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16일

신앙의 포기냐, 죽음이냐 

콘스탄스 성에 도착하자, 후스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허락되었다. 황제의 통행권에는 다시 법왕의 개인적인 보증이 첨부되었다. 그러나 이 엄숙하게 반복된 보증도 무시되고, 얼마 후에 그 개혁자는 법왕과 추기경들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곧 불결하고 음침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라인 강 건너편에 있는 튼튼한 성안으로 이송되어 죄수로 수감되었다. 이러한 법왕의 배반은 법왕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였으며, 오래지 아니하여 그 법왕도 또한 그 동일한 장소에 갇히게 되었다 (Bonnechose, vol.1, pp.247). 그는 회의석상에서 살인, 성직 매매, 간음, 그 외에도 말할 수 없이 더러운 죄악을 범한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그는 회의의 선고로 삼층 면류관을 박탈당하고, 동시에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참칭 법왕들도 폐위당하고 새로운 법왕이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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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가 개혁을 요구하며 신부들을 비난해 왔던 죄들보다 더 큰 죄를 법왕 자신이 범했지만, 법왕을 파면시킨 바로 그 동일한 회의는 이제 이 개혁자를 처치해 버리기로 하였다. 후스의 투옥은 보헤미아 사람들의 큰 분노를 일으켰다. 유력한 귀족들이 대회의 석상에서 이러한 횡포한 행위에 대하여 이의 (異議) 를 제기하였다. 자기가 발행한 통행권이 침해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황제는 후스에 대한 조치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개혁자의 원수들은 악독하고 완고하였다. 그들은 황제의 편견과 그의 공포심과 교회에 대한 그의 열성 등을 들어 황제에게 호소하였다. 그들은 “비록 황제나 국왕으로부터 통행권을 받은 자일지라도 그가 이단이거나 이단의 혐의를 받은 자일 경우에는 그로 더불어 맺은 약속이 이행될 수 없다” (Jacques Lenfant, His-tory of the Council of Constance, vol.1, p.516) 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장황한 이론을 펴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득의했다. 

감방의 습기와 불결한 공기 때문에 열병에 걸려서 거의 죽음 직전에 놓여 있었지만 마침내 후스는 대회의에 끌려나왔다. 그는 무거운 쇠사슬에 매인 채로 황제 앞에 섰다. 이 황제는 일찍이 자기의 명예와 훌륭한 신앙으로 후스를 보호해 주기로 서약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긴 심문을 통하여 후스는 확고부동하게 진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제 그 곳에 열석한 교회와 정부의 고관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교권의 부패를 규탄하였다. 자기의 교리를 취소하든지 죽음을 택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그는 순교자의 운명을 수락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붙들었다. 그가 최후의 선고를 받기 전에 있은 고난의 몇 주일 동안에 그에게는 하늘의 평화가 마음에 충만하여졌다. 그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나는 옥중에서 내일 사형 선고가 내릴 것을 기다리면서 쇠사슬에 매인 손으로 이 편지를 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내세의 귀한 화평 중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대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어느 정도의 자비를 베푸신 것과 내가 당한 시험과 시련 중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나를 도우셨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Bonnechose, vol.2,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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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한 옥중에서 그는 참된 신앙의 승리를 미리 보았다. 꿈 가운데 그는 자기가 복음을 전하던 프라하의 교회당으로 돌아가서 그가 벽에 그렸던 그리스도의 그림들을 법왕과 주교들이 지워 버리는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은 그를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 그는 더욱 많은 화가들이 더욱 찬란한 채색으로 더욱 많은 그림들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을 마치자마자 그 화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 이제는 법왕이든지 감독이든지 와 보라. 그들이 더 이상 다시는 이 그림들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고 부르짖었다. 개혁자는 그가 꾼 꿈에 관하여 ‘나는 그리스도의 상 (像) 을 결단코 지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들은 그것을 소멸시켜 버리고자 했지만 나보다 훨씬 더 유력한 전도자들로 말미암아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롭게 그려질 것이다’고 말하였다” (D’Aubigne, b.1, ch.6). 

후스의 장렬한 최후 

후스는 마지막으로 큰 회의에 소환되었다. 그것은 실로 규모가 크고도 엄숙한 집회였다. 황제와 왕공과 사신과 추기경들과 감독과 신부들이 열석하고, 밖에는 허다한 방청자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한 긴 투쟁에서 최초의 큰 희생자를 목격하고자 그리스도교국의 각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후스는 최후의 결심을 표명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자기의 견해를 철회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는 약속한 바를 아무런 가책 없이 깨뜨려버린 황제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나는 여기 임석한 황제의 신의 (信義) 와 공공연한 보호 아래 내 자신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대회의에 출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Bonnechose, vol.2, p.84) 라고 언명하였다. 그러자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에게 집중되었으며, 시기스문트는 얼굴을 붉혔다.  

선고가 언도되고, 지위를 박탈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감독들은 그 죄수에게 승려와 같은 옷을 입혔다. 후스는 승복을 손에 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치욕을 받으실 때에 흰옷을 입으시고 헤롯에게서 빌라도에게로 호송되셨다” (Bon-nechose, vol.2, p.86) 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권고를 다시 받게 되자 그는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순결한 복음을 전한 저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의 구원을 이제 죽기로 작정된 불쌍한 나의 몸 이상으로 귀중하게 여긴다.” 그의 제복 (祭服) 은 하나씩 차례로 벗겨졌는데, 그럴 때마다 의식을 행하고, 열석한 감독들은 차례대로 저주를 선언하였다. 드디어 그의 머리 위에는 모자 곧 피라미드 모양으로 만든 종이 고깔이 씌워졌는데, 거기에는 악마의 무서운 형상이 그려져 있고 대이단자라는 글자가 그 앞면에 뚜렷하게 쓰여 있었다. 후스는 ‘주 예수여 이 종은 더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당신을 위하여 치욕의 관을 쓰나이다. 나를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주 예수여!’ 하고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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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식을 행한 후에 “주교는 ‘네 영혼을 마귀에게 주노라’고 말하였다. 그 때에 얀 후스는 하늘을 우러러, ‘오, 주 예수여! 당신이 나를 구원하셨으니, 나는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고 말하였다” (Wylie, b.3, ch.7).  

그 후에 그는 세속적 권세에 맡겨져 처형장으로 끌려나갔다. 그의 뒤에는 많은 군중, 몇백 명의 무장한 사람들, 아름다운 의복을 입은 신부와 주교들, 콘스탄스 성의 주민들이 따랐다. 그가 화형주에 결박되고 불을 붙일 수 있는 준비가 다 갖추어졌을 때에 그 순교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그의 오류를 취소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한 것과 전파한 것은 모두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진리를 나의 피로써 확인하기를 매우 기뻐한다” (Wylie, b.3, ch.7). 이윽고 불을 붙이매 그는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찬미를 그의 목소리가 영영히 그쳐질 때까지 불렀다.  

심지어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열광적인 법왕당의 한 사람은 후스와 그 후에 있은 제롬의 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두 사람은 다같이 최후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화형을 받기 위하여 나아가기를 마치 혼인 잔치에 나아가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고통의 부르짖음도 발하지 않았다. 불길이 일어날 때에 그들은 찬미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그 불길의 기세도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그치게 할 수 없는 듯하였다” (Wylie, b.3, ch.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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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의 몸이 다 타버린 다음에 그들은 그 재와 흙을 모아서 라인 강에 던져 대해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의 핍박자들은 그가 전한 진리를 근절한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날에 던져진 재가 대해로 흘러가서 각 나라에 씨를 뿌리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까지 진리를 증거하는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질 것을 그들은 거의 생각지 못하였다. 콘스탄스의 회의장에서 부르짖은 그의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그 후 각 시대를 통하여 쉼없이 울려 퍼질 것이었다. 후스는 이미 가고 없으나 그가 생명을 바쳐서까지 옹호한 그 진리는 결코 멸절될 수 없었다. 그의 신앙과 충성의 모본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문과 사망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의 처형 (處刑) 은 횡포한 로마의 잔인성을 전 세계에 드러내 보이는 일이 되었다. 진리의 원수들은 자기들이 없애 버리려고 한 그 사업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히려 발전시키는 결과를 빚어내게 되었다.  

제롬의 옥중 생활 

이제 또 하나의 화형주가 콘스탄스 성에 세워질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의 증인의 피가 진리를 위하여 증거하여야 할 것이었다. 제롬은 후스가 대회의에 나아갈 때에 그와 작별하면서 그에게 용기와 확고한 태도를 가지라고 권면하고 만일 그에게 위험이 있을 때에는 즉시 도와주겠노라고 하였다. 개혁자의 투옥 (投獄) 소식을 듣자 충실한 그 제자는 곧 약속을 이행하려 하였다. 그는 통행권도 가지지 않고 한 동료를 데리고, 콘스탄스 성을 향하여 떠났다. 그는 그 곳에 도착하자, 후스를 구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성에서 피하였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그는 붙잡히어 쇠사슬에 매여 일단의 군인들에 의하여 호송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회의에 끌려나와 그에 대한 소송에 답변을 하고자 했을 때 그는 “화형에 처하라, 화형에 처하라”는 부르짖음을 듣게 되었다 (Bonnechose, vol.1, p.234). 그는 큰 고통을 느끼도록 쇠사슬에 결박된 채로 투옥되어 있었는데, 먹을 것이라고는 물과 빵뿐이었다. 옥중에서 너무나 가혹한 대우를 받았으므로 제롬은 병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원수들은 그가 그대로 죽을 것을 염려하여 약간 관대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그는 약 1년간 옥중에 그대로 갇히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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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의 죽음은 법왕당에게 있어서 기대한 것만큼의 효과가 없었다. 후스의 통행권에 대한 침해가 심한 분노와 물의를 일으켰으므로, 더 안전한 방법으로, 대회의는 제롬을 화형에 처하는 대신에 할 수 있는 대로 그를 강요하여 그의 주장을 취소하게 하고자 결정하였다. 그는 회의장에 끌려나와 오류를 취소하든가, 화형으로 죽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가 당한 무서운 고난을 생각해 보면 수감 초기에 죽는 것이 도리어 그에게는 동정 깊은 처사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제 옥중에서 당한 고통으로 얻은 질병 때문에 기력이 쇠하여졌고, 근심과 불안에서 오는 괴로움, 친구들과의 이별, 후스의 죽음으로 인한 낙심 등과 같은 일들로 말미암아 제롬의 용기는 꺾이어 마침내 그는 회의에 굴복하였다. 그는 가톨릭의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서약하고, 위클리프와 후스가 가르친 교리 중 소위 “신성한 진리” (Bonnechose, vol.2, p.141) 이외의 것을 정죄한 회의의 결의를 수락하였다.  

이와 같은 임기응변의 수단으로 제롬은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키고 절박해 오는 죽음을 면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감방의 적막 속에서 그는 자기가 한 일이 무엇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후스의 충성과 용기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것과 비교해서 진리를 거부한 자기의 무가치한 행동을 숙고하였다. 그는 자기가 섬기기로 서약한 거룩하신 주님,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였다. 신앙을 취소하기 전에는 온갖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확증으로 말미암는 위로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의 마음속에 오직 후회와 의혹과 고민만이 남아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로마교와 화해하려면 아직도 여러 번 신앙의 취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아가는 길은 완전한 배도로 끝날 것이었다. 그는 잠깐 동안의 고난을 면하기 위하여 자기의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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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의 뒤를 따른 제롬 

곧 그는 다시 회의에 끌려나왔다. 그의 재판관들은 그의 굴복으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피에 목마른 저들은 후스의 죽음으로 자극을 받아 새로운 희생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제롬은 진리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제롬은 그 신앙을 고백하는 동시에 자기의 형제 순교자의 뒤를 따라 화형을 당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는 지난번의 말을 취소하고, 죽음을 각오한 사람으로서 변명할 기회를 달라고 엄숙히 요구하였다. 그의 말이 끼치게 될 영향을 두려워한 주교들은 그에게 대한 고소에 대해서만 가부간에 대답하라고 강요하였다. 제롬은 이와 같이 잔혹하고 불의한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다. “너희들은 나를 무서운 감옥, 불결하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곳에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은 채 3, 40일간 구금하였다. 그리고 나를 너희 앞에 끌어내어 나를 죽이려는 원수들의 말은 들어 주면서 나의 증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만일 너희들이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들이고 전 세계의 광명이라 자처한다면 정의에 대하여 범죄치 않도록 조심하라. 나는 다만 하나의 연약한 인간이다. 나의 생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불의한 선고를 하지 않도록 너희들에게 권고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보다 너희들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Bonnechose, vol.2, p.146, 147).  

그의 요구는 마침내 수락되었다. 제롬은 재판관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령이 자기의 생각과 말을 제어해 주심으로써 주님을 욕되게 하거나 한 마디라도 진리에 어그러지는 말을 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이날에 그에게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에게 주신바 언약, 곧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 10:18~20) 고 하신 그 언약이 성취되었다.  

제롬의 말은 그의 원수들까지도 경탄케 하고 놀라게 했다. 그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번민 속에서 1년 동안 감옥에 갇힌 채로 보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마치 그가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분명하고 능력이 있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불의한 재판관들에 의하여 정죄의 선고를 받았던 성도들을 일일이 열거하였다. 그는 어떠한 시대에든지 그 시대의 백성들을 계몽하려고 힘쓴 자들이 비난을 받고 배척을 당하였으나 후에는 영광을 받은 것과 그리스도 자신도 불의한 법관에게 악인으로 정죄를 받으신 사실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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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취소하였을 때 제롬은 후스가 정죄를 받은 것을 당연하다고 동의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회개를 선포하였으며 그 순교자의 무죄와 성결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나는 그를 어렸을 때부터 알았다. 그는 의롭고 거룩하며 가장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죄 없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나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언젠가는 아무도 속일 수 없는 크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기만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될 나의 원수들과 거짓 증인들이 마련해 놓은 고통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Bonnechose, vol.2,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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