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종말
법왕교도들은 위클리프가 살아 있을 동안에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몸이 무덤에서 조용히 쉬고 있을 동안에도 그들의 증오심은 충족되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지 40여 년 후에 열린 콘스탄스 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그 근처에 흐르고 있는 시냇물에 던져 버렸다. 그 사실에 대하여 옛날의 한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시냇물은 그 재를 아본 시내로, 아본 시내는 세버언 강으로, 세버언 강은 영국 해협으로, 영국 해협은 대양으로 옮겨 주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오늘날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그의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T.Fuller, Church History of Britain, b.4, sec.2, par.54). 그의 원수들은 자신들의 악의에 찬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 (John Huss) 가 로마교의 많은 오류를 버리고 개혁 사업을 착수한 것은 위클리프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그 두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진리의 씨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뿌려졌다. 그 사업은 보헤미아에서 다른 나라로 확장되어 나갔다. 사람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손이 위대한 종교개혁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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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장 — 후스와 제롬
보헤미아의 진리의 옹호자
복음이 보헤미아에 전파되기는 이미 9세기의 일이었다. 성경이 번역되고 백성들은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법왕권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은 가리워졌다. 평소에 왕들의 권세를 꺾어 버릴 뿐 아니라 백성들을 노예의 상태로 만들고자 꾀해 오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예외 없이 보헤미아어로 공중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교서를 내렸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신다. 이 법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악과 이단이 생기게 되었다” (Wylie, b.3, ch.1) 고 법왕은 선언하였다. 그와 같이 로마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꺼버리고 백성들을 암흑 가운데 가두어 두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기구를 통하여 교회를 보존하시고자 계획하셨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박해를 만나 쫓겨난 많은 왈덴스와 알비젠스 (Albigenses) 인들이 보헤미아로 피난하였다. 비록 그들은 그 곳에서 공공연하게 전도하지 못하였으나 은밀한 가운데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참된 신앙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보존되어 왔다.
후스가 태어나기 전에 보헤미아에는 이미 교회의 부패와 백성들의 비행을 공공연하게 규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주의와 관심을 끌었다. 그러므로 승려 계급은 두려움을 느끼고 복음 사도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그들은 숲 속과 산으로 쫓겨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군사들은 그들을 찾아내어 많은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얼마 후에 로마교의 예배에서 벗어나는 자는 화형에 처한다는 명령이 내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들의 사업의 승리를 확신하고 눈을 감았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죽었다. “진리의 원수의 분노는 오늘날 우리들을 이기고 있지만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평민 가운데서 한 사람이 권세와 검을 쥐지 않고 일어날 것인데, 그들은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Wylie, b.3, ch.1) 루터의 시대는 아직 먼 미래에 속하였다. 그러나 이제 로마를 공격하는 그의 증언으로 모든 나라를 일깨우게 할 한 사람이 일어나는 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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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 총장이 되기까지 얀 후스 (John Huss) 는 비천한 계급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에 그의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그의 경건한 어머니는 교육시키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러한 유업을 그 자식에게 남겨 주고자 애를 썼다. 후스는 처음에 시골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그 후에 프라하 대학의 자선 장학금으로 공부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프라하를 향한 여로에 올랐다. 과부로서 가난에 시달리는 그의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줄 만한 세상 재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큰 도시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아버지 없는 자기의 아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를 위하여 하늘 아버지께 복을 빌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자기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 것인지에 대하여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후스는 부지런한 공부와 신속한 학업의 향상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깨끗한 생애와 온유하고 쾌활한 성격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또한 로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교회가 수여한다고 공언하는 영적 축복을 매우 갈망하였다. 그는 어떤 큰 성회에 참석하였을 때 참회하러 나아가 호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돈을 다 털어 바치고 사면 (赦免) 을 얻기 위하여 행렬 가운데 참례한 일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 그는 신부의 직분을 얻었으며, 그 후 신속히 승진하여 왕실 전속의 승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모교의 교수가 되고, 그 후에 그 대학의 총장까지 되었다. 그리하여 불과 수년 만에 구호금의 장학금을 받던 비천한 일개 학생이 보헤미아의 자랑이 되고, 그 명성을 온 구라파에 떨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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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다른 한 분야에서 개혁 사업을 착수하였다. 성직에 나간 지 수년 후에 그는 베들레헴 회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 회당의 설립자는 성경을 자국어로 설교하는 일을 참으로 중요한 일로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그 일은 로마에서 반대하는 일이었으나 보헤미아에 있어서는 완전히 중지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 성경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무지는 실로 컸으며,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가장 악한 일들이 편만해 있었다. 후스는 이러한 죄악들을 기탄없이 견책하고, 자기가 설명한 진리의 원칙과 순결을 역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곡히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로 전향 (轉向) 함
후에 후스의 절친한 친우가 된 프라하 출신의 제롬 (Jerome) 이 영국으로부터 귀국하면서 위클리프의 저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으로 개종한 영국 왕후는 원래 보헤미아의 공주였으므로, 그의 감화로 말미암아 보헤미아에는 개혁자의 저술이 널리 유포되었다. 후스는 그러한 저술들을 흥미 있게 읽었다. 그는 그 저자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었으며 위클리프가 주장하는 개혁주의에 찬동하게 되었다. 비록 후스 자신은 깨닫지 못하였으나 이때에 그는 그를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인도할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 때에 프라하에 영국으로부터 학식 있는 두 사람이 왔다. 그들은 진리의 밝은 빛을 받았는데,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이렇게 먼 지방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법왕의 최상권을 공공연하게 공격하였으므로 즉시 당국으로부터 발언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의 목적을 버릴 수 없었으므로 한 가지의 계책을 세웠다. 그들은 본래 설교자인 동시에 화가였으므로 그들의 기술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두 장의 그림을 그렸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광경이었는데, 그분께서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마 21:5) 타셨다. 제자들은 여행으로 더러워진 헌 옷을 입고 맨발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장은 법왕의 행렬을 그린 것인데, 법왕은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 삼층 면류관을 쓰고 아름답게 장식한 말을 타고 있으며, 그 앞에는 나팔수들이 가고 있었고, 뒤에는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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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참으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의 주목을 끈 무언의 설교였다. 군중들이 몰려와서 그 두 장의 그림을 주목하여 보았다. 그 그림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주되시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 그리고 그분의 종이라고 자칭하는 법왕의 자고와 교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프라하에는 큰 동요가 생겼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얼마 후에 그 곳을 떠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친 교훈은 잊히지 않았다. 특별히 그 그림은 후스의 마음에 커다란 감동과 인상을 주었으므로 그는 성경과 위클리프의 저서를 더욱 세밀히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아직 위클리프의 개혁설을 모두 받아들일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법왕교의 진상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으므로 타는 듯한 열성으로 교권의 부패와 교만과 야심을 규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