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15일

개혁자 후스와 프라하의 대소동 

진리의 빛은 보헤미아에서 독일로 전파되었다. 왜냐하면 프라하 대학의 소동으로 수백 명의 독일 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의 많은 학생들이 후스에게서 처음으로 성경의 지식을 배웠는데, 그들은 돌아가서 각자 자기 나라의 여러 곳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프라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후스는 곧 법왕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그 명령에 응하는 것은 자기의 몸을 죽음에 내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보헤미아의 왕과 왕후와 대학과 귀족과 정부의 고관들이 연합하여 후스는 프라하에 머물러 있게 하고, 대리자를 로마에 파견시켜 대답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법왕에게 애소하였다. 그러나 법왕은 그 요구를 수락하는 대신에 도리어 후스에게 대하여는 심문 선고를 내리고 프라하 시를 파문 (破門) 에 처한다고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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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 있어서 이와 같은 선고는 언제나 큰 공포를 일으켰다. 거기에 따르는 의식들은 법왕을 하나님의 대표자로 존경하고, 그를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영적 심판은 물론이요, 세속적 심판까지 행할 권능을 가진 자로 알고 있는 백성들을 공포에 질리게 할 수 있도록 잘 꾸며졌다. 파문의 선고를 받은 지방에는 하늘의 문이 닫혀지므로 법왕이 그것을 열기까지는 죽은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처럼 두려운 재난의 증거로서 온갖 종교적 의식은 정지되고, 교회는 폐쇄되고, 결혼식은 교회당의 뜰 앞에서 거행되고, 죽은 자는 성별된 묘지에 매장되지 못하고 장례식 없이 도랑이나 벌판에 매장되었다. 로마는 사람의 상상력에 자극을 주는 이런 종류의 처사를 통하여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프라하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재난을 만난 것은 오로지 후스 때문이라고 그를 규탄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징벌에 신속히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소동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후스는 잠시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프라하에 남겨 놓고 온 친구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내가 그대들을 떠나온 것은 나쁜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영원한 죄의 선고를 자취하지 않도록 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고난과 박해가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교훈과 모본을 따라서 행한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경건치 않은 신부들이 그대들 가운데서 더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금지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한 나머지 잠시 동안 물러나온 것뿐이다. 나는 거룩한 진리를 거절하므로 그대들을 떠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진리를 위하여서는 죽음도 사양치 아니한다” (Bonnechose, The Refor-mers Before the Reformation, vol.1, p.87). 그러나 후스는 자기의 활동을 그치지 아니하고 각지로 다니며 진리를 갈급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법왕이 복음을 감추어 버리고자 취한 조치는 도리어 그것을 더 널리 전파하는 방편이 되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 (고후 13:8)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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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후스의 마음에는 일종의 번민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교회는 위협으로 그를 억누르고자 했지만, 그는 아직까지 교회의 권위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로마 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배우자요, 법왕은 하나님의 대표자요 대리자였다. 후스가 싸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권위의 악용이었지 원칙 그 자체는 아니었다. 이 사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그의 양심의 주장 사이에 무서운 갈등을 일으켰다. 자기가 그렇다고 믿은 대로 로마교의 권위가 정당하고 그릇됨이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거기에 불순종해야 한다고 느껴지는가? 그는 복종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소위 흠이 없는 교회에 복종하는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가? 이것이 바로 그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고, 그를 언제나 번민하게 하는 의문이었다. 그가 궁리해 낼 수 있었던 가장 가능한 해답은 일찍이 구주 당시에 그랬었던 것처럼 교회의 제사장들이 악한 사람들로 바뀌어져서 그들의 합법적인 권위를 불법적인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해답은 후스로 하여금, 깨달음을 통하여 전달된 성경의 교훈들이 양심을 지배해야 한다는 좌우명을 자신의 지도를 위한 지침으로 채택하고 다른 이들도 그들의 지침으로 삼도록 가르치도록 이끌었다. 즉 그릇됨이 없는 지도자는 신부를 통하여 말하는 교회가 아니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었다” (Wylie, b.3, ch.2). 

박식하고 웅변적인 제롬이 나타남 

얼마 후에 프라하의 소동이 진정되자, 후스는 자기가 맡은 베들레헴의 회당으로 돌아가서 더욱 큰 열심과 용기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전하였다. 그의 원수들은 활발하고 강력하였지만, 왕후와 많은 귀족들이 그의 친구가 되었고, 많은 백성들이 그를 지지하였다. 그의 순결하고 고상한 교훈과 경건한 생애를 로마 교도들이 전하는 타락한 교리와 그들의 탐욕적이고도 방탕한 행동과 비교할 때에 많은 사람들은 후스의 편에 가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여겼다.  

지금까지 후스는 단독으로 활동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 영국에 체류해 있는 동안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제롬이 개혁 사업에 참가하였다. 그 후로부터 그 두 사람은 완전히 연합된 생활을 하였으며, 사망도 그들을 헤어지게 할 수 없었다. 대중의 인기를 끄는 재간을 가진 제롬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고, 말을 잘하고, 학식이 뛰어났다. 그러나 참된 인격을 형성하는 자질 (資質) 을 구비한 점에 있어서는 후스가 한층 더 탁월하였다. 그의 냉정한 판단력이 제롬의 충동적인 정신을 제어해 주는 역할을 잘하였다. 한편 제롬은 참으로 겸손하게 후스의 진가 (眞價) 를 인정하고 그의 권면을 잘 받아들였다. 그들의 연합적 활동으로 개혁 사업은 한층 더 신속히 확장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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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택함을 입은 그 사람들의 마음에 큰 빛을 주셨으므로 그들은 로마의 여러 가지 오류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전해 주어야 할 빛을 남김없이 다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로마교의 흑암에서 나오도록 인도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들은 온갖 큰 장애를 만나야 할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을 한 계단씩 한 계단씩 인도하여 내셨다. 그들은 모든 빛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정오의 햇빛과 같이 눈부시게 밝은 빛이 주어졌었더라면, 암흑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사람들처럼 그들은 돌아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에게 사람들이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빛을 나타내 주셨다.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충성된 일꾼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사람들을 차츰 깊은 개혁의 길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콘스탄스에서 개최된 큰 회의 

교회 내의 분열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세 사람의 법왕이 제각기 최상권을 장악코자 다투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교국은 범죄와 소동으로 충만하여졌다. 그들은 피차에 저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세속적 무력에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각각 무기를 구입하고 군대를 모집하기 위하여 애썼다. 물론 돈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소위 교회에 속한 은사, 지위, 축복 등이 돈으로 매매되었다. 신부들도 역시 그들의 위에 있는 성직자들의 본을 받아 성직을 매매하고 자기의 상대자를 넘어뜨리고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싸웠다. 이러한 철면피한 행동들이 날마다 증가되어감으로 후스는 소위 종교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가증한 행위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백성들도 로마교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교국을 비참하게 만드는 자들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 그리고 프라하에는 바야흐로 유혈의 참극이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옛날에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 (왕상 18:17) 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도시는 두 번째로 파문을 선고받았고, 후스는 시골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사랑하는 베들레헴 회당에서 행하던 그의 충성된 증언은 그쳤다. 이제 그는 진리의 증인으로서 그의 생명을 바치기 전에 더욱 넓은 무대에서 온 그리스도교국을 향하여 말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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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유럽을 혼란에 빠지게 한 화근을 제거하기 위하여 콘스탄스에서 총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시기스문트 (sigismund) 황제의 희망에 따라 세 경쟁자 중의 하나인 요한 23세가 소집한 것이었다. 법왕 요한은 원래 회의를 소집하는 것을 환영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인격과 정책에 있어서 당시의 교인들에게서뿐 아니라 타락한 주교들로부터도 힐책과 비난을 받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시기스문트의 뜻을 반대할 수가 없었다 (부록 16 참조).  

회의에서 달성되어야 할 주요한 목표는 교회의 내분을 화해시키고, 이단을 뿌리 뽑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참칭 (僭稱) 법왕과 새로운 주장을 퍼뜨리는 주동자로 지목된 얀 후스가 그 회의에 소환되었다. 그 참칭 법왕들은 모두 자기들의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직접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그들의 대표자들을 참석시켰다. 법왕 요한은 표면상으로 그 회의의 소집자였지만, 황제가 자기를 폐하려는 은밀한 목적이나 없는지, 또는 자기가 삼층관을 얻기 위하여 자행한 범죄와 그 삼층관을 욕되게 한 행위에 대하여 문책당하지나 않을지 하는 여러 가지 불안과 의구심 (疑懼心) 을 가지고 회의에 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높은 직분을 가진 사람들과 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위풍당당하게 콘스탄스 성으로 들어갔다. 시 (市) 의 고관들과 성직자들은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그를 환영하였다. 그의 머리 위에는 황금으로 만든 천개 (天蓋) 가 덮이었고, 그것을 그 지방 장관 네 사람이 붙들고 있었다. 성체 (聖體) 는 그의 앞에서 운반되어 가고, 추기경들의 화려한 복장들은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그 때에 또 다른 여행자가 콘스탄스 성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후스는 자기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그 길을 마치 영원한 이별의 길인 것처럼 느끼고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그는 차츰 화형주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는 보헤미아의 왕으로부터 그의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통행권을 받았고, 또한 시기스문트 황제가 보증해주는 여행 도중의 안전을 위한 통행권까지도 받았지만 도저히 사망을 피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고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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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 임석하려는 후스 

프라하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형제들이여…나는 왕의 통행권을 가지고 나의 많은 대적들을 만나고자 떠나가고 있다. …나는 나의 구주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내가 능히 저들을 대항할 수 있도록 나의 입에 하나님의 지혜와 그분의 신중하신 정신을 넣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그대들의 열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줄로 나는 믿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진리로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주시고, 시련이나 감옥이나 필요하면 잔인한 죽음까지라도 용기 있게 당하게 하실 줄로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일에 참을 수 있도록 본을 보여 주셨으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다. 그분께서는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종들이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비천한 인간들이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 또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정결해지는데 어찌 우리가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즉 사랑하는 친구여, 만일 나의 죽음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된다면, 그날이 하루 속히 이르도록, 그리고 내가 당하게 될 모든 고난에 그분께서 항상 나를 붙들어 주시도록 기도하라. 만일 내가 그대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이라면 나로 하여금 오점 (汚點) 없이 돌아가게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곧 나의 형제들에게 훌륭한 본을 남겨 나를 따라오게 하도록 복음의 진리의 일점 일획이라도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라. 아마도 프라하에서 그대들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나로 하여금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그 때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지식과 사랑으로 마음을 더욱 굳게 하여 전진하여야 할 것이다” (Bonnechose, vol.1, pp.147, 148).  

후스는 복음의 사도가 된 어떤 신부에게 보내는 또 한 장의 다른 편지에서, 과거에 화려한 의복을 입기를 좋아하고 천박한 일로 시간을 낭비한다고 그를 비난하였던 자기의 과오를 충심으로 사과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래와 같이 감동적인 권고를 덧붙였다. “직록 (職祿) 이나 재산에 마음을 팔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으로 그대의 마음을 채우라. 그대의 마음보다도 집을 더 꾸미지 말고, 영적 집을 세우는 데 관심을 쏟으라. 가난한 사람들을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하며, 그대의 물질을 열락하는 일로 낭비하지 말라. 그대가 만일 그대의 생애를 고치고 사치스러운 생애를 끊어 버리지 아니하면, 내가 지금 심하게 징계를 받고 있는 바로 그 징계가 그대에게 미칠까 염려된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나의 교훈을 받았으므로 나의 교훈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이상 더 쓸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그대가 아는 바와 같이 한 때 내가 빠졌던 어떠한 허영에도 그대는 빠지지 말기를 나는 주의 자비를 힘입어 그대에게 간원한다.” 그리고 그 겉봉에는 “나의 친구여, 그대는 내가 죽은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이 봉투를 뜯지 말라” (Bonnechose, vol.1, pp.148, 149) 고 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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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는 그 여행 중에서 자기의 교리가 도처에 전파된 것과 자기의 전도 사업이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의 곁으로 몰려왔으며, 어떤 고을에서는 지방 장관이 그를 따라 거리를 같이 걷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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