아 있는 흙과 함께 후스의 재처럼 라인 강에 던져졌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파한 진리의 빛, 그들의 영웅적인 모본으로 남긴 광채는 소멸될 수 없었다. 바야흐로 세상에 다가오고 있는 여명 (黎明) 을 막으려는 것은 마치 사람이 태양을 돌아가는 궤도에서 역전 (逆轉) 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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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스카 장군의 분기 (奮起)
후스의 처형 (處刑) 은 보헤미아에 분노와 공포의 불길을 일으켰다. 온 국민들은 후스가 승려들의 적의 (敵意) 와 황제의 배신으로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충성된 진리의 교사였음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그에게 사형 언도를 내린 대회의는 살인죄를 범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교리는 어느 때보다 더욱 큰 관심을 끌었다. 법왕은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정죄하고 불태워 버리라는 조서를 내렸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그 저서들 중에서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을 그것들이 숨겨져 있던 곳에서 가져와 성경전서나 혹은 사람이 구할 수 있는 성경 중의 어떤 일부분과 대조하여 연구하였으며,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개혁자들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후스를 죽인 자들은 그의 운동이 승리하는 것을 조용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법왕과 황제가 연합하여 이 운동을 진압하려 하였으며, 시기스문트의 군대는 보헤미아를 향하여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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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에 한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는 개전 직후에 두 눈을 다 잃어버린 지스카 (Ziska) 로서 당시에 가장 훌륭한 장군 중의 한 사람으로서 보헤미아군의 지휘관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들의 사업의 정당성을 신뢰하면서 사람들은 침공해 오는 가장 강력한 군대와 맞서 싸웠다. 황제는 여러 번 거듭하여 새로운 군대를 보내어 보헤미아를 공격하였으나 굴욕적이게도 격퇴를 당할 뿐이었다. 후스의 신봉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아무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었다. 개전 후 불과 수년 만에 그 용감한 장군 지스카는 죽었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용감한, 아니 어떤 점으로는 그보다도 더욱 훌륭한 장군인 프로코피우스 (Procopius) 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보헤미아인의 원수들은 그 눈먼 용사의 죽음을 알게 되자, 그들이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줄로 믿었다. 법왕은 후스의 신봉자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십자군을 보낼 것을 포고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급히 많은 군대를 보헤미아로 투입시켰으나 결국은 엄청난 패배를 당할 뿐이었다. 또다시 십자군의 파견이 선포되었다. 유럽에서 법왕을 지지하는 모든 나라들로부터 전쟁을 위하여 사람과 자금과 군수품들을 모았다. 허다한 무리들이 법왕의 깃발 아래 모여서 마침내 후스의 신봉자들인 이단을 멸절시키겠노라고 약속하였다. 필승의 신념으로 많은 군사들이 보헤미아로 쳐들어갔다. 보헤미아의 백성들도 그들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집결하였다. 두 군대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 (對峙) 하였다. “십자군은 월등하게 우세한 군대였으며, 후스의 신봉자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참으로 먼 거리에서부터 왔기에 그 시내를 건너서 급히 돌진하거나, 그들과 접전하기보다는 조용히 서서 상대방의 전사들을 주목하여 바라보기만 하였다” (Wylie, b.3, ch.17). 그 때에 그들은 갑자기 기이한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에 의하여 쫓겨 가듯이 한 번 공격해 보지도 못하고, 그 대군은 깨어지고 흩어졌다. 무수한 군사들이 도망하다가 그들을 쫓아간 보헤미아군에게 살육을 당하고, 막대한 전리품이 승리자들의 손에 돌아갔다. 그리하여 그 전쟁은 보헤미아 사람들을 곤궁에 빠뜨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요하게 해주었다.
십자군의 파멸
수년 후에 다른 법왕이 십자군을 다시 일으켰다. 전과 같이 군대와 자금이 법왕권 하에 있는 온 유럽 각국에서 징집되었다. 이 위험한 일에 가담시키고자 권유하는 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는 누구든지 아무리 가증한 죄를 범하여도 완전히 용서받는다는 것이 보증되었다. 전쟁에서 죽는 자들은 하늘에서의 큰 상이 약속되었고 살아남는 자들은 그 전쟁터에서 명예와 재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증되었다. 다시금 대군이 징모되어 국경을 넘어 보헤미아로 쳐들어왔다. 후스의 신봉자들은 그 대군 앞에서 퇴각하여 침략자들을 국내로 깊숙이 유인하여 들이고, 그들로 하여금 이미 승리한 줄로 생각하게 하였다. 드디어 프로코피우스의 군대는 퇴각을 정지하고, 원수들을 향하여 돌아서서 그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십자군은 그제야 그들의 실책을 깨닫고, 군대를 멈추고 그 자리에서 적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십자군들은 적군이 접근해오는 소리를 듣자 후스파의 군대를 보기도 전에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왕족들과 장군들과 일반 군사들은 그들의 무기를 내어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하였다. 침략군의 총지휘자인 법왕의 사절은 공포감에 눌려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고자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그는 온갖 노력을 다 하였지만 마침내 그 자신도 도망하는 무리들에게 휩쓸려가고 있었다. 침략군은 완전히 패배당하였고, 막대한 전리품이 다시 승리자의 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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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유럽의 가장 강력한 나라들로부터 파견된 용감하고 호전적이며, 전쟁을 위하여 훈련받고 무장한 무리로 이루어진 두 번째의 대군은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한 연약한 국민으로 편성된 소수의 방위군 앞에서 궤멸되고 말았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침략군은 초자연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 앞에서 미디안 군대를 도망하게 하시며, 하룻밤 사이에 교만한 앗시리아 군대를 쳐부수신 하나님께서 억압자의 세력을 꺾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손을 다시 한 번 펴셨던 것이었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시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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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왕교의 지도자들은 무력으로 정복하는 일을 단념하고, 드디어 권모술수 (權謀術數) 를 쓰게 되었다. 표면으로는 보헤미아인들의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노라고 공언하면서 실지로는 그들을 로마의 권력에 넘겨주는 타협책을 쓰게 되었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로마와 화해하는 조건으로 다음의 네 가지 점을 분명히 밝혔다. 성경을 강론하는 자유, 모든 교인들이 성만찬 예식에 참석하여 떡과 포도즙을 나눌 수 있고 예배 시간에 각각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 성직자가 모든 세속적인 직위와 권력에서 제외되는 일,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일반 법정의 사법권이 성직자나 일반인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취급하는 일 등이었다. 드디어 법왕측은 “후스의 신봉자들이 제출한 네 가지 조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 조문의 명확한 의미를 결정하는 해석권은 종교 회의 즉 법왕과 황제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Wylie, b.3, ch.18). 이러한 조건 아래 조약은 맺어지고, 로마는 투쟁으로 얻지 못한 것을 허위와 사기로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후스의 신봉자들이 제시한 조건들에 대하여서도 성경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저들이 독자적인 해석을 내림으로써 그들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그 조문들의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보헤미아인들은 그 조약이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불화와 분열이 생기고 나중에는 투쟁과 유혈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 내란으로 인하여 고상한 프로코피우스 장군은 죽고, 보헤미아인의 자유는 없어졌다.
후스와 제롬을 배반한 시기스문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으며, 그는 보헤미아인의 권리를 옹호하겠노라고 한 자신의 서약에도 불구하고 법왕권의 확립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그가 로마를 추종하므로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20년간의 그의 생애는 수고와 위험으로 충만하였다. 오랫동안의 쓸데없는 전투로 그의 군대는 쇠잔하여졌고, 그의 재물은 고갈되었다. 그는 1년을 통치한 후에 국가를 내란 일보 직전에 버려둔 채 불명예로 낙인찍힌 이름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면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