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의 비유에는 기다리는 시기와 조는 일이 있은 후에 신랑이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 역시 이미 열거한 예언과 표상에 의한 증거와 일치되었다. 그들은 그 확실성에 대하여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무수한 신자들이 “밤중 소리”를 외치게 되었다.
이 운동은 조수와 같이 각 곳으로 퍼져갔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그것은 멀리 떨어진 벽촌에 이르기까지 퍼져 가서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완전히 깨우쳤다. 떠오르는 햇빛 앞에 사라지는 이른 아침의 서리와 같이 광신자들도 그와 같은 선포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신자들은 그들의 의심과 의혹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으며, 희망과 용기로 마음에 활기가 넘쳤다. 이 운동은 흔히 경험하는 바와 같이 흥분적인 것에만 의존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통제력이 없음으로 생기는 극단적인 일은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옛적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견책의 기별을 받았을 때 즉시 마음을 겸비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간 일들과 유사한 성격의 것이었다. 거기에는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구별해 주는 특징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열광적인 기쁨은 별로 없고, 오히려 마음을 깊이 살피고, 죄를 고백하고, 세상을 버리는 일들이 있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는 그들의 번민하는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부담이었다. 그들은 끈기 있는 기도와 확고한 헌신을 주께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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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경고
밀러는 당시의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열광적인 환희는 없었다. 그런 일은 미래에 속한 것으로 하늘과 땅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충만하여질 그 때를 위하여 남겨 두었다. 또한 즐거운 환호성 (歡呼聲) 도 없었다. 그것 역시 하늘에서 환호성을 올릴 때를 위하여 남겨 두었기 때문이었다. 노래하는 사람들도 잠잠하였다. 그들은 하늘의 찬양대, 곧 천사들의 무리와 연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견의 충돌이 없었고, 모두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뭉쳐있었다” (S.Bliss, Me-moirs of Wm.Miller., pp.270, 271).
그 운동에 참가했던 또 다른 사람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그 운동은 각 곳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마음을 깊이 살피는 일과 심령을 겸비하게 하는 일을 일으켰다. 그 운동은 세속적 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게 하였고, 다툼과 원한을 화해하고,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용서와 가납하심을 얻기 위하여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탄원하게 하였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겸비와 완전한 순종을 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요엘을 통하여 여호와의 큰 날이 절박해 오는 때를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옷을 찢지 않고 마음을 찢었으며, 금식하고 통회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스가랴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마음을 부어 주셨다. 그들은 그들이 찌른 주님을 우러러보았으므로 온 땅에는 크게 통곡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다”[Bliss in Advent Shield and Review, vol 1, p.271 (Jan., 1845) ].
사도 시대 이래로 모든 위대한 종교운동들 중에서 1844년 가을의 재림운동만큼 인간적 결함과 사단의 간계에서 벗어난 운동은 없었다. 그 후 여러 해를 지낸 오늘날에 있어서까지도 그 당시의 운동에 참가하여 진리의 토대 위에 굳게 섰던 사람들은 누구나 당시의 그 복된 사업에 나타났던 거룩한 감화력을 깨닫고,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운동이었음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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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부르짖음을 듣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하였다. 그들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열렬한 흥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였다. 천사들은 실망한 사람들을 일으켜서 그 기별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하고자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그 사업은 사람의 지혜나 학식으로 지속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다. 이 부르심을 처음으로 듣고 순종한 사람들은 가장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겸비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었다. 농부들은 추수할 곡식들을 밭에 세워둔 채, 직공들은 그들의 도구를 버려둔 채, 눈물과 기쁨으로 그 경고의 기별을 전하기 위하여 나아갔다. 그런데 전에는 무슨 일에나 앞장을 서던 사람들이 이 운동에는 맨 뒤에 서 있었다.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그 기별에 대하여 문을 닫았으므로 그 기별을 받아들인 많은 무리들은 그들의 교파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섭리로 그 기별의 선포가 둘째 천사의 기별과 연합되어 그 사업에 큰 힘을 더하게 되었다.
“보라 신랑이로다”는 기별은 성경적인 증거가 분명하고 결정적이었지만 그것은 논증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 기별에는 심령을 움직이는 압도적인 능력이 함께 하였다. 거기에는 아무 의심도, 질문도 없었다.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실 때 유월절을 지키러 각 곳에서 온 사람들이 감람산으로 모였다.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수행하고 있는 군중들과 합세하였는데, 그들은 그 분위기의 영감에 사로잡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복이 있을지어다” (마 21:9) 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재림신자들의 집회에 참석했던 불신자들이 더러는 호기심에서, 더러는 조롱하기 위하여 모였지마는 그들 역시 “보라 신랑이로다”는 그 기별이 가진 감동적인 능력을 느꼈다.
시련기에 처한 재림신자
그 당시에는 기도의 응답을 받는 믿음, 반드시 보상을 받는 믿음이 있었다. 마치 메마른 땅에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열심으로 찾아 구하는 자들에게 은혜의 영이 임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그들의 구주를 대면하여 만날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엄숙한 기쁨을 느꼈다. 하나님의 축복이 충성되고 경건한 무리들 위에 풍성히 주어질 때 성령의 부드럽게 하고 순종케 하는 능력이 마음들을 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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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별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의 깊고 엄숙하게 그들의 주님을 영접할 것으로 기대했던 시기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가납해 주신 증거를 얻는 것을 그들의 첫째 되는 의무로 여겼다. 그들의 마음은 밀접히 연합되었으며, 그들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한적한 곳에 모여서 하나님과 교통하였는데,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그리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소리가 들과 숲 사이에서 하늘로 상달되었다. 구주께서 인정해 주시는 확증이 그들에게는 날마다의 양식보다 더욱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의 마음에 어두운 구름이 덮이는 때에는 그것이 사라지기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받은 증거를 느끼게 될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구주께서 나타나기를 사모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실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기대했던 시간은 지나갔으나 그들의 구주께서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들은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재림을 기다렸으므로, 그들은 일찍이 구주의 무덤에 가서 그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 20:13) 고 울며 부르짖는 마리아가 느꼈던 것과 같은 슬픔을 경험했다.
그 기별이 혹시 진실할는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恐怖感) 은 잠시 동안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제 (自制) 하는 마음을 주었다. 그 공포의 감정은 기대했던 시간이 지난 후에도 즉시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들이 실망한 사람들 앞에서 승리한 것처럼 감히 기뻐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의 표가 나타나지 않자 그들은 전일의 대담한 마음을 회복하여 다시 비난과 조소를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속히 재림하실 것을 믿노라고 공언한 많은 무리들은 그들의 신앙을 버렸다. 대단히 큰 확신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고 마치 세상에서 내어 쫓긴 것처럼 느꼈다. 그들은 요나처럼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기를 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신앙의 기초를 두지 않고 사람의 의견에 신앙의 기초를 두었던 사람들은 이때에 즉시 그들의 견해를 바꾸었다. 의지가 박약하고 겁이 많은 자들은 조롱하는 자들과 합세하여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재림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시기는 경과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오시지 않았으며, 세상은 지나간 수천년 동안과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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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 있고 진실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전보다 그리스도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갔다. 그들은 그들이 확신한 그대로 세상에 최후의 경고를 하였다. 그들은 미구에 그들이 주님과 하늘의 천사들에게 영접되리라고 기대하면서 경고의 기별을 받지 않은 자들과의 교제에서 거의 떠나 있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시지 아니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생애의 염려와 수고의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롱하는 세상의 모욕과 조소를 견디는 일은 믿음과 인내가 요망되는 무서운 시련이었다.
첫째와 둘째 천사의 기별
그러나 이때의 실망은 그리스도의 초림 당시에 제자들이 경험한 것만큼 큰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당당하게 입성을 하신 때에 제자들은 주님께서 미구에 다윗의 보좌에 즉위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압제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실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희망과 영광스러운 기대를 가지고 서로 다투어 그 왕께 경의를 표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의복을 주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에 깔고, 무성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그들은 열렬한 기쁨으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고 외쳤다. 이와 같은 기쁨의 표현을 보고 화가 나고 난처해진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꾸짖어 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눅 19:40) 고 대답하셨다. 예언은 성취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고 있었지만 그들 앞에는 쓰라린 실망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간 후 그들은 구주께서 고통의 죽음을 당하시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기대는 단 하나도 실현되지 못하고, 그들의 희망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들은 구주께서 무덤을 정복하고 부활하시자 비로소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 (행 17:3) 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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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9). 만일 제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심문을 받고 돌아가실 것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결코 이 예언을 성취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와 똑같이 밀러와 그 동역자들은 예언을 성취시켰고, 세상에 전해지도록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기별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만일 그들의 실망을 가르쳐 주고 재림 전에 또 다른 한 기별이 전파될 것을 알려 주는 예언을 미리 완전히 이해했었더라면, 결코 그 예언을 성취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첫째와 둘째 천사의 기별은 적시에 전파되었고, 하나님께서 기별들을 통하여 하시고자 계획하신 사업은 성취되었다.
재림신앙을 계속하여 굳게 잡음
세상 사람들은 예정했던 때가 지나간 후에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아니하면 재림운동의 모든 조직이 없어질 것으로 기대하면서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혹독한 시련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릴지라도 확고하게 서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재림운동의 결실로써 겸손하고 마음을 살피는 정신이 있었고, 세속적 정신을 버리고 생애를 개혁하는 일이 그 사업에 따른 것은 이 운동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증명하였다. 그들은 재림기별을 전파하는 데 나타난 성령의 능력을 감히 부인하지 못하였고, 그들이 예언적 기간을 계산함에 있어 아무런 잘못을 발견할 수 없었다. 가장 재간 있는 그들의 반대자들이라도 그들의 예언해석을 뒤집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성경상 증거가 없이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빛을 받은 정신과, 성령의 산 권능으로 불타는 마음으로 열렬하고 경건하게 성경을 연구하여 얻은 결론, 일반 종교가들과 세상에 지혜 있는 자들의 가장 맹렬한 반대와 비판을 견뎌낸 그들의 주장, 학식과 웅변을 겸한 자들의 공격과 존귀하거나 비천하거나 간에 한 가지로 쏟아 놓는 냉소와 조롱에도 동요되지 않고 굳게 견디어 온 그 주장을 결단코 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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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했던 사건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실망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실망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흔들 수는 없었다. 일찍이 요나가 니느웨의 거리에서 40일 안에 그 성이 멸망하리라고 선포하자 니느웨 사람들이 겸비하고 회개함으로 주님께서는 그들의 은혜의 시기를 연장시키셨다. 그러나 그 때의 요나의 기별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었고,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시련을 받은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재림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사 심판의 경고를 전파하게 하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기별은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을 시험하였으며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든가, 싫어하는 마음, 비록 그 정도에 있어서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키든가 하였다. 그리하여 두 편의 한계가 분명해졌다. …자기들의 마음을 살피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 어느 편에 서게 될는지,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고 부르짖게 될는지, 혹은 산과 바위를 불러 가로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하게 될는지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알기에는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그 시련의 시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뜻을 버리고 뒤로 물러가는지 알고자 하셨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의지하는 여부를 알아보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The Advent Herald and Signs of the Times Reporter, vol.8, No.14 (Nov.13, 1844) ].
또한 과거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다는 것을 여전히 믿고 있던 당시의 신자들의 생각을 윌리엄 밀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나타내고 있다. “그 당시에 내가 가졌던 것과 똑같은 증거를 가지고 내가 다시 한 번 산다면 나는 그 당시에 했던 그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하게 되고자 애쓰게 될 것이다.” “나는 나의 옷이 사람들의 피와 관계없이 깨끗하기를 바란다. 나는 나의 행한 일로써 저들의 정죄에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두 번이나 실망을 당하였으나 아직 절망하는 데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은 전과 같이 강하다. 나는 다만 여러 해를 두고 엄숙히 생각한 후에 그 일이 마땅히 해야 할 엄숙한 의무인 줄 깨닫고 한 것뿐이다. 혹시 내가 잘못했다면 그것은 나의 동포들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본분을 확신하게 된 일이다.” “내가 확실히 아는 한 가지 사실은 나는 믿는 것만을 전파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셨고, 그분의 권능이 이 사업에 나타나서 많은 좋은 결과를 냈다는 것이다.” “재림의 시기를 알려 줌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믿음과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다” (Bliss in Advent Shield and Review, vol.1, pp.256, 255, 277, 280, 281). “나는 교만한 자에게 아첨한 일도 없고 사람들의 푸대접으로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도 미래에도 그들의 호의를 사기 위하여 애쓰거나 나의 분수를 넘어감으로 그들의 미움을 사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생명을 그들의 손에서 찾거나 그들이 두려워서 피하지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라면 죽음이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J.White, Life of Wm.Miller,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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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호와 신자들의 희망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성령께서는 받은 빛을 부인하지 않고 재림운동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과 여전히 함께 하셨다. 히브리서에는 이러한 위기에 처하여 시련 중에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권면과 경고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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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권고의 말씀이 마지막 때의 교회에 주어진 것이 분명한 이유는 그 말씀이 주님의 재림이 가까움을 가리킨 말이기 때문이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런데 이 말씀에는 지체하는 일, 곧 주님께서 지체하시는 듯이 보이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 분명히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한 교훈은 특별히 그 당시의 재림신자들의 경험에 적용된다. 여기에 지적된 사람들은 믿음의 파선 (破船) 을 당하는 위험에 처하였다. 그들은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앞길도 분별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참으로 저들을 인도해 주셨는지에 대하여 의심하는 시험을 당하였다. 그와 같은 때에 있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매우 적절한 말씀이었다. “밤중 소리”의 빛이 그들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어주고, 그들이 예언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재림이 가까움을 알리는 징조들이 신속히 성취되고 있음을 볼 때에 그들은 재림이 바로 눈앞에 이른 것을 알고 빛을 따랐다. 그러나 이제 그 기대는 헛되어 실망으로 주저앉은 그들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만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조롱하는 세상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속았다. 너희들은 신앙을 버리고 재림운동이 사단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그들의 믿음을 버리고 그 기별에 주어졌던 성령의 능력을 부인하게 되면 그들은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한 바울의 말로 그들은 용기를 얻고 확고 부동하게 섰다. 그들의 유일의 안전책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빛을 간직하고, 하나님의 허락을 굳게 붙잡고,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함으로 더욱 많은 빛을 받기 위하여 오래 참아 기다리고 깨어 있는 길이었다.
각 시대의 대쟁투 pp. 400-408