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18일

12 장 — 프랑스에서의 종교개혁

독일과 스위스에서 진행된 종교개혁

독일의 종교개혁의 승리를 나타냈던 스파이얼스의 항의와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앙 고백에 뒤이어 여러 해 동안 투쟁과 암흑이 계속되었다. 내부의 분열로 말미암아 약하여졌을 뿐 아니라 강력한 적의 끈질긴 공격에 시달린 프로테스탄트주의는 완전히 넘어질 운명에 처한 듯이 보였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피로써 그들의 증거를 인쳤다. 내란이 일어나고, 개혁 운동은 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배반을 당하였다. 개혁파측의 가장 존귀한 제후들이 황제의 손에 넘어가서 포로로서 이 성에서 저 성으로 끌려 다녔다. 그러나 승리한 듯이 보였던 그 순간에 황제는 패배를 당하였다. 그는 사로잡아 놓은 포로들이 그의 손에서 빠져 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가 일생의 욕망으로 삼고 멸절시키고자 한 그 교리를 마침내 묵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른바 이단을 박멸하기 위하여 자기의 나라, 재산, 생명까지도 걸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군인들은 전쟁으로 피로해졌고 국고는 바닥이 났고, 국내 각처는 반란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반면, 그가 진압하고자 헛되이 노력하고 있던 개혁주의는 각처에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카알 5세는 절대자의 권능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암흑을 깨뜨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하였다. 여러 해 동안의 전쟁으로 피로해진 조로 (早老) 한 황제는 퇴위하여 수도원에 묻혀 살게 되었다.

스위스에도 독일에서와 같이 종교개혁에 암흑 시대가 왔다. 많은 주 (州) 들은 개혁주의를 받아들였으나, 그렇지 아니한 주들은 맹목적으로 로마교의 신조를 고수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갈망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으로 드디어 내란이 일어났다. 츠빙글리 (Zwingli) 와 종교개혁에 그와 함께 연합했던 많은 동지들이 카펠 (Cappel) 의 혈전에서 전사하였다. 이 두려운 재난에 압도당한 에콜람파디우스 (Ecolampadius) 도 얼마 후에 죽었다. 로마는 승리자가 되었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일찍이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원 전부터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과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손을 드셨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에서 개혁 사업을 추진할 일꾼들을 일으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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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의 개혁 운동의 선구자

루터가 개혁자로서 일반에게 알려지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이미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빛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은 파리 대학의 박식한 교수 러페브르 (Lefevre) 였는데, 그는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 열성이 있고 진실한 법왕교도였다. 그는 고대 문학을 연구하는 중에 성경에 마음이 끌렸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소개하였다.

러페브르는 열심 있는 성도 숭배자였으며, 그는 성도와 순교자들의 역사를 편집해서 교회의 성도전 (聖徒傳) 을 만들고자 계획하였다. 그 일은 엄청난 노력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상당히 진척되었을 때에, 성경에서 유력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서 그는 그런 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성경에서 많은 성도들을 찾아볼 수 있었으나 물론 로마교의 성도의 목록에 기록된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늘의 빛은 홍수처럼 그의 마음에 넘쳐흘렀다. 그는 놀람과 혐오감에 사로잡혀서 종래에 하던 일을 내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는 거기서 찾은 귀중한 진리를 즉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512년, 아직도 루터나 츠빙글리가 개혁 사업에 손을 대기 전에 러페브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는 의, 곧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의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Wylie, b.13, ch.1) 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또 구원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아아, 이 얼마나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교환이냐? 무죄한 분이 죄인으로 선고를 받고, 죄인이 자유의 몸을 얻게 된다. 축복받은 분이 저주를 받고, 저주를 받은 자가 축복을 받는다. 생명의 임금이 죽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영광의 주께서 암흑 속에 잠기시고 허물과 치욕밖에 알지 못하는 자가 그 얼굴에 영광을 나타내게 된다” (D’Aubigne, Lundon ed., b.12, c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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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영광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한편 그는 또한 순종의 의무가 사람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교인이라면, 그대는 그분의 몸의 한 지체이다. 만일 그대가 그분의 몸의 지체라면 그대는 하나님의 품성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아, 사람들이 만일 이 특권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들은 얼마나 깨끗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게 살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속에 있는 영광, 곧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광에 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은 참으로 하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D’Aubigne, b.12, ch.2).

러페브르와 프랑스어 신약 성경 출판

러페브르의 문하생들 가운데는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약간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러페브르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진리를 계속해서 전할 것이었다. 윌리암 파렐 (William Farel) 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한 부모의 아들로서 교회의 가르침을 전심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을 받아 왔다.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자기를 가리켜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 (행 26:5) 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열렬한 로마교도로서 교리를 반대하는 자는 모두 멸절시켜 버려야 한다는 열성으로 불타 있었다. 그는 후년에 당시의 자기의 생애에 대하여 “법왕을 반대하는 말을 들을 때에 나는 마치 사나운 이리처럼 이를 갈았다” (Wylie, b.13, ch.2) 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성도를 숭배하는 일에 매우 열렬하였으므로 러페브르와 함께 파리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각 교회의 제단에서 예배하고, 예물을 드려 성당들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위가 그의 마음에 화평을 줄 수 없었다. 그에게 붙어다니는 죄 의식 (意識) 은 그가 실천한 고행으로 제거해 버릴 수 없었다. 그 때 개혁자의 다음과 같은 말들은 그에게 하늘에서 오는 음성처럼 들렸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다.” “무죄한 분은 정죄를 받고, 죄인은 놓임을 받는다.” “하늘의 문을 열어 주고, 음부의 문을 닫아 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Wylie, b.13, c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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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렐은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였다. 바울의 회개처럼 회개함으로, 그는 유전의 멍에를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유에 들어갔다. 그는 “법왕에게서 온전히 마음을 돌이켜서 그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침으로 부르짖는 이리와 같이 살기등등한 마음은 사라지고 흠 없고 유순한 어린양과 같이 되었다” (D’Aubigne, b.12, ch.3) 라고 말하였다.

러페브르는 그의 제자들에게만 빛을 전하였지마는 파렐은 법왕의 사업에 열렬했던 것과 똑같은 열성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업에 열성을 다하였고, 그는 나아가 진리를 공중에게 전파하였다. 얼마 후에 교회의 한 고위 성직자인 모오 (Meaux) 의 감독이 그들과 연합하였다. 재간과 학식으로 높임을 받고 있는 교수들도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궁전에서부터 아래로는 노동자와 농부의 가정에 이르기까지 각 계급의 사람들이 복음의 옹호자가 되었다. 당시에 왕으로 통치하고 있던 프란시스 1세의 누이까지도 개혁 신앙을 받아들였다. 또한 왕 자신도 모후 (母后) 와 함께 한 때는 거기에 호의를 보였으므로 개혁자들은 큰 희망을 가지고 프랑스가 복음화 (福音化) 될 때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시련과 박해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롭게도 그들의 눈에 숨기어져 있었다. 폭풍에 대응할 만한 힘을 그들에게 육성시켜 주기 위하여 평화로운 한 때가 허락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에 개혁 사업은 신속히 발전하였다. 모오의 감독은 성직자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자기의 교구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 결과로 무지하고 부도덕한 승려들은 제거되고, 지식이 있고 경건한 사람들로 대치되었다. 그 감독은 사람들이 자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그 일이 곧 성취되었다. 러페브르는 신약 성경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비텐베르크에서 발견되던 바로 그 때에 프랑스어 신약 성경도 모오에서 출판되었다. 그 감독은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고 자기의 교구 (敎區) 안에 그 성경을 보급시켰으므로 드디어 모오의 농부들까지도 성경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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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갈증으로 죽어 가는 나그네가 생명의 샘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영혼들은 하늘의 기별을 받아들였다. 들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작업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진리를 이야기함으로 날마다 즐거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밤이면 술집에 가는 대신에 이웃끼리 한 집에 모여서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고 찬미를 불렀다. 곧 그들의 지역 사회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비록 비천한 계급에 속하는 무식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농부들이었지만 그들의 생활에는 개혁과 향상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능력이 나타났다. 그들은 겸손, 성결, 사랑의 증거자로서 복음을 충심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것이 어떠한 일을 이루어 주는지를 입증해 주었다.

모오에서 밝혀진 빛은 멀리까지 비치었다. 회개하는 사람의 수는 매일 증가되어 갔다. 승려들의 완고한 고집을 싫어한 왕 때문에 성직자단의 분노 (忿怒) 는 한 때 견제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법왕측의 지도자들이 세력을 얻었다. 이제 화형주가 세워졌다. 모오의 감독은 화형을 받든지 신앙을 취소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다. 그는 보다 안락한 길을 택하였다. 이와 같이 지도자가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확고하게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이 화형주의 불꽃 가운데서 진리를 증거하였다. 이러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화형주에서까지 충성과 용기를 잃지 않으므로 평안할 때에 그들의 증거를 결코 들어보지 못했던 무수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채를 드러낸 베르캥

고난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들은 비천하고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왕궁과 훌륭한 저택 가운데도 재물과 지위와 심지어는 생명까지라도 진리에 비하면 경하다고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 감독의 예복을 입고 감독의 관을 쓴 자보다도 왕의 갑옷을 입은 자들이 한층 더 고상하고 고결하고 확고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루이 드 베르캥 (Louis de Berquin) 은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용감하고 예의바른 기사였고, 학구열이 투철하고, 세련된 행동과 흠이 없는 도덕적 표준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법왕 제도의 신봉자요 미사에 참석하고 설교를 열심으로 듣는 자였으며,…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루터파를 미워하는 생각이 더욱 많았다”고 한 저자는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도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로마교의 교리가 아니라 루터의 교리인 것을 깨닫고” (Wylie, b.13, ch.9) 놀랐다. 그는 그 뒤로부터 온전히 복음 사업에 헌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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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귀족 가운데서 최대의 학자”인 그는 그의 천품 (天稟) 과 웅변적 재능, 백절불굴의 용기와 열심, 임금에게 총애를 받는 사람으로서 궁전에서의 영향력 등으로 보아서 천성적으로 프랑스 개혁자로 태어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베자 (Beza) 는 “만일 프란시스 1세가 제2의 선후 (選侯) 였었더라면 베르캥은 분명히 제2의 루터가 되었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법왕교도들은 그를 “루터보다 더욱 나쁜 사람이다” (Wylie, b.13, ch.9) 고 부르짖었다. 그는 프랑스의 로마교도들에게는 정말로 루터보다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그를 이단자로 투옥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 왕은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투쟁이 계속되었다. 로마교와 개혁파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프란시스 왕은 승려 측의 가혹한 열성을 묵인하는 듯하다가도 때로는 그것을 견제하였다. 베르캥은 법왕교의 당국자들에 의하여 세 번이나 투옥당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천재적 재질과 고결한 인격을 찬탄해 오던 왕은 그를 교권의 술책에 희생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때마다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베르캥은 프랑스에서 그를 위협하는 위험에 대해서 여러 번 경고를 받고, 또는 자진해서 망명하므로 안전하게 된 사람들의 본을 따르라는 권고를 자주 들었다. 모든 학문의 높은 경지에 이르고서도 진리를 위하여 생명과 명예를 버릴 기백이 없는 비겁한 기회주의자인 에라스무스 (Erasmus) 는 베르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어떤 외국의 대사로 파견되기를 요청하여 독일로 가도록 하십시오. 그대는 베다 (Beda) 를 알 것입니다. 그는 널리 사방으로 독소 (毒素) 를 퍼뜨리는 수천의 머리를 가진 괴물입니다. 그대의 원수는 참으로 많소이다. 그대의 사업이 그리스도의 사업보다 더욱 훌륭할지라도 그들은 그대를 잔혹한 죽음에 처하기 전에는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왕의 보호에 지나치게 의뢰하지 마십시오. 하여간 신학부의 교사들과 나에게 누가 미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Wylie, b.13, ch.9).

그러나 위험이 증가될수록 베르캥의 열심은 더욱 더 강해졌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정책적이요, 기회주의적인 권고에 복종하기는커녕 도리어 한층 더 대담한 수단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진리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오류를 공격할 것이었다. 그는 로마교가 자기에게 씌우고자 하는 이단이라는 비난을 도리어 그들에게 돌려주고자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적극적이요, 무서운 반대자는 파리 시와 불란서 전국을 통하여 종교상 최고의 권위로 인정받고 있는 파리 대학 신학부의 박사들과 승려들이었다. 그런데 베르캥은 그 박사들의 저서 중에서 12개의 조목을 뽑아서 “성경에 위배되고 이단적인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왕에게 그 논쟁의 심판자가 되어 주기를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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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한 베르캥의 순교

왕은 서로 반대되는 투사들 간에 힘과 지혜를 대조적으로 나타낼 기회를 회피하지 않고, 거만한 승려들의 자고심을 꺾어 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로마 교도들에게 대하여 성경으로 그들의 주장을 옹호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별반 유익이 없을 것을 알았다. 그들은 투옥, 고문, 화형과 같은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 형세가 역전되어 베르캥을 빠뜨리기 위하여 판 함정에 그들이 빠진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놀라서 다른 방면으로 피할 길을 찾고자 하였다.

“마침 당시에 어느 길거리에 세운 성모 마리아의 상이 파손되었다.” 시중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 곳에 모여서 슬픔과 분노의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왕의 마음도 심히 흔들렸다. 승려들은 그들에게 유리한 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용하였다. 승려들은 “그것이 베르캥의 가르침의 결과이며, 그 루터당은 모든 것, 곧 종교와 법률과 왕위 자체까지 전복시키고자 하고 있다” (Wylie, b.13, ch.9) 고 부르짖었다.

베르캥은 다시 체포되었다. 그러나 왕은 파리를 떠나 부재중이었으므로 승려들은 저희들 마음대로 그를 처치하게 되었다. 개혁자 베르캥은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프란시스 왕이 그를 구원해 낼 수 없도록 하고자 그 선고는 언도를 받은 그날로 집행되었다. 정오에 베르캥은 사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목격하기 위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악과 의혹으로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용감하고 고귀한 귀족 출신의 그 희생자를 주목하였다. 경악, 의분, 조소, 강한 증오심이 그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어둡게 하였으나 오직 한 사람의 얼굴에는 아무런 그늘도 없었다. 그 순교자의 생각은 이 소동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그는 자기의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심을 의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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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태운 보잘것없는 작은 수레, 박해자들의 험상궂은 얼굴, 곧 그가 당해야 할 무서운 죽음, 그 모든 것들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곁에 계셨다. 베르캥의 용모는 하늘의 빛과 화평으로 빛나고 있었다. 베르캥의 복장은 훌륭하였다. 그는 “우단 외투와 교직 조끼를 입고 금빛 양말” (D’Aubigne.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the Time of Calvin, b.2, ch.16) 을 신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만왕의 왕과 온 우주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의 믿음에 대하여 증거할 것이었다. 그의 얼굴의 어떤 슬픈 흔적도 그의 기쁨을 어그러지게 하지 못했다.

행렬이, 군중으로 들끓는 거리를 천천히 지나갈 때 사람들은 그의 풍채와 태도와 티끌만큼도 흐린 점이 없는 화평과 승리의 기쁨을 보고 놀랐다. “이 사람은 성전 안에 앉아서 거룩한 사물을 조용히 명상하는 사람과 같다” (Wylie, b.13, ch.9) 고 그들은 말하였다.

베르캥은 화형대에서 사람들을 향하여 약간의 말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두려워한 승려들의 부르짖음과 군인들이 무기를 부딪치는 소리와 떠드는 소리로 인하여 순교자의 음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1529년에 개화된 파리에서 학문과 신학의 최고 권위자들이 “사형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말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으로 1793년의 혁명 시대의 민중에게 가장 악한 모본을 남겼다” (Wylie, b.13, ch.9).

베르캥은 교수형을 당하였고, 그의 시체는 불태워졌다. 그의 죽음의 소식은 프랑스 전국의 개혁파의 동지들을 슬프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모본은 허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들도 장차 받을 미래의 생명을 바라보면서 기쁜 마음으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D’Aubigne.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the Time of Calvin, b.2, ch.16) 고 진리의 증인들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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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의 증가와 복음의 전파

모오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개혁파의 교사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박탈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지방을 향하여 떠나갔다. 러페브르는 얼마 후에 독일로 갔고, 파렐은 동프랑스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고향에서 빛을 전하였다. 사람들은 이미 모오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소식을 들었으므로 그가 두려움 없이 열심으로 진리를 설명할 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곧 그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일어나서 그를 읍에서 추방시켰다. 비록 그는 공공연하게 전도할 수 없었으나 촌락을 두루 다니면서 민가 (民家) 와, 격리된 목장에서 교리를 설명하고 숲 속과 소년 시절에 자주 다니던 바위로 된 동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환난을 위하여 그를 준비시켰다. 그는 말하였다. “내가 미리 경고를 받은 십자가와 박해와 사단의 음모 등은 내 힘에 만만치 않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힘으로 견디기에는 너무 심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아버지시다. 그분께서는 내가 필요한 힘을 지금까지 주셨고, 장래에도 언제나 주실 것이다” (D’Aubigne.b.12, ch.9).

사도 시대와 마찬가지로 박해는 “도리어 복음의 진보” (빌 1:12) 를 가져왔다. 파리와 모오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 (행 8:4) 하였다. 그리하여 빛은 프랑스의 궁벽한 먼 지방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칼빈의 심적 고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여전히 일꾼들을 준비시키고 계셨다. 파리의 어느 학교에 사려 깊고 침착한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이미 강력하고 예민한 정신력을 소유한 증거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적 열성과 신앙적 헌신뿐만 아니라 고결한 생애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천재적 지능과 근면은 곧 그 대학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존 칼빈은 교회의 가장 유력하고 존경할 만한 옹호자가 될 것이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하늘의 빛이, 칼빈을 둘러싸고 있던 스콜라 철학과 미신의 장벽을 뚫고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 새로운 교리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교리를 선포하는 이단자들이 화형을 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전혀 예기치 않게 그 이단설과 접하게 되었으므로 개혁파의 교리를 대항하기 위하여서는 로마교의 신학의 능력을 시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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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에 가담한 칼빈의 사촌 한 사람이 파리에 살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때때로 만나서 당시 그리스도교국을 혼란케 하고 있는 문제들을 함께 토론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인 올리베탄 (Olivetan) 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교밖에 없다. 그 중의 한 가지 종교는 사람이 고안해 낸 것으로서, 그것은 의식 (儀式) 과 선한 행실을 통하여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종교는 성경에 밝히 계시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통하여서만이 주어지는 구원을 바라보도록 사람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나는 그대의 새 교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대는 내가 지금까지 오류 가운데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가” (Wylie, b.13, ch.7) 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칼빈의 심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자기의 의지로는 도저히 그것들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는 홀로 자기의 방에서 사촌의 말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죄의 자각이 그에게 떠나지 않았다. 그는 중보자 없이 성결하고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 성도의 중보, 선행, 교회의 의식, 그 모든 것들이 죄를 속하는 데는 무력하였다. 앞길은 암담하여 오직 영원한 절망이 있을 뿐이었다. 교회의 학자들은 그의 근심을 해결해 주고자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고해 성사와 고행도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것들은 심령을 하나님과 화목시켜 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무익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을 동안, 칼빈은 어느 날 우연히 큰 광장에 나가서 소위 이단자를 화형시키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순교자의 얼굴에 화평의 빛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무서운 죽음의 고통 속에서, 그보다 더욱 무서운 교회의 정죄의 선고를 받고서도 순교자는 믿음과 용기를 나타내었다. 그 때에 청년 칼빈은 그러한 믿음과 용기를 가진 순교자와, 가장 엄격하게 교회에 순종하는 생애를 하면서도 오히려 절망과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기 자신을 괴로운 마음으로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단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성경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여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기쁨의 비밀을 찾아내고자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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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투사로 나섬

그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르짖었다. “오, 아버지! 그분의 희생은 당신의 진노를 그치게 하였고, 그분의 피는 나의 많은 허물을 씻어 버렸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나의 저주를 대신 졌고, 그분의 죽음은 나를 속량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아무 소용없는 어리석은 것들을 많이 고안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말씀을 횃불처럼 내 앞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의 마음을 감동하사, 나로 하여금 예수님의 공로 이외에는 아무것이나 다 싫어하게끔 하셨습니다” (Martyn, vol.3, ch.13).

칼빈은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교육을 받아 왔다. 그는 겨우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어떤 작은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머리는 교회의 규정에 따라 감독의 손으로 짧게 깎여 있었다. 그는 아직 안수를 받지 않았고, 신부로서의 직무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의 직분에 대한 칭호를 가지고 있었고, 그 직무에 대한 보수도 받고 있었다.

이제 그는 신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얼마 동안 법률 공부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이 목적도 버리고 자기의 생애를 복음을 위하여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공연하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일을 주저하였다. 선천적으로 수줍음이 많은 그는 그 지위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여전히 연구에 전념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친구들의 끈덕진 권유는 마침내 그의 동의를 얻었다. “이처럼 미천한 출신의 사람이 그렇게 훌륭한 직분을 받아 높임을 받게 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Wylie, b.13, ch.9) 고 그는 말하였다.

칼빈은 그의 사업을 조용히 착수하였다. 그의 말은 마치 땅을 적시는 이슬과 같았다. 그는 파리를 떠나서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의 역군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있던 마가레트 여왕의 보호 아래 있는 지방의 한 작은 도시에 이제 거하게 되었다. 칼빈은 여전히 온유하고 자긍할 줄 모르는 청년이었다. 그의 사업은 가정에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읽고, 구원의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복음의 기별을 들은 사람들은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었으므로 그는 오래지 않아 그 곳을 떠나 멀리 있는 촌락과 도시를 찾아갔다. 그는 귀족들의 큰 집과 가난한 사람의 오막살이를 가리지 않고 들어가서 용감한 진리의 증인들을 만들어 낼 교회의 기초를 놓으면서 전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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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후에 그는 다시 파리에 왔다. 파리에는 흔히 볼 수 없는 동요가 유식한 부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고대의 언어를 연구함으로 사람들은 성경을 주목하게 되었고, 성경의 진리로 마음이 아직 사로잡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열렬히 토론하고, 로마교의 지지자들을 대항하여 투쟁까지 전개하고 있었다. 칼빈은 비록 신학적 논쟁에서는 유능한 투사였지마는, 그 학자들과 소란스런 논쟁을 하는 것 이상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흥분 상태에 놓여 있었고, 이제는 그들의 마음에 진리를 보여 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대학의 강당이 신학적인 논쟁으로 시끄러울 동안, 칼빈은 집집을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 주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투쟁의 와중에 들어간 파리

하나님의 섭리로, 파리는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또 다른 초청을 받게 될 것이었다. 러페브르와 파렐의 호소는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다시 그 기별은 이 큰 도시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었다. 프란시스 왕은 정치적 영향 때문에 아직 개혁주의를 대항하여 로마의 편에 완전히 가담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누이 마가레트는 개혁주의가 프랑스에서 승리를 얻어야 한다는 희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개혁주의를 파리에 선포하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왕의 부재시에, 그는 개혁파의 한 목사에게 파리의 여러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법왕의 당국자들에 의하여 금지되어 있는 것을 알고 그는 왕궁을 공개하였다. 그는 그 일부를 개조 (改造) 하여 강당을 만들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설교를 하도록 하고, 계급과 지위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참석하도록 광고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예배에 참석했다. 강당뿐 아니라 그 근방의 방들까지도 사람들로 꽉 찼다. 매일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거기에는 귀족, 정치가, 법률가, 상인, 직공들까지도 있었다. 왕은 이와 같은 집회를 금지하는 대신에 파리 시내의 두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집회를 열도록 명령하였다. 시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일찍이 받아보지 못한 감동을 받았다. 하늘에서 온 생명의 기운이 사람들에게 들어간 것 같았다. 술 취함과 방탕함과 투쟁과 게으름이 절제와 순결과 질서와 근면으로 바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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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직자 계급에서는 가만있지 않았다. 왕은 여전히 복음 전도를 중단시키는 일에 간섭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중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무지하고 미신적인 많은 무리에게 공포와 편견과 광신을 일으키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고 사용하였다. 거짓 교사들에게 맹종한 파리는 옛날의 예루살렘과 같이 그들의 심판의 날도 알지 못하였고, 평강에 속한 일도 알지 못하였다. 2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파리에서 전파되었다. 그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백성들 중의 대다수는 거절하였다. 프란시스 왕은 단순히 자기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개혁주의를 허용하였으므로, 법왕측이 다시 권세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다시 폐쇄되고, 화형주가 세워졌다.

칼빈의 초기 활동

칼빈은 여전히 파리에서 연구와 명상과 기도로써 장래의 사업을 위한 준비를 갖추는 한편 진리를 계속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당국자들은 그를 화형에 처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안전하게 숨어 있었으므로 그의 신변이 그처럼 위험한 줄은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친구들이 그에게로 급히 달려와서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관리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바로 그 때에 대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각도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친구들 중의 몇 사람이 문에 서서 관리들을 지체시키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급히 그 개혁자를 창문으로 달아 내렸다. 그는 재빨리 시가를 빠져나갔다. 그는 개혁주의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한 노동자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집 주인의 의복을 얻어 입고, 괭이를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났다. 그는 남쪽으로 가서 마가레트 영 (領) 에서 다시금 피난처를 찾았다 (D’Aubigne, b.2, ch.30 참조).

각 시대의 대쟁투 pp. 2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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