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25일

16 장 — 청교도와 신교의 자유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종교계의 형편

영국의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교의 교리는 버렸을지라도 그 교리의 여러 가지 형식은 간직하고 있었다. 비록 로마교의 권위와 신조는 부정되었을지라도 그 관습과 의식은 영국 교회의 예배에 적지 않게 혼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양심의 문제가 아니며, 성경에 특별히 명령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금지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원칙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되었다. 또 그들이 그와 같은 것들을 지킴으로 로마교와 개신교와의 간격을 좁히는 동시에 로마교로 하여금 신교를 받아들이기 쉽게 만드는 것이라고도 해석되었다.

보수적이요 타협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논증들이 확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와 같은 관습을 그대로 지키게 되면 “로마교와 종교 개혁파 사이에 생긴 깊은 구덩이에 다리를 놓는 것과 같은 것” (Martyn, vol.5, p.22) 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단연히 반대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의식들을, 거기에서 해방된 후 다시 되돌아갈 마음조차 없는 노예 제도의 휘장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예배에 관한 규칙을 정하여 주셨으므로 사람들이 거기에 더하거나 감할 자유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큰 배교의 발단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교회의 권위를 첨가하려고 시도하는 데 있었다. 로마교는 하나님께서 금하지 아니한 것을 하라고 명령함으로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신 것을 금지함으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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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은 초대 교회의 특징이었던 순결과 단순성으로 돌아가고자 열망하였다. 그들은 영국 교회가 세운 대부분의 관습들을 우상 숭배의 유물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영국 교회의 예배에 연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교회는 국가의 권력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교회의 의식에 반대하는 일이 용납될 수 없었다. 예배에 출석하는 일은 법률로써 요구되었으며, 허가 없이 종교적 예배를 위한 집회를 여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고, 그것을 범하는 자는 투옥, 추방, 사형 등의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17세기의 초엽에 영국의 한 왕은 즉위하자마자 청교도들을 복종시키든지 괴롭혀 그 땅에서 내쫓든지 혹은 그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게 하든지 하겠다는 자신의 단호한 결심을 표명하였다 (Georgr Bancroft,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t.1, ch.12, par.6). 수색당하고, 추방당하고, 박해를 받은 그들은 그들의 장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을 바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려면 “영국은 이미 영구적으로 거주할 만한 곳이 되지 못 한다” (J.G.Palfrey, History of New England, ch.3, par.43) 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어떤 사람들은 마침내 네덜란드에서 피난처를 찾고자 결심하였다. 그들은 어려움과 손실과 투옥 등을 당하였다. 결국 그들의 목적은 좌절당하고, 그들은 원수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참고 견딘 결과로 마침내 그들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호적인 영접을 받게 되었다.

청교도의 해외 도피

도피해 갈 때, 그들은 집과 재산과 생활 수단 등을 모두 버렸다. 그들은 언어와 관습이 전혀 다른 낯선 나라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하여 새롭고 생소한 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밭을 가는 농부로 지내왔던 중년 남자들이 이제는 기계 공업을 새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일을 달게 받아들이고 불평이나 게으름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극도의 빈궁에 빠진 때도 종종 있었으나 그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축복을 감사하고 끊임없는 영적 교제에서 기쁨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순례자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을 괘념치 않고 그들이 가장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라로 눈을 돌림으로 마음을 평안하게 가졌다” (Bancroft, pt.1, ch.12, par.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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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과 고난 중에서도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주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필요를 따라 주님께서는 항상 그들에게 응답해 주셨다. 주님의 천사들은 그들의 곁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붙들어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이 멀리 바다 저편에서 그들이 건설할 나라, 신교의 자유라는 귀중한 유업을 자손들에게 남겨 줄 땅을 가리켜 주시는 것처럼 생각되었을 때,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의 길을 따라 전진하였다.

그들이 이와 같은 시련을 당하도록 허락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의 은혜로운 목적을 이루도록 하시고자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교회가 그처럼 낮추어진 것은 후에 다시 높여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증거를 세상에 보여 주시고자 당신의 능력을 교회를 위하여 바야흐로 나타내실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사단의 분노와 악인들의 간계로 말미암아 생긴 여러 가지 사건을 눌러 버림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동시에 당신의 백성을 안전한 장소로 데려가시고자 하셨다. 박해와 망명은 자유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청교도들이 처음으로 영국 교회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을 때, 그들은 주님의 자유의 백성으로서 “이미 그들에게 알려졌거나 장차 알려질 하나님의 모든 길을 따라 다 함께 걸어가자” (J.Brown, The Pligrim Fathers, p.74) 고 엄숙히 맹세함으로 함께 결속하였다. 여기에 개혁의 참된 정신, 곧 개신교의 중요한 원칙이 나타났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 순례자들은 네덜란드를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하였다.

청교도들의 아메리카 이주

당시에 그들의 목사였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그들과 동행할 수 없었던 존 로빈슨은 그 망명자들과 고별하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제 미구에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형제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인지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만날 기회를 주시든지 주시지 않든지 나는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형제들에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은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간 그 만큼 나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른 인물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나타내 주실 때, 여러분은 나의 봉사를 통하여 나타내 준 진리를 받아들인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말씀에서 계시해 주실 더욱 많은 진리와 빛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Martyn, vol.5,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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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개인으로서는 개신교의 상태에 대하여 탄식해 마지않습니다. 그 교회는 한 때 신앙적이었지만 개혁 운동을 일으킨 인물들 이상으로는 한 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형편입니다. 루터교도는 루터가 깨달은 것 이상은 더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칼빈파의 신도들 역시 여러분이 보는 바와 같이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깨달았다고 할 수 없는 그 사람이 남긴 것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불행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그 당시에는 밝게 비치는 빛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리의 전부를 밝히 깨닫지는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그들은 분명히 저희가 처음에 받은 빛 이상의 빛을 받고자 갈망할 것입니다” (D.Neal, History of the Puritans, vol.1, p.269).

“일찍이 여러분이 교회에서 한 서약, 곧 이미 알려졌거나 장차 알려질 주의 길을 온전히 따라가기로 한 그 서약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서 여러분에게 알려지는 진리와 빛은 어떤 것이든지 받아들이겠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피차간에 맹세하고 약속한 바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경계할 것은 여러분이 어떠한 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때는 반드시 그것을 성경의 다른 진리와 비교하고 견주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극히 최근에 비그리스도교적 암흑 가운데서 나왔을 뿐이므로 아주 완전한 지식이 한꺼번에 주어졌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Martyn, vol.5, p.70, 71).

그 순례자들을 고무시켜 긴 여행의 위험을 용감하게 뚫고 바다를 건너가게 하고, 황량한 들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위험을 견디어 내게 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메리카의 해변에 큰 나라의 기초를 세우게 한 것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종교 자유의 위대한 원칙을 아직껏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드려서 얻은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균등하게 나누어 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였다. “17세기의 제일가는 사상가들과 도덕가들 중에서까지도 신약 성경에서 나온 위대한 원칙, 곧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사람의 신앙을 심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인식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Martyn, vol.5, p.297).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고 이단을 정죄하여 처벌할 권한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탁하셨다는 교리는 가장 깊이 뿌리를 박은 법왕교의 오류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개혁자들은 로마교의 신조를 부인하면서도 로마교의 비관용적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오랫동안의 법왕교의 지배 아래 전 그리스도교국에 퍼져 있던 짙은 흑암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하여 매사추세츠 만 (灣) 의 식민지에 살던 한 유명한 목사는 “이설 (異說) 에 대한 관용은 이 세상을 반 (反) 그리스도교적으로 만들었고, 이단을 징벌하는 일은 교회에 아무런 손해도 입히지 않았다” (Martyn, vol.5, p.335) 고 말하였다. 교회의 교인들만이 세상 정부에 대하여 발언권을 가진다는 규정이 이주민들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일종의 국교회 (國敎會) 가 형성되었고, 모든 사람에게는 교직자를 부양하는 데 필요한 기부가 강요되었다. 그리고 장관들에게는 이단을 박멸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리하여 속권이 교회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조치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오래지 아니하여 박해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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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 자유의 투사 로저 윌리엄즈

최초의 식민지가 개척된 지 11년 후에 로저 윌리엄즈가 신대륙으로 왔다. 초기의 순례자들처럼 그도 역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그 곳으로 왔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당시에 그것을 인정한 사람이 극히 드물었지마는, 신조가 아무리 다를지라도 자유는 각 사람에게 속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는 열렬한 진리의 탐구자로서 로빈슨처럼 성경에 있는 빛이 이미 다 제공되어 그 이상 더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지 않았다. 윌리엄즈는 “근세의 그리스도교국에 양심의 자유, 곧 누구든지 법률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신조에 기초하여 민권 정치 (民權政治) 를 확립시킨 최초의 사람이었다” (Bancroft, pt.1, ch.15, par.16). 윌리엄즈는 범죄를 그치게 하는 것이 국가 행정자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양심은 결코 지배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일반 민중이나 장관이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일은 결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의무를 규정하려고 하면, 그것은 월권이요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장관이 그와 같은 권리를 소유하게 되면, 마치 영국에서 어떤 국왕이나 여왕이 한 것처럼, 그리고 로마교에서 어떤 법왕이나 의회가 한 것과 같이 오늘 한 가지 주장이나 신조를 세웠다가 내일 다른 주장으로 바꾸게 되어 결국 신조에 많은 혼란을 가져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Martyn, vol.5,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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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교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벌금이나 투옥의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윌리엄즈는 이러한 법률을 부인하였다. 영국 법전 (法典) 의 최악의 법령은 교구내의 교회에 출석하기를 강요한 것이었다. 같지 아니한 신조를 가진 자들을 연합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사람의 생득권 (生得權) 을 공공연하게 유린하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신앙이 없는 자들과 마음으로 원하지 않는 자들을 공중 예배에 억지로 끌고 오는 것은 위선을 강요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누구든지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예배를 강요하거나 교회의 경비를 부담시킬 수는 없다’고 그는 부언하였다. 반대자들은 그의 주장에 놀라서, ‘무엇이라고? 일하는 자가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그는 서슴지 않고 ‘그렇다. 그러나 그 삯은 일 시킨 자에게서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고 대답하였다” (Bancroft, pt.1, ch.15, par.2).

로저 윌리엄즈는 충실하고 특이한 재능을 갖춘 목사로서 품성이 고결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위정자가 교회를 지배하는 권세를 단호히 거부하는 일과 신교 자유에 대한 위정자의 요구에 항거하는 일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새로운 신조의 주장은 “국가의 정치와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것” (Bancroft, pt.1, ch.15, par.2) 이라고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온 식민지들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체포를 면하기 위하여 추운 겨울의 눈보라 속에서 인적도 없는 산림 속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약 14 주간 동안 혹독한 추위 가운데 이리저리 도망을 다녔는데, 나에게는 먹을 것도 잘 곳도 없었다. 그러나 거친 들에서는 까마귀가 나에게 양식을 주었고, 이따금 속이 빈 나무가 나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Martyn, vol.5, pp.349, 350). 그리하여 그는 길 없는 산림 속의 눈을 헤치고 다니면서 괴로운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는 드디어 어떤 인디언의 부락에서 피난처를 찾았는데 그 곳은 그가 일찍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자 수고하는 중에 그들의 사랑과 신임을 받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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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개월 동안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끝에 그는 마침내 내러건세트 만 (灣) 에 도착하여 거기서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근세의 신앙 자유의 권리를 철저하게 승인하는 최초의 주 (州) 의 기초를 놓았다. 로저 윌리엄즈의 식민지의 근본 원칙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양심의 빛을 따라 하나님을 경배할 자유를 가졌다” (Martyn, vol.5, p.354) 는 것이었다. 그의 작은 주 (州), 로드 아일랜드는 박해로 고난당하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차츰 사람의 수가 증가되어 번창해졌다. 그리고 그 주의 기본 원칙, 곧 정치와 종교의 자유가 마침내 북미 공화국의 초석이 되었다.

신교 자유의 정신과 미국의 헌법

우리의 조상들이 그들의 권리장전 (權利章典) 으로 밝힌 위대한 독립 선언서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천명하였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그들에게는 조물주께로부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가 부여되었으며, 그 권리 가운데는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로 주장한다.” 또한 헌법에도 극히 명백한 말로써 양심은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이 보증되어 있다. “합중국은 어떤 공직 (公職) 에 대한 자격으로서 종교적인 시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의회는 종교의 설립에 관여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활동을 금지하는 어떠한 입법도 하지 않을 것이다.”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인간의 법률 위에 있다는 것과 양심의 권리는 양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영원한 원칙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진리를 확립하기 위하여 이론을 전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속에 깨닫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은 인간의 법률을 대항할 때 고난과 화형을 견딜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사람의 법령보다 더욱 우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사람이 자기들의 양심을 지배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느끼었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뿌리 뽑을 수 없는 천부 (天賦) 의 원칙이다”[Congressional Documents (U.S.A.), Serial No.200, Docu-ment No.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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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기의 수고의 대가를 받고 자기의 양심의 지시대로 생활할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소식이 유럽의 여러 나라에 전하여지자 무수한 사람이 북미 대륙으로 모여들었다. 식민지의 인구는 갑자기 늘어났다. “매사추세츠 주는 특별한 법률을 제정하여 전란과 기근과 박해자들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대서양을 건너오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대하여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환영하고 공금 (公金) 으로 그 일을 원조하였다.” 그리하여 망명자와 압박당하는 자들이 법적으로 공화국의 손님이 되었다 (Martyn, vol.5, p.417).

플리머드 (Plymouth) 에 처음으로 상륙한 때로부터 20년 후에는 수천 명의 필그림들 (Pilgrims — 순례자 즉 신앙의 자유를 찾아 바다를 건너온 자들) 이 뉴잉글랜드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검소하게 노력하여 생애함으로 겨우 호구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였다. 그들은 밭에서도 그들이 힘들인 노력에 해당되는 만큼의 수확을 구하였다. 그들은 장차 일확천금을 얻겠다는 꿈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비록 속도는 느리지마는 그들의 사회 제도의 착실한 발전에 만족하였다. 그들은 인내성 있게 광야의 궁핍을 견디고, 눈물로써 자유의 나무에 물을 주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그것을 가꾸어 마침내 그 나무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성경은 신앙의 기초요, 지혜의 근원이며, 자유의 헌장 (憲章) 으로 존중히 여김을 받았다. 성경의 원칙을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열심히 가르쳤고, 그 결과로 검소, 명철, 순결, 절제 등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이 청교도들이 거주하는 곳에 여러 해 동안 살지라도 “한 사람의 술주정뱅이를 보거나 한 마디의 욕설을 듣거나 한 사람의 거지도 만날 수 없었다” (Bancroft, pt.1, ch.19, par.25). 그리하여 성경의 원칙은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안전책이 된다는 것이 분명히 실증되었다. 미약하고 외로웠던 식민지는 강대한 합중국으로 자라났고, 세계는 “법왕 없는 교회, 왕 없는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놀라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미국 종교계의 타락

그러나 계속적으로 미국의 해안으로 건너오는 많은 사람들은 당초의 필그림들과는 전연 다른 목적으로 오게 되었다. 초기의 신앙과 순결이 넓은 범위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지만 세속적 이익만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됨에 따라 본래 정신은 점점 흐려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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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교회의 교인만이 투표권을 가지며 정부 기관의 공직을 얻을 수 있도록 초기의 이주민들이 채택한 규정은 가장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법안은 주 (州) 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한 방편으로 채택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부패를 초래하였다. 신앙 고백이 참정권과 관직을 얻는 조건이 되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변화 없이 다만 세속적 정책이 동기가 되어 교회에 입교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들은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회개하지 아니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성직자들 중에서도 교리상의 오류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의 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흔히 보는 나쁜 결과가 다시 나타났다. 곧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요 18:36) 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복음 사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의 권력에 호소하여 그 도움을 얻어서 교회를 세우고자 시도하였다.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외관상으로는 세상을 교회 편으로 가까이 접근시키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교회를 세상 편으로 더욱 가까이 가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로빈슨과 로저 윌리엄즈가 훌륭하게 옹호한 위대한 원칙, 곧 진리는 점진적인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빛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그들의 자손들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미국의 개신교도들은, 유럽의 개신교도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종교개혁의 풍성한 축복을 받고 있으면서도, 개혁의 길을 따라 전진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비록 소수의 신실한 사람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고 오랫동안 고집하여 오던 오류를 폭로하였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치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루터 당시의 법왕교도들과 같이 그들의 조상들이 믿던 것처럼 믿고, 그들이 생활하던 것처럼 생활하는 것을 만족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종교는 다시 형식주의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계속해서 따라갔다면 당연히 배척할 수밖에 없는 미신과 오류를 간직하고 지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고무되었던 정신은 점차 사라져 버렸고, 마침내 루터 시대의 로마 교회처럼 개신 교회도 큰 개혁이 필요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똑같은 세속화와 영적 혼미 상태, 인간적 의견의 존중, 그리고 사람의 이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대신하는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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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혁의 필요성

19세기 전반 (前半) 에 성경이 널리 반포되어 세계는 큰 빛을 받았으나 사람들은 계시된 진리의 지식을 따라 전진하거나 체험적 신앙을 소유하지 않았다. 전 시대처럼 사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감출 수 없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경하게 여기게끔 이끌었다. 사람들은 성경 연구를 게을리 하게 되었으므로, 계속해서 거짓 해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성경에 아무 근거도 없는 교리를 간직하게 되었다.

핍박으로 진리를 깨뜨려 버리고자 했던 자기의 노력이 실패로 끝난 것을 보고, 사단은 일찍이 로마교를 형성시켜 큰 배교를 일으켰던 타협적 방침을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신교도는 아니지만 새겨서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름없이 이 세상 사물에 몰두된 자들과 연합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은 연합으로 옛 시대보다 더욱 심한 해독을 끼치는 결과를 빚어내었고, 종교라는 가면 아래 교만과 사치를 마음대로 자랑하므로 교회들은 부패하여졌다. 사단은 계속하여 성경의 교리를 왜곡시켰고, 무수한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한 유전들이 깊이 뿌리를 박게 하였다. 교회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하여 투쟁하는 대신에 그 유전들을 지지하고 변호하였다. 그리하여 개혁자들이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세운 원칙들을 전락시켰다.

각 시대의 대쟁투 pp. 289-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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